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8. 신에게 바치는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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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베트르 드 랑두제는 자신이 왜 이 자리에 있는지 혼란에 빠져있었다.
그는 실패한 남자였다. 어설프게 법황의 포고령을 시행하려다 영지 내에서 분란을 만들었었다.
이는 다른 가문의 기사들이 개입하고, 남쪽에서는 트랑카벨 가문이 개입하면서 대규모 전투로 비화되었다. 그리고 벌어진 전투가 여울목의 전투.
그는 지휘관 중 한 사람이었다. 비록 반 강제로 떠밀린 자리이고, 휘하 병력에게 존중받지도 못하는 지휘관이었지만.
수로 보나 기세로 보나 분명 승리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였다.
참담한 패배.
그나마 최후까지 종이 한 장 차이, 아슬아슬한 석패라면 또 달랐겠지만, 그것도 아니다. 철저하게 적의 계획에 빠진 일방적인 패배였다.
심지어 아군은 그 와중에 협력이 되지 않는 자중지란까지 발생했다.
그렇게 간신히 최악은 면한··· 그런 패배였다. 아군이 무너지는 동안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그 후, 작위도 아들에게 물려주고 외딴 오두막에서 홀로 살아가려 하였으나···.
어찌 된 것인지, 레뮤즈 성의 기병대장이 되고 말았다.
“드 레뮤즈 영지군이 빠른 속도로 전쟁 준비를 마쳐가고 있다는 소문은 들었습니다.”
그것도 이처럼 중요한 회담의 대표 중 한 명으로 말이다.
소베트르 드 랑두제 ‘전’ 남작.
드 레뮤즈 백작의 수 많은 봉신들 중에서도 보잘것 없는 소귀족 출신인 그와 마주앉은 남자는···.
다름 아닌 라솔 국왕의 친동생이다. 에드메르 산타로 데 카르도라 공작. 오렌시아 기사단의 단장.
무엇 하나, 자신과 격이 맞는 게 없었다. 평소라면 마주 앉아서 대등하게 말을 나눌 일도 없었겠지.
“맞습니다, 공작님. 현재 레뮤즈 성 인근에 집결한 병력은 모두 6200명 정도입니다.”
“상당한 병력이군요.”
아니, 여기 옆에 앉아서 능숙하게 회담을 이끌어 가는 청년 전략가, 아인멜츠 피노르 폰 자이트리츠가 없었다면 자신은 아마 한 마디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향후 3주 이내로 약 2500명 정도가 추가로 소집에 응할 예정입니다. 모두가 라몽 백작 각하께 충성을 다하는 훌륭하신 가신 분들입니다.”
“확실히, 무장과 숙련도가 상당해 보였습니다.”
“여기, 소베트르 드 랑두제 경께서 그 필두에 계십니다.
갑자기 자기 이름이 거론되자 소베트르는 기겁한다. 딸꾹질이 안 나온 게 다행일 정도로 말이다.
“소베트르 남작이라 하셨소?”
에드메르 공작의 눈이 자신을 평가하듯 빤히 바라본다. 눈을 피하지 않기 위해서 무진 노력을 해야만 했다.
“소베트르 ‘전’ 남작입니다, 에드메르 왕제 전하.”
“허어, 왕제라는 호칭은 익숙하지 않군. 이 몸은 이미 왕실을 떠난 몸이니 다르게 불러주시면 감사하겠소. 공작이든, 단장이든 좋소이다.”
하지만 정작 에드메르는 상대를 시험하거나 평가할 생각은 없었는지, 담담하게 말을 이어간다.
“소베트르 경은 지난 전쟁에서 엘랑키아 기사도 연합의 맹주로 트랑카벨 영지군과 교전하신 경험이 있습니다. 당시 저도 용병으로 참전했었지요.”
“오, 정말이시오? 전투는··· 안타깝게도 패배하셨다 들었소만.”
“비록 패배했으나, 소베트르 경의 흔들림 없는 지휘로 병력을 무사히 수습해 퇴각할 수 있었습니다.”
“오호··· 라몽 백작께서 중히 여기시는 이유가 있구려.”
“그렇습니다. 제 목숨도 구해주셨으니까요.”
에드메르의 눈이 빛난다. 소베트르는 부디 자신의 머리속이 자신의 눈을 통해 상대방에게 보이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옆에서 듣기만 하면 마치 벌칙을 당하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저건 아인멜츠의 진심이다.
몇 번이나 대화를 나눠보았으나, 이 똑똑한 청년은 왠지 자신을 은인으로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게 아니라고 직접적으로 이야기를 한 적도 있었다. 자기는 그저 주변을 통제 못한 얼간이라고, 전투에서 방관자나 다름없었다고 말이다.
‘하지만 전장에 마지막까지 남아서, 무너져가는 아군을 마지막까지 지키려 하신 노력은 진짜가 아니었습니까?’
···참 모를 일이다. 무엇이 아인멜츠로 하여금 자신을 이렇게 고평가하게 만들었는지 말이다.
그의 추천덕인지는 몰라도, 현재 레뮤즈 성에 주둔하는 기병대를 총괄하는 자리에 앉게 되었고 이런 중요한 회담에도 나서게 되었다.
···대체 주군인 라몽 드 레뮤즈 백작의 생각도 모를 일이다.
“블랑독 남부의 이단자들은 상당한 강적이라 들었습니다. 귀경의 경험은 그들을 상대하는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되겠지요.”
“...저로서는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뭐라고 더 할 말은 없었다. 부디 자신이 맡은 일이 능력의 한계를 넘는 일은 아니길 바랄 뿐.
“드 레뮤즈 백작가에서는 그 외에도 인근의 우호관계인 다른 대귀족분들께도 참전을 호소한 상황입니다.”
“솔직히 라몽 백작께서 성전에 이처럼 열성적으로 참여하실 줄은 몰랐소이다.”
“백작 각하께서는 이번 참전의 관건은 ‘신속함’으로 생각하고 계십니다.”
“이렇게까지 해주시는데 우리 오렌시아 기사단 역시 응답을 하지 않을 수 없겠소이다.”
에드메르는 잠시 고민하는 듯, 손가락을 꼽아가며 계산한다. 지금까지 준비된 병력과, 앞으로 추가될 병력을 고려하면서.
“일주일··· 아니, 닷새 후에 집결지에 전 병력이 모이도록 하지요. 오렌시아 기사단의 기사가 2천, 타라트라바 출신 의용군이 1200명이오.”
한번 결정이 된 이상, 거침이 없다.
“그리고 명확한 규모를 말씀드리기는 어려우나, 향후 라솔 왕국의 지원 또한 있을것이오. 비록 수적으로 드 레뮤즈의 대군에 미치지는 못하나, 하나하나가 전투에 익숙한 정예군이니 믿어도 좋소.”
“오렌시아 기사단은 라솔 전체에서도 이름 높은 강군이라 들었습니다. 신성한 전쟁에 나서는 입장에서 아군으로는 더할나위 없군요.”
드 레뷰즈 백작가 대표 아인멜츠와, 오렌시아 기사단 대표 에드메르의 미소가 오고간다. 서로의 의도는 충분히 전해졌다. 이제 실행만이 남았다.
자신도 어떤 형태로든 기여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소베트르였으나, 안타깝게도 끼어들 타이밍은 놓친 모양이다.
“그럼 닷새 뒤, 집결지에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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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보고서를 정리하며 한마디 했다.
“개자식들이 또 개같은 짓을 했구나.”
···자꾸 욕만 늘어간다. 이런 상황에서 욕을 안 할 수가 있어야지.
욕을 해서 안좋은 일은 하면 할수록 늘어만 간다는 것도 있지만, 자칫 부하들이 나를 무서워하게 된다는 것이 문제다. 무서워하게 되면 보고를 꺼리게 되고, 어쩌면 큰 도움이 될지 모르는 의견도 받지 못하게 된다.
“하지만 멍멍이는 충성스럽고 착하고 귀여운데··· 왜 멸칭으로 사용되는 걸까요오···.”
“...그러게. 첼레스티나 말이 맞아.”
“네에··· 그러니 ‘개같다’는 칭찬의 의미로 쓰여야 하지 않을까요?”
“그건 조금 너무 나간 것 같네. 그 언어에는 사회성이란게 있으니까 말이야.”
“네에! 그러면 첼레스티나를 개처럼 칭찬해주세요?”
“어휴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다.”
의도는 알겠지만 어감이··· 어감이 어? 진짜 좀 그렇다.
자칫 예민해질 뻔 한 상황을 농담으로 풀어주는 첼레스티나가 고마웠다.
싸우지 않고 전쟁을 마무리지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지만. 결국은 여기까지 왔다.
나는 언덕을 끼고 대열을 갖춘 적진을 바라본다. 망원경으로 이곳저곳을 살피니 주의깊게, 유기적으로 배치된 방어진형이 눈에 들어온다.
“꼴을 보니 하루 이틀 준비한 건 아닌데.”
“네에, 정찰병들 말에 의하면 일주일 이상 전부터 준비했다고 하네요.”
“사방에서 분탕질을 치면서, 결국 이걸 준비하고 있었구나.”
성전 치고, 적이 비교적 신사적으로 행동한 것이 분명하긴 하다.
물론 블랑독 연맹 측에서 미리 탄압의 대상이 될 정순파 신도들을 대부분 남쪽으로 이주시켜서 그렇겠지만.
그래도 다소 가혹할지는 몰라도 평화로운 공출과, 살인과 방화가 동반될 수 밖에 없는 무자비한 약탈은 분명히 다르다.
의도야 어떻든 전자의 방향을 견지하던 적군이 갑자기 후자를 저지르기 시작했다. 게다가 각지에 이단심판소를 세워 가혹한 이단심문도 자행했다는 것이다.
이 자식들이 갑자기 미쳤나 생각했지만, 이 방어 진형을 보니 명확히 알겠다.
적은 ‘전투에 도움이 되는’ 병력과 ‘전투에 도움이 되지 않는’ 병력으로 나누어 행동했다.
전투에 도움이 되는 병력은 지금 언덕에 배치된 놈들이다. 유리한 지형에 완벽하게 자리잡고 있다.
부분적으로 가파른 비탈과 중간중간 준비된 야전축성을 생각하니 어떻게 올라가야 할지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진다. 가장 시야가 좋은 데 배치된 포병대는 어떻게 상대하지?
우리 병사들에게 여길 올라가라고 명령해야 한다고?
그리고 전투에 도움이 되지 않는 병력은 사방으로 풀어 약탈을 자행시켰다.
아마도 식량은 중앙으로 긁어 모았겠지만, 다른 돈이 될법한 물건들은 각자가 가져도 된다고 했을 것이다. 아주 효율적인 방법이다.
이를 통해 전투 지속에 필수인 식량은 충분히 모아들였고, 약탈의 인센티브에 눈이 먼 약탈자들은 더더욱 열심히 일했으리라.
···한편으로는 성전군으로서 조금의 눈치도 보지 않기로 정했다는 것이지.
정말 천벌을 받을 놈들.
“콘도티에레 에트···.”
“의무대장님.”
“아쥬흐 양, 오셨어요?”
우리 부상병들을 책임지는 아쥬흐가 도착했다. 아마도 만반의 준비를 마쳐놓고 왔으리라. 그런데 그녀의 표정이 영 좋지 않다.
“저는 전투에 대해서 문외한이지만··· 적의 위치가 까다롭네요.”
역시 그런 생각을 하고있었구나. 그렇지, 누가 봐도, 측면과 후방이 막힌 비탈 위에 위치한 적이다. 까다로워 보일 수 밖에.
그러고보니 벌써 오래 전, 리니 능선에서 우주방어 태세를 취하고 있을때 그걸 굳이 공격해왔던 적이 생각난다. 대체 무슨 생각을 했던 거지 적장 머저리는.
“많은 분들이 다칠 것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좋지 않아요.”
“저도 걱정입니다, 의무대장님.”
“아, 미안해요. 콘도티에레 에트가 누구보다 신경쓰고 계셨을 텐데···. 내가 그런 말을 하면 안 되는 거였네요.”
“아뇨, 충분히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습니다. 그걸 가지고 뭐라 하는 작자가 있다면, 첼레스티나가 날려 버릴 겁니다!”
“네에! 맡겨만 주세요!”
마침 내 농담을 받아준 첼레스티나가 팔뚝을 걷으며 근육을 자랑하자, 아쥬흐가 웃음을 터뜨린다.
“...항상 배려해줘서 고마워요. 콘도티에레 에트, 첼레스티나.”
“그럼요. 아쥬흐도, 우리 트랑카벨 가문이나 블랑독 연맹군의 병사들도 모두 배려를 받아야죠.”
“그렇게 말해줘서 기쁘네요.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거예요. 이번에도··· 맡길게요, 콘도티에레.”
“예, 아쥬흐 양. 곧 작전 준비가 마무리됩니다. 연대장들을 소집할 예정인데 함께 들으시겠습니까?”
“그래도 될까요?”
물론 그래도 되지. 아니, 그래야 한다. 그래야 의무대장으로서 판단해서 엄연히 제한된 인력인 트랑카벨 의무대를 적절하게 배치할테니 말이다.
전쟁이란 불길한 일이고··· 죽고 다치는 사람이 생기는 것을 완전히 방지할 수는 없다. 아마 신이라고 해도 불가능하겠지.
그걸 최대한 줄이는 게 내 임무. 부상자를 최대한 살리는 게 그녀의 임무.
“전투는 언제 시작될까요?”
“기왕 전투를 하기로 결정한 이상, 최대한 빨리 해야합니다. 다른 어떤 문제가 발생할지 모르니까요.”
“...그렇겠네요.”
다른 문제··· 많다. 특히 갑자기 드 레뮤즈 백작이 군대를 모으고 있다는 소식이 말이다.
이미 선발대가 블랑독 북서쪽에서 얼쩡거리고 있다는 소문도 있고, 요새를 짓고 있다는 소문도 있더라.
양면전쟁의 악몽··· 이 떠오른다. 전력이 제한되는 우리가 이만큼 싸울 수 있었던 것은 선택과 집중을 잘 했기 때문이지.
더불어서 적이 서로 협력이 안되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런데 이미 정리가 된 줄 알았던 전선에서 또다시 적이 집결하고 있다? 이건··· 공포 그 자체다. 상상만 해도 무섭네.
다행히 카르카냑의 아롱드 트랑카벨 영감님과 가스텔 드 누아 백작님이 외교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나로서는 최악의 상황도 가정할 수 밖에 없다.
뭐 어느 쪽이든 이번 전투를 잘 마무리 해서 법황의 성전군을 끝장낸 다음의 일이겠지만.
“첼레스티나, 이번에도 포병대를 부탁해도 될까?”
“네에, 물론이에요! 개처럼 충성스럽게 따를게요!”
“...개처럼?”
“아니··· 아니아니! 첼레스티나 그 말은 쓰지 말라고 했잖아.”
“네에··· 그래도 멍멍이는 충성스럽고 착한데···.”
“그래 그래. 나도 멍멍이는 좋지만 사회적 통념이란 게 있으니까.”
긴장을 풀어주는 농담은 좋지만, 그게 가끔 새로운 긴장을 몰고 오곤 한다. 아쥬흐는 어떤 상황인지 이해했는지 소리 죽여 웃고있다.
“연대장들을 소집해 줘. 오늘 작전 계획을 마치고, 내일 아침 일찍 전투 배치에 들어가야 하니까.”
“네에, 콘도티에레! 다녀올게요오.”
가급적 피하고 싶었던 전투지만, 피할 수 없다면 신속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