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3. 타는 냄새
라몽 드 레뮤즈 백작은 기본적으로 인간 관계를 매우 싫어하는 사람이다. 굳이 표출하지는 않지만 대부분의 인간들을 ‘극히 혐오’ 한다.
게다가 인간에 대한 평가도 매우 박하다.
애초에 다른 인간과의 접점을 최소화 하려 노력하지만, 그렇게 만나는 상대 중 그나마 대화까지는 참을 수 있는 경우는 열 명 중에서 한 명 정도뿐이다.
그런데 오늘의 방문자, 라솔 국왕의 동생이라는 에드메르 산타로 데 카르도라는 싫은 아홉 명 중에서도 특히 싫은 부류에 속하는 인간이었다.
“최근 ‘가장 신실한 수호자’ 칭호를 받으신, 라솔 국왕 리오고 폐하께서는, 드 레뮤즈 가문과 블랑독 문제에 대해서 우려를 표하셨습니다.”
“....”
라몽은 사람을 불러 ‘이 놈을 끌어내라!’고 외치지 않기 위해 가지고 있는 참을성을 다 쓰고 있었다.
자기네도 최근까지 내전 직전까지 갔으면서 왜 강 건너 이웃나라 땅에서 일어난 사건에 신경을 쓰는 건지. 서로 살가운 사이도 아닌데.
“최근 블랑독은 온갖 이단의 온상이 되었다 들었습니다.”
“...정순파 말고 또 무슨 이단이 있다는 건가요.”
“이단자들 사이에서 새롭게 성녀 신앙이 발흥했다는 이야기가 있더군요. 교단의 협의 없이 성인을 칭하는 것은 명백한 이단 행위입니다.”
“허어, 그것은 그냥 못 배운 병사들이 하는 소리일 뿐입니다. 전장에서 생사가 갈리는 경험을 하는 어리석은 이들이 의존하는 미신 같은 거지요.”
“일종의 총알 막아주는 부적과도 같은?”
“그렇지요.”
에드메르 공작은 일견 수긍한 듯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라몽 백작께서는 그리 잘 아시면서, 어째서 이단들을 방치하셨다는 말이오?”
“방치한 것이 아니라, 이단들을 한 데 모아 격리했을 뿐입니다. 레뮤즈 영민들 중에서도 불순한 자들은 모두 추방했고요.”
어차피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블랑독의 황폐한 구석에 모여 지들끼리 성녀를 숭배하든 악마를 숭배하든 무슨 상관이겠느냐. 이것이 라몽의 논리였다.
게다가 자신도 불만이 없지 않았다.
“애초에 헛소리나 하는 인간들을 모아 놓았더니, 굳이 그걸 건드려서 기세까지 올려 준 것은 교단의 방침이 아닙니까?”
조용했던 꼴 보기 싫은 놈들이 시끄러운 꼴 보기 싫은 놈들이 되었으니까. 라몽이 보기에 굳이 들쑤셔 놓은 것이 이해가 가질 않는다.
“이단이란 극심한 부패와도 같지요. 모아서 잘 덮어 숨겨놓는다 해도, 결국 주변에 풍기는 악취로 인해 주변에서 알게 됩니다. 게다가 벌레까지 꼬이는 단계에 이르면 이미 늦습니다.”
“어리석은 자들 사이에서 도는 미신이야, 한 세대가 지나기 전에 사라질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요! 그래서 철저한 근절이 필요한 겁니다. 블랑독은 엘랑키아 건국 시기부터 내려온 드 레뮤즈의 권역이 아닙니까?”
권역이라니··· 라몽은 머리가 아파졌다. 권역은 영토와는 조금 다른 개념이다. 봉건 제도에서 더 상위, 혹은 동급의 권력자에게 인정 받은 ‘영토를 확장할 수 있는 권리’와도 비슷하다.
하지만 권역이 영토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국경처럼 명확한 것도 아니기에, 영토 분쟁은 대체로 권역의 해석이 구실이 되는 경우가 많다.
즉, 블랑독은 엘랑키아 왕실이 인정한 드 레뮤즈의 ‘권역’은 맞다. 하지만 지난 500년 간, ‘영토’였던 적은 단 한번도 없다.
그거야 저 가증스러운 트랑카벨을 비롯한 무리들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고.
이 권역을 걸고 넘어졌다는 것은, 에드메르 공작이 대놓고 시비를 걸러 왔다는 이야기이다. 역사적으로 네가 관리해야 할 토지에서 일이 터졌으니 네 책임이다, 이런 소리니까.
“그리고 우리 오렌시아 기사단은 엘랑키아 남부 지역에서 조사를 했습니다.”
“뭐라고요? 아니··· 라솔이 엘랑키아 일에 나서는 것은 월권 행위가 아닙니까? 이건 문제가···.”
“아니, 아니오. 라솔 왕국의 왕제로서가 아니라, 주신을 섬기는 오렌시아의 기사로서 한 일이오. 국경은 인간이 만든 것이되, 주신 앞에서 우리는 모두 하나가 아니겠소?”
“흐으음···.”
불쾌감을 이루 말할 수 없었으나, 라몽은 일단 참았다. 여기서 흥분해봤자 자신만 손해였다.
“우리 조사에서, 많은 이단의 흔적을 발견했습이다.”
“그거야 방금 블랑독은 온갖 이단의 온상이라 하지 않으셨나요?”
“오오, 오해가 있군요. 우리는 ‘블랑독 남부’가 아니라 ‘엘랑키아 남부’에 대한 조사를 했습니다.”
“...내 영토에도 들어왔단 말씀이신지?”
“그렇습니다. 로그포르, 비고네, 유렌뉴. 세 곳의 지명을 아십니까?”
“...부끄럽지만 내 영토라 해도 지명을 모두 알지는 못합니다.”
분노를 참지 못한 라몽은 이제 거의 으르렁대듯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에르메드는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평소와 같은 여상스러운 말투이다.
“이스키비르 강에서 멀지 않은 작은 영토들이었지요. 백작께서 신경쓰실 필요까지는 없는 장소였으니.”
이스키비르 강은 엘랑키아와 라솔의 자연국경 역할을 하는 강의 이름이다. 드 레뮤즈 백작령 중에서도 변경 중의 변경이니, 자신이 모를 만도 했다.
“요는, 분명 ‘격리’ 하셨다 말씀하신 라몽 백작의 영토에서도 그처럼 이단들이 암약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게 ‘블랑독에 모인 이단의 악취’의 영향이 아니라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까?”
“...아직은 모르지요.”
에드메르는 빙긋 웃었다. 건강 문제로 대부분 실내에만 있어서 창백하고 윤기가 없는 라몽 백작의 하얀 피부와, 이름만이 아니라 진짜로 검을 휘두르는 기사인 에드메르 공작의 건강한 구릿빛 피부가 대조적이다.
“이건 단순히 오렌시아 기사단에서 전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교단의, 법황 성하의 뜻이라 여기셔야 합니다.”
“뭐가 말이죠?”
“저희는 드 레뮤즈가 이번 성전에서 좀 더 큰 역할을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미 이단 토벌에 많은 자원을 쓰고 있습니다만.”
“아니죠. 드 레뮤즈의 힘은 그 정도가 아니죠. 듣자하니 이단의 수괴 트랑카벨 가문과 사이도 좋지 않다 하시던데요. 좀 더 적극적인 참여를 요청드립니다.”
"사이가 좋지 않다고 항상 무력을 쓸 수는 없는 일이지요."
지금 눈 앞의 에드메르를 끌어내지 않고 참고 있듯 말이다. 그 말을 들은 에드메르는 눈가를 찡그리며 웃었다. 마치 마음이라도 읽었다는 듯.
"법황청에서는 드 레뮤즈 가문을 비롯한, 블랑독에 영토를 가진 가문들 전체에 책임을 묻는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법황 성하께서는 레뮤즈가 어지간히 싫으신 모양이군요."
"아뇨, '블랑독'은 엘랑키아에만 있는 게 아닙니다."
"아...."
그랬지. 선대 엘랑키아 국왕이 라솔에 시비 걸었다가 이스키비르 강 너머의 영토를 왕창 뜯겼으니까. 가스텔 드 누아 백작이 있었으면 열 받을 이야기였다.
"라솔 왕실도 '라솔 블랑독' 영토 문제 때문에 현 이단 발흥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러면 니들이 알아서 책임 지던가...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왔다. 하지만 라몽은 초인적인 자제력으로 참는데 성공했다.
"조만간 오렌시아 기사단의 정예가 이스키비르 강을 건널 예정입니다."
"아 그러시군요."
"그 때, 귀 가문의 신실한 군대와 함께할 수 있다면 영광이겠습니다."
에드메르 공작은 왼손으로 망토 자락을 잡고 오른손을 비스듬히 전방으로 펼쳐 맨손을 보여주는 남방식 정중한 인사를 한다. 왕의 동생다운 완벽한 예절이다.
이 동작의 근원은 물론 무장하지 않았으며 적대할 생각이 없음을 보여주는 퍼포먼스이다.
하지만 라몽이 받아들이기에는 조롱이나 다름 없었다.
"이단이 나온 마을들의 이름을 알려주시고 가시지요."
"아하, 로그포르, 비고네, 유렌뉴의 세 마을 말씀이십니까?"
집무실에서 나가려던 에드메르가 몸을 들리며 말했다.
"신경쓰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희 기사단의 이단심판소가 주신의 뜻을 받들어 공정하게 처리했습니다."
"그건 또 무슨...."
뭐라고 더 말을 하기도 전에, 에드메르는 떠나버렸다. 불쾌함과 불길함을 동시에 느낀 라몽은 즉시 시종을 호출했다.
"기병대장 소베트르 경을 불러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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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랑키아의 왕도 베르마유. 엘랑키아 왕국의 영화를 상징하는 듯 화려한 궁전의 비밀스러운 내실에는 세 사람의 어전회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엘랑키아 국왕, 다고베르 드 팔라스 2세.
왕국의 일은 이 사람을 통하지 않고는 어떤 것도 돌아가지 않는다 하는, 뮈르텔 드 생프랑보 재상.
마지막으로, 에티엔 드 크레이 공작. 샹다메리 전투의 패장으로, 책임을 지고 자신의 영토에서 근신하고 있던 젊은 귀족이다.
가문의 형님뻘인 국왕 다고베르 2세가 억지로 부르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도 엘랑키아 북부의 영지에서 칩거하고 있었을 사람이다.
하지만 상황이 변했고, 블랑독 침공을 계획할 때 처럼 세 사람은 다시 모이게 되었다. 비공식 어전회의지만.
"그 동안 작성한 반성문은 잘 읽어보았다."
"형님 폐하, 그건 반성문 목적으로 쓴 게 아니라...."
"알고있다. 그래도 패배를 반성하면서 쓴 글이지 않느냐? 그렇다면 반성문이겠지."
"...그건 그렇습니다."
왕 앞에서 안절부절못하는 에티엔을 보면서, 뮈르텔 재상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가 보기에, 에티엔 드 크레이는 패장이라고는 해도 너무나 몸을 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사령관으로 출전해 패배하기는 했다. 그러나 함께 참전했던 귀족들 사이에서 에티엔의 평가는 나쁘지 않았다.
온갖 쟁쟁한 권력자들 사이에서 균형도 잘 잡았고, 결정적인 원한이 생길 일도 하지 않았다. 패배가 확정된 이후, 어떻게든 병력을 온전히 보전하며 퇴각하는 데도 성공했다.
결정적으로 그 자리에 다른 사람을 앉혔으면 이겼겠는가?
아무도 거기에 '그렇다'라고 대답하지는 못하리라.
왜냐하면 작전 회의에서 지휘관급들의 의사는 충분히 반영되었으며, 지엽적인 전투에서 패배한 것은 일선 지휘관들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원정군의 주장이었으니 책임을 안 질 수는 없겠지만... 아무튼 안타까운 일이었다.
"저도 읽어보았습니다. 감정적으로는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웠지만, 논조는 동감이 가더군요. 하지만... 전쟁은 감정만으로 하는 것은 아니지요."
"재상께서도 보셨는지요...."
패장 에티엔이 공적인 업무를 마친 후, 영지에서 두문불출하며 작성한 '반성문'의 내용은 다름 아닌 적군의 분석이었다. 특히 1년여 만에 강군을 양성해낸 트랑카벨 영지군에 대해서 말이다.
"엘랑키아 군대는 '자신의 강점만 갈고 닦을 뿐, 약점을 보완할 생각은 하지 않는다' 라는 부분은 참으로 뼈아팠다."
"저는 군사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동의합니다."
국왕과 재상이 자신의 보고서를 칭찬하자, 에티엔은 부끄러움과 뿌듯함을 함께 느꼈다.
통한의 패배를 당하고 다시는 지기 싫다는 생각으로 뼈를 깎아내는 심정으로 쓴 보고서였다. 자칫 패배에 대한 변명으로 보일까 봐, 완성본을 남에게 보여주는 것도 부담스러웠으니.
하지만 다행히도, 국왕과 재상은 그의 진심을 알아준 것 같다.
"지금이야 블랑독의 이단들이 적이지만... 앞으로는 '가상 적국'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지."
아예 때 되면 하다시피 정례적으로 전쟁을 해 온 라솔이나 그룬발트는 명백한 가상 적국이다.
당장은 정리되었으나, 나우데사 연방 역시 사이가 좋을 리가 없고.
한 도시와 사이가 좋아지만 다른 도시와 사이가 나빠지는 주디칼리는 또 어떤가.
규모가 문제이지, 모두가 언제 분쟁이 발생해도 이상하지 않을 나라들이다. 이를 상대하기 위해 엘랑키아 군을 균일화 하자는 것이 보고서의 핵심 내용이었다.
게다가 엘랑키아는 기병이 '너무' 강하다. 일단 전선만 고착되고 기병이 자유로우면 어떻게든 기병이 이겨버린다. 어떤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샹다메리 전투에서처럼, 그 우세한 기병이 활약하지 못하는 환경이 되면 전선 자체에 위기가 찾아오는 것이다.
"하지만 에티엔, 너는 다른 가능성을 본 거지?"
"그렇습니다, 형님 폐하."
"흐음...."
국왕 다고베르 2세는 다소 독선적인 면은 있지만 어리석은 자는 아니다. 게다가 패배를 무엇보다 싫어했다. 그의 머리속에서는 자존심과 가능성 등 여러가지 요소를 따지는 계산이 돌아가고 있다.
"좋은 자료 만든 김에 하나만 더 부탁하자."
"예, 폐하."
"네가 제시한 개혁안 중, 현실성이 있는 필요성을 고려해서 우선순위를 책정해보거라."
"알겠습니다."
"보자, 날짜가... 닷새 후에 프레니히 백작이 귀환하는군. 그 때 같이 논의하기로 하자."
에티엔은 조금 놀랐다. 왕에게 불려온 이상, 자신이 할 일이 있을 것으로 추측은 하고 있었지만... 국왕군 원수를 역임하고 있는 프레니히 백작이 참여하는 회의는 어떤 내용일까.
"주제는 몇가지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건 이거다."
국왕의 표정은 썩 좋아보이지는 않았다. 내키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이 해야한다는 표정.
"향후 엘랑키아가 트랑카벨 가문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