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2. 신에게 바치는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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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이 쑤시는 것 같았다.
물론 실제로 아픈 것은 아니었다. 과거에 느꼈던 끔찍한 고통이 재현되는 듯한 느낌. 트라우마로 남을 정도로 머리속에 깊게 각인된 고통은 때로는 환상을 유발하기도 하니까.
그러나 ‘환상’이라고 통증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마음의 착각이든, 생각의 착각이든지, 느껴지는 통증 자체는 진짜였다.
가끔 엄습하는 통증은 자신도 모르게 가슴에 손을 얹고 허리가 구부러질 정도로 강렬한 때가 있었다. 때로는 1분 가까이 지속되어 주변 사람들이 놀랄 정도였다.
뭐, 시간이 1년 이상 흐른 지금은 예전의 선명했던 고통에 비하면 흔적 정도지만.
그래도 평소에 존재를 느끼기 어려운 심장이 따끔거리는 듯한 느낌이 들면 자신도 모르게 온 몸에 힘이 들어가고 숨이 가빠지는 것이다.
하지만 카렐 드 상포리앙은 이 가끔씩 찾아오는 상상속의 통증을 저주로만 여기지는 않기로 했다.
오히려 자신의 과거 어리석은 선택에 대한 경계이자 보속으로 여기는 편이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늘 그는, 소수의 호위병과 함께 남쪽으로 향하는 여행중이다.
약 1년 전에는 가문의 병사들을 이끌고 아직 제대로 시작되지도 않은 ‘성전’에 참여하러 갔던 그 길이고.
당시 지휘관은 르므완 드 레스펜스 후작이었다. 카렐의 아버지, 그레비 드 상포리앙은 과거 신세를 진 일이 있었기에 어쩔 수 없이 아들을 파견했던 것이고.
별다른 전략적 목표도 없이 블랑독 북서부를 침공했던 ‘최초의 성전군’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일까.
현재 성전은 격화되어 서로 만 명 단위의 대군이 격돌하고 있다고 한다. 천 명이 조금 넘는 병력으로 쳐들어가서 무슨 일을 할 수 있었을까.
이 기세만 높았던 성전군은 결국, 리니 능선이라는 가파른 비탈에서 충격적인 패배를 당했다.
상포리앙 가문의 가신들도 수십 명 이상이 전사했다. 당시 영지군을 이끌었던 카렐은 심장이 멈췄었고 말이다. 다행히 깨어나긴 했지만··· 그때의 고통은 트라우마로 남아 지금도 간혹 통증을 느끼게 되었고.
끔찍한 경험이었다. 카렐 드 상포리앙 개인에게도, 드 상포리앙 백작가에도 말이다.
죽은 사람도 많으니 전화위복이라는 표현을 쓰기에는 주저가 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 사건은 상포리앙 가문에 일종의 예방책이 되었다.
성전의 선봉에 선 데다가, 후계자까지 죽을 뻔 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때문에 국왕이 소집한 성전군에도 눈치보지 않고 참여하지 않을 수 있었다.
당장이라도 승리할 듯이 기세를 올리던 성전군의 모습이 기억난다.
국왕에 대한 충성심을 증명하고, 주신에 대한 신앙심을 증명할 좋을 기회로 생각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 화려하고도 기세 넘치던 대열에는 카렐의 친구도, 친척도 여럿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카렐 역시 자신들의 대열에 함께하기를 권해왔다. 거절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진심으로 응원하고, 기도했다. 그들이 무사히 살아서 돌아오기를 말이다. 자신이 겪은 것과 같은 참혹한 패배를 피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렇다고 트랑카벨 가문의 예의바른 후계자 소년이나, 그들의 군대를 지휘하던 용병 지휘관의 패배를 바랐던 것도 결코 아니다.
이율배반적인 생각이지만 그게 진심이었다.
오히려··· 그들의 힘을 누구보다 명확하게, ‘몸으로’ 느꼈기에 그랬을 수도 있다. 너희들은 나처럼 당하지는 말아라··· 와 같은 감정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투 종료 소식이 들려왔다.
그 결과는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많은 귀족과 기사, 병사들이 참여했다가 돌아오지 못한 샹다메리 전투의 패전 소식이었으니.
전투 전, 너무 이르게도 승리자의 모습으로 출전했던 많은 기사들이.
전투 후, 너무도 참혹한 패배자의 모습으로 드 상포리앙의 영지를 지나갔다.
몇 명은 부상이 악화되어 고향에 돌아가지도 못하고 묻히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가슴의 고통이 느껴질 때마다 생각한다. 어쩌면 이 고통을 겪은 대가로, 자신은 두 번째 삶의 기회를 얻은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카렐 경, 여기서부터 드 레뮤즈 백작령입니다.”
생각에 빠져있던 카렐에게 호위 기사가 말을 걸었다. 그 호위는 리니 능선 전투에서도 그와 함께했던, 가문의 베테랑 기사이다.
“그래, 레뮤즈의 영지라면 거의 다 왔군. 잠시 쉬어가도록 할까?”
“옛, 카렐 경.”
오늘은 오랜 친구인 에티엔 드 크레이 공작에게 부탁을 받아 비공식 사절 임무를 가지고 가는 길이다.
공식적으로는 부상당해서 포로로 잡혔다는 먼 친척의 처우 개선 협상이 목적이다.
하지만 본 목적은, 트랑카벨 가문과의 접촉이다. 어쩌면 장기적으로 이 성전, 슬픈 일을 끝내는 실마리가 될지도 모른다.
전장은 다른 곳으로 옮겨갔지만 적대 지역을 오가는 것이니 위험할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말렸지만, 카렐은 이 임무를 꼭 하고 싶었다.
언젠가 만났던 트랑카벨의 후계자나, 그 유능했던 용병 지휘관을 다시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도 했고 말이다.
특히 친구 에티엔 공작과 엘랑키아 왕국 수뇌부에서는 그들에 대해 궁금해하던 모양이었다. 아마 지금도 전쟁을 성공적으로 이끌어가고 있다 들었고 말이다.
···솔직히 카렐 자신도 그 두 사람이라면 잘 싸울 것이라 생각하긴 했었다.
하지만 그건 ‘밀리지 않고 끈질기게 버틴다’ 정도의 ‘잘 싸움’ 이었지, 국왕군을 박살내서 귀족 사회를 흔들어 놓을 정도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리고 이제는 아마 성전 자체를 이길 기세이다. 국왕군은 결국 철수했고, 법황의 군세도 이미 크게 한 번 이겼다지 않는가.
카렐 자신도 엘랑키아 귀족의 일원이고, 트랑카벨 가문과는 서로 무기를 겨눈 경험이 있지만···.
내심 응원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고 있었다.
그러니, 자신의 이번 방문이 밑거름이 되면 좋겠다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서로의 생각을 확인하고, 공식적으로 외교적 회담으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카렐이 보기에, 엘랑키아 국왕은 그렇게 자질이 나쁜 군주는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물론 군주를 선택할 수야 없지만, 그런 점을 감안해도 섬길 만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분명 괜찮은 해결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
국왕과 트랑카벨 가문 양쪽을 다 아는 사람으로서, 엘랑키아 귀족의 일원으로서, 이번 일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의무이자 권리라 생각했다.
“카렐 경! 카렐 경!”
아무래도 전장을 지나야 하는지라, 길 확인을 위해 앞서 나갔던 두 명의 호위들이 돌아오고 있었다.
다급해보인다. 무슨 일이지? 드 레뮤즈 백작령은 안전한 상태라고 들었는데! 설마 전투가 근처에서 벌어지고 있나?
카렐과 호위 기사들은 혹시 몰라, 간단한 식사 준비를 멈추고 무기를 잡는다.
“카렐 경! 전방에 드 레뮤즈 가문의 대군이 있습니다!”
“뭐? 정말인가? 남부의 군대, 트랑카벨의 군대가 아닌 것이 확실한가?”
“그렇습니다! 라몽 드 레뮤즈 백작께서 직접 지휘하실 군대라고 합니다.”
“허어···.”
예상하지 못한 일. 카렐은 크게 놀랐다.
라몽 백작은 이번 성전에 소극적이라 하지 않았던가? 에티엔 공작도 국왕의 성전군을 소집할 때, 라몽 백작을 끌어들이고 싶어했으나 실패했었다.
때문에 지금도 사실상 중립을 고수하고 있었다 들었는데···. 이번 임무를 맡고 나서도 영내를 지나가야 하니 예의상 허락을 구했을 때도 특별한 징후는 없었는데.
레뮤즈, 움직이지 않음.
일부 엘랑키아 북부 귀족들은 여기에 분개하곤 했다. 블랑독 문제에 1차적인 책임이 있는 대군주이면서, 어재서 방관만 하냐는 것이었다.
다만 카렐은 조금 다른 것을 느꼈다. 세력은 드 레뮤즈 쪽이 훨씬 크지만, 그래도 같은 위계의 귀족 가문으로서 몇 번 교류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건들면 중립도 안해버리는 수가 있다’
뭐 이런? 정작 본인이 들으면 무슨 생각을 할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드 레뮤즈의 군세는 움직이고 있는가?”
“그건 아닙니다. 아마도 다음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듯, 주둔하고만 있었습니다.”
다행히 일촉즉발의 급박한 전투 상황은 아닌 모양이었다. 뭔가 이유가 있어서 병력을 소집했겠지.
“라몽 백작께서 직접 지휘하신다면 인사를 하러 가야겠군.”
“예, 카렐 경. 지금 출발하시겠습니까?”
“아니 밥은 먹고 가야지 않겠나? 자네들도 와서 잠시 쉬게.”
“아, 감사합니다! 저희가 물 떠오겠습니다.”
배가 고파서는 인사도 제대로 못 할게 분명했다. 군대가 어디로 도망갈 것도 아니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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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작님!”
피를 토하는 듯한 젊은 기사의 고함이, 조용한 레뮤즈 성의 복도를 메아리친다.
“이, 이러지 마십시오 기사님!”
“여기서 들어가시면 안됩니다!”
당황한 듯한 시종들의 목소리가 이어진다. 뭔가 무거운 것이 부딪히는 소리, 그리고 질질 끌리는 듯한 소리도 이어진다.
“백작님,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드 레도쿠르 자작가의 장남, 라마엘 드 레도쿠르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에구구, 더 가시면 안돼요···.”
라몽 드 레뮤즈 백작은 막 갑옷을 입던 차였다. 평균적인 체형에 비해서, 여기저기 투실투실하게 살이 많이 찐 편인 그가 갑옷을 입는 데엔 더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답답하지 않을 정도로 살을 잡아주는 복장을 입고, 그 위해 단 한명을 위해 특별한 실루엣을 한 갑주를 입힌다.
흉갑과 투구 정도만 입는데도 시간이 오래걸린다.
“괜찮다. 들어오라 해라.”
밖에서 계속되는 소란에, 라몽 백작은 무표정한 얼굴로 허락한다.
아니, 사실 이미 거의 들어와 있었다. 열려있는 집무실의 문 밖으로, 무려 세 명의 시종을 질질 끌면서도 들어오는 젊은 기사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 더 가까이 왔으면, 집무실을 지키던 호위 기사들이 무기를 뽑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어찌 됐든, 출전을 앞두고 쓸데없이 피를 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 라몽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인다.
정신이 나간 듯한 표정의 시종들이 기사의 몸을 놔주고, 인사를 한 뒤 물러간다. 이 무례한 민원인, 라마엘 드 레도쿠르는 시종들에게 붙들려 흐트러진 복장을 잠시 바로하고 인사한다.
“레도쿠르 자작가의 장남, 라마엘 드 레도쿠르가 라몽 백작님께 인사드립니다.”
“자네가 누군지는 알고 있네. 무슨 일로 왔지?”
“당치 않은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라몽 백작님, 오렌시아 기사단이 드 레뮤즈의 영토에 들어왔다는 소식 말입니다.”
“그건 사실이네.”
시종에게 갑옷 끈을 조이게 하면서, 라몽은 감정 없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하지만, 백작님! 오렌시아 기사단은, 얼마 전 로그포르를 비롯한 세 마을에서 발생한 학살의 범인입니다!”
“....”
“저, 라마엘 드 레도쿠르는 드 레뮤즈 백작가의 가신입니다. 라몽 백작님께서 명령은 무엇이든 따를 생각입니다. 하지만! 저는 동시에 무장하지 못한 자들을 지키겠다 맹세한 기사이기도 합니다.”
이 청년 기사의 눈가가 젖어가기 시작한다. 목소리에는 울음이 섞이기 시작한다. 꽉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한다.
로그포르에서 보았던 참상이 기억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갑자기 청년 기사가 무릎을 꿇는다. 기사의 갑주가 바닥에 부딪혀 쿵 소리를 낸다.
“기사로서 제 행동, 무례함을 분명 알고 있습니다. 죄값은 달게 받겠습니다. 하지만 제 목숨을 걸고 반드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격정과 눈물에 젖어 빨갛게 된 라마엘의 올려다 보는 눈과, 여전히 얼음장처럼 차갑게 감정 하나 내보이지 않는 라몽의 눈이 마주친다.
자작가의 후계자와 백작.
건장한 기사와 병약한 군주.
둘 사이에는 공통점도 많고 차이점도 많다.
하지만 현재의 태도만큼 판이하게 다른 점은 없으리라.
“좋다. 말해보도록 하라.”
마침내 라몽 백작의 허락이 떨어진다. 라마엘은 숨을 들이쉬더니, 천천히 입을 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