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4. 성녀 대 성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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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성스러운 전쟁’의 본질은 정순파에 대한 토벌전이다.
물론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안다.
대부분 참가자들의 목적은 풍요로운 블랑독의 영지이다. 입장에 따라서 자기 차지로 하든, 약탈을 하든 다르겠지만. 특히나 부유한 트랑카벨 가문의 도시들이 주 목적인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렇더라도, 이 수많은 욕심쟁이를 한 자리에 불러 모은 것은 정순파 토벌령이다. 세상에 핑계 없는 무덤 없듯, 명분 없는 전쟁도 없는 법이니까.
그래서 오해하기 쉬운 것이, 블랑독의 주요 종파가 정순파일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아무리 정순파가 많은 블랑독이라고 해도 전체 비율로 보면 정순파는 소수 종파에 속한다. 오히려 대다수는 성전군과 같게 법황청에 기반을 둔 교단의 가르침에 순응하여 살고 있었던 것이다.
유독 정순파 비율이 높은 아넥시라는 특이한 상황이 있지만, 이는 정말 예외 상황이다.
보통은 정순파 비율이 높은 곳이라 해도 사 분의 일을 넘기 힘들었다. 특히 트랑카벨 가문의 영토는 더 낮아서 많아 봤자 오 분의 일 정도이다. 듣기로는 델레망드가 가장 많고, 몽세나가 가장 적다고 하던가.
무엇보다 통치자인 트랑카벨 가문의 세 사람이 정순파에 별 관심이 없었다. 그토록 명석한 아쥬흐도 전쟁 이전에는 잘 몰랐으니까 말이다.
트랑카벨 가문은 어쨌든 소수파인 정순파를 탄압해 전쟁을 피하는 선택은 하지 않았다. 만약 정순파를 몰아냈어도, 없는 정순파를 찾아내라며 전쟁은 시작됐을 것이다.
트랑카벨의 백성들 역시 자신들이 정순파라서가 아니라, 고향과 가족을 위해 무장하고 자신을 지켰다.
그래서··· 아쥬흐는 자신에 대한 성녀 숭배를 상당히 조심스럽게 여겼다. 이미 좋다 싫다의 문제를 넘은 것은 당연했고 말이다.
처음 아쥬흐를 성녀로 여긴 것은 아넥시의 정순파 주민들이다. 정순파 특유의 완성자 교리에 따라 자연스럽게 성녀 숭배로 옮겨간 것이다.
정순파에게 완성자란, 단순한 종교 지도자의 의미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 주신의 의지를 완전히 체현하고 교리적, 도덕적으로 ‘완성’된 인간이라는 뜻이 더 강하다.
그게 몇 차례의 전투를 거치면서··· 정순파가 아닌 병사들 사이에도 널리 퍼졌던 것이지.
뭐,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다.
굳이 신경을 쓰지 않아도 손해볼 입장이 아닌 고귀하고 아름다운 귀족 아가씨가 말이다. 평소라면 얼굴 볼 일도 없을 그런 구름 위의 존재가 와서는 다 죽어가는 산송장들을 벌떡벌떡 잘도 살려낸다.
어두운 밤, 헐떡대는 부상병에게 상냥하게 말을 걸며 아무렇지도 않게 피고름을 짜내던 모습을 보았다. 고열로 제정신이 아닌 병사의 피투성이 머리카락을 상냥하게 쓰다듬으며 말 거는 모습을 보았다.
부상을 입었던 당사자나 그 동료들이나. 그들의 경험은 실로 ‘기적’이 아닐까?
아니 솔직히 이게 성녀지 뭐가 성녀지? 나도 입장에 있으니까 어디가서 자랑을 못하는 거지. 내가 어? 아넥시 성녀전설의 탄생을 바로 옆에서 지켜본 몸이라 이 말이다.
···물론 아쥬흐 본인이나 트랑카벨 가문에서 성녀 숭배를 프로파간다로 삼기를 원치 않는데. 내가 함부로 나설 수 없다는 게 가장 크고.
그리고 아쥬흐가 조심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자칫하면 성녀 숭배는 이단 판정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체계화되면 안된다. 그냥 병사들 사이에서 도는 농담 정도여야 한다. 엄한 상관을 악마라고 부르더라도 실제 지옥에서 온 존재는 아니듯 말이다.
그런데 그건 아쥬흐의 생각이고··· 어느새 아쥬흐에 대한 성녀 전설은 우리 군 사이에서 대세가 되어버린 모양이다.
“어휴, 이 답답한 인간들아! 문단속하라고 보냈더니 미친년을 안방까지 들이면 어쩌자는 거야?”
“알아서 잘 커트 했어야지! 성전군 새끼들 그거··· 죄다 쓰레기인 거 너희도 알잖아!”
"영주 따님께 이게 무슨 무례야!"
“빌어먹을 놈들 대가리에 총알 박아버리지 그랬어!”
자신들의 성녀가 모욕당한 일이 유독 분노한 병사들이 많이 보인다. 안타깝게도, 그날 원거리 외곽 순찰을 하였던 추격기병 중대 병사들이 죽도록 욕을 먹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 성녀인지 뭔지 하는 ‘외교 사절단’을 발견해 우리 주둔지로 안내했기 때문이다.
“아니 우리도 몰랐지! 겉보기에는 멀쩡하게 생겼는데···.”
“그거 호위병들 가면 쓴 꼬라지를 보고도 멀쩡하다는 말이 나와?”
“하··· 시발 가면 쓴 새끼들. 보이는 대로 죄다 잡아 죽인다 개자식들!”
들어보니 순찰 돌았던 병사들은 억울할 만도 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정확히 규정대로 잘 실행했기 때문이다.
외곽 순찰 매뉴얼에 의하면, ‘적의 외교 사절’을 정찰 중 발견했을 때 주둔지 부근으로 이끌어 주둔지 경비대에 인계하게 되어있다.
호위병 숫자도 정해져 있다. 단순 사절은 2명, 경칭이 ‘경’에 속하는 귀족은 5명, 경칭이 ‘공’에 속하는, 즉 백작 이상의 귀족은 10명.
법황청이 공인한 주교급 성녀이니, ‘공’에 준하는 대우를 한 것도 틀린 것은 아니고.
참고로 이 매뉴얼 만든 것도 난데, 보통 못된 짓을 하려면 주둔지 안에 들어와서 일어날 거로 생각했지···. 문밖에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그 난리를 펼 줄은 솔직히 몰랐다.
···나쁜 자식들. 물론 우리 애들 말고, 저쪽 성년지 뭔지 하는 애들 말이다.
“자, 그만 해라. 콘도티에레께서 보고 계시다.”
“코, 콘도티에레!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항상 침착한 로베르 드 나뵈프 제31 정찰 연대장이 부하들을 진정시킨다. 역시, 항상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합리적으로 판단하는 인물이다.
“이번 일은 우리 연대 전체의 수치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자.”
“알겠습니다, 연대장님!”
아니··· 수치까지야 뭐···. 있을 수 있는 일이라니깐.
“그 가면 쓴 수도사들은 반드시 우리 연대가 섬멸한다!”
“알겠습니다!”
“한 명도 남기지 않는다!”
“알겠습니다!”
헛, 방금 엄청난 살기를 느꼈다.
정말로 조용한 사람이 화를 내면 이렇게 되는구나. 정찰 연대 병사들의 눈빛이 예사롭지가 않다.
특히 정찰 중에 만나 안내해서 온 장교는 눈앞에 있으면 씹어먹기라도 할 기세이다. 하긴 그렇게 욕을 먹었으니 억울하기도 하겠지···.
“흉한 모습을 보여드려 죄송합니다, 콘도티에레.”
“아뇨, 아닙니다. 정찰 연대의 순찰대는 매뉴얼대로 잘했습니다.”
로베르 연대장의 굳이 필요한가 싶은 사과를 받은 나는 곧바로 의무대의 막사로 향했다. 막사 앞에는 리타 드 리스바쥬가 안절부절못하며 서 있었다. 그녀가 나를 보더니 활짝 웃는다.
“앗, 콘도티에레!”
“아쥬흐 의무대장님은 안에 계신가요?”
“네! 어서 들어가 보세요.”
나는 떠밀리듯 아쥬흐의 막사로 들어갔다. 이거 들어간다는 말도 못했는데.
“아쥬흐 양, 저 왔습니다. 괜찮으세요?”
허둥지둥 말하자, 멍하니 의자에 앉아있던 아쥬흐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언제나 완벽하게 다듬어져 있던 화사한 금발에서 몇 가닥이 삐져나와 있다.
“...빨리 오셨네요 콘도티에레 에트.”
“불쾌한 일이 벌어졌다는 말을 듣고 바로 왔습니다! 괜찮으세요?”
“흐음···.”
언제나 옅은 웃음기가 있던 눈가가 붉게 부어있는 것을 보니 가슴이 아파온다.
워낙 자기관리가 완벽해서 자꾸 잊는데, 그녀는 이제 갓 스물을 넘은 어린 아가씨였다.
“...바로 오셨다는 말을 들으니 기분이 조금 나아졌어요.”
“다, 다행입니다.”
“혹시··· 그 ‘성녀’가 저에 대해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들으셨어요?”
“...심한 이야기를 했다고만 들었습니다.”
“사실이 아니에요.”
그녀가 무슨 의도로 말하는 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 여자가 한 말은 사실이 아니라고요.”
“그건 당연하지 않습니까?”
남의 집에 갑자기 찾아와서는 앞에서 고래고래 고함지르는 미친··· 이상한 여자의 말을 누가 믿겠느냐 이 말이다.
“...저는 미색으로 누구를 홀린 적도 없어요.”
“그럼요, 그럼요!”
“...반인반수의 악마를 소환해서 처녀를 바, 바친 적도 없어요!”
“그럼요! 대체 그런 소리를 누가 믿겠습니까?”
그녀가 살짝 웃는다. 이런 상황이어서 그런지 더더욱 아름다워 보이는 미소이다.
“그렇게 말씀해주실 것이라 생각은 했지만···.”
손수건을 꺼내 눈가를 닦는다. 너무도 가느다란 손목이 도드라진다. 수없이 많은 부상병을 살린 손이지만··· 그래서 더욱 애처로운가 보다.
“그래도 직접 들으니 조금 기쁘네요.”
“마음이 풀리신 것 같아서 저도 기쁩니다.”
아쥬흐는 내 얼굴을 약간 비스듬히, 하지만 지그시 올려다본다. 나는 그녀의 의도를 알 수 없어서, 어색한 미소로 답한다.
우리는 꽤 오랫동안, 그렇게 말없이 마주 앉아 있었다.
얼마 뒤, 내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기만 하던 그녀는 곧 활짝 웃는다. 평소의 '자작가의 영애다운' 미소가 아니다. 오히려 더 어린 소녀에게 어울릴 법한 웃음이다.
코와 눈가를 한껏 찡그린, 개구쟁이 같은 웃음.
"가끔은 욕을 먹는 것도 나쁘진 않네요."
"네... 네? 어, 아쥬흐 양?"
"아니에요. 그보다 콘도티에레 에트, 왜 성전군의 성녀는 여기까지 와서 저에게 욕을 했을까요?"
"음... 그야, 뭐. 불리한 전세와 자연스러운 성녀 숭배에 의한 열패감 등이...."
"으응, 아뇨. 그거 말고요."
"...네?"
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젓는 아쥬흐를 보면서, 나는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더이상 적의 험한 말에 상처받았던 가련한 여인이 아니었다.
엘랑키아 남부에서 가장 부유한 가문의 경영자.
엘랑키아 왕가와 주신교와 법황마저 위협하는 강맹한 대군의 병참 책임자.
냉정하되 냉혹하지는 않은 침착한 수완가 아쥬흐 트랑카벨로 돌아와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녀의 물음은 전혀 다른 것을 물어보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아넥시 부근의 주둔지를 찾아온 적 성녀의 행동이 전략적인 의도를 물어보는 것이겠다.
...아쥬흐에게는 좀 미안한 이야기지만, 솔직히 나도 이번 사건을 처음 듣자마자 그 생각을 했었다.
지랄에는 지랄을 하는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제 생각에는 아마도 '주군의 단신 출격'과 유사한 행위가 아닌가 싶습니다."
"주군의... 단신 출격이요?"
주군의 단신 출격이란, 지휘 체계가 어그러질 수밖에 없는 봉건 군대에서 최상급에 가까운 지휘관이 단독으로 출격하는 것을 말한다.
분산된 지휘권으로 인한 온갖 비효율. 즉, 병력 배치 조율, 병종 구분, 지휘권 배분 따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극약 처방이다.
군주가 최소한의 측근들만 데리고 적과 인접한 위험 지역으로 나선다? 휘하 가신들로서는 당연히 만사 치워놓고 따라가지 않으면 안 된다.
주군이 위험에 처하거나 패배하기라도 하면 큰일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자신만 빼놓고 나머지가 싸워서 이긴다면? 그건 더 심각한 문제이다. 이겨서 분위기 좋은 전후 포상에서 자신의 몫만 사라지는 것이니까.
이러나 저러나 계산 따위는 없이, 손 닿는 병력은 몽땅 챙겨서 최대한 빠르게 전장으로 달려갈 수 밖에 없게 만드는 '강요'이다.
물론 정말 신뢰 받지 못해서, 아무도 안 따라오면 낭패지만.
"지난 아넥시에서의 패전으로 전쟁 속행에 부담감을 가지게 될 성전군 지휘관들을 몰아 붙이는 행동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흐음... 일리가 있네요."
곧바로 전투까지 벌어진 것은 아니니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그래도 법황청 공인 성녀가 위험을 각오하고 선공을 걸고 왔으니 말이다.
진작 발을 뺐으면 몰라도... 전장으로 나갈 주신의 성녀를 내버려두고 고향으로 돌아가기는 모양새가 좋지 않겠지.
"어쩌면... '왕자의 희생' 전략을 사용하려 했을지도 모릅니다."
"왕자의 희생이라... 어딘가 시적인 표현이네요."
왕자의 희생이란, 아군 사이에서 유명하고 정치적 영향력은 있으나 군사적으로는 크게 의미가 없는 인물을 사기를 희생물로 삼는 것을 말한다.
아군의 사기를 올리기 위한 신성한 제의에 바쳐지는 제물이다.
고귀하고 모두가 사랑하는 인물이 '어쩔 수 없는 이유로' 당면한 적에 의해 살해당한다.
이는 소중한 인물을 지켜내지 못한 아군에게 분노와 슬픔의 트리거가 되고, 정신적으로 물러서지 못하는 배수진이 된다.
그리고 이 '고귀하고 성스러운 죽음'은 새롭게 포장된 강력한 프로파간다가 되어 아군을 강화하고 적을 압박할 것이다.
만약에, 만약이지만 말이다. 도발당해 분노한 아군에게 적 성녀가 살해당했다면....
"휴우, 참기를 잘 했네요."
"네... 정말 훌륭하셨습니다."
최악의 경우는, 새로운 성전의 시발점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평화를 위해 방문한 성녀를 참살한 무도한 이단자' 누명이라니... 생각만 해도 두렵다.
"그런데 갑자기 다른 이야기인데요, 콘도티에레 에트가 말씀하신 명칭들은 누가 이름 지으신 건가요?"
"아, 제 스승님께서 지으셨습니다. 개념을 이해하려면 우선 이름이 있어야 한다고 하시면서요."
"호오... 온당하신 말씀이네요. 개념을 이해하려면 이름이 있어야 한다라...."
내 스승님이 항상 맞는 말만 한 것은 물론 아니지만, 이건 분명 맞는 말이다. 그래서 나도 가르치는 입장이 되면 개념을 적합한 단위로 나누어 명확하게 전달하려고 노력한다.
생각해보면 참 좋은 본을 보여주신 스승님이었다.
"그래서... 전쟁이 이어질까요?"
"그러리라 예상합니다."
"그렇군요...."
적 성녀의 행동은 명백한 도발이자 도전이었으니까.
한편으로는 궁금해진다. 어디까지 알고 어디까지 계획 된 도발일까?
그게 앞으로의 전황에 영향을 끼치게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