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1. 타는 냄새
나와 첼레스티나는 펼쳐진 블랑독의 큰 지도에 각종 기물을 표시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쪽 보급품 기록 좀 챙겨줄래?"
"네에, 콘도티에레!"
다름 아닌 북동부 블랑독을 향한 진격 계획 작성이다.
워낙 오랫동안 '효율적으로 방어하기' 계획만 세웠다 보니 좀 낯설게 느껴지기도 한다. 전쟁 통에 이런 생각을 하면 안되겠지만, 솔직히 재밌게 느껴지기도 하고.
공세계획의 약 절반은 병참이다. 진격로 선정까지도 병참과 유관하다고 보면 절반 이상이 병참이라 할 수 있겠다.
장대한 전략과 전술만이 군사이며, 하찮은 보급 따위는 군사가 아니라 생각하는 지휘관은 반드시 패망한다.
나는 패망하기 싫다. 그래서 상당히 꼼꼼하게 준비하고 있다.
그리고 이번 병참 계획에는 특별한 점이 하나가 있었다. 성전군 점령지 수복 과정에서 현지 주민들이 식량 부족에 빠져 있을 가능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블랑독 연맹군의 상당수는 트랑카벨 가문의 영토 밖 출신이다. 당연히 북부 출신들도 많을 것이다.
그런데 배가 고파 아우성치는 주민들을 놔두고 나몰라라 작전 진행이 가능할 리가. 그래서 다소 넉넉하게 계획을 세우고 있다.
점령지 주민들이 식량난에 시달릴 것이라 추측한 이유도 있다. 아넥시에서 노획한 성전군의 물자 중, 강제 공출의 흔적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아마 무자비한 학살이나 파괴를 동반한 약탈은 아니었겠지. 그래도 '신성한 전쟁에 참여하여 신실함의 증거를 보여라' 어쩌고 하면서 각종 물자를 빼앗아 갔겠지. 이런 놈들 하는 짓은 뻔하니까.
아넥시의 노획 물자 하니, 따로 언급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걸 대체 여기까지 어떻게 옮겼나 싶을 정도로 막대한 양의 군수 물자였다.
그 대부분은 아직 뜯지도 않은, 타비뇽의 상단 납품 도장이 찍힌 상자 그대로였다. 그런 상자가 방수천에 덮여 말 그대로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보통 전쟁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에게도 '전투에 승리해 적 몇천 명을 격퇴했다'라고 하면 곧바로 이해한다.
하지만 '전투에 승리하여 적 야전군의 물자집적소를 탈취했다'라고 하면 반응이 그렇게 좋지는 못하다. 직관적으로 감이 딱 오지 않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그게 일반의 인식과는 조금 다르다. 전쟁을 오래 지속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전자보다 후자의 의미가 더 큰 경우가 많으니까.
뭐 적 입장에서는 아넥시를 점령해서 보급 기지로 활용할 생각이었겠지. 아마도 다음 목표였을 벨모제와의 거리를 생각하면 나쁜 선택은 아니었을 테고.
물론 무사히 아넥시를 점령했다면 말이지.
그래서 의도야 어떻든 간에, 그게 몽땅 우리 게 되었다 이 말이다.
적은 아마 곤란을 겪겠지. 물자를 살 돈이 있더라도, 당장 없는 물자가 뿅 하고 생겨나지는 않을 테니까.
전략의 기본은 적이 싫어할 법한 일을 하는 것이다. 물자 탈취는 적병 직접 살상 만큼이나 싫어할 법한 일이고.
이번 전쟁에서의 승리에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은 분명하다.
“실례할게요, 콘도티에레 에트.”
밖에서 아쥬흐의 목소리가 들린다. 아, 그리고보니 아쥬흐가 시간이 되면 들른다고 했었지.
그녀는 우리 병사들의 정신적 지주인 성녀이며, 의료 보건적 지주인 의무대장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금전적 지주, 트랑카벨 가문의 재무 책임자였으니까.
“아쥬흐 야앙!”
내 충실한 부관, 길찾기 말고는 모든 게 정말로 완벽한 팔방미인 첼레스티나가 아쥬흐에게 안긴다.
키가 큰 편인 첼레스티나가 자신보다 작은 아쥬흐에게 달려들자 아쥬흐도 놀란 모양이다.
“어이쿠, 첼레스티나?”
“아쥬흐 양! 못된 성녀에게 험한 꼴을 당하셨다고 들었어요! 세상에! 어떻게 그런 짓을!”
“후후,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첼레스티나.”
“우웅, 아니에요, 이건 그냥 걱정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에요! 복수를! 악마의 혀를 가진 자들에게 정당한 심판을! 피의 복수를!”
“체, 첼레스티나···.”
첼레스티나는 나 대신 급하게 처리할 일이 있어서 좀 늦게 오긴했지만···.
적 성녀의 도발 방문 소식을 듣고 굉장히 화를 냈었다 한다. 너무 화가 나서 일이 잘 잡히지 않았다고도 했다.
그런 것 치고는 무사히 잘 마무리하고 돌아와줘서 정말 다행이지만. 뭐 보고서를 보니 역시나 완벽했고.
“콘도티에레! 저, 전부터 관심이 있던 게 있어요.”
“음··· 뭔데?”
“네에, 고전적인 처형 방법이에요!”
“고오전? 처어형?”
뭔가 또 이상한 소리를 할 까 봐 걱정이 되기 시작하는데···.
“사람을 묶어 놓고, 그 앞에 넓은 탁자를 놓는 거예요.”
“그리고?”
“아랫배를 살짝만 째서, 거기로 내장을 꺼내는 거예요! 그리고 창자를 탁자에 늘어놓고 보여주는 거죠! 자신의 뱃속에 연결 된 상태로, 기름과 피가 번들거리는 자기 창자가 햇빛에 말라가는 것을!”
“아니 갑자기 뭔 소리를 하는 거야!”
첼레스티나의 감성은 가끔 미묘하게 리얼한 정도로 폭력적이고 참혹하다.
···그 미묘하게 리얼한 정도가 정말 해버릴 것 같아서 무섭다니까.
“콘도티에레는 알고 계신가요? 사람의 창자의 길이는 자기 키의 몇 배나 된대요! 책에서 그랬어요!”
“그거야 나도 알··· 아니 별로 알고 싶지 않아. 그만 해!”
“너무하셔요 콘도티에레··· 우리 소중한 아쥬흐 양을 그렇게 괴롭힌 자들인데요? 창자를 뱃속에 온전히 두고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게 하실 건가요?”
“아니 창자에 그만 집착하라고 좀···.”
“하지만 가장 길고 아랫배 외부에 있어서 꺼내기가 좋은 내장이라고 책에서 그랬는 걸요?”
“알았으니까 내장은 그만 꺼내.”
뭐 하는 인간이야 책에 그딴 내용을 쓰다니. 애들이 보고 따라하려고 하잖아 진짜.
아 정말··· 그나저나 아쥬흐··· 양?
“아하하하!”
아쥬흐는 몸을 살짝 돌리고, 배를 잡고 웃고 있었다. 첼리스티나도, 나도 놀라서 아쥬흐가 웃는 모습을 멍하니 보았다.
낯선 모습이었다. 언제나 침착하고 냉정한, 마치 장인의 손에 의해 완벽하게 다듬어진 보석과도 같았던 평소의 모습이 아니다.
좀 더, 활기차고 날 것 그대로의 야생화와 같은.
그래서 더 아름다운 모습이다.
언제 보았더라, 그녀가 남의 시선을 신경쓰지 않고 얼굴을 찡그리며 웃는 것은···. 최근 일인데.
“미안해요, 웃어서. 그게··· 두 사람이 너무 고맙고, 안심도 되고 해서 그랬어요.”
그녀는 곧 원래의 모습을 되찾는다. 그래도 시원하게 웃은 흔적인지, 뺨에 살짝 홍조가 귀엽다.
“첼레스티나, 신경 써 줘서 정말 기뻐요.”
“에헤헤, 아쥬흐 양, 저도 기뻐요!”
아쥬흐가 첼레스티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하지만, 복수나 경고 등의 목적으로, 불필요하게 고통을 주는 처형 방식은 안 돼요.”
“네에? 그래도··· 나쁜 녀석들인데요! 창자 뽑기 정도는!”
“그래도 저는 지양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첼레스티나도 따라 주시면 좋겠어요.”
“네에···.”
어휴··· 간신히 진정됐다.
첼레스티나는 불가사의한 친화력과 괴상한 텐션을 둘 다 가지고 있다. 그래서 자칫 대화의 주도권을 넘겨줬다가는 주제가 우주로 가버리는 수가 있다.
“미안해요, 콘도티에레 에트. 병참 정보를 확인했으면 했는데 방해를 해버렸네요.”
“아뇨, 아닙니다! 아쥬흐 의무대장님은 당연히 확인하셔야죠. 다 첼레스티나 잘못입니다.”
“네에··· 첼레스티나 잘못입니다··· 죄송해요오···.”
첼레스티나의 모기 소리만 한 사과를 끝으로, 우리 눈은 펼쳐진 블랑독 지방 지도로 돌아갔다.
우리, 블랑독 연맹군은 이번 전쟁이 시작된 이후 거의 처음으로, 대대적인 공세를 준비하고 있었다.
물론, 성전군이 해왔던 것처럼 색칠이라도 하듯 차근차근 마을과 마을 지역과 지역을 점거하는 방식은 아니다.
그렇다 해도 주요 거점들 사이에서 우선순위를 정하고, 진격로에 맞춰 부대를 배치하고 병참 소요량을 계산하는 것은 큰 일이다. 병력이나 물자나 제한된 숫자니까.
수비전의 경우는 보급 거점을 정하고 수비군의 숫자를 따져서 물자 소모량을 예상할 수 있다.
하지만 공격전은 이야기가 좀 다르다. 제대로 관리해주지 않으면 후방엔 물자가 썩어 넘치고 전방에는 부족해지는 상황이 나온다.
···뭐 블랑독은 그리 넓은 땅은 아니고, 주민들도 우리에게 우호적이니 그렇게까지 되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아직 성전군은 병력이 꽤 많은 것으로 알고 있어요.”
아쥬흐가 질문을 해온다. 그렇지, 단순히 숫자로만 따지면, 아군이 싸운 성전군은 전체의 절반 정도 밖에 안 된다.
남은 병력은 결코 적은 수는 아니고, 질이야 어떻든 간에 숫자는 오히려 더 많을 수도 있었다.
“점령지를 하나 하나 탈환하려면 쉬운 일이 아니겠네요··· 희생자도 많이 나오고요.”
아쥬흐의 표정이 흐려진다. 그래서 나는 나답지 않게 다소 자신감을 과장해서 말한다.
“그래서 이번에는 최대한 단기간에 싸워 이길 생각입니다.”
“최대한 단기간에··· 이겨요?”
나는 손가락을 올려, 지도의 북쪽 끝을 따라가다가, 마침내 지도를 벗어났다. 까끌까끌한 나무 테이블 표면이 손가락에 느껴진다.
“여기, 뭐가 있는지 아시나요?”
“타비뇽인가요?”
그렇다. 엘랑키아 왕국 동부의 대도시 타비뇽. 법황의 성전군이 출정 직전에 본진을 두었던 곳이다.
아넥시에서 노획한 물자에 타비뇽의 상단 납품 마크가 찍혀 있었다는 데서 알 수 있지만, 지금도 후방 보급기지라고 할 수 있겠다.
“적은 엄청난 양의 물자를 아넥시에서 잃었습니다. 지금은 전부 우리 차지지요. 첼레스티나, 서류가 거기 있어?”
“네에, 여기 목록이 있어요오.”
“한번 보시지요. 적은 병력을 많이 잃었으나 여전히 대군입니다. 약탈로도 한계가 있으니 타비뇽에서 다시 물자를 보급하려 할 겁니다.”
아쥬흐는 첼레스티나가 작성한 노획품 목록을 보더니 눈이 조금 커졌다. 그녀 조차도 놀랄 정도의 물량이다. 이거 조금 뿌듯한 걸.
“이 정도의 양을 단기간에 다시 조달하려 한다면··· 타비뇽 뿐 아니라 엘랑키아 동부 지방 물가에 영향을 끼칠 정도네요.”
“허어··· 그 정도인가요?”
“네. 장기간 보관이 가능한 식재는 제한되어 있는데, 그게 군수품으로만 쓰이는 건 아니잖아요?”
역시 아쥬흐, 날카로운 지적이다. 같은 돈을 줘도 더 적은 식재밖에 구하지 못한다는 이야기겠지.
아무튼, 전략 지도로 돌아가자. 나는 손가락으로 아넥시 위치에서 북쪽으로 휘익 그으며 말한다.
“그래서 저희는 타비뇽으로 진격할 겁니다.”
“타비뇽··· 흐음, 조금 곤란하네요. 타비뇽의 위트라스 가문은 우호까지는 아니지만 적대 가문은 아닌데···.”
그녀의 표정은 복잡해 보인다. 뭐, 성전군에 자원 퍼다 주고 쏠쏠하게 돈 만지고 있으니 꼴보기 싫기는 하지만 확실히 적대 가문은 아니니까.
“아, 타비뇽을 공격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건 저희도 곤란합니다. 이 시점에서 괜히 엘랑키아 정부를 자극하고 싶지는 않거든요.”
“아아, 이해했어요. 직접 공격하는 게 아니군요. 타비뇽으로의 길을 끊으려 하시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물론 소부대로 남쪽에서도 계속 괴롭혀야겠죠. 견디지 못한 적은 어쩔 수 없이 우리 진격을 막으려 들 겁니다.”
혹은 그냥 도망칠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블랑독에서 적을 몰아내는 것이 최우선 사항이니까.
“그래서 단기간에 적을 전장으로 끌어낼 수 있다, 라는 말씀이시네요.”
“맞습니다.”
역시 아쥬흐는 이해가 빨랐다.
나도 전장에서 여러 번 느껴봤지만, 보급로가 끊길 지도 모른다는 것은 지휘관에게 엄청난 공포이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로.
그러니, 적도 분명 그렇겠지. 게다가 성녀인지 나부랭인지를 보내서 도발까지 한 와중이 아닌가? 결전을 서두를 것이라 볼 근거는 충분하다.
법황의 성전군은 어째 만날 때마다 지휘 스타일이 달랐다. 대부분은 지리멸렬했고··· 가장 날카로운 것은 델레망드 삼각주에서 상대했던 적장이지만.
포로를 신문해도 누구인지 잘 모르는 것 같았다. 그 정도라면 아마도 서열이 떨어지는 지휘관이겠지. 델레망드에서 이끌었던 부대 숫자도 그렇게 다수는 아니었고.
정상적인 판단을 하는 지휘관이라면 물러나려고 할 것이다. 때와 방식의 문제일 테고.
타비뇽 진격은, 그걸 슬쩍 뒤에서 밀어 주는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
제발 적당히 끝내고 이제 그만 좀 가 줬으면 좋겠는데 말이다.
원래 지들 땅도 아니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