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200화 (200/556)

26-4. 타는 냄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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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랑키아 왕궁, 어전 회의.

국왕의 개인 집무실이나 밀실에서 진행하는 회의가 아니다. 엘랑키아 국왕부터 참가자 한 명 한 명 까지 모두에게 공무인 정식 회의이다.

논의된 모든 안건이 서기에 의해 기록되고, 국왕의 재가가 난 안건은 그대로 국법의 일부가 되는 일까지 있다.

그런 만큼, 왕실 입장에서도 보통 행사는 아니다. 참여자들 역시 충분히 준비된, 그만큼의 무게감을 가진 이들이 아니면 곤란하다.

오늘의 참여자 명단만 보아도, 각종 행사를 책임지는 궁내부원이라면 한번 쯤 긴장하여 식은 땀을 흘릴 만한 쟁쟁한 인물들이다.

국왕. 다고베르 드 팔라스 2세

재상. 뮈르텔 드 생프랑보

왕국군 원수. 프레니히 드 루블랭 백작

외무대신. 장듀 드 퀴슈 후작

궁내부대신. 오두로 드 마르데제 자작

객원 참여. 에티엔 드 크레이 공작

객원 참여. 도니 드 리모제 백작

7명이라는 숫자는 어전회의치고는 그다지 많은 숫자는 아니기는 하다. 그러나 그만큼 특정 분야의 굵직한 안건을 논의한다는 의미기도 했다.

그렇지 않다면, 굳이 정식 어전회의를 소집하지 않았을 테니까.

오늘의 주제는···.

다름 아닌 ‘이단의 수괴’ 트랑카벨 가문을 어떻게 대하느냐 하는 것이다.

전제까지는 아니지만, 더 이상 트랑카벨 가문을 적대하는 것이 상책이 아니라는 것에는 동의하고 있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이미 전쟁을 한 사이이다. 심지어 졌다. 명목상으로야···

‘블랑독은 엘랑키아 왕국의 적법한 영토이며, 트랑카벨 가문은 드 레뮤즈를 섬기고, 드 레뮤즈는 엘랑키아 왕실을 섬긴다. 트랑카벨 가문은 이를 부인한 적 없다’

···라는 관계지만 봉건 사회에서 이런 명목상 관계 따위 아무런 의미도 없다. 게다가 먼저 시비를 건 쪽이 이 쪽이다.

그나마 성전이라는 구실이 끼어 있어서 서로간의 예민한 부분을 건드리지 않았다는 게 다행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참여자들이 공감하는 점이 하나 더 있었다.

“이런 말 하기는 좀 그렇지만, 꼴 보기 싫은 법황군 놈들을 때려 부순다는 소식을 들으니 속은 시원하더이다.”

평생을 전장에서 살며 하급 기사에서 백작위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 노장 프레니히가 말했다. 다른 이들도 무언의 동의를 보낸다.

한편으로는, 자신들은 졌는데 법황군이 이겨 버리면 자존심은 이중으로 박살나는 것이다.

아니,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자존심 찾을 상황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그렇다. 호탕한 전장의 영웅들도 마음 속 어딘가에는 소인배가 살고 있었던 것인지.

애매한 관계이기는 하지만, 블랑독의 이단자들과 법황군이 싸운다면 이단자들이 승리하는 쪽이 엘랑키아 왕국에는 이득이라는 점은 대체로 동의했다.

“하지만 만약··· 트랑카벨이 완전히 승리해서 블랑독의 지배권을 공고히 한다면 말입니다. 그 무력이 엘랑키아 왕실을 향하지는 않을까요?”

외무대신 장듀 후작이 조심스럽게 말한다. 생각해볼 수 있는 문제였다.

“트랑카벨의 현 당주인 아롱드 트랑카벨의 젊은 시절 이후로, 이 가문은 무력을 통한 세력 확장을 버린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 기조를 유지해 주기를 바라야 하겠습니다.”

재상 뮈르텔이 말한다. 물론 그 자신도 100퍼센트 확신할 수 있는 내용은 아니었기에 다소 말투는 조심스럽다.

“만약에 무력을 사용할 생각이 있었다면 명목상 군주인 드 레뮤즈 백작가와 대립했겠지요. 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고··· 레뮤즈 역시 블랑독에는 불개입 원칙을 지켜왔습니다.”

“그럼 트랑카벨의 힘은 어디서 나온 것인지요?”

“전부 상업, 경제력에서 나왔습니다. 대륙 남북을 관통하는 엄청난 규모의 상단을 운영하고 있다 하더군요.”

참가자 중 가장 연장자인, 궁내부대신 오두로가 안경을 끼고 서류를 뒤적이더니 부연 설명을 한다.

궁내부는 말 그대로 왕실의 업무를 담당하지만, 다른 역할은 ‘국왕의 문장관’이기도 하다. 엘랑키아는 물론 대륙 전체의 귀족 가문을 파악하고 기록하는 것이 이들의 일이다.

“블랑독의 4개 자작 영지도··· 나름 하나 하나가 알짜배기 영토들입니다. 여기서 나오는 수입도 상당하리라 생각합니다. 인구도 많고요.”

“황량한 변경이라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군···.”

“이 곳에 정착한 트랑카벨 가문이 몇 세기에 걸쳐 서서히 발전시켰다고 합니다. 경쟁자가 없는 동안 착실하게 내실을 다졌던 것이죠.”

정말 맹점이라고 할 수 있었다.

게다가 궁내부대신의 설명이 계속되면서 회의 참여자들은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트랑카벨 가문은 이번 성전 직전까지도 체계화 된 영지군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무장도 전술도 가신 개개인의 자질과 재산에 의존하는 전통적 봉건 군대와 어느정도 중앙이 개입한 체계적인 군대는 완전히 다른 존재이다.

원래 돈은 많았고, 인구도 상당했다. 이를 충분히 활용해 단기간에 강군을 양성했을 뿐.

애초에 군대를 기르지 않았다는 것은 무력을 통한 영토 확장의 의지가 없었다고 밖에 볼 수 없었다. 최소한 엘랑키아 내부에서는 말이다.

“...잠자는 사자의 수염을 건드린 꼴이구려··· 법황 성하께서는. 이런 어리석은 일이···.”

“거기 편승한 국왕의 어리석음도 잊고 가선 안 되겠소이다.”

“폐, 폐하! 그런 뜻으로 한 이야기는···.”

“아니오. 부유한 땅이라는 거야 알았지만 욕심만 있었지 잘 알아보려 하질 않았으니까. 법황의 칙령이란 것이 부담스럽기도 했고. 그 결과가 이 꼴이오.”

모두가 숙연한 가운데, 다고베르 2세는 씁쓸하게 웃었다. 분명히 안일했다. 부인할 수 없었다.

“외람된 말이오나, 트랑카벨이 엘랑키아 왕국을 적대하는 일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한참동안 침묵만 지키던 에티엔이 말을 잇는다.

“저는 최후통첩을 위한 사절로 카르카냑을 방문했었습니다. 그때, 그들은 분명하게 자신들의 안전을 목적으로 전쟁하고 있음을 밝혔습니다.”

“그렇다는 것은?”

“엘랑키아 왕국을 적대하는 것은 그들의 안전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흐음, 확실히···.”

샹다메리에서 패배한 성전군은 강군이기는 했으나, 어디까지나 국왕의 성전 참여령에 응한 자발적인 귀족 군대였다.

타국과의 전쟁을 위해 잘 정련된 국왕의 정예군에 비해 아무래도 부족한 군대이다.

아무리 트랑카벨이 강하다고 해도 엘랑키아의 한 지방에 불과한 이상, 전력을 다한 왕실군을 막을 수 있을리는 없다.

“오히려 이 쪽에서 너무 압박하면, 절망한 나머지 엉뚱한 선택을 할지 모르겠군요···.”

외무대신 장듀 후작이 말하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인다.

여기서 엉뚱한 선택이란, 생존을 위해 외부 세력과 손을 잡는 것을 말한다. 게다가 명목상 대군주인 왕실이 먼저 적대했다면, 이는 반역도 아니다.

자칫하면 블랑독 전체가 더 이상 엘랑키아의 권역이 아니게 될 수도 있다. 이건 절대로 피해야 할 일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트랑카벨의 블랑독 지배를 인정하고 군신관계를 다시 맺어야 할까요?”

“필요하다면 블랑독의 백작위를 신설하여, 블랑독 전체의 지배를 인정해도 좋지 않겠습니까? 필요하다면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해야지요.”

“그··· 그것은···.”

호탕한 프레니히 백작의 말에, 궁내부대신 오두로 자작은 곤란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블랑독은 넓고 풍요로운 땅이지만 백작위가 없었다. 정확히는 대부분이 드 레뮤즈 백작의 권역이었다.

아마도 당시에는 블랑독이 그다지 가치있는 땅이 아니었을 것이다. 게다가 남부의 대군주로서 권력이 막강하던 드 레뮤즈 가문이기도 했고 말이다.

따라서 오늘날 기준으로 따지면 블랑독을 통치하는 대군주가 없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긴 했다. 그렇다고 없는 백작위를 만드는 것은 아주 큰 일이었다.

당장 주변의 대영주들이 예민하게 받아들일 것이었다. 특히, 권역의 원주인인 드 레뮤즈가 말이다. 버린 땅으로 치고 방치하는 것과, 거기 새로운 백작령이 들어서는 것은 다른 이야기니까 말이다.

“이 늙은이는 폐하의 성은으로 백작위를 받지 않았소? 트랑카벨의 경우는 왜 안 된다는 것인지 모르겠소만.”

프레니히 백작은 정말 모르겠다는 듯 묻는다.

“외람되오나··· 프레니히 백작님의 작위는 군문과 명예를 위한 것입니다. 다른 대영토를 가진 귀족과 경쟁하시지는 않는 입장이기에 가능했던 일로 생각됩니다.”

“허헛, 허울 뿐인 작위라 상관 없다는 것인가!”

“아뇨! 아닙니다, 백작님! 전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이 늙은이가 말 실수를···.”

“아니오, 궁내부대신. 이 늙은이는 지금 아주 만족하고 있소이다. 맞지, 죽는 날까지 군문에 설 수 있다면 좋겠구만! 하하하핫!”

확실히, 부유한 4개 자작령과 막강한 영지군이라는 실질적 힘을 가진 가문이다. 그런데 거기에 국왕이 공인한 백작이라는 권위까지 더해진다면··· 기존 질서가 단번에 흔들릴 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우스운 일이다. 막강한 경제력도 군사력도 왕실이 인정한 작위 따위와는 상관이 없었다. 전부 자력으로 쌓아 올린 힘이다. 그런데 이걸 국왕이 인정하느니 마느니 한다는 것.

그러나, 그게 봉건 질서라는 것이다. 모두 다소간의 불합리를 느끼면서도 이해는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트랑카벨 가문은 역사가 얼마나 오래된 가문인가?”

다고베르 2세의 물음에, 궁내부대신은 다시 자료를 뒤적인다.

“드 레뮤즈 백작가의 변경 관리 출신입니다. 기록을 보면··· 역사가 500년은 넘은 나름 유서깊은 가문입니다.”

“레뮤즈 백작이 트랑카벨을 싫어하는 이유가 있구려!”

싫어하는 게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지만, 빼놓을 수 없는 이유기는 했다.

“주제와 다른 이야기를 해서 미안하지만, 묻고 싶은게 있소.”

“무엇입니까, 폐하?”

“대체 적장은 누구요? 단기간에 트랑카벨 영지군을 이 수준으로 키운 자 말이오.”

갑작스러운 왕의 질문에, 좌중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눈치를 살핀다.

“에트라는 이름의 용병입니다. 얼마 전부터 트랑카벨 가문의 콘도티에레, 대리 사령관을 맡고 있습니다. 군사 관련 전권을 위임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원래 뭘 하던 자길래··· 그런 결과물을 냈던 것이오?”

“그건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오오, 도니 백작, 말해보시오.”

어전 회의가 시작된 이후로 한마디도 않고 있던 도니 드 리모제 백작이 처음으로 입을 연다.

그는 젊은 시절을 용병으로 보냈다. 백작위는 당연히 형이 상속받으리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형이 후계자도 없이 급사하는 바람에 황급히 귀국하여 백작 계승자가 된 군인이다.

“그룬발트 출신이라 하나, 가문을 내세우지 않아 정확히 어디 출신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확실한 것은 그룬발트와 주디칼리에서 용병으로 이름을 날렸다는 것입니다.”

설명에 익숙하지 않은듯, 도니는 조심스럽게, 하지만 군인다운 꼼꼼함으로 설명을 이어간다.

“엘랑키아로 오기 전, 슈토르히 연대라는 용병단을 창설했습니다. 그리고 이 부대가··· 샹다메리에서 아퀴오슈 공의 보병과 베리브 자작의 기병을 무너뜨린 부대입니다.”

“그 터무니없이 강한 부대 말인가!”

“그렇습니다. 저도 용병 시절 동료에게 연락해보고 기억을 되살릴 수 있었습니다. 주디칼리에서도 강병으로 유명했던 부대입니다.”

샹다메리에서의 결전에서, 베리브 드 퐁투베 자작의 기병대가 무너지는 순간 패배는 확정되었었다. 엘랑키아가 자랑하는 정예 기병대를 유인해 순식간에 붕괴시키다니.

에티엔 공작, 프레니히 백작, 도니 백작은 모두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러니 이 정보가 각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전례가 있는 장수이니··· 단기간에 블랑독의 시골 농부들을 그 정도까지 단련해 낸 것도 납득이 가는구려.”

프레니히 백작이 하얀 수염을 쓰다듬으며 수긍했다. 힘을 다해 싸워 패배한 상대이다. 이제 와서 인정하지 않아도 자신만 비참해 질 뿐이다.

“지금와서 드는 생각은··· 이 어리석은 늙은이의 자리에 그 에트라는 자를 앉히면 어찌 되려나 하는 생각이네만.”

“무, 무슨! 그래봐야 시골 영지의 지휘관입니다. 백전노장이신 프레니히 공의 관록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하핫, 그렇게 말해주시니 기분은 좋지만, 이 늙은이의 재주로는 당하지 못한 게 사실이니 어쩌겠소이까. 에티엔 공의 보고서를 보았소. 개혁은 필요하오.”

“...백작님.”

에트라는 용병은 시간과 장소 등 모든 것이 제한된 상황에서 그만큼의 결과를 내놓았다.

그렇다면, 국왕과 육군 원수의 전폭적인 후원 아래 엘랑키아의 군대를 맡기면 어떻게 될 것인가? 엘랑키아 군은 어디까지 강해질 수 있을까?

아무래도 군인인 이상,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반대로 작은 영지라서 가능했을 수도 있습니다. 규모가 커질수록 살필 일이 많아지겠지요.”

“그것도 그렇군요.”

작은 조직이고 아직 만들어진 것이 없는 신규 조직이기에 가능한 것이 있다. 허나 이미 상당한 역사와 전통을 지닌 중앙군은 또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 트랑카벨은 이런 인재를 어떻게 영입했을까요? 아니, 어떤 조건으로요?”

이번에는 외무대신 장듀 후작의 질문이다. 그가 해낸 업적을 생각해보면··· 평범한 조건은 아닐 것이다.

만약에 그것을 알 수 있다면, 트랑카벨 가문과의 교섭에 실마리가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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