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207화 (207/556)

27-5. 신에게 바치는 전쟁

###

“라솔과 손을 잡은 것이 사실이라고? 아니 백작님 제정신인가!”

“목소리가 너무 크십니다, 백작님. 귀가 아프네요. 작게 이야기 하셔도 듣고 있다고요.”

“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소? 선대 드 레뮤즈 백작이나, 우리 드 누아나 라솔에게는 영토를 빼앗긴 원한이 있는 게 아니었소?”

“언제까지나 사사로운 원한에 사로잡혀 행동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니겠나요.”

라몽 드 레뮤즈 백작이 퉁명스럽게 말하자, 가스텔 드 누아 백작은 어이가 없어 말이 안 나온다는 표정을 짓는다.

두 백작은 과거의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두 가문의 접경지대 숲에서 측근들만 데리고 비밀리에 만나고 있었다.

“그렇다면 오랜 이웃으로서 한 마디 정도는 미리 해줄 수 있지 않았소이까?”

“라솔의 개자식들은 아무런 사전 예고도 없이 찾아왔습니다! 어떻게 미리 말씀을 드린단 말씀이죠?”

갑자기 라몽이 격하게 반응했다. 가스텔이 놀랄 정도였다.

평소처럼 상태가 좋지만은 않아 보이는, 창백한 얼굴 한 가운데의 충혈된 눈동자와 그 주위가 파르르 떨리는 것은 분노 때문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눈동자에는 곧 후회의 빛이 어린다. 마치 스스로의 흥분을 탓하는 듯한 느낌이다.

“...애초에 가스텔 백작님이랑 나는 전쟁 중이란 말이죠. 이것 저것 다 공유할 수는 없는 입장입니다.”

“뭐 그건 맞는 말이긴 하지만···. 평화롭지 않은 세상이 개탄스럽구만.”

“이놈의 세상은 평화가 싫은 모양이지만 말이죠.”

“흐으으음.”

가스텔 백작 역시 태도를 누그러뜨린다. 자신도 너무 흥분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이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괴짜, 이웃의 대영주는 평소에도 이해가 안되는 행동을 많이 하곤 했으니까.

적어도 이렇게 자신을 불러냈다는 것은 결정적으로 적대할 생각은 없다는 것이겠지. 그리고 아마··· 본인도 고민이 많을 것이다.

의심할 바 없이, 가스텔은 확신하고 있었다. 그래서 과도한 억측을 말하는 것을 참는다.

분명히, 라몽 백작은 자신보다도 라솔을 더 싫어한다.

···뭐 그가 좋아하는 상대가 있기야 하겠느냐마는.

“그래서 이제는 어쩔 셈인가. 전처럼 드 누아를 ‘침공’할 셈이요?”

“...이번에는 안 합니다.”

의외로 라몽은 선선히 대답한다.

“그럼 이번에는 ‘진짜 침공’이라도 하려고 하시나. 설마··· 트랑카벨 가문을 칠 생각인가!”

“....”

“트랑카벨의 군대나 콘도티에레가 카르카냑을 떠나 있는 건 맞지. 하지만 그렇다고 무주공산 상황은 아니라오. 결코 쉽지 않을 거로 생각하는 게 좋소이다.”

“...그 정도야 알고 있습니다.”

화를 낸다기보다는 마치 심통이 난 듯한, 시무룩한 말투로 라몽이 대답했다. 가스텔은 대화를 할수록 어리둥절함을 숨기기 힘들었다.

라몽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는 사람은 절대 아니다. 하지만 오래 알아온 자신은 이 오랜 동맹 가문의 주인의 태도를 알아차리는 데 이골이 났다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은 유난히 그걸 인지하기가 어렵다.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대체 무슨 의도인지, 가스텔은 판단하기 어려웠다.

“오늘은 시간이 없네요. 오후에는 라솔 왕의 동생인가 하는 자를 만나기로 한지라.”

“그렇군. 시간을 내 줘서 감사했소이다. 가시기 전에 한 가지만 더 묻고 싶군.”

“뭡니까?”

“대체··· 라솔 녀석들과 무슨 일이 있었던 거요?”

가스텔의 질문을 듣자, 라몽의 얼굴이 형편없이 찌그러진다. 정말로 싫은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별일은 없어요.”

“별일이 없다니··· 라몽 백작.”

“역겨운 놈들이 역겨운 짓을 하는 게 별일인가요? 그냥 평소대로지.”

라몽의 말투는 평소로 돌아와 있었다. 세상을 전부 혐오한다는 듯한 말투.

“아무튼 라솔 놈들이든, 우리든 누아의 땅을 공격할 생각은 없으니 그렇게 알고 계시죠!”

“그거 고맙구려.”

‘선전포고’할 때와는 정 반대의 말을 던진 라몽은, 잠시 말을 할까 말까 머뭇거리더니 몸을 휙 돌려 가버린다. 휘청거리는 것이, 안정적이지 못한 걸음이다.

가스텔은 마음속으로 짧게 기도했다. 드 누아와 블랑독을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저 대화에 서툰 젊은 백작을 위해서도 말이다.

###

이스키비르 강의 북쪽 강변에는 오렌시아 기사단, 정확히는 ‘오렌시아의 영원한 샘을 수호하는 겸허한 신성 기사단’의 막사들이 하나 둘 늘어서기 시작했다.

이미 어둑해진 지금도 거룻배들이 쉴 새 없이 오가며 병력과 각종 물자를 부려놓고 있었다. 더 늦어지면 어두워서 위험해지기 때문에 최대한 서두르는 모습이 보인다.

여기저기 밤을 위한 화톳불이 켜지고, 눈물을 흘리는 여인의 형상을 그린 깃발들이 펄럭인다.

“도강작전은 잘 되어가고 있나?”

“오늘까지 1200명의 형제가 강을 건넜고, 타라트라바의 용병 500명도 무사히 넘어왔습니다.”

“용병이 아닐세. 영원의 샘을 지키기로 서원한 타라트라바 출신의 ‘의용병’들이네.”

“네, 의용병이 맞습니다. 제가 잠시 실수했습니다, 에드메르 단장.”

오렌시아 기사단을 지휘하는 에드메르 산타로 데 카르도라는 기사단 간부들로부터 보고를 받고 있었다.

“다행히 생각보다 빠르군.”

“그렇습니다만, 아직 중요한 군마가 80필 밖에 넘어오지 못했습니다. 군수물자도 아직 갈 길이 멀었습니다.”

“아직 큰 배를 구하지 못했나 보군.”

“수소문해보니 최근 이스키비르 강의 큰 배들이 전부 하류 쪽으로 이동했다고 합니다.”

“흐음···.”

에드메르에게 보고하는 기사단 재무관인 젊은 기사, 위그나시오 올리메 데 트라카제토는 짙은 눈썹을 찌푸리며 보고를 이어간다.

“아무래도 엘랑키아 인들이 저희를 환영하지는 않는 모양입니다.”

“선대에 전쟁을 한 원한이 있으니까.”

“드 레뮤즈 백작가에서 파견온 드레피니란 자도, 말은 뭐든 해 줄 것 같으면서도 구체적으로 요구하면 난색을 표하며 자꾸 미루다 마지못해 들어줄 뿐입니다.”

국경을 맞댄 두 나라의 사이가 좋을리야 없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싫어할 줄은 몰랐다.

그렇다 해도 지금은 전쟁을 서두르는 중이다. 눈치가 훤하게 보이는 태업 따위로 중요한 시간을 날려버릴 수는 없었다.

“그러고보니, 에드메르 단장께서는 오늘 라몽 드 레뮤즈 백작과 만나고 오시지 않았습니까?”

“그랬네.”

“백작은··· 어땠습니까?”

“다른 엘랑키아 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지. 노골적으로 싫어하더군.”

“...이래서 전쟁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하하하핫!”

위그나시오가 눈살을 찌푸리자, 에드메르가 웃음을 터뜨렸다.

“라몽 백작은 정세를 잘 읽고 이득이 되는 점을 잘 아는 똑똑한 남자더군. 본심을 숨길 줄은 모르긴 하지만.”

“그럼 다른 마음을 먹었다는 말씀이 아니신지요.”

“우리 기사단이나 라솔 출신들이 죽도록 싫기는 하지만, 진정 이득이 되는 쪽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는 자일세.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했으니까.”

“흐음··· 단장님의 판단을 따르겠습니다.”

불안을 완전히 지울 수 없다는듯, 위그나시오 재무관이 고민하는 듯 했다. 하지만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았다.

오렌시아 기사단의 단장 에드메르 산타로 데 카르도라는 라솔 국왕의 친동생이다.

게다가, 라솔의 가신이지만 반 독립상태인 타라트라바 공작의 장인이기도 하다.

최근 타라트라바 공작위의 계승을 두고, 라솔과 타라트라바 사이에 심각한 대립이 있었다. 자칫하면 일촉즉발의 내전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이를 봉합한 것이 다름아닌 에드메르였다.

군신관계이기는 해도 사실상 타국이라 해야 하는 라솔과 타라트라바는 서로의 계승권이 뒤섞이는 것을 두려워했다.

결혼을 통해 하나의 왕권으로 맺어지기는 커녕, 새로운 내전의 실마리가 되곤 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종교 기사단에 투신했기에 세속적인 계승권은 모두 포기한 에드메르가 젊은시절에 낳은 딸을 통한 결혼동맹이 이를 해결했다.

서로의 계승권은 완전히 독립된 상태로 단단한 결혼 동맹은 성립되었다.

내전의 위험을 피하고 비로소 군사력을 외부로 돌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게 조국을 안정화시킨 에드메르는 자신의 형님의 왕가와, 딸의 공작가에 한 가지 권위를 더하고 싶었다.

바로 종교적 권위.

현재 주신 교단에 가장 큰 위협이 되고있는 블랑독의 이단을 토벌해 ‘교단의 수호자’ 칭호를 얻는 것이다.

이는 분명히 그 둘의 통치권을 공고히 할 것이 분명했다. 이를 위해 라솔 왕국을 뒤에 두고 라몽 백작에게 접근한 것이다.

어차피 블랑독 땅에 대한 영토 욕심은 없었으니까. 영토는 레뮤즈가 전부 차지해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법황이 보낸 성전군도 토벌하지 못한 이단을 토벌했다는 주신의 영광을 라솔이 가져갈 뿐.

“에드메르 단장님, 하지만 그래서는 라솔 왕국이 얻는 게 너무 적지 않습니까?”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는가?”

“물론, 영원한 샘을 지키기로 맹세한 입장에서 세속적인 보상이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전쟁 비용이 라솔 국왕 폐하의 금고에서 나온다고 들었습니다만.”

“그건 그렇지.”

블랑독 이단 토벌을 위해 나서는 병력은 단순히 오렌시아 기사단 뿐은 아니다.

라솔 왕국이 많은 군자금을 댈 뿐더러, 향후 지원군을 파견하기로 약조했고.

타라트라바 공국 역시 비공식적으로 장인 어른이 이끄는 원정에 천명이 넘는 용병대를 파견했다.

명목상 성전에 지원한 의용병이지만, 그 비용을 대는 것은 타라트라바 공작이다.

그런데 정말로 법황의 인정과 종교적 권위 외에 얻는 것이 없다는 것은··· 재무관인 위그나시오로서는 좀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역시 다른 밀약이 있지는 않은가, 그걸 묻고 싶은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정말일세. 자칫하면 엘랑키아의 심기를 거스를 수도 있고. 영토는 정당한 주인인 라몽 드 레뮤즈 백작이 모두 가져갈 예정이네.”

“알겠습니다, 단장님.”

에드메르는 이 젊은 재무관에게 사실은 이야기를 좀 더 해줄까 하다가 거기서 멈추기로 했다. 최소한 몇 년 후 미래의 일, 확실하지도 않은 않은 점을 이야기 할 필요는 없다 판단했다.

사실 에드메르 자신도 위그나시오와 비슷한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형님인 국왕에게 직접 물어보기도 했다.

친동생인 자신을 보내기 전, ‘가장 신실한 수호자’ 리오고 국왕은 많은 이야기를 했다. 그 중에는 정말 놀랄만한 심모원려가 포함되어 있었다.

‘동생아, 내가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원정에 돈을 쓴다고 생각하느냐?’

최근 이어진 격무로 많이 쇠약해졌으나, 여전히 정정한 리오고는 동생에게 가르치듯 말을 시작했다.

‘드 레뮤즈의 애송이에게 블랑독 전체를 넘긴다는 약속에는 어김이 없다. 엘랑키아의 계승법으로도 그가 가지는 게 마땅한 영토이고 주변에서 개입하기도 힘들겠지.’

그러면서, 동생인 자신도 다소 소름이 돋는 음모가의 미소를 지었다.

왕가의 형제는 종종 화목하지 못하다. 아니, 화목했다고 해도 계승권 다툼으로 인해 원수보다 심한 관계가 되는 일도 심하다.

어쩌면 리오고와 에드메르의 관계도 그렇게 되지 말란 법은 없었다.

하지만 에드메르는 일찌감치 자신이 형을 당해낼 수 없음을 확신했다.

어린 나이에 왕위를 계승받아 순식간에 엉망진창인 라솔 왕실을 음모라는 무기로 정리한 형을 바로 옆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형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아님을 끊임없이 보였다.

형의 지시에 따라 적절한 공신의 딸과 결혼하고, 종교 기사단에 적을 두어 왕가에서 나가 계승권을 포기했다. 그 후에야 형의 미소를 편한 마음으로 지켜볼 수 있었다.

그러니 이제부터 그의 형이 이야기 하려는 이야기는 자신이 상상할 수 있는 영역을 한참 벗어난 것이리라.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