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2. 마르사코르 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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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군이 쏜 포탄이 끊임없이 날아온다. 예상보다 좀 더 정확하고 강렬한 화력이다.
“대열을 유지해!”
“어차피 지나갈 가랑비다.”
장교들과 고참병들이 대열을 유지한다. 지금으로서는 포탄을 몸으로 받아내는 것 외에, 병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으니까.
이 또한 용병의 일이었다. 이를 각오하지 않고 전장에 나온 자는 없었다.
하지만 머리속으로 생각하며 각오한 것과, 이를 전장에서 실제로 마주하는 것은 분명 달랐다.
퍼억, 콱!
주먹보다 조금 작은 쇠구슬이 언덕 비탈에 낙하해 튀어 오른다. 엄청난 속도로 회전하는 포탄이 서로 뿌리가 얽힌 잡초 한 무더기를 뽑아 허공으로 날려버린다.
풀잎과 아직 젖어있는 흙이 붙은 뿌리를 사방으로 튕기며, 한 번 더 바닥을 구르던 포탄이 갑자기 각도를 조금 바꾸며 튕겨 오른다.
“흐아아악!”
성전군 창병의 흉갑을 부수고 갈비뼈를 몇 개나 뜯어내듯 짓이기며 인체를 파괴한다. 끔찍한 비명을 지르던 창병은 순식간에 절명한다.
사방으로 쇳조각과 핏방울을 흩날리던 포탄은 한참을 더 지나가서야 힘을 잃고 평범한 쇠구슬로 돌아온다.
데구르르 굴러가는 포탄을, 숙련병들조차 두려운 눈으로 쫓는다.
표면에 붙어있는 살점의 흔적만 아니라면, 방금 살인을 저지른 무기로 보이지는 않는 평범한 구체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투콱! 지지지직!
이번에는 비탈을 타고 올라온 또 다른 포탄이 제자리를 뱅글뱅글 돈다. 이상하게 스핀을 먹었는지, 사방으로 잡초들을 흩날리며 땅을 파고들 듯한 기세이다.
아주 느릿하게, 대열을 향해 다가온다. 제자리에서 뱅글뱅글 돌면서. 창병 대열 측방에서 이를 멈출 생각인지, 병사 하나가 발을 슬쩍 내민다.
“야! 야야!”
“멈춰 멍청아!”
뒤늦게 그 행동을 발견한 주변의 고참 부사관들이 그를 제지하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마치 굴러오는 축구공을 멈춰 세우듯 발 안쪽의 우묵한 곳으로 제자리를 맴도는 포탄을 멈춰 세우려 한 병사는···.
“으아아아아아아!”
장화의 가죽 표면이 하얗게 벗겨지고, 발목의 복숭아뼈 아래가 빨려들어가듯 기괴한 각도로 뒤틀려 버린다.
포탄의 운동 에너지가 회전력으로 바뀌었을 뿐, 여전히 살을 찢어내고 뼈를 박살내는 힘을 품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흐그그그··· 으그극···.”
“야, 상처 만지지 마. 뒤질 상처는 아니니까 조금만 참아.”
맨정신에 피부가 찢어지고 뼈와 관절이 꺾인 젊은 병사가 눈물을 흘리며 후방으로 질질 끌려나간다.
다행히 발목이 잘려나가지는 않았다. 좋은 의사를 만나 잘 치료한다면 다시 걸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 고통스러운 골절 치료가 남아있으리라.
자신이 벌인 일을 당연히 모를 포탄은 그제서야 제자리 회전을 멈추고 그 자리에 남아있다. 이제는 안전함에도 아무도 섣부르게 만지거나 가까이 다가가려 하지 않는다.
언덕 위로 쏟아진 포탄들이 반복해서 끔찍한 유혈 사태를 만들어내고 있다.
하지만 끔찍한 상황과 무관하게, 이를 지켜보는 성전군 현장 지휘관과 장교, 고참병들의 판단은 하나로 모였다.
‘이거 생각보다 버틸 만 하다’
직접 포탄에 맞아 목숨, 혹은 팔다리를 잃은 피해 당사자들은 절대로 동의하지 못하겠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지의 블랑독 연맹군이 퍼붓는 포화가 충분한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역시 가장 큰 것은 고지대에 위치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포격에 동원된 포들이 경야포라는 점이었다.
트랑카벨 정규 연대가 보유한 경야포들도 그렇지만 샹다메리나 아넥시에서 노획한 대포들 중 현재 사용하고 있는 포들은 소구경 포가 대부분이다.
가볍고 사용이 간편하며 연사 속도에 중점을 둔 포가 대부분이다. 평지에서 양측의 군대가 대치한 상태에서 벌어지는 회전에서 이보다 유용한 포는 없었다.
게다가 포탄을 단일 구경으로 통일하면서 생기는 보급의 용이함이나, 1회 발사시 소모되는 화약의 양이 적다는 점도 중요한 장점이었다.
때문에 블랑독 연맹군 포병대의 장점도 명확하지만, 그만큼 단점도 명확했다.
평소보다 먼 거리에서, 높은 포각으로 발사되는 포탄들은 날아오는 기세에 비해서 위력이 별로였다.
게다가 경야포인 만큼 포탄의 무게도 가볍다. 발사체의 무게가 가볍기에 발사 직후 포구를 벗어날 때의 탄속이나 운동에너지를 유지하기 어렵다.
이건 명중률과도 직결된다. 상대적으로 표적을 벗어나는 포탄이 많았던 것도 이때문이다.
또한 언덕 위의 성전군 역시 철저하게 선형 대형으로 포격을 맞이하고 있었다. 때문에 밀집도나 대열의 깊이가 얕아 한 발의 포탄이 할 수 있는 일이 더 적을 수밖에 없다.
정리하자면, 더 가까운 평지에서 밀집 대형을 갖춘 적에게 가해졌을 경우 최소 4~5명, 심하면 10명 이상을 살상할 수 있는 포탄이 겨우 1~3명을 살상하는데 그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피해가 무사해도 좋을 정도라는 것은 아니다.
포격에 끊임없이 시달린다는 것 자체가 병사들에게는 큰 심적 부담으로 다가오니까.
포격 소리가 들릴 때마다 혹시 이번에는 내 차례가 아닐까 마음을 졸이며, 포탄에 맞아 끔찍한 꼴이 되는 동료들을 목도하게 된다.
그러나 적이 무한히 포격을 할 수 없다는 것은 병사들도 알고 있다.
게다가 시간이 흐를수록 뜨겁게 달아오르는 포신과 포병들의 피로도 문제도 무시할 수 없다. 결국 명중률과 연사속도는 더욱 떨어진다.
이런 판단을 종합한 것이 ‘이거 생각보다 버틸 만 하다’ 라는 결론으로 나온 것이다.
“끄아아아!”
어디선가 피분수와 함께 비명소리가 또 울린다. 그러나 여전히 언덕위에 배치된 성전군의 대열은 단단하다.
“겁쟁이 이단자 새끼들! 이리 올라와봐라아아!”
어느 대담한 선두 부사관의 도발 외침이 포격이 쏟아지는 비탈을 따라 메아리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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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 위의 성전군은 지형의 도움을 톡톡히 보고 있던 그 와중.
물론 모든 성전군이 그 혜택을 받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애초에 성전군이 배치된 진형 상 어쩔 수 없었다.
우측은 측면을 바위 절벽에 보호받는 강고한 지형이다. 하지만 반대로 좌측의 일부는 평지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성전군의 좌측 끝, 평지에서 버티고 있는 것은 아소모 델 안프로니오 대공 휘하의 용병 부대이다.
투콱! 콰자자작!
“으억!”
“악!”
물론 평지에 덩그러니 던져진 것은 아니었다. 포탄이 떨어지자 흙과 나무를 섞어 급조한 바리케이드가 조각나며 허공으로 비산한다.
나무조각 파편에 맞아 다친 사람이 여럿 나왔지만, 포탄 자체는 막아주었기에 치명상을 입은 병사는 없었다.
평지의 안프로니오 연대가 믿는 것은 전투를 준비하면서, 전군이 몰아준 바리케이드 더미와 주변의 축축한 지표면이었다.
물론 수비하는 측에서도 물렁거리는 지표면이 썩 반가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단단하지 못한 땅은 일단 낙하한 포탄이 튀어 오르는 것을 막고 에너지를 낭비시켰다.
그 대가로 주변으로 진흙이 튀어 모두가 흙투성이가 되고는 있었지만, 피투성이가 되는 것 보다야 물론 훨씬 나았다.
“빌어먹을 포격! 그래도 흙을 뒤집어 쓰면서 준비한 게 의미는 없지 않았군.”
“그렇습니다, 대공 전하! 외곽으로 파둔 도랑도 굴러오는 포탄을 막아주고 있습니다.”
“그건 다행이지만···.”
아소모 대공은 이번 전투에서 가장 위험한 측면 방어를 자원했다.
그의 연대를 구성한 병사들은 주디칼리에서 활동하며 경험을 쌓은 용병들이라 가장 적합한 인선이기는 했다.
게다가 아넥시에서 벌어진 재앙에서 ‘후방을 향해 돌격’하여 아직 싸우고 있는 아군의 측면을 노출시킨 추태를 저지른 오명 반납의 의미도 컸다.
아마도 안프로니오 연대가 끝까지 남아 싸웠더라도 아넥시의 결과가 크게 바뀌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총사령관 라모리를 포함한 다른 지휘관들도 크게 책임을 묻지는 않았으나, 전문 용병 지휘관으로서 이름에 먹칠을 한 것은 분명하니까.
“정말 엿 같은 일이군. 법황의 칙령 하나 받겠다고 연대 전체가 잘못될지도 모르는 도박에 뛰어들어야 하다니.”
“하지만 누가 봐도 이번 전투의 핵심적인 역할을 맡으시지 않았습니까? 이기기만 한다면, 대공 전하와 우리 연대의 최고 전공은 분명할 겁니다.”
“그렇겠지. 이기기만 한다면 말이지만, 이기기만 한다면!”
“이길 겁니다! 반드시 이기겠습니다!”
아소모 대공이 투덜대자 참모이자 가신들인 주변 장교들이 승리를 다짐한다.
그가 원하는 것은 말 그대로 법황의 칙령 하나였다. 델 안프로니오 대공국의 영토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있는, 산악지대를 넘는 길목의 정당한 소유자임을 선언하는 칙령.
주변 영주들과 주교령의 이권이 어지러이 얽혀있는데다가, 국경 확정이 애매한 산악도로가 이어져서 애매한 장소였다.
하지만 만약 이 지역을 명확하게 영토로 들이고 요새를 건설한다면, 안프로니오 대공국의 국경이 안전해지는 것에 더해서 주변 물류를 장악하는 효과도 있었다.
이를 위해서는 여기 강한 이권을 가진 주변국들, 특히 주교령의 지지가 필수였다. 그래서 법황의 칙령이 필요한 것이다.
오랜 숙원을 이루기 위해 1500명의 휘하 정예 병력을 이끌고 보무도 당당하게 성전군에 합류했던 것이지만.
한 줌 밖에 안되는 이단자 놈들, 금방 쓸어버리고 가을에는 돌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지금 오히려 수세에 몰린 상태. 아소모 대공 자신도 전장에서 뼈가 굵은 무장 출신이다. 라모리 경의 판단은 훌륭했지만, 그래도 반드시 이긴다는 보장은 없었다.
듣기로는 그룬발트 출신들로 이루어진 성전군 제2진이 북쪽에서 접근하고 있으니 ‘지지만 않으면 이긴다’고 하긴 했지만 말이다.
아소모 델 안프로니오 대공으로서는 세가지를 다 이루어야 했다.
어떻게든 이겨서 살아 남는 것, 전공을 세워서 법황의 호의적인 칙령을 받아내는 것, 병력을 최대한 살려서 돌아가는 것.
성전에 참여시킨 1500명의 용병들은, 그가 오랫동안 전장에서 함께해온, 직접 키운 자식들이나 다름없었다.
전문 용병 대장인 자신의 장사 밑천이기도 했고, 대공국 국방의 핵심이기도 했다. 상당수가 대공국에 정착한 신하이자 납세자들이기도 했고.
그러니 적당히 숫자만 채운, 혹은 실력보다 마음만 앞선 어중이떠중이 용병이나 순례자 나부랭이들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그의 부하들이 정예군이라는 것에 이의를 가지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정예군이다. 누구나 인정하는 정예군이지. 하지만 빌어먹게도 현실은, 아무리 정예군이라도 포탄에 맞으면 죽어 나간다는 것이다.
퍼억, 콰작! 우지지직!”
“끄아아악!”
“컥!”
“흐아악!”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바리케이드가 박살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비명이 울린다.
“의무병! 여기 부상자가 많다!”
“후방으로 옮기고, 나머지는 바리케이드 수리해!”
재수가 없었다. 진흙 속에 숨어있던 돌덩이라도 부딪혔는지, 거의 45도 각도로 꺾인 포탄이 바리케이드 하나를 측면에서 쓸어버렸다.
심각한 부상을 입은 병사들이 울부짖는 가운데, 옆구리가 뚫려 절명한 사망자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가 진흙속에 스며들어 소름끼치는 진회색을 만들고 있었다.
“좆같은 전쟁! 좆같은 칙령!”
부하들이 개죽음을 당하는 꼴을 본 아소모 대공은 진심으로 성전 참여를 후회했다.
자신이 너무 안일했다. 당시에는 법황의 호의를 얻는 가장 쉬운 방법이라 생각했으나, 완전히 착각이었다.
아넥시에서 무사히 살아서 도망쳤을 때, 그대로 북쪽을 향해 행군해서 주디칼리 북부의 고향으로 돌아갔어야 했다.
다른 더 겁이 많거나, 똑똑했던 동료들이 했던 대로 말이다.
“이 더러운 이단 새끼들은 공격도 안 해오나?”
“그게··· 아직 움직임은 없습니다, 대공 전하!”
적의 포격을 각오하기는 했으나, 어디까지나 적의 정면 공격을 감안한 포진이다.
적이 접근하면 진창인 바닥과 여러 겹의 바리케이드로 진격을 늦추고 총병대의 일제사격으로 최대한 피해를 강요하고, 견고한 중앙의 창병 대열로 반격한다는 기본 전술.
평지에 노출된 데다가, 부채꼴 형태로 정면과 측면이 노출되어 있으니 더 많은 숫자의 적과의 교전을 각오하고 있었다.
그러나 저 멀리 공격대형을 갖춘 것으로 보이는 적 보병 대열은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그저 눈으로 봐도 견고해보이는 포대에서 끊임없이 포탄만 날아올 뿐이다.
적의 정면 공격과 거기 이어지는 총격전과 백병전도 쉽지는 않겠지. 그래도 일방적으로 포격만 맞는 상황보다는 나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시간을 끌면 유리하다고는 하지만··· 정말로 유리한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고 말이다.
“...지금은 방법이 없다. 일단 버티고, 병사들에게 필요한 건 무엇이든 지원하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대공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