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208화 (208/556)

27-6. 신에게 바치는 전쟁

라솔 왕국의 군주, ‘가장 신실한 수호자’ 리오고 국왕은 마치 저녁 메뉴를 말하는 것 같은 심드렁한 말투로 자신의 속마음을 설명했었다.

대체 라몽 드 레뮤즈 백작에게 블랑독을 전부 넘겨서 라솔이 얻는 이득이 무엇일지, 동생인 에드메르로서는 짐작이 잘 가지 않았다.

‘그러면 드 레뮤즈의 영토는 단숨에 두 배 이상으로 커진다. 영토나 수입이나 인구나, 엘랑키아에서 비교 대상이 없을 정도로 강대한 대영주가 되는 것이다.’

‘거기서 라솔 왕국은 무엇을 얻을 수 있습니까?’

‘아직은 아무것도 없다. 그저, 그 애송이가 통치자로서의 역량을 시험하는 것을 지켜볼 뿐이지. 자고로, 갑자기 큰 영토나 권한을 하사받은 귀족은 그릇을 시험당하게 마련이다.’

역시 뭔가 숨기고 있는 뒷계획이 있었구나. 어린 나이에 라솔 국왕에 등극해 순식간에 경쟁 세력들을 말살하고 왕권을 안정시킨 형님다웠다.

사실 여기까지 듣고서도, 에드메르는 형의 생각을 확실히 알지 못했다. 감당도 못할 큰 영토를 받은 라몽 드 레뮤즈가 자멸하기를 기다린다는 뜻인가?

‘물론, 늘어난 영토를 감당하지 못할 그릇이라면 그대로 무너질 것이다. 정신적으로 무너진 영주는 반드시 혼란을 부르지. 국경을 맞댄 우리로서는 접경지대의 영주가 무능하고 혼란스러운 것은 전혀 손해가 아니다.’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그 영토를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면 어찌 됩니까?’

국경지대에 강대한 단일 영주를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다.

‘만약 레뮤즈의 애송이가 그만한 영토를 통째로 삼킬 그릇이 된다면···. 엘랑키아 내 최강의 영방이자, 군벌이 탄생한다.’

‘그, 그렇군요!’

‘게다가 왕도에서 먼 변경이다. 언제나 중앙에서 먼 힘을 관심을 부르고, 관심은 시기를 부르지.”

형의 다소 섬뜩한 미소에서, 에드메르는 답을 읽어낸 것 같았다.

‘블랑독은 지금도 국왕과 법황을 상대로 물러서지 않고 싸우는 땅이다. 그렇지 않느냐?’

‘...맞습니다.’

‘그런데 그 두 배의 영토가 된다면··· 엘랑키아의 왕으로서 그거 그걸 그냥 지켜볼 수 있겠느냐?”

‘없습니다.’

‘그렇다. 필연적으로 과도한 힘을 가지고 자신의 능력을 증명한 영주는 주군을 적대하고야 만다. 본인이 그러고 싶지 않아도, 어느새 그런 입장에 서고야 말겠지.’

지금 라솔의 타라트라바처럼 말이다.

엘랑키아에 비해 귀족의 숫자가 훨씬 많고, 그만큼 더 작은 영지로 쪼개진 라솔에서 독보적으로 강대한 힘을 가진 타라트라바 공국은 그게 문제였다.

‘물론 우리 라솔이 조금쯤··· 그래, 망설이는 자들을 재촉해 시간을 당겨 주는 정도는 도와줄 필요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결국은 자기들이 원하는 일을 하게 될 것이다.’

에드메르는 침을 꿀꺽 삼키며 형의 말을 들었다. 그때의 ‘도움’은 지금의 ‘도움’과는 다른 의미가 되겠지.

‘우리 라솔의 대군이 이스키비르 강을 다시 건너는 것은 그리 먼 미래는 아닐 것이다. 그때는 단순히 이단 토벌 따위의 목적은 아니겠지. 그렇지 않느냐?’

‘맞습니다, 형님 폐하.’

‘그때도 말이다, 에드메르, 네가 선봉에서 눈물 흘리는 성녀의 기를 높이 들어줬으면 좋겠구나. 라솔의 국왕기와 함께 말이다.’

‘...기꺼이 그렇게 하겠습니다.’

같은 피를 이어받은 왕자였다. 그러나 역시 자신은 죽었다 깨어나도 형과 같은 군왕은 되지 못할 것이다.

‘이거 말을 너무 많이 해버렸구나. 그래도 이번에는 말이다, 에드메르. 레뮤즈 애송이의 충실한 동맹자를 연기하거라. 더 이상 아무것도 요구할 필요는 없으니.’

그게 전부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불필요하게 엘랑키아의 귀족들을 적대하거나, 뭔가를 요구할 필요는 없었다.

그저 드 레뮤즈의 ‘엘랑키아 건국 당시부터 인정받은 정당한 권리’에 편승하여, 정순파라 자칭하는 이단을 몰아내면 될 뿐이다.

고집스러운, 형의 표현을 빌리자면 ‘레뮤즈의 애송이’가 말을 듣게 하기 위해 다소 극단적인 방식을 쓰기는 했지만.

그래도 주신을 섬기기로 맹세한 신성 기사로서, 조금도 부끄럽지는 않았다.

자신의 모든 것은 주신과 교단, 그리고 라솔 왕국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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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황이 임명한 성전군 사령관, 라모리 스텐던은 보병들이 언덕을 오르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무거운 갑옷과 장비를 가지고 언덕을 오르는 병사들이 힘들어보인다. 그래도 마침 오늘은 날씨가 덥지 않다. 병사들이 최대한 체력을 아끼고 쉴 수 있을 것 같아 다행이다.

최근 심혈을 기울여 재편성한 성전군은 이제 그럭저럭 싸워볼 수 있는 야전군의 느낌이 난다. 숫자는 줄었으나, 전력이라는 면에서는 더 믿음직하다.

라모리 자신의 직할 용병대 총 2800명

- 보병 2100

- 기병 600

드라멜른 기사단 총 6200명

- 보병 5500

- 기병 700

모스탈 수도회 총 400명

- 기병 400

아소모 델 안프로니오 대공 용병대 총 1500명

- 보병 1500

그 외 지원군 약 3500명

- 보병 약 3300

- 기병 약 200

총 병력 약 14400

- 보병 12500

- 기병 1900

아마 블랑독 어딘가를 떠돌고 있는 확인 불명인 병력도 상당히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와서 합류한다고 특별한 전력이 되지는 않겠지.

오히려 그 자리에서 최대한 주변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적의 진격을 방해해주기를 바랄 뿐이다.

한 번 크게 패하고, 완전히 와해되면 어쩌나 싶었던 병력을 재건한 것 치고는 상당한 병력이다.

그러나 문제는··· 역시 기병의 세력이다.

‘1만! 최소 1만 기의 기병이오! 하지만 이런 변경의 자작 따위가 1만 기의 기병을 다룰 수 있을리가 없지 않소! 이건 분명 그거요! 마왕에게 순결을 바친 마녀의 사술! 마녀가 불러낸 지옥의 마귀들이란 말이오! 오오오, 주신이시여, 당신의 기사들을 보호하소서!’

라모리가 아직 귀환중이던 때, 아넥시 포위망 부근에서 박살이 나도록 두들겨 맞은 어느 주디칼리 출신 귀족이 했던 횡설수설이다.

어찌나 심하게 탈탈 털렸는지, 혹은 도망치다 머리라도 심하게 맞았는지. 간신히 살아서 도망친 자들 중 상당수가 정상적인 판단이 서질 않는 모양이었다.

얼간이들 같으니라고···.

그나마 다행일지도 모른다. 적의 수를 과장해서 말하며 괜히 주변 병사들 사기나 깎던 머저리들은 대부분 짐을 싸서 북쪽으로 도망쳤다.

이단자들은 저런 머저리들이나 꼼꼼히 잡아 죽일 것이지. 아마도 머저리라는 것을 알고 일부러 풀어준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쓸만한 녀석들일 수록 먼저 죽는다.’

용병들 사이에서 흔히 도는 이야기이다. 좋은 녀석들은 진작에 다 죽어 무덤에 들어갔고, 주변에는 멍청이들만 남는다는 이야기.

자기 자신도 그 장점이라고는 명줄 긴 것 밖에 없는 멍청이들 중 하나라는 자조적인 블랙 유머기도 하다.

어쨌든 1만 기는 멍청한 귀족의 공포감이 만들어낸 헛것이라고 쳐도 적 기병의 강대한 세력은 거짓이 아니다.

“약 5천 기는 된다고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가장 큰 병력을 유지하고 있는 드라멜른 기사단의 발란트 디아모프 폰 잘렌펠트는 그렇게 말했다. 그는 적과 대치하고 무사히 돌아왔다.

“7천 기. 그 이하는 절대 아니외다. 나는 겔젠브로텐 전투에서 아리세나하 선제후의 구원 돌격을 직접 보았소! 절대로 그 미만은 아니라고 맹세할 수 있소이다.”

아넥시나 그 이후 철퇴 과정에서 추태를 보였던, 그래서 지금은 절치부심하여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 중인 용병대장. 아소모 델 안프로니오 대공은 그렇게 말했다.

“제가 직면한 기병은 선봉과 후위를 합쳐서 2천 기 정도였습니다. 다른 방향으로도 상당한 수의 적 기병이 돌격하고 있었으니, 최소 그 두 배 이상은 된다고 하겠습니다.”

아넥시 성문 앞에서 휘하 병력을 다 잃고 상처투성이로 귀환한 빌다우 기사단의 파견대장 바콘 스트로치크의 말이었다.

다른 생존자들의 증언을 종합해 보아도, 적 기병의 숫자는 5천 기 이하는 아닐 것으로 생각된다.

···최저한으로 잡아도, 아군의 두 배.

기병의 ‘세력’은 중요하다.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세력으로 표현하는 이유가 있다. 보병은 숫자가 적으면 적은 대로 싸울 방법이 다 있다.

철저하게 방어전을 하건, 혹은 역으로 방어를 포기하고 일점 돌파를 하건.

하지만 기병은 양측의 숫자와 기세가 크게 차이나면 도저히 상대할 수 없다. 자칫하면 전투가 의미가 없을 정도이다.

결국, 보병의 보호 없이 단독으로 기병을 활용하기 어려워지니 기동력이 강점인 기병 활동이 많이 위축될 것이다.

하필 기병 돌격으로 성전군 주력을 밀어버린 직후이다. 기세가 약한 리도 없겠지.

하지만 기병 전력이 불리한 전투를 처음 해보는 건 아니다.

기병이 불리하다고 반드시 지는 것도 아니지.

이 비탈진 전장은 기병이 우세한 적을 상대하기 위해 라모리가 찾아낸 전장이었다.

반달 형태의 언덕.

한쪽 측면은 가파른 사면과 숲으로 보호받고, 반대편은 평지에 노출되어 있지만 앞에 작은 습지가 있어 적의 기동이 불리하다.

후방은 울창한 숲이다. 그 뒤로도 비탈이 있어 적이 뒤로 돌아 들어오기도 힘들다. 분명 그 전에 대응할 수 있는 기회가 있을 것이다.

라모리는 드라멜른 기사단의 베테랑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은 아직 성전이 격화되기 전, 법황의 명으로 블랑독을 습격했었다.

그리고 당시 트랑카벨 가문의 주력군과 여울목 부근에서 전투를 벌였다고 한다.

분명히, 이번 전투의 적군을 이끄는 지휘관은 당시의 지휘관과 같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북 로데브 강을 건너 복잡한 녹색의 미로에서 교전했던 적장도 같은 사람이겠지.

당연히 엘랑키아 국왕군이 패배한 샹다메리 전투도 그가 지휘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라모리는 그가 승리했던 전장에서 그가 즐겨 사용했던 전술을 분석해보았다.

가능하다면 먼저 전장을 선점하고 기다리는 전술을 선호.

그렇지 않더라도 철저하게 지형을 분석하고 자신에게 유리하게 사용할 줄 안다.

우세한 화력과 야전축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적에게 포착되지 않은 기동력 있는 부대를 활용한 우회 공격에 능하다.

그래서 라모리는 이번에는 그것을 빼앗아 보기로 결정했다. 자신도 전장에서 잔뼈가 굵고, 법황에게 인정받은 용병 지휘관이다.

상대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을 자신이 못할 리는 없다.

그 첫번째가 바로 이 전장. 갑자기 천벌이라도 떨어져 대지가 두쪽나기 전에는 유리할 수 밖에 없는 방어전이다.

측후면 공격을 하려면 많은 난관을 거쳐야만 하는 전장이다.

더 높은 곳에 잘 설치된 포병은 1.5배 이상의 화력을 제공하는 법이다. 게다가 높은 운동에너지를 가진 쇠구슬이 굴러갈 뿐인 통상적인 포탄은 오르막길에서 위력이 감소된다.

그러니 다소 화력면에서 부족해도 버틸 수 있을 것이다.

트랑카벨 군은 어이가 없을 정도로 총병 비율이 높았다. 한 번이라도 돌파 당하면 어쩌려고 총병 비율이 저렇게 높은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총병간 사격에서도 화력이 부족하지만, 울타리 등 적절한 엄폐물을 설치하면 충분히 대응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자 그쪽 당겨!”

“떨어지지 않게 조심해! 위험하다!”

저 멀리서 포병들이 대포들을 밀어 올리고 있었다. 아넥시 전투에서 잃어버린 포대가 무척 아깝지만··· 다행히 보급부대 문제로 다수의 화포들이 후방에 머물던 것이 전화위복이 되었다.

그래서 그럭저럭 포병대의 구색은 갖출 수 있었던 것이다.

“시간 내로 끝낼 수 있겠나? 인력 지원이 필요한가?”

“옛, 라모리 대장님. 포병대 쪽 용병들이 부근에서 노무자들을 고용해 화약과 포탄을 나르고 있다고 합니다.”

“다행이군. 엄폐물을 설치해야 해서 이쪽도 인력은 부족하니까.”

저쪽은 포술 전문가들을 맡겨주자. 그들이 땅을 다져 포대를 설치할 공간도 만들어 줄 것이다. 전장 어디로도 포각이 잘 나오는 가장 좋은 언덕 위를 그들에게 주었으니.

자, 이렇게 판은 깔아 놓았다.

전략의 기본은 적이 싫어하는 것을 보는 것. 라모리가 평생의 용병 경력을 걸고 장담하는데, 적장은 이 지형과 배치를 보자마자 진저리를 칠 것이다.

이름 모를 적장이 지을 표정을 직접 보고 싶을 정도였다.

절대로, 아무도 공격하기 싫은 방어 준비를 할 테니까.

분명 공격하기 싫을 것이다.

하지만 공격해야만 한다.

그렇게 만들 예정이니까.

“랑시아 성녀나 네부카디 수도원장은 아직 소식이 없나?”

“예··· 아직은 없습니다. 하지만 동쪽에서 여기저기 검은 연기가 오르는 것을 보면···.”

“부지런히 활동하고 있는 모양이군.”

분명 이 일로 자신은 죽도록 욕을 먹겠지. 나름 평생 관리해온 평판이 땅에 떨어질지도 모른다.

무사히 고향 땅을 밟지 못할지도 모른다.

이럴 줄 알았으면 괜히 착한 척이나 하지 말 걸.

하지만 한가지는 분명했다.

선량한 패배자가 되느니, 사악한 승리자가 되는 게 낫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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