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2. 타는 냄새
###
출전 전야.
내일은 아넥시 부근의 주둔지를 떠나 타비뇽을 향하는 주력군과 함께 북진하게 된다. 병사들도 특식으로 나온 저녁을 먹고 쉬고 있을 것이다.
“지금쯤 아실은 어디에 있을까요?”
“동부 해안을 향해 가고 있을 겁니다.”
“그 후에는 북쪽을 향하게 되나요?”
“네. 해안 쪽에는 아직 저항을 멈추지 않은 거점이 있거든요.”
“어머나··· 대단하네요.”
나와 아쥬흐는 간단한 저녁식사 후, 느긋하게 마주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오늘의 차는 어느 주디칼리 영주의 개인 소지품으로 보이는 짐에서 나온 물건이라고 한다.
으음, 향기가 좋군. 역시 남의 것을 빼앗아 먹어서 그런가?
최근에는 워낙에 여러가지 일이 많이 있어서 그런지, 오히려 아무 일도 없는 일상이 특이하게 느껴진다.
해안 쪽에서 저항을 멈추지 않은 곳은 아스쿠라는 작은 요새이다.
바다쪽으로 불쑥 튀어나온 바위산에 자리한 곳이다. 성전군도 굳이 피를 흘려가며 점령할 생각은 없었던 것 같다.
나도 직접 가보지는 않았지만, 사람 두 명이 겨우 올라갈 수 있는 좁은 길을 한참 올라가야 한다던가.
“아실이 참 대견하네요···. 제 동생이지만 요즘에는 볼 때마다 깜짝 놀라게 돼요. 그 나이의 아이들이 빨리 자라는 걸까요?”
“객관적으로 말씀드립니다. 아실 자작님은 훌륭한 군인, 훌륭한 지도자가 되셨습니다.”
나는 약간은 힘을 담아 단호하게 말했다. 동생이 칭찬받자 아쥬흐는 본인이 더 좋은 듯, 미소를 지으며 차를 한 모금 마신다.
맹세코 나는 조금도 과장을 섞지 않았다. 어떤 의미에서는, 트랑카벨 가문이 이번 전쟁을 겪으면서 얻은 가장 큰 성과라고도 생각한다.
바로 아실 트랑카벨의 성장이 말이다.
물론 현 가주인 아롱드 트랑카벨 영감님이 오래오래 살면서 가문의 중심을 지켜주시기를 바라긴 한다.
그렇지만 지금 아실 트랑카벨이 가문을 계승한다고 했을때 불안요소가 있나?
결단코, 전혀 없다. 지금의 아실은 엘랑키아 전체, 어쩌면 대륙 전체의 귀족들이 부러워 할 이상적인 후계자로 자라고 있었다.
“아실의 군인으로서의 능력이나 가능성은 어떤가요? 콘도티에레 에트가 보시기에는요.”
“흐으음··· 군인으로서 말입니까···.”
“냉정하게 평가해주시면 좋겠어요.”
아쥬흐가 나를 또 지그시 바라본다. 으음, 이건 거짓을 꿰뚫어보는 눈이군.
하지만 뭐, 이번에도 굳이 거짓을 섞어 말할 필요는 없는 상황이다. 털 끝만 한 거짓도 없이 진심이다. 말했듯이, 아실의 성장은 완연하니까.
“제가 야전군 하나를 맡겨서 파견했습니다. 더 이상 설명이 필요할까요?”
“...네에. 생각해보니 저도 도저히 답이 없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친해도 상단 지점을 맡기지는 않겠네요.”
“그럼요, 그럼요.”
아쥬흐가 웃고, 나도 마주 웃는다. 요새는 서로 마음이 잘 맞는 경우가 많아진 것 같다. 예전에는 내가 눈치도 좀 보고 했던 것 같은데 말이지.
트랑카벨 가문의 군사 전 분야를 위탁받고 있는 내 입장에서, 아실의 존재는 정말 고마운 사령관급 인재이다.
현재, 신생 트랑카벨 영지군의 가장 큰 리스크는 사령관과 그 참모 장교 역할을 할 인재가 부족하다는 것이거든. 내가 모든 전선을 다 맡아 줄 수는 없으니까.
사실은 전 분야의 인재가 부족하다. 갑자기 만명 단위 군대를 만드는데 당연했다. 하지만 연대장도 중대장도 모두 잘 성장해 주었다.
어려운 와중에 균분상속제라는 전통하에 형성된 블랑독 특유의 촘촘한 봉건제가 양질의 장교를 제공해 준 덕분이다. 물론 하늘이 내린 인복이라고도 생각하지만.
그렇게 성장한 장교들은 트랑카벨 영지군의 기간이 되었다. 지금까지의 많은 승리들은 이들의 역할이 없었다면 불가능했겠지.
하지만 사령관급과 참모 장교는 좀 다른 이야기이다.
우선 2개 연대 이상의 부대를 지휘해야 한다. 보병과 기병, 포병 각 병종을 이해하고 협력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하나의 전선을 맡고 상황에 맞춰 진격과 후퇴를 판단하고 책임질 수 잇는 인물. 그리고 그 인물을 보좌할 참모가 없다는 것이다.
만약에 아군이 전통있는 군대였다면, 한직에 묻혀있는 간부들 중에 보물 찾기를 시도할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대부분 임관 1년 이하인 신생 군대니까.
이게 참 어려운 이유는, 능력도 중요하지만 그만큼 권위나 인간관계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당장 나만 해도, 트랑카벨 가문의 전폭적인 지지가 없었다면 아찔하다. 아마 전통적인 블랑독 귀족들의 질시를 받아 갈갈이 찢겼을 지도 모르고.
역사상 얼마나 많은 군대가 지휘체계가 통일되지 않아 붕괴되었던가. 손발이 안 맞는 아군은 때로는 적군보다도 무섭다.
양이 이끄는 사자의 군대보다, 사자가 이끄는 양의 군대가 강하다 하는 것은 극단적이지만, 분명 중요한 시사점이 있다고 본다.
그런 와중, 사령관 아실과 참모장 모리츠의 콤비는 보물과도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지.
아실은 권위 상으로 ‘트랑카벨 영지군 통수권자’이다. 게다가 훈련소 시절부터 많은 병사들과 함께 지냈기에 병사들 입장에서도 전혀 뜬금없는 인선이 아니다.
처음 의도는 ‘병사들은 자신이 충성을 바치는 대상이 누군지 알아야 한다. 직속 상관에 충성하는 군벌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였는데···.
상상 이상으로 아실의 자질이 뛰어났던 거지 뭐.
모리츠 역시 나와 함께하면서 신생 영지군의 초기 단계부터 함께했던 장교라 병사들에게 익숙하고, 여러 차례 성과를 보여줬으니까.
무엇보다 둘 다 병사들에게 인기가 좋다! 게다가 그들은 병사들을 사랑하고, 병사들도 그들을 사랑한다. 돈으로도, 훈련으로도 맺지 못할 훌륭한 유대이다.
아마도 이게 내가 그 둘을 믿고 군대를 맡긴 가장 큰 원인이겠지.
안타깝게도 그 외에는 야전군을 맡겨볼 만한 인재가 없다는 것이 현실이다.
물론 이건 내가 지휘권을 독점하고 있는 상황이니 어쩔 수가 없는 일이기는 하다. 한 번이라도 패배하면 큰일이니 악착같이 해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지금까지는 운 좋게 한 번에 하나의 전선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만약에··· 앞으로 두 곳 이상의 전선을 상대해야 한다면 걱정이 안 되는 것은 아니다.
으으, 만약에 이게 게임이었다면, 혹은 나에게 치트가 있었다면! 스테이터스 확인해서 적합한 인재를 찾으면 됐겠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는다. 사령관과 그 참모들에게는 굉장히 다양한 자질이 필요하고, 이건 쉽게 길러지는 게 아니다.
그나마 지금까지 좋은 모습을 보여줬고, 나름의 경험을 갖춘 인물이라면 블랑독 연맹군 전체에 두 명 정도가 생각난다.
우선, 슈토르히 연대의 실질적인 지휘를 맡고 있는 루트비히. 루트비히 아린 폰 자이트리츠이다. 이 녀석은 분명 뭘 맡겨도 잘 해내겠지.
하지만 아직은 전선 사령관급으로 세우기에는 권위가 부족하다.
다음으로 네그라타 연대의 미카토 바르두 샌잔디스가 있겠다. 실제로 경험이 꽤 많은 것 같은데.
알코자르 토벌전 당시의 브롱보카쥬 전투도, 당시 알코라즈 남작 대신 미카토가 지휘했다면 아군에게는 더 어려운 전투가 되었겠지.
다만 미카토는 입지가 조금 약하다. 한때 적대했던 용병대 소속인데다가.
하지만 샹다메리 전투 때와 같은 활약을 또 해준다면 앞으로는 모르지. 그래도 한동안은 내가 조금 더 고민을 해 봐야 할 것 같다.
###
라몽 드 레뮤즈 백작은 오늘도 평소처럼 짜증을 부리고 있었다.
이전 포로 교환에 참여하지 않은 귀족들 다수가 문의를 해왔기 때문이다. 연락을 오는 것 자체가 큰 문제겠느냐마는··· 아무튼 짜증은 난다.
어째서 얼마 전, 트랑카벨 가문과의 포로 교환에 참여하지 않았던가. 한 번 해도 될 일을 두 번 하는 꼴이 되지 않았냐는 말이다!
고생고생해서 돈을 마련해서는 트랑카벨 가문 좋은 일만 해야 한다는 생각에 다시 한번 열이 뻗친다.
엘랑키아 북부 귀족들 사이에는 이상한 헛소문이 돌고 있다고 한다. 최근 있었던 전투 이후 트랑카벨 가문이 본성을 드러냈다는 소문이다.
오랫동안 트랑카벨 가문이 키워온 악마가 각성했다던가. 악마의 가호를 받은 트랑카벨의 군대에는 총알이 통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악마의 힘을 빌리는 제물로는 포로들이 바쳐진다는 말이다.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되려나 싶어서 포로 석방에 응하지 않았던 가문들이 서둘러 나선 것이다.
공포에 하얗게 질려, 위의 이야기를 하면서 진지하게 묻던 어느 백작가문의 집사가 그런 말을 했었다.
"이런 현실감각 없는 등신 버러지새끼들이!"
그때는 간신히 참았지만, 집무실로 돌아와 자료를 보고 있었더니 갑자기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욕설을 내뱉으며 탁자를 내리친다.
이런 머저리들이 엘랑키아의 지배자들이다. 다음 세대를 짊어질 대들보들이다.
그러니 법황의 헛소리에 응해서는 남쪽 촌구석 얼간이들 때려잡겠다고 귀한 아들이며 남편이며 보내서는 이 고생이지.
아 졌으면 다 뒤지든가 포로는 또 왜 잡혀서 일을 만드냐고.
"아으으으으!"
분노를 참을 수가 없어 다시 책상을 내리친다.
안타깝게도 드 레뮤즈 가문에 대대로 내려오는 고풍스러운 참나무 책상은 이 정도로는 끄떡도 없어 주먹만 아파진다.
트랑카벨 이 자식들은 또 왜 유능한 거야. 국왕이 정신 나가서 군대까지 보냈으면 좀 찌그러지던가. 그걸 또 굳이 싸워서 이겨서는··· 하···.
"배, 백작님. 찾아오신 분이 계십니다."
라몽이 씩씩거리며 분을 삭이는 사이, 시종이 찾아와 방문자를 알린다. 그러고보니, 오늘 찾아오기로 한 이웃나라 라솔의 사절이 있었다.
이름이 뭐라더라, 무슨 공작이었는데. 라솔은 엘랑키아에 비해서 영토가 작게 쪼개져있고 작위가 많다.
그래서 라솔 왕국의 공작이라 해도 권위나 세력이 엘랑키아 백작만도 못한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런 쭉정이 공작이 아닌 모양이다. 라솔 국왕의 친동생이랬나. 또 뭔 일로 온 건지. 라솔 놈들이라면 보나마나 국경 문제 아니면 이스키비르 강 관련 문제겠지.
무모한 국왕놈은 굳이 전쟁을 할 거면 트랑카벨이 아니라 라솔의 머저리들 머리통이나 부숴 놓아야 했다. 빌어먹을 놈들.
"알겠다. 들어오라 해라!"
"접견실로 안내할까요?"
"아니, 집무실에서 보겠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여기서 적당히 처리하면 되겠지. 피곤한 놈들.
일이 해도 해도 끝이 없었다. 욕심만 많은 라솔의 돌대가리들에게 쓸 시간 따위는 없었다.
"백작님, 에드메르 산타로 데 카르도라 공작님이십니다.”
머저리같은 라솔 놈들. 이름은 또 왜 그 따위로 긴 것인지. 잉크가 아깝지도 않은 것이냐.
하여간 마음에 드는 구석이 단 하나도 없다. 생각해보니 트랑카벨 놈들의 유일한 장점은 이름이 짧다는 것이었다.
“라몽 공,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처음 뵙겠소. 오렌시아 기사단의 에드메르 산타로 데 카르도라요.”
“오렌시아··· 기사단이요?”
라몽은 생각한 것과 너무도 다른 손님이 입장하여 깜짝 놀랐다. 라솔 국왕의 친동생인 어디어디의 공작이라니, 당연히 외교 사절이라 생각했다.
휘황찬란한 비단 옷으로 온 몸을 감싸고 황금과 보석으로 몸을 장식한 인간일 것으로 생각했지.
“그렇소이다. 오렌시아의 성처녀 마리암의 샘을 수호하기로 서원한 수도사들이오.”
시커먼 바탕에 눈물을 흘리는 여인의 모습이 그려진, 외투를 걸친, 완전 무장의 기사가 들어올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빌어먹을 종교쟁이들.’
이야기가 길어지고 복잡할 것 같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온다.
평범한 밭뙈기 경계석 논쟁, 이스키비르 강에 새로 생긴 섬의 소유권 논쟁 따위와는 다를 것 같았다.
오늘도 편히 자기는 틀린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