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205화 (205/556)

27-3. 신에게 바치는 전쟁

라마엘 드 레도쿠르는 한쪽 무릎을 꿇은 자세 그대로 자신의 주군인 라몽 드 레뮤즈 백작에게 말을 시작한다.

“로그포르의··· 백성들과 아이들은 저희 자작가의 백성들은 아닙니다. 하지만 기사로서, 드 레뮤즈의 가신으로서 지켜야 할 대상이었습니다.”

이제 라마엘의 눈물이 줄기가 되어 쏟아져 내린다. 깍듯하게 수그린 자세에서, 격정을 이기지 못해 주먹을 쥔 손이 가슴 앞으로 나온다.

“하지만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학살한, 참혹하게 학살한 자들이 드 레뮤즈의 영토를 밟게 한다는 것이···.”

라마엘이 옷깃으로 눈물을 거칠게 닦는다. 라몽은 무표정한 얼굴로 아무 말도 없다. 그저 젊은 기사의 분노를 바라보기만 한다.

“그건 정당하지 못합니다. 게다가, 그들은 라솔 왕국의 첨병! 분명히 엘랑키아 왕국의 적이 될 자들입니다!”

“그만 두어라 어리석은 녀석! 너 따위가 신경 쓸 부분이 아니다!”

“아, 아버님! 여기 계셨습니까···.”

라몽 대신 고함을 친 것은 세샤르 드 레도쿠르, 라마엘의 아버지인 현 드 레도쿠르 자작이었다.

“그렇다! 주군께서 친히 출병하시는데, 기사로서 함께 따라나서야 도리가 아니겠느냐!”

“...그렇지요.”

“그런데 네 녀석은 대체 무슨 짓이냐. 출병으로 바쁜 이 와중에 무슨 불충인 것이냐!”

“저 역시 주군께 충성을 다 하러 온 것입니다, 아버님!”

“시끄럽다! 당장 물러나거라!”

세샤르 자작은 무례를 저지르는 아들에게 불처럼 화를 낸다. 아들도 물러서지 않고 맞선다.

“세샤르 자작, 괜찮네.”

라몽이 세샤르의 팔에 손을 얹어 진정시킨다.

주군인 라몽 백작이 화를 내기 전에 아들을 물러나게 하려던 의도였던 세샤르 자작은 조금 놀랐다.

라몽 백작은 화가 많은 사람이다. 그 기준을 잘 모르겠다는 점에서 측근들의 속을 썩이는 사람이기도 했다.

지금도 당장이라도 불호령이 떨어지고, 아들인 라마엘의 처벌을 명령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다. 그래서 자신이 먼저 나섰던 것인데···.

오히려 라몽 백작의 태도는 대단히 냉정하고, 평소보다도 침착해보인다.

“라마엘 경, 그래서 어쩌자는 건가. 똑같이 복수하자는 건가?”

“그··· 그건···.”

“이스키비르 강을 건너, 라솔의 백성들을 불태우고 온다면 만족하겠나? 귀관은 그러고 싶다는 것인지 궁금하군. 내 허락이 필요한가?”

주군의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에, 라마엘은 당황한다.

“그건 아닙니다! 하오나···.”

“똑같이 돌려준다 해도, 무엇 하나 해결되지 않네. 백성들 위에 군림하는 자라면 반드시 알아야 하는 일이지.”

“큭··· 하지만 로그포르의 백성들은···.”

“비통하고 괴로운가? 하지만 통치자라면 심장이 아니라 머리로 생각해야 하네. 더 이상의 어리석은 행동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니!”

마지막 말을 하면서 라몽은 목소리를 높였으나, 여전히 침착하고 이성적이다. 주변에서 소름이 돋을 정도로 말이다.

“이제 물러가게. 다음에 또 이야기 할 기회가 있겠지.”

축객령을 받은 라마엘은 시종들에게 팔을 붙들려 흐느끼며 물러간다.

이번에는 라마엘도 저항하지 않는다. 시종들도 라마엘을 함부로 대하지는 않는다.

하급 귀족 출신들이 많은 시종들에 비해 자작가의 계승자의 계위가 높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의 주장에 공감하는 바가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슴 깊이 고통스러워하는 젊은 기사에게 동정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죄송합니다, 백작님. 제 어리석은 자식 놈 때문에···.”

“아니오. 때로는 열정은 기사의 보물이 되기도 하니, 쯧.”

세샤르 자작이 어쩔 줄 몰라하며 사과하자, 라몽은 사과를 받아들이는 듯 하면서도 혀를 찬다. 무척 심기가 불편한 모양이다라고 주변 귀족들은 몸을 사린다.

“하지만, 라마엘 경은 라솔에서 온 기사들 근처에는 가지 않도록 하는 게 좋겠소. 혹시 무슨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

“명심하겠습니다, 백작님.”

“그러고보니 북쪽에서 사절이 온다고 했었지··· 그 안내를 맡겨도 좋겠소이다. 레도쿠르 영지는 블랑독에 걸쳐 있으니···.”

“트랑카벨 가문으로 간다는 사절 말이군요. 알겠습니다. 그 일을 맡기도록 시키겠습니다!”

‘그 가문’의 이름이 들리자, 갑자기 기분이 나빠진 듯, 눈가가 꿈틀거렸지만 굳이 말을 하지는 않는다.

그 후, 라몽 백작은 차가운 눈으로 고개를 돌려 탁자 위에 펼쳐진 지도를 내려다본다. 드 레뮤즈의 영토와 블랑독 지방이 그려진 지도이다.

눈대중으로, 자신의 본성인 레뮤즈와 트랑카벨의 본성인 카르카냑의 거리를 살핀다.

그리고 카르카냑과, 아마도 트랑카벨의 주력 군이 싸우고 있을 블랑독 북동부와의 거리를 살핀다.

그냥 보아도 이쪽이 거리가 훨씬 가깝다. 로데브 강을 건너야 하긴 하지만··· 그건 트랑카벨의 주력부대도 마찬가지겠지.

“흠···.”

갑옷 착용이 끝났다. 라몽 드 레뮤즈는 천천히 집무실을 걸어 나간다. 자신의 속마음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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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한 휴식과 식사 후에 라몽 백작이 있는 진영을 방문할 예정이었던 카렐 드 상포리앙은 뜻밖의 보고를 들었다.

자신의 방문을 알리기 위해 보냈던 전령이 완곡한 면담 거절의 뜻을 밝혀왔기 때문이다.

“그러신가··· 라몽 백작께서는 바쁘신 모양이군.”

“현재 군사 관련 업무때문에 백작가의 봉신들을 만나고 계신 모양입니다. 대신 블랑독에 대해 잘 아는 안내인을 보내주신다 하였습니다.”

“오, 그런가. 나중에 배려에 감사하다고 전해야겠군.”

사실 약간 다행스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 자신도 허례허식을 챙기는 대신, 빨리 사절 임무를 마치고 싶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방면에서는 현재 전투가 벌어지고 있지는 않다. 그래서 하루라도 빨리 서둘러야 한다거나 하는 일은 아니다.

그렇더라도··· 자신의 임무는 비공식적으로 서로의 의견을 맞춰보는 사전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결론이 나야 ‘진짜’ 외교적 협의를 할 수 있을 테고.

그래서 오히려 드 레뮤즈 령을 빠르게 지나갈 수 있다면 대환영이다. 또 친선 인사다 오찬이나 하다보면 하루는 그냥 낭비가 될 테니까.

거기다 길을 잘 아는 안내인이라니, 여정을 단축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런데··· 카렐 경, 특이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무슨 일인가?”

“드 레뮤즈 군의 소집 목적말입니다.”

카렐은 측근 기사의 말이 언듯 이해가 가질 않았다. 라몽 드 레뮤즈 백작은 아마도 영지를 떠나지는 않을 것이 분명했다.

국왕의 명령을 받은 에티엔 드 크레이가 그렇게나 설득하려 했지만 실패하지 않았던가.

듣기로는 엘랑키아 정부에서도 은근히 압력을 넣었고, 인근에 영지를 가진 귀족들도 많은 요청을 했다고 한다.

드 레뮤즈 백작가는 엘랑키아 내부에서도 손꼽히는 대귀족이다. 괜히 건국 8대귀족이 아니다. 가문의 격이나 세력이나 비할 상대가 많지 않다.

당연히 소집할 수 있는 병력의 숫자도 어지간한 대귀족의 두세배에 가까웠다.

그런 드 레뮤즈가 성전군에 합류한다면 당연히 큰 도움이 되지 않을 리가 없었다. 혹은, 그런 가문의 참전을 이끌어 낸다면 그것도 큰 공훈이 될 테고.

하지만 결과는 항상 ‘드 레뮤즈, 움직이지 않음’ 이었다.

건너 들은 카렐이 알기로도 굉장히 많은 제안과 탄원이 있었던 것으로 안다. 위협···은 설마. 천하의 라몽 백작을 위협하는 사람이 있었을까?

그러니 이번도 정례 훈련이나, 앞으로 생길 일에 대응하는 병력 소집이 아닐까? 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좀··· 드 레뮤즈 군은 블랑독으로의 진격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뭐? 정말인가?”

“저도 진영을 따라다니는 장사꾼들에게 들은 이야기라··· 앗, 술은 마시지 않았습니다, 백작님.”

“음, 괜찮네. 전투 상황도 아니지 않나. 정보 수집도 중요한 임무니까. 그건 그렇고 진격 예정이란 말인가···.”

카렐은 혼란에 빠졌다. 라몽 백작이? 이제와서 블랑독으로 진격을?

···왜지?

무엇을 얻으려고?

분명 드 레뮤즈 백작가는 부유하고 세력도 큰 가문이지만···.

블랑독 세력을 주도하고 있는 트랑카벨 가문은 부유함이나 세력으로 계산이 불가능할 정도로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다.

아마 드 레뮤즈 단독으로도 1만 명 이상의 병력을 모을 수 있으리라 생각되긴 한다. 단일 가문으로 엄청난 숫자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 두배에 이르는 국왕의 군대가 이미 정면대결에서 패배한 상황이다.

그런데 어째서··· 물론 라몽 백작이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라고는 생각하지만, 그 재능을 군사분야에서 보여준 적은 아직 없다.

“...도무지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군. 라몽 백작은.”

“그럼 역시 한 번 만나보시겠습니까?”

“아니, 그건 아닐세.”

라몽 백작을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한 번 안 만난다고 했는데 찾아온다고 반가워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안다. 오죽하면 사람 자체를 싫어한다는 말까지 있을까.

“그보다, 서두르도록 하지. 전쟁 중인 평원보다는 전쟁 전의 평원을 가로지르는 게 나을 테니.”

“알겠습니다. 그런데··· 안내역을 기다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때, 다른 호위기사가 뭔가를 발견하고 외친다.

“저기 누가 옵니다! 혹시 안내역이 저 분이 아닐까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재빠르게 카렐의 주변을 둘러싸고 언제라도 뽑을 수 있도록 권총에 손을 가져가는 것이 숙련된 호위병답다.

두 명은 앞서 나아가며 이쪽의 신분을 외친다.

“사절 임무를 받고 오신 카렐 드 상포리앙 경의 대열입니다! 그쪽은 누구십니까?”

“라몽 드 레뮤즈 백작님의 명령을 받고 왔습니다!”

다행히도 적은 아니었다. 분위기는 조금 누그러졌으나, 무기에서 손을 떼지는 않는다. 여기는 적지까지는 아니지만, 전쟁중인 지역은 분명했다.

게다가, 때로는 명백한 적 보다 적으로 오인한 아군이 더 무서울 때도 있고.

“반갑습니다. 카렐 드 상포리앙이라 합니다.”

“라마엘 드 레도쿠르입니다. 주군의 명으로 안내역을 맡았습니다.”

“블랑독까지의 잘 부탁드립니다.”

카렐과 라마엘은 말 위에서 서로 인사했다. 전장에서의 인사법이다. 새삼스럽게, 전장에 있음을 느끼게 된다.

“드 레도쿠르 가문은 라몽 백작님의 봉신 가문입니까?”

레도쿠르라는 가문명은 처음 듣기에, 친목도 다질 겸 더 가까이 다가가 대화를 나누려던 카렐은 흠칫 놀랐다. 상대의 얼굴이 너무 안 좋았기 때문이다.

자세히 보니, 건강하게 생긴 귀족 청년이다. 구릿빛 피부와 곧은 허리, 그리고 옷 위로도 알 수 있는 두꺼운 팔뚝은 야전에 익숙한 기사임이 분명했다.

그런데··· 혼이 나간다면 저런 표정일까. 피부나 체형이 건강미를 풍기는 것에 비해서 너무도 어두운 표정이다.

“아버님이신 세샤르 드 레도쿠르 자작님이 라몽 백작님을 섬기고 계십니다.”

“아아, 그렇군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둘은 남쪽으로 향하는 길을 따라가며, 말을 나란히 걷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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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키비르 강 북안. 덜컹, 소리와 함께 거룻배의 바닥 긁히는 소리가 들린다. 첨벙 소리와 함께 완전무장한 기사들이 뱃머리에서 뛰어내린다.

짙은 남색 바탕에, 기도하며 눈물을 흘리는 여인이 그려진 겉옷을 입은 기사 무리이다.

공식 명칭으로, 오렌시아의 영원한 샘을 수호하는 겸허한 신성 기사들.

통칭 오렌시아 기사단의 주력이 공식적으로 드 레뮤즈의 땅을 밟고 있었다.

“어서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물론 일방적은 침략은 아니다. 드 레뮤즈 백작가에서 보낸 안내역에 기다리고 있다는 것만 해도 분명하다.

“에드메르 산타로 데 카르도라 공작님이신지요?”

“그렇소이다.”

라솔 국왕의 친동생이자 오렌시아 기사단의 단장인 에드메르가 대답한다.

그 뒤로는 오렌시아 기사단 소속의 병력이 끝도 없이 도착하고 있었다. 거룻배들이 쉴 새 없이 그다지 폭이 넓지 않은 이스키비르 강을 오가며 기사들을 실어 나른다.

“라몽 드 레뮤즈 백작님께서 오렌시아의 기사님들을 환영하십니다. 오늘 백작님 당신께서는 급한 일이 있으셔서··· 대신 저를 보내셨습니다.”

“바쁘신 와중에도 신경을 써 주셔서 감사하다 전해주시오.”

“저는 라몽 백작님의 신하 중 하나인 드레피니라고 합니다. 여기 백작님께서 보내신 환영의 표시입니다.”

드레피니가 손짓하자, 뒤에 서 있던 호위병이 들고 있던 넓적한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거기에는 포도주와 작게 썰린 빵 조각이 있었다.

포도주와 빵의 제공.

가문의 손님으로 인정한다는 오랜 관습이다. 고대 아란 제국의 풍습으로, 오늘날에는 잊혀져가는.

“...생각지도 못한 환대에 솔직히 놀랐소이다. 오렌시아 기사단과, 라솔 왕국 양자를 대표해서 감사의 인사를 드리오.”

에드메르는 포도주 잔을 들고 빵 한 조각을 집어 먹는다.

“라몽 백작께서는 오렌시아 기사단과 같은 아군을 오랫동안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저 간악한 트랑카벨의 토벌은 가문의 오랜 숙원이니까요···.”

“잘 알겠소.”

“그러니··· 이단 토벌 후에는 잘 부탁드린다고 확인을 부탁드립니다.”

그 말을 하는 드레피니의 표정은 무척이나 불안하고, 또 간사해보인다.

에드메르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조용히 빵을 씹다가, 포도주를 주욱 들이키고 나서 대답한다.

“맹세하오. 우리 오렌시아 기사단은 성전 완수 외에는 관심이 없소이다. 또한 라솔 왕국은 드 레뮤즈 백작가의 적법한 권역을 존중할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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