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4. 마르사코르 언덕
아소모 델 안프로니오 대공은 생각을 정리하며 주변인들과 눈을 마주친다.
성전군 지휘부에는 사령관인 라모리 스텐던과 드라멜른 기사단의 집행관인 발란트 디아모프 폰 잘렌펠트, 그리고 여타 성전군 소속의 고급 장교들이 모여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유의미한 병력을 보유한 지휘관은 라모리와 발란트, 아소모 대공 본인 뿐이다.
나머지는 휘하 병력이 기껏해야 수백, 심하면 한명도 없는 경우도 있었으니까.
결국 대부분의 중요한 결정은 실질적인 지휘권과 병력을 가진 세 사람이 내리게 될 것이다.
물론 단순히 지휘 병력으로만 판단할 수 없는 성녀, 랑시아 아스트로메다의 존재도 있었다.
그녀의 직속 병력은 모스탈 수도회 소속의 전투 수도사 400여 명 뿐이지만, 그녀의 존재 자체가 이 성전군을 마지막까지 지탱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성녀 랑시아는 라모리 사령관을 지지하고 뜻을 같이한다고 공언했다. 결국 그녀의 그 언행이 마침내 성전군의 사령권을 하나로 묶는 데 성공한 것이기도 하고.
생각을 정리한 아소모 대공은 천천히 입을 연다.
“아군도 포격 지원이 필요합니다.”
본론은 최대한 짧게, 이어서 추가적인 생각과 근거를 말한다.
“물론 아군의 포탄 재고가 많지 않다는 것은 압니다. 그래서 적의 전면 공격에 대한 준비로 탄약을 비축하고 있다는 점에도 동의했습니다. 다만··· 상황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아소모 대공의 말에 사령부 회의실 분위기가 조금 흔들린다.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하루 종일 쏟아지는 적의 포탄을 계속해서 뒤집어 쓴 것은 그들도 마찬가지이다. 휘하 병력을 잃은 경우도 적지 않았다.
적이 언덕 비탈을 오르는 주공을 시작하기 전까지는 포격을 최대한 억제하며 탄을 아낀다.
이것이 사전에 협의된 내용이었으나···.
문제는 적 보병의 대군이 언덕 아래에서 멀뚱멀뚱 보고만 있을 뿐, 공격해올 생각을 않는다는 것이다.
때문에 모처럼 좋은 위치에 배치된 성전군 포병대는 아무 역할을 못하고 있었다.
“...적이 곧바로 공격하리라 생각했던 것은 본인의 판단 실수가 맞습니다.”
라모리 사령관은 선선히 자신의 실수를 시인한다. 적이 이처럼 여유를 부릴 줄은, 그리고 충분한 탄환을 가지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블랑독을 약탈하면서, 적의 약점을 찔러 결전으로 유도한 것 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그 결전이 시작되질 않는다.
“...최악의 경우, 아군이 선공을 취해야 할 상황이 나올 수도 있습니까?”
이 무거운 질문은 드라멜른 기사단의 발란트 경에게서 나왔다. 전술적 우위를 점해놓고도, 화력에서 밀려 끝내 이 고지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
애초에 전체적인 병력의 숫자가 부족하고, 특히나 기병의 전력에서 비교도 안되게 밀려서 선택한 전장이었다.
그런데 이걸 포기하고 접전을 선택했을 때 승리를 기대할 수 있느냐.
라모리와 발란트를 제외한 모두의 얼굴이 어둡게 변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전술의 문외한 입장에서는, 화력이 밀리면, 근접전을 시도하면 되지 않겠냐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이들이 미처 떠올리지 못하는 점이 있다.
화력은 가까우면 더 세진다는 사실이다.
총도 대포도, 가까이서 쏘면 더 잘 맞고 파괴력도 관통력도 좋아진다.
그렇다고 화력에 피해를 줄이고자 폭이 얕은 선형 대형이나 산개 대형을 취한다?
그랬다가는 근접전에서 일방적으로 패배한다. 대보병 전투도 대기병 전투도, 사격전도 백병전도 일정 수준의 대열 ‘깊이’는 필수적이다.
“새벽에··· 선제 기습을 가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언덕 내려가는 도중에 발각될 수 밖에 없을겁니다.”
“그 거리에서 적 포대에 노출되면··· 상상만 해도 끔찍하군요.”
“지금 상황이면 정면에서는 뭘 해도 어렵습니다.”
아직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소근소근 의견들을 주고받는다.
“여러분, 선제 공격은 저희 안프로니오 연대가 결단코 반대합니다.”
의외로 그런 분위기에 단호하게 대처한 것은 아소모 대공이었다. 자신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논의가 진행되지 않도록 못을 박는다.
“이 지형, 그리고 이 포진에서 싸우는 것이 아군에게 가장 유익한 상황이라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다만, 이대로는 적의 공격을 기다리기도 전에 우리 연대가 붕괴할 지경입니다.”
안프로니오 연대는 성전군 전체의 좌측을 담당하고 있었다. 게다가 평지 쪽이라 방어에도 가장 불리한 쪽이다.
위험하고도 중요한 역할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요청드립니다. 내일도 오늘처럼 적이 포격 중심으로 나온다면 그때는 대응 포격을 해야 합니다.”
이건 단순히 포격으로 적에게 얼마나 피해를 주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사기 문제였다.
일방적으로 포탄에 얻어맞고, 동료들이 죽거나 실려가는 것을 지켜본다. 그리고 다음은 내 차례가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며 하염없이 기다리기만 한다.
그런데 아군 포대는? 아침에 몇 발 쏘더니 계속 침묵중이다.
여기까지 오면 이제 별의 별 생각이 다 들기 시작한다.
혹시 아군이 패주했고 남은 것은 우리 뿐만 아닐까?
이대로 일방적으로 얻어맞다가 방어선이 무너지면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는 것은 아닐까?
이미 패배는 확정되었고, 나는 개죽음만 당하는 건 아닐까?
아무리 목숨을 내놓고 돈을 버는 용병이라 하지만 실제로 죽음과 패배가 정해진 상황은 다르다. 승산 없는 전장에서 열심히 싸울 용병은 없다.
굳이 용병이 아니라도 말이지만.
“아시다시피, 아군의 포병용 탄약 재고가 많지 않습니다. 전력으로 포격을 시작하면 한나절이나 버틸까 하는 수준이지요.”
고민하던 라모리가 입을 연다. 탄약이 좀 더 여유가 있었다면 다른 선택지가 있었을까. 확신은 할 수 없다.
“하지만 대공 전하께서 말씀하신대로, 더 이상 병사들에게 희생을 감수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군요. 내일도 오늘과 같은 상황이 이어진다면 반격을 명령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령관!”
“다만··· 전체 탄약의 절반은 마지막 결전용으로 비 축해두도록 하겠습니다. 나머지 탄약은 최대한, 적의 공세에서 아군을 보호하기 위해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
“저희도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아소모 대공의 표정이 밝아진다. 전체적인 분위기가 그렇다. 이제는 일방적으로 당하지 않아도 된다는 그런 분위기.
“만약, 사용하기로 한 절반의 탄약을 다 쓰게 되면 그때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밝아진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듯 말을 꺼낸 인물은 드라멜른 기사단의 발란트 경이다.
듣고 보니 또 그렇다. 다시 분위기가 조용해진다.
“그건 적의 대응을 보고 다시 논의를 해 봐야겠지요. 길어야··· 하루, 늦어도 이틀 내로는 결판을 내야 합니다.”
라모리가 대답했다. 급박한 것은 화약 뿐이지만, 그렇다고 다른 물자들이 풍부한 것도 아니니까.
모두가 이견을 표시하지 않았기에, 아소모 대공은 부대로 돌아가기 위해 사령부 막사를 나온다.
해가 진 언덕 위는 선선하다. 다행히 원하던 목적은 달성했다. 이제 내일은 일방적으로 얻어맞지 않아도 될 것이다.
언덕 아래의 부대로 돌아가기위해 걸음을 빠르게 한다.
“이 새끼야! 똑바로 안해!”
“뒤지고 싶어? 어?”
저 뒤편, 어둠속에서 고함소리가 들려온다. 횃불이 몇개 왔다갔다하고 상당히 많은 이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저건 무슨 일인가?”
“아직 짐을 옮기고 있는 모양입니다. 짐꾼들이 뭔가 실수를 한 모양인데요.”
주변의 경비병에게 묻자, 책임자로 보이는 장교가 대답한다.
“이 시간에? 아직도 물자를 다 못 옮겼다는 말인가···.”
“그게··· 북동부에서 약··· 조달한 물건들이 뒤늦게 도착한 모양입니다.”
“그렇군. 저렇게 몰아 댄다고 일을 더 잘하지는 않을 텐데.”
쯧쯧 혀를 찼지만 그렇다고 대공인 자신이 나서서 중재하기에도 애매한 일이다. 저들도 누군가의 부하일테고, 자신과는 다른 지휘계통의 지휘를 받을 테니.
“우리는 어서 돌아가서 내일을 준비하세나. 내일도 눈물나게 얻어 터져야 할테니.”
“알겠습니다. 내일도 오늘처럼 진행될까요?”
“글쎄, 그건 적 우두머리에게 달린 게 아니겠나. 뭐 하는 놈인지 머리라도 열어보고 싶군.”
“알겠습니다, 대공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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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사코르 언덕을 포위하고 이틀 째, 나는 드디어 공격 명령을 내렸다.
우측만.
“전 포 문 발사!”
“쏴!”
펑! 퍼펑!
콰과광!
“재장전 되는대로 조준 유지하며 발사한다!”
아군의 포격은 어제보다 조금 늦게 시작했으나, 훨씬 격렬하게 이어졌다. 포각이 닿는 모든 화력이 적진의 우측, 적 입장에서 좌익인 평지에 쏟아졌다.
어제 하루종일 포격하면서 명중을 조정해둔 첼레스티나와 포술장들의 고생도 있었지만, 실제로 참여한 포의 대수도 더 많았다.
예비용으로 빼 두었던 포들도 모두 배치했기 때문이다.
쉴 새 없이 날아가는 포탄이 수백 미터 정도의 좁은 공간에 집중된다. 어느정도의 비효율을 각오한 집중 포격이다.
축축한 바닥과 나름 충실한 바리케이드 방비덕에 생각만큼 효과는 없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상관 없다. 쉴새없이 땅바닥을 헤집으며 사방으로 흙탕불을 튀기던, 바리케이드를 박살내 돌조각을 사방으로 날리던.
목적은 적을 정신없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었으니까.
“제21 카르카냑, 앞으로!”
“앞으로!”
이번에는 보병 공격이 시작된다.
충분한 우세를 점했다. 적의 ‘틈’을 찾아냈다.
그게 어제 하루 종일 적진을 포탄으로 찜찔하며 관찰한 내 결론이었다.
적은 크게 세 덩어리로 나뉘어져 있었다. 아마도 중앙과 좌, 우익의 세 덩어리는 처음부터 편성된 단독 병력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를 보조하는 소수 병력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누가 보아도 숙련도나 결집력이 형편없었다.
약점은 여기 있었다. 분명, 우리가 한 대 때렸을 때 생각보다 힘을 내지 못할 부분이다.
공격을 맡은 제21 카르카냑 보병 연대에게도 분명하게 명령을 내렸다.
무리해서 공격하지 마라. 바리케이드를 뚫고 지나가려다 대열이 무너지면 우리 손해다.
적에게 교전을 강요하면서 포격에 약점을 노출하도록 놔둬라.
제21 카르카냑 연대는 경험이 많은 편은 아니지만, 이만큼 지원을 받는 상황에서는 분명 자기 역할을 잘 해 줄 것이 분명했다.
“대열을 유지해! 적이 코 앞이다!”
“우리 샹다메리에서도 이겼잖아? 침착하게 가자!”
선형 대형을 취한 중대들이 작은 개울과 습지대를 거쳐 적진을 향한다. 집중 포격에 정신이 반쯤 나간 적들이 서둘러 바리케이드에 배치되고 있었다.
콰콱!
“끄아아악!”
“흐윽!”
예상대로다. 적은 포격에서 피해를 줄이기 위해 병력 밀도를 낮추고 있었다. 그런데 아군이 공격을 개시하니 전방에 병력을 배치할 수 밖에 없지.
그걸 우리 포병이 발사한 포탄이 측면에서 훑고 지나갔다.
포탄의 힘에 서너명이 동시에 허공을 날아가는 모습은 희극 영화의 한 장면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물론, 전장은 희극이 아니다.
저들은 나가 떨어진 후 먼지를 탁탁 털며 일어나지 못한다. 분명 팔다리가 부러졌을 테고, 포탄에 맞아 생긴 상처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가겠지.
비극이다.
게다가 언제라도 아군이 당할 수 있는 비극이다.
여기서는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안된다. 피같은 내 새끼들, 정규 보병 연대 하나 1200명이 내 명령에 의해 사지가 될 수 있는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촤아악!
“으아악!”
“진정해! 안 맞았다! 대열을 유지한다!”
빌어먹을, 언덕 위의 적 포병이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리 포대나, 언덕 아래의 아군을 쏠 줄 알았더니 진형 반대편의 공격 부대를 쏠 줄이야.
퍽, 촤악! 촥!
몇 발이 더 날아온다. 다행이라고 해야할지, 다행히 장거리에서 날아와 힘이 빠진 포탄은 습지의 축축한 바닥에 힘없이 묻혀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죽어라 쏘다보면 맞으니까 계속 쏘고 잇는 것이니.
축축한 바닥 탓에 제대로 튕기면서 피해를 확대시키지 못한다 뿐이지, 밀집 대형 안에 떨어지면 피해는 결코 적지 않을 것이었다.
“첼레스티나! 역시 적 포대에 대한 직접 포격은 무리일까?”
“네에··· 으으으, 죄송해요! 이 각도와 거리에서는 역시 어렵네요오···. 콘도티에레께서 시키시면 시도는 해 볼게요!”
“아니야, 표적은 유지! 지금처럼 좌측의 포대는 언덕 위의 적 보병 부대를 공격해줘.”
“네에, 콘도티에레!”
이런 상황에서도 냉정하게 말해주는 첼레스티나에게 고맙다. 안타깝지만 이번에는 포격으로 포격을 무력화시키는 것은 무리다.
제발, 제21 연대의 장병들에게 큰 피해가 없기를.
“콘도티에레, 선두가 교전을 시작합니다!”
전령의 외침과 함께, 타타타탕 하는 둔중한 총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나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쥔다.
우리 창병들이 바리케이드에 달라붙어 창 끝으로 반대편의 적들을 제압한다.
총병들이 소대 단위로 바짝 달라붙어 총을 쏜다.
힘 내라, 내 새끼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