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4. 신에게 바치는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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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시발 뭐라고?”
라고 말하면서 아차 했다. 가능하면 남들, 특히 아쥬흐나 아실 앞에서는 욕을 안하려고 노력했는데 말이다.
아니 근데 시발··· 너무 놀라가지고 나도 모르게 욕이 입 밖으로 나오고 말았다.
으으, 일부러 내가 알아야 할 급한 정보라 판단해서 들고온 첼레스티나에게도 미안하네.
다행히도, 첼레스티나는 그다지 마음에 두지는 않는 것 같았다. 찬찬히 다시 한번 내용을 읽어준다.
“네에, 드 레뮤즈에서 새로운 성전군이 조직되고 있다고 해요! 그리고 얼마 전부터 라솔에서 온 사절이 라몽 백작을 만나고 다녔다고 하고요오···.”
“드 누아의 가스텔 백작님이 보내신 전령이지?”
“네에, 맞아요, 콘도티에레.”
“왜 가만히 있다가 이제와서···. 그 망할 백작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남부를 침공한다 어쩐다 호들갑을 떨긴 했지만, 결국은 이번 전쟁 내내 중립을 지켜주었던 라몽 백작이 아닌가. 분명 엘랑키아 정부의 압박이 있었을 텐데.
"그런데 방금 라솔이라고 하셨죠?"
"네에, 아쥬흐 양."
"의외네요, 라몽 백작님이 라솔 왕국이랑 손을 잡다니."
아쥬흐가 의아해한다.
라솔이라... 나나 첼레스티나는 외부 사람이라지만, 엘랑키아의 기사라면 라솔이라는 이름을 듣고 유쾌해 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엘랑키아 왕국이 겪은 가장 최근의 대패가 라솔을 상대로 한 전쟁이었다. 게다가 엘랑키아와 라솔은 수백 년 동안 라이벌이었다. 아마 앞으로도 그렇겠지.
하물며 은근히 가문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데다가 원래 사람을 싫어하는 라몽 드 레뮤즈 백작이... 라솔과 손을 잡는다니 상상이 잘 가지 않는 것이다.
아닌가, 그냥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싫다 보면 오히려 다른 조건은 완화되는 건가.
설마 하면서도 나도 참 별 생각을 다 하게 되네.
"아쥬흐 의무대장님이 생각하시기에는 라몽 드 레뮤즈 백작은 어떤 사람인가요?"
"흐음... 글쎄요."
아쥬흐가 사람을 보는 눈은 놀랍도록 객관적이다. 그녀의 성격상 너무 좋거나 나쁜 평가는 피하는 경향이 있지만 말이다.
"라몽 백작은... 좀 알기가 힘든 사람이네요...."
아쥬흐도 잘 모르는 게 있구나.
"예전에 가스텔 드 누아 백작님과 함께, 카르카냑에 찾아왔던 것 기억나세요?"
"아... 편집증 환자처럼 굴었었죠! 하인 중 한명을 자기 옷 입혀서는 버려두고 도망치질 않나...."
기억났다. 솔직히 그때는 폐급 인간쓰레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 시종을 포섭해서 정보원으로 쓰려고 했는데요. 나중에 저희 측 정보원... 은 아니고 상인 분이 찾아갔을 때, 저희가 드린 돈을 돌려주셨다고 해요."
"...어? 그게 흔한 일인가요?"
"돈을 돌려주기까지 하는 건, 처음이었어요. 양심에 걸려서 주군을 배신하지 못하겠다고 하더라고요."
자길 버리고 갔던 사람인데... 통 이해하기가 어렵네.
"그래서 그 후에 조사를 좀 해봤는데, 역시 어떤 사람인지 종잡을 수 없더라고요."
엘랑키아 남부의 영주, 드 레뮤즈 가문은 풍요로운 영토와 많은 가신을 가진 말 그대로의 대귀족이라 한다.
그런데 현 가주인 라몽 백작은 까다로운 성격과 복지부동에 가까운 소극적 태도라는 평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변 영주들과의 사이는 나쁘지 않았다 한다. 가신들의 충성도 흔들림이 없었고 말이다.
소극적으로 행동하는 대신에, 주변에도 그다지 간섭하지 않는다. 덕분에 봉신 가문들은 징병이나 공출의 부담 없이 자유롭게 영지와 가문의 이익을 추구하는 모양이다.
세금을 걷기는 하나 평범한 봉신의 의무 수준. 지난 성전군에의 참여를 사실상 거부한 것을 보면 엘랑키아 왕실의 명령조차 호락호락 따르지 않는다.
엘랑키아의 종주권을 거부까지 하지는 않지만 따르지도 않는다. 거기에 힘과 재력을 기르며 가신들의 자율권을 보장한다.
음... 이거 뭔가 트랑카벨 가문이랑 좀 비슷한 방침인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드 레뮤즈 가문은 반 독립적인 남부의 작은 왕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본인이 원치 않는 일이라면 누가 시켜도 절대로 따르지 않겠지.
"그리고 이번에는 전쟁 준비를 한다는 징후를 전혀... 알지 못했어요."
"그건 왜 그런가요?"
"음... 대규모 출정을 준비하는 물류의 이동을 전혀 보고받지 못했거든요...."
"네? 그럼 못해도 수천 이상의 병력을 출병시키는데 필요한 물자를 쌓아놓고 있었다... 이 말인가요?"
"...그렇게 되겠네요. 아니면 전부터 조금씩 준비를 했었다거나."
아쥬흐는 과거에도 상인들 사이의 물류 이동을 분석해 성전군에 대해 제법 자세히 예측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필요한 물건을 원래 가지고 있던' 상대는 그런 방식을 전혀 쓸 수 없다.
트랑카벨 가문조차 전쟁 전에 물건을 그렇게 많이 사들였는데, 라몽 백작은 대체 뭔 생각으로 그걸 집구석에 쌓아놓고 살았냐는 거다.
결국 전쟁을 하게 될 것은 예상하고 물자를 모아놓고 있었다?
진짜 출전하려는 것이 맞나? 그냥 허세부리는 것은 아닌가?
허세가 아니라면... 진작부터 빈틈 없는 전쟁 준비를 해 놓았다는 것이겠다. 정말로 자급자족이 가능한 작은 왕국이라고 해야 할지.
“대체 라몽 백작님은 무슨 생각이실까요···.”
항상 여유있는 편인 아쥬흐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뺨을 쓰다듬었다.
나는 잠깐 지도를 살핀다. 그리고 눈을 감고 고민을 한다.
내가 라몽 백작이라면 무슨 생각을 할까.
나는 변덕스럽다!
블랑독을 괴롭히고 싶다!
나는 트랑카벨이 밉다!
···눈을 슬쩍 떴다가 아쥬흐와 눈이 마주치자,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갸웃하는 그녀 탓에 완벽한 빙의는 실패했지만.
“제가 블랑독을 공격하고 트랑카벨 가문을 미워한다는 가정을 해보았습니다.”
“네에? 그럼 안 돼요, 콘도티에레!”
“아니 그냥 가정이야, 가정.”
“그래도 트랑카벨을 미워하시면 어떡해요?”
“아니 첼레스티나, 그냥 가정이라니까.”
호들갑떠는 첼레스티나를 진정시키며 아쥬흐를 보니, 어쩐지 아쥬흐의 표정도 썩 좋지 않다.
아니 또 첼레스티나가 옳고 내 잘못인가?
“음, 흠··· 제가 라몽 백작이고, 블랑독을 공격하는 입장이라 가정해보았습니다.”
첼레스티나는 뭐가 불만인지 볼이 퉁퉁 부어있지만, 다행히 더 방해하지는 않는다. 아쥬흐 역시 진지한 태도로 듣고있다.
최근 드 레뮤즈 가문이 나서 블랑독에 대한 종주권을 요구한 적 없다.
반대로 트랑카벨을 위시한 블랑독의 여러 가문들도 드 레뮤즈의 종주권을 거부한 적 없다.
때문에 엘랑키아 초대 국왕이 드 레뮤즈에 부여한 권한, 블랑독 전체를 권역으로 가진다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라몽 백작이 사실은 엄청난 야심가이고, 단순히 상징적 종주권만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게다가 그걸 전혀 밖으로 표출하지 않고 조용히 감춘 채로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면?
그렇다면 몇 가지가 설명된다.
우선 국왕의 소집에도 제대로 응하지 않고, 대놓고 태업하며 블랑독 침공을 피한 이유이다.
만약 국왕의 소집에 응해 성전군에 참여했다면 그건 엘랑키아 왕실에 힘을 실어주는 것이다.
성전에서 승리하고 블랑독을 점령했다면··· 논공행상 과정에서 나름의 몫을 챙기기야 하겠지만 블랑독 자체는 더 이상 드 레뮤즈의 권역이 아니게 되리라.
아마도 국왕의 직할령이 되어, 성전에 참여한 공신이나 그 자손들이 나눠가지게 되겠지.
혹은 별도의 백작령을 설치하여 국왕과 긴말한 관계인 사람이 새롭게 통치자가 될 수도 있겠다.
어찌됐든, 그게 드 레뮤즈 백작가에 이득이 되는지는 잘 모르겠다는 것이고.
“저도 그래서 레뮤즈가 지금까지 중립을 지켰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왜 이제와서 움직이는 걸까요?”
아쥬흐의 의문 또한 타당하다.
그래서 이번처럼 외부 군대의 힘을 빌리는 대신, 자신이 주도적으로 행동하는 경우를 따져보았다.
그런데 이게 좀 딱딱 맞아 떨어지는 점이 없지 않다.
“드 레뮤즈 백작은 자기 권역인 블랑독에서 활동하는 것이니, 오히려 블랑독에 대해 권리를 가지지 않은 외국 군대를 들이는 편이 나을 수 있습니다.”
“아···.”
“용병처럼요.”
첼레스티나는 어리둥절하다는 표정이지만, 역시 아쥬흐는 단번에 알아듣는다.
블랑독과 관련된 세력과 함께한다면, 좋든 싫든 권리를 나누어야 한다.
하지만 아예 외국에서 군대를 끌어온다면?
교섭이나 계약 관계가 신경쓰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엘랑키아 왕국과 적대할 생각이 아니라면 영토에 대한 권리는 보장받기 어렵다.
가령, 나 역시도 외국 출신 용병이다. 트랑카벨 군을 이끌고 승리한다고 한들 내가 카르카냑의 영주 자리를 요구할 수 없는 것과 같다고 할까?
“현재 라솔 국왕은 독실한 신도로, 주신교의 수호자 자리를 간절히 원하고 있다 합니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요?”
아쥬흐의 목소리는 조금 차갑다. 겨우 종교를 위해서 엄청난 비용과 자원, 그리고 병사들의 목숨을 바칠 생각이냐는 것이겠지.
“라솔은 그림자에 의한 재앙을 많이 겪었기에 종교적인 분위기가 엘랑키아보다 훨씬 강합니다. 지방분권 으로 인한 세속 왕권이 불안한 점도 있고요.”
“...오히려 실질적인 영토 보상이 없는 성전에 참여했기에 그 공로를 인정받을 수 있다?”
“정확합니다.”
“라솔 왕국군이··· 블랑독에 개입할 거로 생각하시는 건가요?”
“그렇진 않을 겁니다. 엘랑키아 왕실이 가만 안 있을테니까요. 아마 다른 우회적 지원을 하겠지요. 종교 기사단이라거나.”
혹은 용병일 수도 있고.
그럼 이걸 어찌해야 한담.
“아쥬흐 양, 혹시 드 레뮤즈 가문이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얼마나 될까요?”
내 질문에, 아쥬흐는 잠시 머리속으로 계산하는 것 같더니 금방 대답을 내놓는다.
“직할령과 가신들의 군대를 합치면 약 5천에서 7천 명 정도 될거예요. 하지만 드 레뮤즈는 부유한 곳이고··· 마음을 먹으면 1만 명 이상도 모을 수 있겠죠.”
나도 그 정도로 생각했다. 엘랑키아가 넓고 대귀족이 많다지만, 자력으로 이정도 세력을 모을 수 있는 귀족은 왕국 전체에도 몇 없다.
“그리고 아마··· 라솔에서 보낸 병력이 추가되겠네요. 몇 명이나 될지는 정보를 최대한 모아볼게요.”
“감사합니다, 아쥬흐 양.”
“아니에요. 미리 예상하지 못해서 미안해요, 콘도티에레 에트.”
아쥬흐는 굳이 자신이 사과하지 않아도 될 일을 사과한다.
아무래도 이대로 주력군을 이끌고 타비뇽으로 진격하는 것은 포기해야겠다. 트랑카벨 군의 주력을 이끌고 카르카냑에서 멀어지는 것은 위험하다.
싸우지 않고 기동전만으로 적을 제압한다··· 같은 건 이제 힘들겠네.
그렇다 해도 너무 서두르는 것은 피해야 한다. 얼마나 많은 사령관들이 ‘단기결전’의 달콤한 유혹에 빠져 신세와 군대를 말아먹었던가.
나도 그 중의 한 명이 될 수야 없지.
문득 생각나는 질문이 있었다.
“라몽 드 레뮤즈 백작과 제가 싸우면··· 이길 수 있을까요?”
“당연하죠.
“당연히 이기죠!”
두 미녀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곧바로 대답한다. 참 고마운 일이다. 그녀들이 지지를 해 주기에, 나는 마음 놓고 전장을 누빌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건 그렇고, 라몽 백작의 의중을 잘 모르겠다는 사실이 자꾸 걸린다.
왠지 까다로울 것 같고···. 상성이 잘 안 맞는 상대와의 싸움은 피곤하니까.
아직 정보가 부족하기는 하지만, 드 레뮤즈 백작군은 적으로 간주하고 전략을 짜야겠다.
레뮤즈 성이 블랑독에서 워낙 가깝기에, 최고 속도로 행군한다면 트랑카벨의 심장부인 카르카냑이나 벨모제까지는 순식간이다.
아마 지금 병력을 되돌려 돌아간다고 해도 대응이 힘들겠지.
하지만 카르카냑을 치려면 로데브 강 본류를 건너야 한다.
그리고 벨모제는 심혈을 기울인 농성전 준비가 완료된 요새 도시다.
트랑카벨의 심장부에 적군을 들여 놓는 것 자체가 부담스럽기는 하다. 하지만 어느 쪽이나 쉽게 함락되지는 않을 것이다.
예비대를 카르카냑에 집결시키고 대응을 준비하자.
아직은 법황의 성전군이 우선이다. 적의 두 세력 사이에 끼이느니, 이쪽부터 끝장을 내고 다음을 생각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