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6. 타는 냄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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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곤 보좌주교의 동생, 저격수 나브리치오 델 로카라소는 화약을 주의깊게 소분하여 종이로 감싸 새롭게 포장하고 있었다.
화약은 수분을 흡수하는 성질이 있다. 때문에 공기중에 오래 방치하면 수분을 흡수해 딱딱하게 굳어 뭉치거나 질이 떨어지고는 했다.
일반적인 총병이라면 상관이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정확한 사격을 위해서는 화약 입자의 크기도 일정해야했기에, 저격수들은 수시로 화약을 체크한다.
적절한 양의 화약을 천칭의 접시 위에 올려놓은 종이 위에 쏟아 놓고, 넘치는 분량을 제거하며 조절한다.
작은 실수로 전혀 다른 사격 결과가 나올 수 있다. 아무리 조심해도 모자라지 않는다.
지난 전투, 아넥시 포위전은 완전한 실패였다. 적 지휘관들을 저격해 조직력을 와해하고 전투력을 약하게 만든다는 목표는 전혀 이루지 못했다.
적 중에 저격수의 존재를 금방 알아채고 대응하는 근대적인 저격 전술을 배운 자가 있었다.
눈치도 빠르고 실력도 좋은 명사수가 적군에도 제법 있었다.
벼락치기로 총병 중에 뽑은 동료들이라, 손발이 잘 맞지 않았다.
변명거리가 없지야 않지만, 그렇다고 나브리치오의 실패가 정당화 될 수는 없었다.
그의 지휘력이 더 뛰어났다면.
혹은 저격 실력이 압도적이라 적이 대응 가능한 범위를 벗어날 정도였다면.
그러면 적이 알고 대응한다 해도 힘으로 찍어 누르고 성벽 위를 제압했을지도 모른다. 스스로를 과대평가한 것이 부끄러웠다.
“나, 나으리! 나브리치오 나으리!”
그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들어보니, 떡진 머리카락에 퀭하니 큰 눈, 그리고 왠지 불성실해보이는 인상의 얼굴이 보인다.
“어? 너··· 그롬콜리?”
“맞습니다 나으리! 역시! 여기 계셨군요, 오길 잘 했네!”
“어떻게 된 거지? 죽은 줄 알았는데.”
“저도 죽는 줄 알았죠! 그런데 어떻게 죽은 척 하면서 북쪽으로 도망칠 수 있었습니다.”
그롬콜리는 지금은 한 명도 남지 않은 벼락치기 저격수 부대의 일원이다. 나브리치오가 평가하기로, 그중에 그나마 가장 실력이 괜찮았고 눈치도 빠른 녀석이었다.
“성전군 소집령을 듣고 다시 온 건가?”
“그렇죠! 혹시 여기로 오면 나으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그랬군.”
“뭐 돈도 이미 받은 데다가, 나으리가 가르쳐 주신 게 또 제법 재밌었으니까요.”
“허어···.”
형 말고는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병영에서 아는 얼굴을 만났기 때문인지. 혹은 이 보기보다 대단히 성실한 동료의 마음 씀씀이 때문인지.
나브리치오는 깊은 감동을 느꼈다.
그의 친형이자 후견인인 페르곤 보좌주교는 현재 아르누아 추기경을 간병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듣기로는 아넥시 전투의 패배로 충격을 받아 드러누웠다고 한다.
추기경 따위는 알 바 아니다. 하지만 형을 실망시킬 수는 없었다.
이번에는 반드시 적장 몇 놈 쯤은 머리에 구멍을 낼 각오를, 실패한다면 전장에서 죽을 각오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든든한 파트너가 등장한 것이다.
“잘 부탁한다.”
“어휴, 제가 부탁드려야죠. 이번에야말로!”
큰 소리로 말한 그롬콜리가 부끄러운 듯 웃는다. 겨우 두 명이지만, 최소한 나브리치오 혼자서 하는 것 보다는 분명 나을 것이다. 사수는 혼자서는 적을 찾기도 힘드니까.
그렇다면, 분명 몇 번 정도는 기회가 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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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목적지에 도착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벌써부터 매캐한 탄내가 공기 중에 짙게 배어있었다. 숨을 깊게 들이쉬면 목 뒤편에 까끌까끌한 느낌이 남는다.
만약 모래를 한 줌 집어 우적우적 씹어먹고 나면 이런 기분이 들지 않을까? 싶은 기분이었다.
“퇫!”
라마엘 드 레도쿠르는 고개를 뻗어 조심스럽게 침을 뱉었다. 혹시라도 침이 자신의 다리나 말 위에 떨어지면 곤란했으니까.
그래도 어딘가 개운해지지 않는 느낌이다. 한동안은 이대로 갈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주군인 드 레뮤즈 백작의 소집에 응해 가병들을 이끌고 복무중인 라마엘 드 레도쿠르 소자작은 지금 10명의 부하들과 함께 이스키비르 강 북안의 어딘가를 이동하고 있었다.
로그포르 마을.
처음 듣는 지명이다. 그의 주군, 라몽 드 레뮤즈 백작은 자신을 직접 불러 혹시 이 마을에 이상이 있는지 확인해보라고 명령했다.
혹시라도 강 건너 라솔 왕국이 불온한 움직임이라도 보이고 있는 것인가 했더니 그것은 아니라고 한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라몽 백작이 직접 시킨 일이다.
그래서 서둘러 소수의 부하들만 이끌고 출발했다. 전투 임무는 아니지만, 일부러 자신을 불러 명령한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주변은 기이할 정도로 적막하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떠드는 소리는 들릴 법 한데.
게다가 아까 발견한 표지판에 의하면, 로그포르 마을은 이제 코 앞이다.
지도에도 생략되곤 하는 마을이라더니, 굽이 진 산길을 몇 개나 돌아야 했다. 평소대로라면, 근처를 지나다가도 마을의 존재를 알지 못하고 지나칠 것 같았다.
타는 냄새가 점점 짙어진다. 설마 불이 났나? 큰 불 특유의 연기나 열기는 느껴지지 않는데.
다시 크게 굽이진 숲 길을 지난다. 마치 표지판처럼, 홀로 높고 곧게 서 있는 나무를 지나자 작은 마을의 전경이 들어온다.
"이건...."
"불을 질렀나봅니다."
마을 전체가 불에 타 있었다.
실화로 인한, 혹은 우발적 방화로 인해 마을의 일부가 탄 것은 아니다. 꼼꼼하게도, 마을 전체의 건물 하나 하나가 완전히 불에 타 있었다.
분명 상당한 정성과 노력을 쏟았으리라.
그 결과물로 마치 검은 칠이라도 된 것 처럼 새카맣게 변한 나무 기둥과 들보가 마치 죽은 동물의 갈비뼈처럼 흉물스러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부분 부분 남아있는 돌벽들 역시, 새카만 그을음으로 덮여있다. 대체 마을에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우욱! 으으윽!"
"아니! 이게 뭐야 시팔!"
"어어어?"
마을 한가운데, 광장이라고 하기도 민망한 작은 공간에 작은 산이 솟아 있었다. 숯처럼 까맣게 탄 시체로 된 산이었다.
그리고 그 주변을 빙 둘러, 큰 나무가지에 뭔가가 줄줄이 매달려 있다.
10여 개.
...아니 명이다.
하나같이 어린아이들이다. 아마도 아이들이 아니었다면 나뭇가지가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부러졌겠지.
"...일단 두 명은 레뮤즈 성으로 돌아가라. 라몽 백작께 한시라도 빨리 보고해야 한다."
"예, 라마엘 경. 로그포르는 습격당해 완전히 불에 타 생존자가 없다 보고하겠습니다."
"그렇게 하게."
"넵! 출발하겠습니다!"
부하 두 명을 전령으로 보내고, 라마엘 드 레도쿠르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숯이 되어 쌓여있는 마을 사람들의 시체도.
그 시체를 보고 기겁한 표정을 짓고 있는 부하들의 모습도.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다.
"우선 유해를 내리자."
"예, 라마엘 경."
라마엘은 조심스럽게 시체를 잡아 내린다. 손이 자기도 모르게 부들부들 떨린다. 목각인형처럼 단단하고 작은 체구를 가진 여자아이의 시체였다.
비슷한 또래의 여자아이가 생각났다. 릴리. 라마엘의 여동생. 릴리 드 레도쿠르.
책을 좋아하고, 항상 호기심이 많아 큰 눈을 이리저리 두리번 거리는 열 살의 비쩍 마른 여자아이.
지금은 레뮤즈 성에서 안전하게 지내고 있지만, 자신은 이리저리 일이 바빠서 자주 만나지 못했다.
지금 그의 품에 안긴, 불에 타다 못해서 탄화된 소녀의 시체는 그의 동생과 비슷한 체구였다.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린다.
믿을 수가 없었다. 이런 어린 아이가... 대체 무슨 짓을 했다고 이렇게 끔찍하게 태워죽였어야 했는지. 아마 이 아이가 온 힘을 다해 못된 짓을 하려고 해도 그런 죄업에 이르지는 못할 것이다.
부모의 말을 듣지 않았는가.
독서에 빠져 바닥에 여분의 책을 마구 늘어 놓았는가.
자신을 예뻐하는 부엌 일꾼들에게 간식을 얻어먹어 정작 배가 불러 저녁은 먹지 못했는가.
한 밤중에 오빠의 갑주에 관심을 가지고 만지다가 쓰러뜨리는 바람에 온 저택의 사람들을 깨웠는가.
엄격한 드 레도쿠르의 가주인 그의 아버지, 세샤르 드 레도쿠르 자작에게 눈물이 쏙 빠지도록 혼났던 '큰 일'이다.
하지만 무엇 하나 소녀가 죽음, 그것도 끔찍한 죽음에 이르러야 할 죄는 하나도 없었다.
믿을 수가 없다. 눈물을 멈출 수도 없다.
"라, 라마엘 경! 여기를 보십시오."
부하의 물음에, 라마엘은 서둘러 소매로 눈가를 닦는다. 여전히 시야는 뿌옇지만.
"살인자들이... 서명을 남겼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가신의 얼굴은 굳어있었다. 드 레도쿠르 가문의 마구간 지기의 장남. 덩치는 크지만 어딘가 행동이 느리고 잘 웃는 그의 심복이자 친구.
그가 그렇게 굳은 얼굴을 한 것은 처음 봤다.
- 오렌시아의 영원한 샘이 끝없이 이 대지를 적시기를.
- 주신과 오렌시아 성녀의 뜻을 받들어 이 땅에 정의를 실현했도다.
- 오렌시의 겸허한 신성 기사들.
부하들이 분노의 고함을 지른다. 예상은 했지만, 이는 이단 심판의 결과였다. 그리고 왠지 이 마을 주민들은 전원 이단으로 판정났나보다.
라마엘은 떨리는 손으로 소녀의 시체를 바닥에 내려놓는다. 시체는 워낙 단단하게 탄화되어 단단하고, 가볍고, 시체 특유의 냄새도 나지 않는다.
심한 화상을 입은 사람을 본 적 있다. 화재 사고가 났을 때였다. 불에 타 검붉게 변한 피부가 떨어져 나가자 빨간 속살이 드러났었다.
하지만 그렇지도 않을 정도로, 뼛속까지 타버린 모양이다. 어찌나 철저하게 태웠는지, 혹시 인간의 형상으로 빚어낸 숯덩이는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일단 무덤을 파자. 힘들겠지만, 부탁한다."
"...저도 이들을 이대로 두고는 못 돌아갑니다."
"그래."
대부분이 한 영지에서 친구처럼 지내고 승마를 배운 친구들이다. 틈만 나면 시끄럽게 떠들던 친구들. 하지만 누구 하나 말을 하지 않는다. 거친 숨소리만 들릴 뿐.
오렌시아 기사단이 누구지? 처음 들어본다.
이단 토벌 전쟁은 멀리 남동쪽 블랑독에서 벌어지는 것이 아니었나? 게다가 드 레뮤즈 영내의 이단자들은 전부 추방했었다.
이해가 가는 것이 하나도 없다.
땅을 파는 기사들의 수는 아홉이지만, 시체의 수는 훨씬 많았다. 안타깝지만 한 명 한 명 무덤을 팔 수는 없다. 게다가... 서로 얽혀서 불탄 까닭으로 분리할 수 없어보이는 시체도 있었다.
말 없이 무덤을 판다. 고된 노동으로 땀과 함께 눈물이 흐른다.
남부로의 진격로를 개척하며 육체 노동에 익숙해져서 다행이었다. 무덤은 순식간에 적절한 깊이에 이르렀다.
탄화된 시체들을 가능한 정중하게 넣고, 흙을 덮는다.
"이런 시팔!"
짧은 묵념 후, 부하 하나가 삽을 집어 던지며 쌍욕을 한다. 레도쿠르 성 집사의 둘째 아들. 자기 앞에서 이렇게 욕을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누구도, 그의 폭거를 나무라지 않는다.
"라마엘 경! 이러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전쟁 중이라 목숨을 잃을 건 각오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그래도 이러면 안되는 것 아니냐고요!"
"...."
침묵한다. 뭐라 할 말이 없다. 순식간에 닳을 대로 닳아버린 신경은 무례를 나무란다는 생각에는 닿지도 못한다.
"이... 이! 이런 꼴을 계속 봐야 하는 겁니까? 무장하지 못한 자들을 수호하겠다 맹세한 게 기사 아닙니까?"
라마엘의 오랜 친구. 하지만 성인이 되고서는 단 한 번도 무례를 저지른 적 없는 청년이기도 하다. 그가 눈물과 함께 분노를 쏟아내고 있었다.
"라몽 백작께서!"
한참을 망설이던 라마엘이 입을 연다.
"이걸 그냥 내버려 두실리 없다.... 우리는 기사로서! 라몽 백작님의 명령을 따르면 된다."
"...예, 라마엘 경."
"로그포르의 광경을 잘 기억해 두자. 우리라도, 잊어서는 안 돼."
"알겠습니다."
드 레도쿠르의 기사들은 조용히 말에 올라 묘비 없는 무덤을 뒤로한다. 그들의 대열은 마치 장례 행렬과도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