28-5. 마르사코르 언덕
###
타타타타탕!
타탕! 탕탕! 따다당!
요란한 총성과 함께 공기가 일렁인다. 매캐한 냄새가 사방을 가득 채운다.
여기저기 뭉개뭉개 피어난 화약 연기 때문에 시야가 좋지 않다. 그러나 굳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그만한 화약 연기를 한꺼번에 만들어 내려면 그만큼의 병력이 거기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빽빽한 인간과 강철의 벽이 절대로 지나갈 수 없는 ‘개념의 벽’을 만들고 몰려온다.
철퍽철퍽, 전투화가 축축한 바닥을 디디며 내는 소리가 커질 수록 아소모 대공의 심장도 두방망이질 친다.
“가장 외곽 바리케이드는 포기해도 괜찮다! 계획대로 그 안쪽에 방어선을 형성하고 대열을 유지해!”
“알겠습니다, 대공 전하!”
아소모 델 안프로니오 대공은 나지막한 보급품 상자 위에 올라서서 전방의 병사들이 방어대형을 취하는 것을 보고 있었다.
다행히도 숙련된 용병들인 부하들은 전방 장교들의 지휘 아래 계획대로 잘 움직이고 있었다.
다행히 공격해오는 적의 숫자는 그렇게 많지 않다. 이정도라면 충분히 대항할 수 있다.
“이 근처에도 포탄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내려오십시오!”
“여기 안전한 장소가 어디 있겠나?”
“그··· 그래도···.”
“언덕 그늘 쪽으로 가면 아군이 잘 보이지도 않는데 그대로는 지휘를 할 수 없네.”
참모들의 만류에도 아소모는 전선 바로 뒤편을 돌아다니며 지휘하고 있었다.
이미 그의 흉갑과 바지에는 모자이크 그림처럼 점점이 진흙이 튀어있었다. 바로 가까이에 떨어진 포탄이 만든 흔적이다.
대량의 화기가 사용되기 시작된 후 부터이다. 과거에 ‘안전한 후방’이라 생각되었던 전선 뒤편은 결코 안전하지 않은 공간이 되었다.
거리가 멀어질 수록 떨어지는 명중률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어찌됐든 눈 먼 포탄이 상급 장교의 목숨을 끊거나,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아소모 대공 자신은 아직 그런 상처를 입은 적은 없었다.
하지만 신뢰하는 많은 부하들, 라이벌들, 동료들을 전장에서 사고에 가까운 포격 피해로 잃은 적이 있었다.
“좌측! 적이 좌측으로 우회하려 한다. 전선 연장이 필요해.”
“리코네 중대를 보내겠습니다, 대공 전하!”
“그렇게 하게, 적이 적극적으로 공격하고 있지는 않지만, 최전방을 비워 놓을 순 없으니.”
미리 충분히 준비한 바리케이드와 분산 배치가 나름 효과를 발휘하고 있었다.
이 정도의 적 공세에 무너지지는 않는다! 그의 부하들 중에는, 선대 델 안프로니오 대공 시절부터 종군해온 노병들도 있었다.
아무리 강군이라 해도, 벼락치기로 만들어진 이단자들의 군대에 쉽사리 무너지지는 않는다.
안프로니오 연대는 아소모 자신의, 델 안프로니오 가문의 자랑이었다. 포격에 한참 시달렸으면서도 늠름하게 대응하는 휘하 병사들을 보니 자부심이 느껴졌다.
안프로니오 대공국.
대공은 대륙의 주신교 문화권 국가들 대부분에서 최고위 귀족이다. 공후백자남 오등작 체계 정점이란 말이다.
때문에 희소한 것이 당연했다. 엘랑키아 왕가의 봉신들 중, 대공위를 가진 것은 오로지 왕가의 방계이자 반 독립 군주인 엘랑드르의 대공 뿐이니까.
다른 나라들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신성 그룬발트 제국에서도 대공위는 황제를 선출할 권력이 있는 소수의 선제후들 뿐이다.
타국에 비해 작위의 수가 너무 많다고 평가되는 라솔 왕국에서도 타라트라바 대공 등, 특별히 강한 권위와 국력을 가진 반독립국의 군주들만 가지고 있는 작위니까.
하지만 주디칼리에서는 상황이 조금 다르다.
고대 아란 제국의 멸망 이후, 주디칼리에는 좀처럼 통일 국가가 형성되지 못했다. 오히려 종교, 전통, 군사력 등 서로 다른 잣대를 가진 소국들이 난립하는 형국이었다.
그 결과로 지금도 몇몇 지역적 강자는 있고, 주디칼리라는 지역적 정체성은 있을지 몰라도 통일 강국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와중에 탄생한 것이 쓸데없이 많은 대공과 공작들이다.
다른 나라라면 자작이나 남작위에 딸릴 법한 작은 장원에 대공이나 공작위가 붙은 경우가 허다했으니 말이다.
델 안프로니오 대공국 역시 마찬가지다. 산맥 아래에 자리한 좁은 계곡 길을 끼고 이어지는 몇 개의 소도시가 영토의 전부였다.
아마 경제력으로 따지면 엘랑키아의 어떤 백작과 비교해도 밀릴 정도겠지.
하지만 아소모의 아버지는 제한된 인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작지만 단단한 용병 부대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들은 적대적인 주변국을 공격해 합병하기도 했고, 평소에는 타국의 전쟁을 대신 해주며 막대한 용병료를 벌어들였다.
너무 외딴 곳이라 농업도 상업도 힘들 정도라는 지빌링엔에 비하면 조금 나았지만, 생업으로 용병을 선택했다는 것은 비슷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연대를 물려 받은 아소모 델 안프로니오, 현재의 대공이다. 물론 그 역시 부하들을 이끌고 전장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즉, 안프로니오 연대는 아소모 대공의 가신이며, 동료이며, 자산이며, 영지 그 자체였다.
“적이 온다! 몇 번 와도 여기서 되밀어 낸다!”
“알겠습니다!”
“전방 바리케이드는 우리가 포기한 거다! 우리가 마음 먹고 지키면 절대로 안 밀려! 우리가 이긴다아!”
“이긴다아아아!”
두번째 바리케이드 뒤에, 창병과 총병으로 이루어진 작은 요새들이 여러개 생긴다. 어떤 방향에서, 어떤 병종의 공격도 충분히 막아낼 수 있는 강력한 방어 대형이다.
적군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서로가 작정하면 충분히 사격전이 가능할 정도의 거리이다.
적은 대열을 유지하며 서두르지 않고 있었다.
누가 먼저 사격할까. 양측이 눈치를 보고 있다. 먼저 쏜다는 것은 선공의 우세함을 보장하지만, 자칫하면 적에게 행동의 주도권을 넘겨버릴 수 있다.
자칫 적이 더 접근해서 정확도 높은 근거리 사격을 가해 역으로 큰 손해를 입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양측이 적정한 거리를 두고 대치하는 것은, 방어측인 성전군에게 결코 나쁘지 않았다.
괜찮다, 지금까지는 괜찮다. 부하들은 잘 싸우고 있었다.
“대, 대공 전하! 동쪽을 확인해 주십시오!”
“무슨 일이지?”
아소모 대공은 참모의 보고에, 동쪽이 잘 보이는 바리케이드 반대편으로 가서 너머를 확인한다.
“...환장하겠군.”
적이 공격하지 않고 있는 방향에서, 새로운 부대가 접근하고 있었다.
절대로 아군은 아니었다.
“아직 교전에 들어가지 않은 중대장들과 참모들을 모두 소집해라. 재배치를 준비해야겠군.”
“알겠습니다!”
지금 예비대가 얼마나 있는지 머리로 세어본다. 적이 얼마나 되는지는 몰라도, 최소한 연대급 보병과 기병이 딸려 있는 것은 멀리서도 보인다.
몇 시간 내로 도착할까? 2시간? 3시간?
이건 어쩔 수 없었다. 안프로니오 연대만으로 대응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좋든 싫든, 성전군 혼성부대로 이루어진 예비대를 투입해야 했다.
“언덕 위의 사령부에 전령을 보낼 준비를!”
“옛, 대공 전하!”
###
나는 중앙 포대 뒤편에서 적진을 살핀다. 전령들이 바쁘게 오가는 모습을 보니 적이 뭔가 하려는 것 같다.
말이 집중 포격이라고는 하지만, 아군 포대는 상당히 엄격한 포격 제한 시간을 두고 사격하고 있었다.
물론 우리 포병들은 상당히 숙련된 편이고 엄격하게 훈련받았기에, 속사에 상당히 능하다.
물론 포 사격이라는게 상당히 힘든 일이다. 사격 직후 매번 반동으로 밀려난 포를 제자리로 되돌려야 하고, 사용하는 장구와 포탄, 화약의 무게도도 상당하다.
실수하면 자신과 동료들이 몽땅 황천행을 할지 모른다는 긴장감까지 더해지면 포수들의 체력 소모가 더더욱 빨라진다.
그걸 감안하더라도, 정규 연대에 딸린 연대 포병의 경우, ‘화승총 사수와 같은 속도로’ 연사가 가능할 정도이다.
연대가 보유한 포가 소구경의 경야포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대단히 훌륭한 속도가 아닐 수 없었다.
다만 이건 아주 짧은 교전거리에서 일시적으로 화력을 부어 넣다시피 할 때의 속도이다. 항상 그 속도를 유지할 수는 없다.
앞에서 말한 포병들의 체력 문제도 있겠지만, 그 속도를 유지하다가는 포가 버텨내질 못한다.
과열된 포는 파열 위험이 높고, 동료 포 중에 하나라도 파열하면 그 포대는 정신적으로 전멸한 것이나 다름없다.
자기 포도 터질지 모르는데 누가 열성적으로 포를 다루겠나 이 말이다.
공포를 느낀 포병들을 총과 칼로 위협하면서 사격을 유지시킨다고? 내가 경험해봐서 아는 건 아니지만, 근처에서 본 적이 있어서 잘 안다. 별로 추천하지 않는다.
오로지 사람을 죽이고 물건을 부수기 위한 용도의 수백 킬로그램짜리 쇳덩이를 다루는 이들을 위협하는 건 결코 좋은 생각이 아니다.
하물며 그들의 발치에 주변을 몽땅 날려버릴 수 있는 양의 화약이 담긴 통이 있다면 말이다.
아마 높은 확률로 자기만 뒈지는 길을 선택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애초에 불 붙은 화승 달린 총기 들고 포대에 들어가면 안된다는 건 기본이고.
아무튼 그 때문에, 우리 포병들은 포술장의 판단과 모래시계의 기준 아래 ‘쉬엄쉬엄’ 포를 쏘고 있었다.
남는 시간은 젖은 장전봉으로 포구를 닦아내고, 젖은 천으로 노출된 포신을 식히며 유용하게 쓰고 있었다. 이러면 포의 수명을 크게 줄이지 않고도 냉각 효율을 높일 수 있으니까.
또한 젖은 장전봉으로 포신 내부를 꼼꼼하게 닦아내는 것은 명중률과 다음 장전에도 영향을 미친다. 타다 남은 흑색 화약 찌꺼기는 물에 녹는 성질을 가졌기 때문이다.
제대로 닦아내지 않으면 포신 내부에 덕지덕지 달라붙어 동굴처럼 되고 만다. 이러면 장전에도 시간이 더 들어가고 다음 포격에 영향을 미치는 건 당연하다.
···최악의 경우에는, 아직 불 붙은 찌꺼기가 남아있다가 다음 장전을 위해 화약이 들어가는 순간 폭발하기도 한다.
청소를 위해 장전봉을 넣을 때, 포술장이 점화구를 막고 장전수는 반드시 한 손으로 넣는 이유가 있다.
자칫하면 공기가 유입되면서 덜 탄 화약이 폭발하거든.
이 때 장전수가 한 손만 쓰고 있어야 놓아 버리면서 큰 부상을 막을 수 있다. 좀 가혹하게 말하자면, 두 손을 다 다치는 것보다 한 손만 다치는 게 낫기도 하고.
또한 너무 뜨거운 포신은 뒤틀리기 때문에, 아주 작은 차이가 큰 왜곡을 만드는 장거리 포격에선 피해야 할 일이기도 했다.
이래저래 포병들은 자기 포를 애지중지하는 이유가 있다. 그게 자신들의 전과는 물론 안전에도 직결되니까 말이다.
“쏴라!”
뻐엉!
또 한 발의 포탄이 적진을 향해 날아간다.
포대 가장 오른쪽에 있는 두 문의 포는 첼레스티나가 직접 통제하고 있었다. 물론 내 지시에 의해서이다.
“레미 군, 식혀줘!”
“네, 수석포술장님!”
어린 병사가 다가가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하자, 어깨 위에서 기프트 발동의 신호인 하얀 빛이 떠오른다.
레미 라타니에, 카르카냑 출신의 이 어린 병사는 기프트를 가지고 있었다. 바로 ‘열을 이동시킨다’는 능력을 가진 기프티드, 엘리멘탈리이다.
원래는 부모님이 하시는 가게에서 부업으로 얼음을 만들어서 팔고 있었다는 친구이다. 지금은 트랑카벨 영지군의 기프티드로 특별 수당을 받는 일원이다.
여울목의 전투에 처음 선보였던 초경량포인 가죽포를 고속 냉각시켜 대활약을 했었고, 이후 샹다메리 전투에도 참전하는 등 아군 포병대가 활약하는 전투라면 빠진 적이 없는 재원이지.
다만 기프트 활용이라는 것은 체력의 소모가 따르는 것이라, 무한정 사용은 불가능하다.
최근에는 첼레스티나에게 발탁되어, 반드시 필요한 경우 냉각 작업에 투입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다 됐습니다!”
레미가 포에서 물러서자, 포수들이 부지런히 장전을 시작한다. 그 사이, 첼레스티나는 다른 포 하나의 조준을 주의 깊게 하고 있었다.
“조준 완료! 포격 준비!”
“포격 준비이!”
마지막까지 가늠자를 살피던 첼레스티나가 완료를 외치자 포수들이 주변에서 떨어진다. 마지막으로 첼레스티나도 몇 걸음 물러난다.
“발사!”
“발사아!”
모든 포수들이 복창함과 동시에, 굉음과 함께 대포가 불을 뿜는다. 화염을 뚫고 튀어나온 포탄의 새카만 꽁무니가 슬쩍 눈에 들어오다가 이내 사라진다.
“명중?”
“명중! 명중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100명 이상의 적군이 똘똘 뭉쳐있는 방어지점에 포탄이 떨어졌다. 뭔가가 사방으로 튀어 오른다.
망가진 무기인지··· 잘려나간 인간의 조각인지···. 이럴 때는 참 멀어서 다행이다.
아군의 공격에 대비하던 밀집대형이 엉망진창이 된다. 몇 명은 포격의 충격에 치명상은 아니더라도 나가떨어지고, 몇 명은 아우성치며 달아난다.
“잘 했어! 레미 군, 여기도 부탁해?”
“넵, 수석포술장님!”
첼레스티나가 물러난 포를 다시 레미가 식힌다. 거듭 말하지만 레미의 능력은 무제한이 아니기 때문에 한번에 2세트, 즉 4회만 사용하기로 합의를 봤다.
레미 본인은 더 할 수 있다고 했지만··· 포병 전력이라는게 결정적일 때 무리해서 쓸 수 있을 정도의 여력은 남겨 두어야 하는 거니까.
이번에 첼레스티나가 저렇게나 바짝 달라 붙어서 주의깊게 쏜 이유는 하나이다. 아군이 총격 교전 거리까지 바짝 달라붙었기 때문이다.
이건 즉, 조금만 조준이 우측으로 날아가거나, 몇 십 미터만 멀리 날아가도 포탄이 아군 대열을 뚫고 지나간다는 말이다.
어쩔 수 없이 견뎌야만 하는 적군의 포탄 수십 발 보다, 예상하지 못한 아군의 포탄 한 발이 더 치명적일 때가 많다.
전방에 선 보병의 입장이나, 발사한 포병의 입장이나 마찬가지다.
한 번이라도 아군을 오사한 포병은 다시는 적극적인 지원 포격을 하지 못한다.
아마 이번에 첼레스티낙 주의깊게 쏜 한 발의 포격은, 지금까지 쏜 포대 전체의 사격보다도 위력적일지도 모른다.
총격 교전거리까지 접근한 상황이라 마음 놓고 밀집 대형을 취한 적 입장에서는 날벼락이 분명할테니 말이다.
“전령입니다, 콘도티에레!”
“전령이라고? 누구에게서?”
“아실 자작님으로 부터의 전령입니다! 전령! 별동대, 전장 동남쪽에 2시간 내로 도착 예정!”
“오, 드디어 왔나!”
포격에 혼쭐이 난 적군은 이제 측면에서도 공격을 당하게 될 것이다.
“수고스럽겠지만, 아실 자작님께 다시 전령을 부탁하네!”
“말씀해주십시오!”
슬슬 퍼즐이 맞춰지고 있었다. 잘하면, 사흘이 되기 전에 전투를 끝낼 수 있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