ㅅ26-5. 타는 냄새
어전회의의 참여자들은 머리를 싸매기 시작했다.
과연 트랑카벨 가문은, 이런 유능한 용병대장을 어디서 구해 왔을까.
그리고 어떤 조건으로 계약을 맺었을까.
“에트라는 용병대장은 주디칼리에서 활동했다 하고, 트랑카벨 가문의 주요 상업 무대도 주디칼리가 아니었습니까?”
“그럼 주디칼리에서의 업무 중 만났을 수 있겠군요.”
“상단이 자체적으로 군사력을 가지는 경우도 있으니··· 이미 트랑카벨 가문의 군무를 대신해주는 관계였을 수도 있습니다.”
“호오··· 그럴 수도 있겠군요. 그럼 바닥부터 군대를 새롭게 만들어 낸 것은 아니겠습니다.”
“그렇지요. 오히려 그게 더 합리적인 추측이라고 생각됩니다만.”
진지하게도, 트랑카벨 가문 사람들이 들으면 어처구니가 없어 반박도 하지 않을 소리들을 주고 받는다.
“그래서 용병대장이 얻는 것은 무엇일까요? 역시 부자 가문일테니, 막대한 양의 황금? 대체 얼마나 큰 돈을 줘야 할까요. 혹은 작위를 나눠주는 걸까요?”
“꽤 큰 규모의 자작령이 네 개나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 중 하나를 내주고 가신으로 삼으려고 했을지도 모르지요. 직속 용병 부대도 데리고 있으니 말입니다.”
“트랑카벨 가문의 장녀가 미인이라고 하더군요. 데릴사위 자리를 제안했을지도 모릅니다.”
"단순히 미녀일 뿐 아니라... 막대한 지참금을 가지고 오는 미녀겠군요."
이번에는 제법 정확할 수도 있는 언급들이 나온다. 하지만 여전히 진실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말들이다.
“트랑카벨 가문은 영토를 가신들에게 분봉하여 다스리는 대신, ‘성주’라 불리는 임명직 관리를 파견하여 자작령들을 전부 직접 통치하고 있다 합니다.”
궁내부대신 오두로 드 마르데제 자작이 정리하면서 말한다. 역시 국왕의 문장관 답게, 귀족들에 대한 지식은 해박했다.
이 ‘봉건제도 내의 봉건적이지 않은 방식’이 트랑카벨 가문이 권력을 유지해온 핵심이었다.
이 4개의 주요 도시들을 어느 개인이 아니라 ‘가문’이 통치했기 때문에 균분상속의 늪에서 살짝 피할 수 있었고. 이는 가문을 유지하는데 필수적인 안정적인 수입이 되었다.
물론 이건 가문 구성원들 사이에 충분한 신뢰와 협력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자칫하면 구성원 간에 불만이 폭주하여 가문이 갈갈이 찢길 수도 있는 일이었으니.
“흠··· 그렇다면 자작령 중 하나를 용병에게 내주는 일은 더더욱 없겠군요. 그런 소중한 가문의 재산을 외부인에게 내주면 가신들의 불만이 엄청날 테니 말입니다.”
이유가 정확하지는 않지만, 정황 자체가 틀린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성공적인 커리어를 가진 용병을 어설픈 작위 따위로 묶을 수는 없습니다. 한 가문에 묶이는 것 보다 자유롭게 행동하는 것이 여러모로 더 이득이니까요.”
도니 드 리모제 백작이 젊은 시절의 용병 경험을 살려 말한다.
그의 말은 진실이다. 향후 획득 가능한 수입이나, 당장 가지고 있는 무력을 따져 보아도 수지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어중이 떠중이 그저 그런 용병 정도는 하급 귀족이나, 당대에 그치는 준귀족 작위로 묶어놓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력과 기반이 있는 용병일수록 묶어 놓으려면 그만한 보상이 필요하다.
이건 굳이 용병이 아니더라도 사람 데려다 쓰려면 어느 분야에서나 당연한 상식이기도 하고. 능력 있으면 그만큼 보상을 줘야 일을 맡길 수 있으니까.
“뭐, 필요하다면 내 손녀 사위로라도 받아들이기로 하지! 무관이라면 무관 가문이 받아줘야 하지 않겠소이까?”
프레니히 드 루블랭 백작이 호기롭게 말한다.
“아니, 백작님의 손녀분은 아직 나이가 어리시지 않습니까. 그런 약속을 하시면···.”
“하하핫, 벌써부터 이 할애비보다 강한 신랑감을 구해달라고 하더이다.”
“허어··· 그거 신랑감 구하기 어렵겠습니다.”
잠시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진다. 국왕인 다고베르 2세까지도 웃음을 터뜨릴 정도였다.
현실적으로 고려해도, 어중간한 규모의 장원을 가진 귀족 보다 군사 귀족인 프레니히 백작가의 데릴사위로 들어가는 것이 용병에게는 나쁘지 않을 수 있다.
왜냐하면 큰 영토와 안정적인 수입은 없겠지만, 왕국군 원수 프레니히 백작이 가진 엘랑키아 내 군사적 기반을 물려받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정략 결혼이 이루어진다면 말이지만.
“뭐 이 늙은이도 그런 말을 하기는 했지만, 우선은 선결 사항이 있지 않겠소. 트랑카벨은 이번 성전을 자력으로 이겨내야 할 것이오.”
“음음, 그렇지요.”
“모든 교섭은 그 후에야 이루어져야 합니다. 법황청과 정면으로 대립할 수는 없으니까요···.”
이 또한 정론이다. 법황청과의 관계는 단순히 군사력이 강하고 약하고의 관계가 아니다. 제멋대로인 엘랑키아 국왕이 하기 싫은 전쟁을 억지로 시킬 만큼의 권력을 가진 집단이니까.
설령 눈가리고 아웅일지라도, 엘랑키아 왕실이 대놓고 법황청과 맞서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어디까지나, 법황의 소집령에 응해 대군을 파견했으나, 열심히 싸우고도 패배한 신실한 신앙인으로 남아야 한다. 그를 위한 성전이기도 했고.
그래서 안타깝게도, 트랑카벨 가문은 한동안은 홀로 싸워야 할 것 같다.
“저··· 우리가 이렇게 이야기는 나누고 있습니다만, 정작 트랑카벨의 의향이 어떤지도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재상 뮈르텔이 말한다. 모두가 놓치고 있던 부분이었다. 백작이 아니라 공작위를 내리더라도, 당사자가 싫어서 안 받으면 그만이다.
오히려 작위를 내렸는데 거부를 당하면 왕실의 체면이 엉망이 될 수도 있겠다.
“그렇다고 일이 결정되기 전에 왕실에서 사절을 보낼 수는 없습니다! 그건 예법에도 어긋납니다.”
궁내부대신이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확실히, 실질적이야 어떻든 모양새는 가신과 보상을 의논하는 꼴이 되어서는 안 된다.
엘랑키아 건국 초기, 이미 막강한 힘을 가진 영주들을 국왕이 ‘인정’하는 절차에 불과했던 시기에도 어쨌든 엘랑키아 국왕들은 고압적인 태도를 고수했으니까.
“넌지시 가서 의향을 알아볼 만한 분이 없을까요?”
외무대신 장듀 후작이 묻는다. 확실히 이 ‘비공식 사절’을 뽑아 보내기에는 조건이 애매했다.
왕실과 직접적인 연관이 적어야 한다. 왕의 칙령을 가지고 가는 공식 사절이 아니니까. 그 점에서 이 자리에 있는 가문들은 모두 불합격이다.
다음으로 성전에 참여하지 않은 편이 좋다. 최소한 샹다메리 전투로 엮이지는 않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대등한 의미의 사절이라고 하기가 힘드니···.
마지막으로 양쪽의 사정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한다. 계위 면에서 자작가에 밀리지 않을 정도의 적절한 지위가 있고, 트랑카벨 가문에 대해서도 잘 알면 좋을 테고.
이런 점들을 모두 만족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나?
“저, 제가 사람을 한 명 추천하고 싶습니다.”
얼마 후 입을 연 것은 에티엔 드 크레이 공작이었다.
“대귀족의 일원이고, 트랑카벨 가문과도 인연이 있는 사람입니다.”
“호오, 대체 누구요?”
“제 오랜 친구입니다만···.”
에티엔은 아마도, 자신의 친구가 이 임무를 맡아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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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황이 임명한 성전군 사령관 라모리 스텐던은 병력을 재건하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허울 뿐인 총사령관이었으나, 현재는 아르누아 추기경과 랑시아 성녀로부터 권위를 위임받아 명실상부한 단일 지휘관이다.
주신의 유일한 지상 대행자 법황.
법황이 파견한 전권 대리인.
현 교단 유일의 살아있는 성녀.
이 세 사람의 권위를 빌린 이상, 종교를 명목으로 소집된 성전군이 라모리의 주도권을 의심하는 일은 없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정작 라모리 스텐던 본인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는 것이다. 지휘권을 행사할 수는 있지만, 포기할 자유는 없었다.
뭐, 상관 없었다. 처음부터 그런 자리였으니 말이다.
“새롭게 200명 정도의 부대가 도착했습니다. 주디칼리 출신들이고, 북동쪽 변경을 점거하고 있던 부대로 생각됩니다.”
“으음···.”
지금까지 누군가 해야 했지만 아무도 하지 않았던 성전군 참여 병력의 목록을 작성하고 있다.
그러면서 놀란 점은, 생각보다 병력이 상당히 많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파멸적인 패배라 생각했던 아넥시에서의 전투를 거치고도 이만한 전력이 남아있다는 것이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물론, 이만한 병력을 모아 놓고도 아무 가치도 없는 블랑독 북부 땅덩이들만 주물럭대고 있었던 현실이 개탄스러울 뿐이지만.
잔존 성전군의 주력은 물론 종교 기사단이다.
수로 보나 전투력으로 보나 핵심 중의 핵심인 드라멜른 기사단. 성녀 랑시아의 친위대 역할을 하고 있는 무시무시한 가면 수도사들인 모스탈 수도회만 해도 남은 병력의 절반 이상이다.
거기에 아넥시에서 큰 타격을 입은 빌다우 기사단 등. 살아남은 종교 기사단의 생존자들이 개인, 혹은 집단으로 집결한 숫자도 적지 않았고.
한편으로는 세속 군주들도 제법 남았다. 라모리 자신의 직속 부대를 빼더라도, 아넥시에서 무사히 살아 돌아온 아소모 델 안프로니오의 연대도 든든한 전력이었다.
게다가 이 용병 대공은 아넥시에서 보였던 추태 때문인지, 상당히 열성적으로 협력하고 있었다.
이렇게 되니, 쓸만한 병력만 추려도 1만을 훌쩍 넘는다.
하기는 뭐··· 라모리의 직속 병력과 드라멜른 기사단만 합쳐도 1만에 근접하는 병력이 되니 말이다.
“문제는 기병의 숫자가 부족합니다.”
“어느 정도라 생각하나?”
“솔직히··· 위험한 수준입니다.”
라모리의 기병대장인 울터 코린스가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역시, 아군이 불리하다는 말은 드러내서 말하기 곤란하다는 것인지.
아넥시 전투가 벌어지기 전부터, 기병의 피해는 심대했다. 이단자들의 기병 대군이 활발하게 활동했고, 여기 대응하려면 이쪽도 기병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크고 작은 기병전이 이어지면서, 이기든 지든 피해는 누적되었기에 전체적으로 기병 소모가 많았다.
그래도 많은 숫자를 자랑하던 주력 기병은 아넥시 공방전에서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고 말았다. 사실상 전멸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단자들은 막강한 기병 전력을 보유하고 있다. 아넥시 공방전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기병 대군은 거의 온전히 남아 있을 것이다.
아군이 너무 무력하게 무너진 것이 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최소한 대등하게 싸워 피해라도 입혔다면 이런 걱정은 하지 않았겠지.
이제와서는 하나 마나한 가정이겠지만 말이다.
“수는 적어도 중기병들은 제법 세력이 있습니다. 드라멜른 기사단 소속의 중기병들은 아주 강해보입니다. 모스탈 수도회 역시 마찬가지구요.”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경기병이 부족하다. 물론 전장에서야 중기병에게 밀리고, 단독으로 보병 대열을 돌파할 능력도 부족한 것이 경기병이다.
하지만 경기병이 빛나는 것은 오히려 전장의 밖이다. 전투 전에는 부대의 눈과 귀가 되어 주력군을 이끌고 지키며, 전투 후에는 적을 추격하여 다시 일어설 수 없게 만든다.
그런데 그게 부족했다. 충분한 숫자를 상시 주변 경계에 뿌려놓지 않으면, 아넥시 공방전의 비극이 또 벌어질지도 모른다.
그간의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은 것 외에도, 전선 이탈자들이 많았다. 기동성은 있되, 전의를 잃었으니 당연한 일이겠지.
어쩌면, 라모리가 지휘권을 잡은 후 내린 집결령을 듣기도 전에 블랑독 경계를 넘어 고향으로 가버렸을지도 모르고.
“...한동안은 울터 경 휘하의 기병들이 고생을 좀 해줘야겠군.”
“알겠습니다, 대장. 그거야 문제는 아닙니다만···.”
“적 기병이 마음대로 활동하지 않도록 전장을 잘 정해보겠네.”
“감사합니다.”
이제 더 이상 기병에게 무너질 수는 없었다. 하지만 맞대응할 기병 전력이 부족하다. 결국 라모리가 머리를 써서 해결하는 수밖에.
전략적으로도 큰 문제가 하나 있다. 적군이 북쪽으로 행군하고 있는 것이다. 서두르지도 않고, 점령지를 탈환해 소문을 내면서 유유히.
누가 보아도 북쪽의 타비뇽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의도를 숨길 생각도 없었고, 진격로도 정직했다.
이건 성전군더러 도발하고 있는 것이다. 나와서 싸우든가, 아니면 물러서든가.
이대로 아무것도 않고 시간을 보낸다면 확실히 파멸한다. 이 또한 아넥시 패배의 그늘이다. 주요 보급품을 몽땅 잃어버린 타격이 너무도 컸다.
때문에 지금은 타비뇽에서 출발하는, 소량이지만 꾸준히 들어오는 보급품에 의존하는 바가 컸다. 이게 끊긴다면 간신히 새롭게 꾸린 성전군은 다시 풍비박산이 날 것이다.
전략적 불리를 인정하고 블랑독에서 벗어날 것인가?
아니면 북쪽으로 행군하는 적의 주력을 찾아가 최후의 도전을 할 것인가?
적은 지긋지긋한 양자택일 상황을 던졌다. 무엇을 택하든 그다지 유쾌한 상황은 나오지 않으리라.
라모리는 둘 다 하고싶지 않았다.
"랑시아 성녀는 어디 계신가? 면담을 요청드린다 전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