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3. 마르사코르 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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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대를 돌며 포격을 점검하던 첼레스티나가 울상으로 돌아왔다. 원하는 만큼의 성과가 안 나와서 그렇겠지.
“콘도티에레··· 생각보다 포격이 효과가 없는 것 같아요오···. 어떡하죠?”
“아니 적이 고지대잖아? 우리 야포들은 구경이 작고, 어쩔 수 없는 거지. 지금 잘 하고 있어.”
“네에··· 그래도요··· 귀중한 화약이 허공에 낭비되고 있어요오···.”
“아니야 낭비되는 게 아니라고.”
분명 첼레스티나는 훌륭한 포술장이지만, 이런 역경에는 약한 모양이다.
하긴, 평지에서 접근해오는 적을 상대로 이정도 화력을 가진 포대를 맡겨주었다면···. 뭐 지금 쯤 적진은 피가 철철 흐르는 응급실 겸 장례식장이었겠지.
그러니 지금 그녀가 불만스러워 하는 게 이해가 안 가지는 않는다.
“지금처럼만 해 주면 돼. 처음부터 예상했으니까!”
“네에, 콘도티에레! 제가 잠시 콘도티에레를 의심할 뻔 했네요···. 그래도 조금이라도 더 맞춰보도록 노력할게요!”
“부탁할게.”
다행히 그녀는 곧 기운을 차린 모양이다. 씩씩하게 인사하며 다시 포대로 돌아간다.
이번 전투는 포대가 세 개로 나뉘어있다. 이리저리 오가며 지휘해야하는 첼레스티나도 정신이 없겠지. 그러니 당장 눈 앞의 성과에 너무 신경쓰지 말았으면 좋겠다.
첼레스티나도 은근히 현재 기분이 업무에 영향을 미치는 스타일이니까. 대체로 잘 해주지만 말이다.
“첼레스티나가 어깨에 힘이 너무 많이 들어가 있는 것 같네요, 콘도티에레 에트.”
풀 죽은 첼레스티나가 안되어 보였는지, 역시 사령부에서 대기하고 있던 아쥬흐가 한마디 한다.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 거겠죠. 걱정도 많고, 이것 저것 챙길것도 많고 한꺼번에 하려니 힘이 들 거예요. 저래도 잘 할 겁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실력이 받쳐주지 않았다면 절대 슈토르히의 선임 중대장을 하지는 못했겠지.
첼레스티나의 지휘와 관리는 종종 힘이 든다는 소리를 듣기도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구성원들에게 이득이 간다. 보기보다 지휘력도 있고 배려도 있는 녀석이라서.
“군수 물자는 모두 전부 이 전투에서 승리하는데 써버리기 위한 소모품이라 생각해요. 사용해서 이득이라 판단하신다면 아낄 필요는 없어요.”
“아, 물론입니다, 아쥬흐 양.”
으음, 생각해보니 어찌보면 화약을 포함한 군수품은 대부분 트랑카벨 가문의 금고에서 나온 것이다.
···더 좁게 생각하면 가문의 재무 책임자인 아쥬흐 트랑카벨, ‘황금의 성녀’의 주머니에서 나온다고 할 수도 있겠다. 가문의 재산과 개인의 재산이 그렇게까지 분리가 되는 문화도 아니니까···.
나는 슬쩍 아쥬흐의 눈치를 본다.
“음? 왜 그렇게 쳐다보시나요, 콘도티에레 에트?”
“앗··· 아닙니다.”
“서, 설마? 제가 화약 아껴쓰라고 눈치 준 것으로 생각하셨나요?”
“아뇨 그럴리가요··· 오해입니다!”
바로 들켰다.
“휴··· 제가 필요한 만큼 쓰라고 한 것은 문자 그대로 말씀드린 거예요.”
“아 물론 알지요··· 그게···.”
“애초에 콘도티에레 에트처럼 성실하게 자기 일 하는 사람을 재촉하는 고용주가 세상 어디에 있겠어요···.”
“...죄송합니다.”
“오히려 항상 감사하고 있는 걸요. 우리가 얼마나 오래 함께했는데··· 이제는 좀 알아주시면 좋겠네요.”
하이고, 내가 죽일 놈이지. 이렇게 관대하고 이해심 넓은 고용주며, 투자자가 어디 있다고.
이게 다 가난뱅이 시절 남은 총알 숫자까지 세어가면서 끙끙대던 시절 근성이 남아있어서 그래.
우리는 부유한 군대이고, 이기는 군대다. 너무 쪼잔하게 생각하지는 말아야지.
“그런데 콘도티에레 에트, 제가 이런 질문을 하는 게 역할을 벗어났을지도 모르지만··· 혹시 공격을 언제로 계획하고 계신가요?”
“아 의무대 운용 계획 때문에 그러신가 보네요.”
“맞아요. 물론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나중에라도 말씀해주시면···.”
“사실은··· 오늘은 공격을 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네에?”
아쥬흐가 놀란 모양이다. 사실 일선 연대장들에게도 내 생각을 완전히 전하지는 않았으니까.
현재 일선 지휘관들은 부대를 이끌고 전선에 나가있다.
공식적으로 내가 내린 명령은 ‘상황에 따라 다음 명령에 대기하라. 장기전이 될 수 있으니 병사들의 체력 관리에 주의하라’라는 것이다.
아마도 내가 트랑카벨 가문에 합류한 이후 내린 명령 중, 가장 두루뭉실한 명령이리라.
현장 지휘관의 판단에 따른 임무 수행을 중시해 자율권을 준 것도 아니고, 그냥 ‘기다려라’라는 명령이니까.
그래서 적이 포진한 언덕 아래쪽에 바짝 접근한 아군 연대들은 대단히 호전적으로 당장이라도 진군을 할 기세이다.
적의 포격이 물론 닿을 수 있는 위치지만, 적은 포격하지 않는다. 분명, 더 완벽한 포격의 기회를 노리고 있겠지. 포탄과 화약의 재고가 많지 않다는 추측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언덕 바로 아래에 공격을 준비하는 보병 부대가 저렇게 기세를 올리고 있다. 그러니 언덕 위의 적군이 대응을 하지 않을 수도 없다.
그렇게 전투 대형을 갖추고 언덕 끄트머리에서 아군의 공격을 주시하고 있지만, 아군은 공격하지 않는다. 대신 끊임 없이 날아오는 포탄에 의해 꾸준히 피해가 발생한다.
이게 아니라면 적군은 엎드리거나 완전한 산개 대형으로 포격 피해를 최소화 할 수도 있었으리라.
어느 쪽이나 적군에게는 스트레스가 되겠지.
“사실은 적군에게 틈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가요?”
아쥬흐가 두 번 연속으로 놀라다니, 이건 정말 특이한 일인데.
“지금 공격해도 이길 수는 있을 겁니다. 하지만··· 분명 언덕을 오르는 과정에서 많은 희생자가 생길 겁니다.”
“그렇군요···.”
아쥬흐는 슬픈 눈으로, 전방에서 대열을 형성하고 있는 트랑카벨의 정규 연대들을 바라본다.
아직 죽고 죽이는 전투에 들어가지 않은, 늠름하고 멋있는 영지군이다. 복장도 무기도 잘 관리된 새 것. 대열도 빈자리 하나 없이 채워진 완편 연대이다.
그러나 살륙전이 시작되는 순간, 눈에 보일 정도로 사상자가 늘어날 것이다. 아무리 신기에 가까운 아쥬흐의 의술이라도 죽은 사람을 살릴 수는 없다.
전쟁을 하는 이상 사상자가 나올 각오는 하고 있지만, 이를 최소화 하고 싶다는 것은 그녀와 내가 공유하고 있는 중요한 가치겠지.
그래서 이렇게 설명한다.
“하지만 기다리면, 반드시 틈이 생깁니다. 그 틈을 노려 비교도 안되는 적은 희생자로 승리해 보이겠습니다.”
“아··· 포격으로 적의 방어를 약화 시키는 것인가요?”
“네,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지형에서, 아니 어떤 지형이더라도 포격만으로 상당한 숫자의 적군이 치명타를 입히는 것은 쉽지 않다.
특히 이런 언덕 위의 적에게 유효할 정도로 사상자를 내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을까? 아마 지금 분배된 화약을 전부 다 쓰고, 예비 화약까지 끌어다 써도 소용 없을 것이다.
오히려 꾸준한 포격을 통해 노리는 것은 심리적 타격이다.
항상 하는 이야기지만, ‘패배할지도 모른다’라고 생각하는 공포가 실제로 패배한 상황보다도 위험한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이번에는 거기 한 가지가 더해진다.
“그리고 사람 마음이 의외로··· 불공평하다는 점에 쉽게 무너집니다.”
“호오··· 그건 또 무슨 이야기인가요?”
“다 같이 얻어 맞는 것은 참을 수 있지만, 주변은 괜찮은데 자기만 맞는다는 생각이 들면 그건 못 참는다는 말입니다.”
“하아··· 그렇네요. 그건 저라도 못 참을 것 같아요.”
그럼, 당연히 절대 못 참지. 고난은 나눠 가지면 반으로 줄어들지만, 나만 독박 쓰면 제곱으로 열받는 법이니까.
내가 더 이상 버틸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버틸 생각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지.
“사흘··· 사흘만 시간을 주십시오. 그 전에 반드시 틈을 찾아내겠습니다. 아니··· 제가 만들어 내는 것이겠지요.”
“음, 콘도티에레 에트. 한가지 오해하고 있으신 것 같아요.”
아쥬흐가 가까이 다가오더니, 살짝 눈을 치켜떠서는 나를 올려다 본다. 잠시 웃는가 싶더니, 어느새 무척 진지한 표정이 된다.
“사흘이 중요한 게 아니라, 열흘도 한 달도 상관이 없어요. 콘도티에레 에트가 우리 트랑카벨 가문과 블랑독에 도움이 된다 판단하시면요.”
“네···.”
아쥬흐는 그렇게 말하며, 손을 뻗어 내 손을 잡는다. 전장에서 거칠어진 내 손에 비하면, 훨씬 작고 하얀 손. 내가 사람을 죽이는 손이라면, 그녀는 사람을 살리는 손이다.
“후후, 이제는 손을 떨지 않으시네요.”
“...어느샌가 그렇게 됐습니다.”
“정말 다행이에요. 부탁이니까, 괜한 일로 스트레스 받지 말아주세요. 트랑카벨 가문이, 제가 무엇이든 해드릴 준비가 되어있으니까요.”
“감사합니다.”
그녀가 보여주는 신뢰에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하지만 여기서 울면 꼴사납겠지.
“그리고 이번에는 너무 시간을 많이 쓸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아··· 드 레뮤즈 가문의 일인가요?”
아쥬흐는 눈살을 살짝 찌푸리더니, 휴우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백방으로 알아보고는 있지만 정말 라몽 백작님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병력 규모가 1만이 넘을 것 같다는데···.”
“가스텔 드 누아 백작님께서는 자신이 최대한 늦춰 보시겠다고 하셨죠.”
“그렇네요. 그러면서도 혹시 모르니 준비를 부탁한다고 하셨으니 걱정이 되긴 해요.”
이 갑작스러운 사태가 내가 시간을 충분히 쓰지 못하는 원인인 것이다. 당연히 트랑카벨 사람들도 걱정이 되겠지.
드 레뮤즈 백작가는 막강한 대귀족이다. 더 문제는 트랑카벨 가문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카르카냑에서 멀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로데브 강을 건너야 하니 쉽게 넘어오지는 못하겠지만···. 강 북쪽의 벨모제를 공격하는 것도 걱정이고 말이다.
그래서 사흘이라는 시간을 한정한 것이다.
“그런데, 왜 사흘인가요?”
멀리서 포탄이 떨어지는 언덕 위의 적진을 올려다보던 아쥬흐가 묻는다.
사실 딱히 왜 사흘이냐고 물으면 대답할 말은 없지만···. 그동안 보아온 바에 따르면 불편함을 강요하면 사흘 째에는 사단이 나곤 했거든.
“저 좁은 데서··· 1만이 넘는 인간들이 복작복작대고 있으니 얼마나 힘들겠어요. 게다가 끊임없이 포탄이 떨어지고, 오늘도 누군가는 죽었고 누군가는 팔다리를 잃었고 할 텐데요.”
“아···.”
역시 아쥬흐도 단번에 이해한다. 화약도 부족한 저들이 식량은 풍족하겠는가. 저 좁은 공간에 저렇게 들어찼으니 화장실 파는 일도 큰일이다.
포탄은 계속 떨어지지, 언덕 아래 바글거리는 적군은 언제 올라올지 모르지.
조금도 쉬지 못하고 핏발 선 눈으로 종일 긴장해있다가 돌아가면 편히 누울 공간도 없을 테고.
거기서 사흘을 버틸 수 있을까? 출신도 목적도 제각각인 성전군이?
“사흘··· 못 버티겠네요.”
아쥬흐가 잠시 생각해보더니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한다. 그렇겠지 뭐.
그러니, 지금 밖에서 열심히 포격하고 있는 우리 포병대는 의미없는 짓을 하는 게 아니라는 이야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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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날의 ‘전투’가 끝났다.
거의 일방적으로 얻어맞은 포격전이기는 했지만.
아소모 델 안프로니오 대공은 밤이 늦고 포격이 멈추자 비탈길을 걸어 올라갔다. 총사령관인 라모리 경을 만나 따질 생각이었다.
이런 걸 기대한 것이 아니었다. 전투야 원래 괴로운 것이다. 적지 않은 부하들, 심하면 자기 자신의 목숨을 내놓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각오도 하기야 했다.
하지만 이건··· 견디고 견디지 못하고의 일이 아니었다.
아니, 부당한 일이다. 자신의 병사들이 이런 상황을 겪게 할 수는 없었다.
“라모리 사령관,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아소모 대공은 자신의 진흙이 덕지덕지 말라 붙은 투구를 사령부 회의실 탁자 위에 탁 소리가 나게 내려놓았다.
일부러 진흙을 바르는 연출을 한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전하고 싶어서 일부러 닦아내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현재 안프로니오 연대는 적군 포병 절반 이상의 집중 포격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승리를 위해 피해를 분담한다는 점에서, 병사들이 감내하고는 있습니다만···.”
일부러 단어를 조심스럽게 고른다. ‘왜 우리면 이러느냐’라는 불평불만으로 들리면 안 된다.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다른 아군도 시달리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모두 세 개의 적 포대 중, 두 개 에서 집중 포격을 당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아무래도 평지에 배치되었기 때문인지.
그러니, 더더욱 조심해서 의견을 표출할 필요가 있었다.
“오늘만 해도 100명에 가까운 병사들이 죽거나 다쳤습니다. 이와 같은 피해를 얼마나 더 감수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사령관 라모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을 듣는다. 아소모 대공 역시 전장에서 뼈가 굵은 용병 출신이다. 예상대로 풀리지 않는 전장 상황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겠지.
지금 문제는 적이 곧장 공격해오지 않았다는 것이겠다.
하루만에 승패가 갈리는 결전, 그것을 조금 더 유리한 포지션에서 맞이하겠다는게 모두가 동의한 작전이었으니까.
이렇게 하루 종일 적의 포격을 뒤집어쓰며 시간만 끌리는 게 아니라.
잠시 후, 라모리가 대답한다.
“아소모 대공님, 귀공과 안프로니오 연대 병사들의 용맹과 분투에는 경의를 표합니다.”
“감사한 말씀입니다.”
“무엇을 원하시는지 들어보고 싶습니다. 아시다시피 현재 아군은 많은 것이 부족한 상태입니다. 하지만 최전방에서 힘든 싸움을 하는 안프로니오 연대의 요청이니까요···.”
아소모 대공 만큼이나 라모리 역시 주의깊게 말을 고르는 눈치였다. 역시 베테랑 용병 대장들 답게, 서로가 서로의 성질을 건드려서 좋을 게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뭐든 해드린다 약속은 못드리지만, 그래도 최적의 상황을 만들 수 있도록 같이 의논은 해볼 수 있다 생각합니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아소모 대공은 마지막으로 머리속에서 자기 의견을 준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