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193화 (193/556)

25-2. 성녀 대 성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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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으으··· 아파 죽겠네.”

“깨끗한 천이 없으니 이거라도 먼저 묶어.”

“으윽!”

블랑독 북동부의 어느 버려진 마을에는 도망쳐온 성전군 무리가 머물고 있었다.

버려진 마을은 오랫동안 관리가 되지 않아 무너진 것인지, 혹은 약탈 과정에서 파괴당했는지 멀쩡한 집이 거의 없었다.

때문에 패잔병들은 그나마 멀쩡한 처마 밑에서 담장에 기대어 휴식을 취하고 있다. 복장도 제각각, 소속도 제각각. 하지만 모두 한가지 공통점은 있었다.

피냄새와 쇠냄새, 화약냄새는 숨겨도 절대로 숨기지 못한다는 공포의 냄새를 풍기고 있다는 것이다.

그동안 제대로 쉬지도, 씻지도 못해서 엉망진창이 된 그들의 얼굴에서는 아무런 희망도 보이지 않는다.

그 한가운데, 그나마 멀쩡한 건물의 벽에 넓은 천을 걸어 만든 임시 막사에 몇 명의 남자들이 모여 의견을 나누고 있다.

이들 역시 패잔병들과 다름없는 비참한 몰골이기는 하다. 하지만 좀 더 화려하고 제대로 된 복장을 하고 있다.

적게는 수 백, 많게는 수 천명의 부하들을 거느리고 성전에 참여했던 지휘관급들이다.

그들이 조금 더 용맹하고 운이 좋았는지, 혹은 부하들을 버림 돌로 삼아 살아남아왔는지는 그들이 섬기는 신만이 알 것이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오···.”

누군가가 벌벌떨리는 손을 다른 손으로 고정하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한동안 아무도 대답이 없다.

“이제 성전은 끝났소이다···.”

“이런 꼴이 될 줄은 몰랐는데···.”

하나마나한 답변과 함께 한숨소리가 이어진다.

“엘랑키아 국왕군이 야전에서 패했다고 했을 때 조심했어야 했는데.”

“그러게말입니다.”

사실 뻔뻔한 소리다. 샹다메리 전투에서 국왕의 성전군이 패배했을 때, 그들은 대부분 속으로 환호했었다.

경쟁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노획물을, 금화를, 영토를, 법황이 내릴 은총을 나눠야 하는 경쟁자 말이다.

성전군의 규모는 역사에 남을 정도로 거대한데, 그들이 점령해야 할 점령지는 제한이 되니까.

특히나 여기는 엄연히 엘랑키아의 영토이다. 이단자들도 대부분 엘랑키아의 신민이고.

따라서 엘랑키아 국왕에게 이단 발흥의 책임을 지울 수야 있겠지만, 영토와 백성을 뜯어낸다는 것은 쉽지가 않다.

그랬기에, 위풍당당하게 출전했던 국왕의 군대가 박살났다? 그 소식에 대놓고 좋아하지는 못했지만 남모르게 축배를 들었던 이들이 얼마든지 있었다.

여기 있는 이 남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어딘가의 영주, 누구를 섬기는 기사, 어떤 수하들을 이끄는 대장. 하나같이 내로라 하는 인물들.

세력이 크고 권한이 큰 만큼, 야심도 욕망도 컸다.

거기에 눈이 멀어, 엘랑키아 국왕군이 당한 일을 자신들도 당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못했다. 아니 하지 않다는 것에 가깝겠지.

전력은 아니더라도, 대륙에서 손꼽히는 강국 엘랑키아이다. 그 국왕의 주도로 편성된 군대가 약할 리 없다.

최소한 ‘이단들이 점거한’ 블랑독 수복 정도는 확실히 할 수 있다고 자신한 군대였지.

그런데 그 군대가 크게 패배했다는 소식에 기뻐했다. 그런 강군을 격퇴한 피묻은 칼 끝이 자신들을 향하리라는 생각을 못했다.

지금 생각하면 한심한 일이다. 입 밖으로 꺼내어 말은 못하지만, 모두가 하는 생각은 비슷할 것이다.

그때, 이 허술한 피난처 외곽의 병사들이 뭔가 떠들기 시작한다.

“누가 온 모양인데···.”

“엇, 저건 빌다우 기사단의?”

바콘 스트로치크. 초쵀한 얼굴로 회색 망토를 걸친 기사는 빌다우 기사단의 파견대를 지휘하던 그가 맞았다.

기사단의 상징이자 자랑인 회색 망토는 엉망진창으로 망가졌다. 안이 보일 정도로 크게 찢어진 자국이 두 곳 이상에, 여기저기 시커먼 얼룩은 핏자국이리라.

그가 속한 기사단의 이명처럼, 마치 유령처럼 휘적휘적와서는 말에서 내린다. 며칠이나 잠을 못잤는지, 눈 밑이 시커멓게 변해서는 초점이 잘 맞지 않아 보인다.

누군가가 물통을 넘겨주자, 몇 모금 벌컥벌컥 마신 후 돌려준다. 행동 자체는 이상하지 않게 느껴진다.

“괘, 괜찮으시오? 바콘 경?”

모여있던 ‘높은 분’들 들이 우르르 달려간다. 빌다우 기사단은 성전군 내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세력이었다. 젊은 수도기사라고는 해도 모르거나 함부로 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걱정했었소!”

“상처는? 무사히 퇴각하셨나?”

그들은 유난히 호들갑을 떤다. 순수하게 반갑기도 했겠으나, 그들은 동료가 필요했다. 자신들의 감정을 나눌 동료들이.

성전군 와해로 인한 패배감.

모든 것을 잃었다는 좌절감.

게다가···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전장을 떠났다는 죄책감.

이 모든 감정에서 편해지고 싶어 질척거리는 성전군 동료들을 본 바콘은 아무 반응도 하지 않는다. 특별히 나무라는 것도 못 마땅한 것도 아니다.

그냥 자신과 별로 상관없는 누군가를 무심하게 지켜보는 듯한 모습.

“빌다우 기사단은? 귀공의 기사들은 어디에 있소?”

“...제 기사들은 이제 없습니다.”

“어, 없다니···.”

바콘은 한 마디 대답을 하더니 다시 입을 꾹 다문다.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그 말의 뜻을 모를 정도의 머저리는 없었다.

주변은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는 태도로, 다시 말에 오른다.

“어, 어디로 가시는 게요?”

“추기경께서 소집령을 내리셨으니.”

“추, 추기경 예하께서? 어디 계신지 아는 것인가?”

바콘은 말 없이 동쪽 길을 가리킨다. 그리고 설명도 없이 떠나버린다.

“어! 추기경께서 거기 계시다는 말인가? 동쪽에?”

“우, 우리도 따라가지요. 일단은 뭉쳐야지 않겠습니까?”

“그럽시다···.”

폐허의 패잔병들은 회색 망토를 휘날리며 서둘러 장비와 병력을 수습해 바콘의 뒤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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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으으윽!”

“스승님 괜찮으십니까?”

“어깨가 떨어져 나가는 것 같군. 앗, 이미 떨어져 나갔나?”

“스승님! 그런 농담은···.”

“하하하하핫! 주신께서 내 목숨은 남겨 주시되, 어깨 껍데기는 가져 가셨으니 어쩌겠나? 받아 들이는 수밖··· 으으윽···.”

상체를 온통 붕대로 감은 방어교회 사제, 요한 린데만 폰 아인푸르트는 상체를 움찔거리며 괴로워한다.

그걸 보며 ‘꼴 좋다’ 라는 표정을 하지 않은 것만 보아도 제자인 아르옌 그로반 수사의 인격과 참을성을 알아볼 수 있다.

스승만큼의 중상은 아니지만, 아르옌 수사 역시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다.

두 사람은 아넥시 성문 근처에 쌓여있는 목재 위에 나란히 걸터 앉아 있었다.

바로 얼마 전, 적대적인 군대로 가득했던 아넥시의 주변은 이제 우호적인 군대로 가득하다.

그들은 해냈다. 끝까지 지켜냈다. 성전군의 대군세 앞에서 이 작은 요새를 지켜낸 것이다.

“그래도 대단한 전투였지 않나?”

“...마지막엔 정말 크게 다치신 줄 알았습니다.”

“하하! 진정한 믿음을 가진 이는 신의 의지를 의심하지 않기에 행동할 수 있는 걸세.”

“그, 그래도 그렇게 무모하게···.”

역사적인 공방전의 마지막 날, 아넥시 정면에서 일어난 대폭발은 다름아닌 요한 사제의 작품이었다.

포격으로 구멍이 뻥 뚫려버린 성벽을 통한 마지막 출성돌격.

미리 계획된 것은 절대 아니었다.

그냥, 성벽 위에서 내려다보니 적이 포구를 돌리고 있었다.

그 정면에는 구원군 기사들이 잔뜩 있었고.

그래서 생각이고 계획이고 없었다. 적은 마침 이쪽에 신경을 전혀 못쓰고 있었고, 공성을 위해 적 포대는 성벽에 생각보다 가까이 붙어있었다.

요한 사제가 성벽 아래를 보고 고함을 지르는 데 5초.

주민 대표 루옹이 그걸 알아듣고 달려오는데 10초.

대충 되는대로 준비해서 무너진 성벽 틈으로 뛰쳐나올 때까지 모두 1분이 걸리지 않았다.

‘제가 소싯적에 돌팔매질로 새 좀 잡았습니다.’

요한 사제는 화염병용으로 쓸 질그릇 항아리를 짊어지고 달려나갔다. 아무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적은 당면한 구원군의 기병 돌격을 막기 위해 집중하느라 아넥시에는 전혀 신경을 못쓰고 있었다.

사거리와 구경이 제각각인 포들을 방열하기 위해서 포대가 제멋대로 널찍한 구역에 배치되어 있었다.

설령 뒤늦게 알아챈 적이 지원을 보낸다고 해도 포대 전체를 커버하지 못할 거란 생각은 있었다.

그래서 했다.

“화약고에 불 붙은 기름 단지를 던지시다니! 대체 무슨 생각이셨던 겁니까, 스승님.”

“허허헛, 주신께서 어떻게든 해 주시겠거니 하는 생각이었지 뭔가.”

“휴우우···.”

그 결과는 아넥시 주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하늘에라도 닿을 것 같은 기세의 대폭발이었다.

땅이 흔들리고 귀가 먹먹해지며, 크고 작은 대포들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가 바닥에 나동그라지며 깨져버렸다.

이 또한 임시방편의 공성용 포대 배치와, 급한대로 대충 나서 방향전환을 하려던 적의 실수 탓이었다.

일부러 비효율을 감수하고 화약 통을 분산해서 배치하는 이유가 있는 것인데. 포 꺼내서 방향 바꾸는데 정신이 팔려 있어서 이리 되었던 것이다.

물론 그것도 ‘사람이 던져서 닿을 수 있는 거리’ 까지 가서 화염병, 아니 화염단지를 집어 던진 요한의 과감함이 없었다면 문제가 없었겠지만 말이다.

하필이면 그 날, 아넥시 성채에는 그런 정신나간 짓도 망설이지 않고 할 수 있는 방어교회의 사제가 있었다는 말이다.

그 결과로 상처에 심각한 상처를 입었고, 본인 표현대로 누더기 인형이 되었지만 말이다.

“이제 저희는 어떻게 합니까, 스승님?”

“음, 우선은 아넥시가 안정을 찾을 수 있도록 돕고, 성전 중에 달리 교단의 위력에 의해 핍박받는 마을이 있는지 또 찾아봐야겠지 않겠나.”

“스승님께서 너무 심하게 다치셔서 금방 갈 수 있겠습니까?”

“그게 문제구먼··· 어이구우···.”

요한은 통증이 심한지 얼굴을 찡그리며 신음을 흘린다. 그냥 엄살이 아니라, 이게 살아있나 의심이 갈 정도로 말도 안되는 큰 상처를 입은 게 진실이다.

그걸 이렇게까지 단기간에 멀정하게 움직일 수 있게 잘 치료한 것은···.

“사제님, 병실을 벗어나시면 안 돼요.”

뒤에서, 단호하지만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린다.

“어엇, 스승님! 허락 받고 나오신 것 아닌가요?”

“하하핫, 어리석은 내가 이리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주신의 허락을 받았음이지 않겠는가?”

“어휴, 말을 무슨··· 어서 가시죠!”

능청스러운 스승 대신, 아르옌 수사가 몇 번이나 허리를 숙인다.

“기왕 나오셨으니, 오늘은 쉬었다 들어가세요.”

“아··· 그래도···.”

“괜찮아요. 트랑카벨 가문은 두 분께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은혜를 입었는데··· 인사도 못드렸네요.”

하얀 앞치마를 입고 깨끗한 붕대가 가득한 바구니를 안고 있던 트랑카벨 영지군의 의무대장. 아쥬흐 트랑카벨은 누가 말릴 사이도 없이 허리를 깊게 숙인다.

“아넥시를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놀란 요한이 일어나려다 통증에 신음을 흘린다. 대신 아르옌이 일어나 고개를 마주숙인다.

“만약 보상을 바라신다면 무엇이든 말씀해주세요.”

“아아아니, 그런 의도로 한 것은 아니라서 저희는···.”

“후후, 왠지 그러실 것 같았어요. 그래도 다음 전장으로 가시려면 필요하신 게 있지 않을까요?”

현실적인 이야기이다. 그가 아넥시에 도착할 때 각종 무기를 싸들고 왔듯, 다른 전장에 가려면 필요한 물건이 있겠지.

“...그러시다면 나중에 요청드리겠습니다.”

“네에, 언제든지요. 하지만, 상처가 회복되시기 전에 떠나시는 것은 의무대장으로서 용서 못해요.”

“아니 그···.”

“양해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천방지축 스승을 단번에 제압하는 모습을 보고, 아르옌 수사는 강한 인상을 받은 모양이다. 아쥬흐가 떠나자, 요한은 끙끙대며 자세를 고쳐 앉는다.

“...왜 아넥시 사람들이 성녀님이라 하는지 알 것 같네.”

“저도 그렇습니다, 스승님.”

“하지만 우리는 성녀님이라고 부르면 안 되네. 그럼 이단이야.”

“법황의 군대를 상대로 무기를 드는 것은 이단이 아니고, 살아있는 사람을 성녀라 부르는 것은 이단입니까?”

“그게 실제로 교리상 그렇다는게 문제 아니겠나?”

“하아아아···.”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내쉬는 아르옌 수사와, 이를 보고 빙긋 웃는 요한이다.

스승인 요한 입장에서는 그렇지. 아넥시에 도착하기 전에 굉장히 소극적이었던 이 제자가 자신의 생각을 자꾸 표출하는 것이 어쩐지 기뻤기 때문이다.

스승과 제자의 싸움은 아직 조금 더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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