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5. 성녀 대 성녀
아넥시에서의 참패.
대륙 전체의 질서에 영향이 갈 정도의 사건이기도 했지만, 특히나 성전군에 끼친 영향은 지대했다.
선두에 섰던 정예 야전군이 박살났다.
수로 따져 거의 2만에 이르는 대군. 이것만으로도 블랑독 연맹의 전군과 비등할 정도의 대군이다.
이대로 유유히 이단자들의 영토로 진격하여, 이단의 수괴 트랑카벨의 심장에 칼을 꽂았다 해도 아무도 의문을 가지지 않을 정도의 병력이었다.
그런데 그 병력이 한나절만에 섬멸되었다. 요행히 질서를 유지해 철퇴에 성공한 부대가 없지는 않다. 그러나 반 수 이상이 전장에서 사망했다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은 어쩔 수 없었다.
그렇다고 치열한 격전이 있었던 것도 아니요, 압도적으로 강대한 적과 맞서다 장렬히 전사한 것도 아니다.
수천 기 정도의 적군에 기습당해, 아무것도 못하고 가축처럼 쫓겨 다니다 일방적으로 도륙당했다고 한다.
그렇다고 목표인 아넥시 요새를 함락이라도 시켰나? 못 시켰다.
하다 못해 적군에 통렬한 타격이라도 입혔나? 못 입혔다.
너무도 처참한 결과였다.
물론 성전군은 워낙에 수가 많아 아직도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후방 병력이 많이 남아있다.
하지만 이는 숫자로만 존재하는 병력이며, 이제와서는 이 숫자가 그만큼의 전력으로 치환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공포에 질린 나머지 성전군은 온갖 핑계를 대며 이리저리 도망치려 하는 상황이었다.
자칫하면 아직도 1만을 훌쩍 넘는 나머지 성전군 모두가 싸워보지도 않고 패잔병의 대열에 합류할 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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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 조금 피곤하구나.”
성전군의 총책임자, 아르누아 루케 추기경의 보좌주교인 페르곤이 의자에 몸을 깊게 묻었다. 딱딱한 나무의자가 등을 따갑게 찔렀다.
아넥시 공방전에서 처참하게 패하고 도망치고, 간신히 재규합한 성전군에는 모든 것이 부족했다.
병력, 물자, 무기. 심지어 용기와 미래를 위한 계획까지.
물론 가구 역시 부족한 것 중 하나였다. 때문에 사실상 추기경부의 서열 2위라고 할 수 있는 페르곤 보좌주교 조차 불편한 의자가 배정된 것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그나마 주교 쯤 되니까 의자라도 있는 것이고.
“오늘은 타비뇽에서 온 군납 업자들과 회합이 있었다. 다들 불안해하고 있었고··· 대금을 제대로 받을 수 있는지 걱정하고 있더구나.”
지친 목소리로 말하는 페르곤 보좌주교, 자신의 친형을 보면서 나브리치오 델 로카라소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아넥시 전투의 승리를 가져오겠다 형에게 호언장담해놓고, 전혀 지키지 못했던 것이다.
자신이 자랑했던 저격 능력은 큰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상대 측에 여기 대응할만큼 뛰어난 판단력을 가진 누군가가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어차피 자신은 성전군 내부에서 아무런 지위도 없는 백의종군에 불과했다.
그저 형인 페르곤의 배려를 받아 약간의 권한을 가지는 객원 장교에 가까워 실제로 책임을 질 일은 없었으나···.
그에게는 성전군 전체의 칭찬이나 법황의 포상보다, 형과의 약속을 지키는 것이 더욱 중요했다. 그래서 더욱 괴롭게 느껴졌다.
“다행히 법황 성하께서 내려주신 내탕금이 남아있어 아직은 괜찮았다. 하지만 군수참모에게 있던 자금과 물자는 전부 적에게 남아갔다 봐야겠지···.”
페르곤의 흐린 목소리는 사실 성전군의 종말을 말하고 있었다. 나브리치오도 이리저리 전장을 떠돌다 깨달은 단 하나의 절대적인 진실이 있었다.
바로 돈이 없는 군대는 전쟁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바로 지난 주 까지만 해도 전혀 상관이 없었을 말이다. 성전군은 아마도 대륙에서 가장 부유한 군대였을지도 모른다.
화려한 군장을 갖추고 대륙 전역에서 모여든 군주와 기사들이 병영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장교급들의 식사에는 항상 은식기가 나왔었다.
하지만 단 한번의 패전이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산처럼 쌓인 금은보화까지는 아니더라도 넉넉하던 군자금이 사라졌다. 멋지고 화려한 갑주 차림의 군주와 기사들은 초라한 패잔병이 되어버렸다.
심지어 물건을 팔고 돈을 받으면 그만인 군납 업자들까지도 동요하는 판이다.
“나브리치오, 너라면 어떻게 하겠느냐 이 상황을.”
“예, 형님···.”
나브리치오 델 로카라소는 잠시 고민한다. 무엇이라 대답해야 할지. 사실 답은 정해져있으나···.
“패배로 인해 생긴 문제이니, 승리로 상황을 돌릴 수 있습니다. 지금부터라도 조심스럽게 적이 유리한 상황을 피해가며 싸운다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아직 성전군에는 병력이 많이 남았지 않습니까?”
최대한 합리적으로, 하지만 자신감 있게 대답한다. 그 말에 페르곤 보좌주교는 살짝 웃는다.
“좋은 말이구나. 물론 아직 우리 군에는 전투에 참여도 안해본 병력이 많긴 하지.”
“그렇습니다. 아직도 적은 아군에 비해 수적 우세를 장담하지 못할 정도의 대군입니다.”
“그래··· 하지만 그 병력을 다시 집결시킬 수 있을지···.”
페르곤은 몇몇 군주와 대장을 만나, 그들의 완곡한 귀국 요청을 듣고 오는 길이었다.
물론 대놓고 가망 없는 성전군에서 빠지고 싶다 말하지는 않는다. 그저 갑자기 무슨 일이 생겨서, 부득이하게 본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그런 이야기들.
전후 상황이야 어떻든, 아넥시의 아비규환에서 휘하 병력을 모두 살려서 돌아온 아소모 델 안프로니오 경도 그랬다.
그는 아예 퇴각을 건의하며 자신이 퇴각의 최후미를 맡아 싸우겠다는 대담한 말까지 해왔으니까.
아소모 경은 자신의 영토에서 발생한 고갯길 통행권 분쟁 때문에 법황의 협력이 반드시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쉽게 발을 빼지 못하고 있을 뿐, 지난 전투에서 아군이 불 앞의 얼음처럼 녹아내리는 꼴을 보았으니... 더더욱 마음이 급한 것이 분명했다.
“집결령을 내려 둔 상황이니··· 앞으로 어떻게 흘러가는지 알아보도록 하자꾸나. 라모리 스텐던 경도 돌아오고 했으니.”
“알겠습니다, 형님.”
나브리치오는 법황이 임명한 총사령관이라는, 라모리라는 이름의 용병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넥시에서 아군이 궤멸할 때 그는 어디에 있었다는 말인가?
성직자와 용병, 어찌보면 이질적인 두 형제는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그때, 밖에서 이변이 벌어지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제가 보고 오겠습니다, 형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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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전까지만 해도 온통 침울하고 칙칙한 반위기였던 성전군 진영에는 활기가 넘치고 있었다. 그것도 대단히 뜨겁고 열정적인.
"지난 패배는 신의 뜻을 따르지 않는 자들이 나섰기 때문이다!"
"주신의 군대를, 주신의 손으로!"
"주신의 군대를, 주신의 손으로!"
"주신의 군대를 주신의 손으로! 와아아아!"
한 무리의 병사들이 핏발 선 눈으로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어찌나 열성적인지, 모두가 땀을 뻘뻘 흘리며 치켜든 팔과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는 목에 힘줄이 설 정도였다.
"주신의 군대를, 주신의 손으로!"
수백 명은 되어 보이는 무리의 맨 앞에는 말에 오른 성녀가 있다. 법황령의 검은 꽃, 랑시아 아스트로메다.
그녀는 주변의 기세에 휘둘리지도 않고, 무리를 선동하지도 않았다. 그저 고고하게 걸음을 옮길 뿐이었고, 성난 군중은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엄청난 기세인데요, 대장."
"그렇군."
다소 무질서하게 되는대로 자리를 나눈 숙영지 구석. 법황이 임명한 사령관, 라모리 스텐던은 휘하 기병 대장인 울터 콜린스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성녀가 나서니까 분위기가 이렇게까지 바뀌는 걸까요... 당장 탈영이라도 하지 않을까 걱정되던 녀석들이 태반이었는데요."
"그랬었지."
라모리는 울터의 말에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마찬가지로 생각하고 있었다.
성전군은 패했다. 바로 철수하지는 않더라도, 이전과 같은 기세를 회복하지는 못할 것이었다.
아마도 라모리에게 남은 임무는, 그나마 남은 병력이라도 잘 운용해서 한명이라도 더 살려 블랑독 밖으로 빼 내는 것이리라 생각했다.
이기고 있는 군대의 지휘는 누구나 하고 싶어하지만, 지고 있는 군대의 지휘를 누가 하려고 들겠나. 그러니 이 영광도 희망도 남지 않은 임무는 라모리가 떠안게 될 것이 분명하다 생각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성전군과 블랑독 북부 주민들이 완전한 적대 상황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성전을 위한 세금이라는 명목으로 재산을 갈취하고 종교적 무결함을 증명하라며 귀찮게 굴기야 했지만. 그래도 정순파 처단이 아니면 무분별한 약탈과 학살은 '최소화'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니 신속하게 준비해서 철수하면 그렇게 큰 전투는 없으리라.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렇게 쉽게 끝나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무엇이 성녀의 추종자들을 저렇게 빠져들게 하는 걸까요? 역시 외모 때문일까요?”
“...성녀는 보이는 대로의 여자는 아니다.”
“예, 대장? 뭐라 하셨습니까?”
“음··· 아니다.”
라모리는 묵묵히, 이번 출정에 앞서서 법황을 알현했을 때 들었던 내용을 되새겨본다.
랑시아 아스트로메다는 단순히 신실하고 아름다운 이름 그대로의 성녀는 아니었다.
법황은 얼마 전, 성전을 선포하고 아르누아 루케 추기경에게 정순파 토벌의 책임을 내렸다. 그리고 수많은 군주들과 기사단, 수도회를 지원으로 보냈다.
하지만 그 중에서 개인을 법황 자신이 직접 지명해서 파견한 이는 딱 두 명 있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라모리 스텐던 자신이었다.
라모리 자신이 특별히 신실하거나, 교단을 위해 용병단을 운영했던 것은 아니다.
지금 생각해도, 그가 교단과 좋은 관계를 쌓게 되고 이 자리까지 올라온 것은 신기했다.
아마도 그가 나름 만족과 고마움을 아는 남자였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교단의 의뢰에 항시 성실하게 임했고, 성직자들을 존중하는 ‘척’이라도 했으니.
덕분에 휘하 용병단도 이만큼 크게 성장할 수 있었고 법황에게 직접 성전군의 총대장으로 임명될 수도 있었으니까.
그리고 라모리를 제외한, 두 명 중의 나머지 하나가 바로 성녀, 랑시아 아스트로메다였다.
법황은 라모리에게 그렇게만 알려주었다. 구체적인 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 그저, 이번 성전에 주신께서 라모리의 손을 빌어 행할 일이 있을 거라고만 했고.
상대방인 성녀 또한 라모리와 같은 말을 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한번도 그런 이야기를 나눠본 적 없었으니까.
아무튼 법황은 그 자리에서, 교단이 외딴 변방에서 찾아내어 성장시킨 성녀에 대한 이야기를 해줬었다. 아니, 성녀들이라고 해야하···.
“라모리 스텐던 경.”
술렁. 잠시 라모리가 상념에 잠겨있었던 동안, 말에서 내린 성녀 랑시아가 이끄는 시끄러운 대열이 그의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부하들과 함께 격의 없이 대충 아무 상자에나 걸터앉아 있던 그로서는 허를 찔린 느낌이었다.
초점이 또렷하고 큰 눈이 라모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검은 눈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제 보니 짙은 갈색으로 보인다. 인형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상아처럼 하얗고 매끈한 피부와 무표정한 얼굴.
"얼마 전, 법황 성하를 알현하고 왔습니다. 그때 성하께서는 상황이 어렵게 돌아가면 라모리 경을 찾아가라고 하셨지요."
"...그러셨습니까."
성녀 랑시아를 만나는 것은 처음이 아니다. 어째서 처음 만났을 때는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까. 그때는 아직 상황이 어렵지 않았기 때문인가.
"아르누아 루케 추기경께서 와병하시면서 저에게 자신의 권한을 위임하셨습니다."
교단의 성녀는 대주교에 준하는 성직이다. 다만 위계상 그렇다는 것이고 실제로 권한을 행사하는 경우는 많지는 않다. 존중하고 존중받는, 마스코트와도 같은 직위라 여기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랑시아는 존중 받고만 끝내지는 않으려는 모양이다.
"랑시아 아스트로메다, 법황 성하와 추기경단에 의해 공인된 유일한 '살아있는 성녀'가, 프루덴티우스 교황 성하와 아르누아 추기경 예하의 권위를 빌어 전달합니다!"
성녀의 목소리는 쩌렁쩌렁한 목소리는 아니다. 그러나 또렷하고도 멀리까지 전달되며, 듣는 이의 관심을 끄는 힘이 있었다.
잠시 말을 끊었던 그녀가 말을 잇는다.
"라모리 경, 성전군의 지휘권을 받아주세요. 이 권위는 법황 성하께서 부여하신 것이며, 모든 성전 참가자는 라모리 경의 명령을 따라야 합니다."
환호. 축하. 함성소리에 귀가 먹먹할 정도였다. 뒤에서 용병단 소속의 병사들이 자신의 어깨를 두드리고 팔을 끌어당기는 것이 느껴진다.
하지만 어째서일지, 어쩐지 가슴 한구석이 서늘하다.
이제와서 지휘권이라니···.
이론상 원래 라모리의 것이었다. 처음부터 법황에게 임명 받은 사령관이었으니까. 아무도 존중을 안 해줬고, 라모리 자신도 그다지 탐을 내지 않았지만.
게다가 지금 성녀의 어깨 위에서 빛나는 하얀 빛은 분명한 기프트의 발동 신호이다. 대체 무슨 기프트일까. 설마 사람의 생각을 조종하는 정신 지배 계통의 스피리티라면....
지금 라모리 자신이 가진 성녀 랑시아에 대한 어정쩡한 호감 조차도 만들어진 감정일지도 모른다.
대체 이 속을 모를 검은 머리 미녀의 가슴 속에는 어떤 생각이 들어있을지.
라모리는 알고 있다. 법황청의 성녀, 아니 성녀 '들'은 그냥 신실하고 열성적인 고귀한 성처녀들은 아니다.
법황은 어째서인지 성직자도 아닌 라모리에게 그런이야기를 했었다.
그렇다면... 성녀는 법황에게 무슨 이야기를 들었을까? 라모리 자신에 대해서는?
"...명 받들겠습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어차피 선택지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