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192화 (192/556)

25-1. 성녀 대 성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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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넥시 공방전은 시작되었을 때처럼 순식간에 끝나버렸다.

성전군의 패배, 블랑독 연맹의 승리.

압도적으로 벌어진 사상자 비율.

끝끝내 함락되지 않고 버텨낸 보잘것없는 요새.

거기서 나온 놀라운 결과는 블랑독 전체를, 더 나아가 엘랑키아와 대륙 전체를 전율시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그와 무관하더라도 해야 할 일은 해야 하는 법이다. 마치 해가 지면 달이 뜨는 것처럼.

“그동안 잘 있었소?”

“올여름은 가뭄이 심해서 걱정이 많군요. 가스텔 백작님도 전쟁만 하러 다니지 말고 영지 좀 살피시죠!”

“허허허, 우리 드 누아 영지는 가난해서 농지가 얼마 없거든. 한나절이면 살피는 건 일도 아니지.”

“흥, 요즘에 이스키비르 강 너머도 손을 대고 계시다는 것을 제가 모를 것 같습니까?”

“오오, 그런 소문이 돌았나. 그저 최근 교류를 늘렸을 뿐이라네.”

살집이 있지만, 피부에 윤기가 없고 창백한 청년 귀족이 신경질을 뿌리자, 점잖은 노신사가 허허 웃으며 부드럽게 받아넘긴다.

블랑독에 영토를 가진 엘랑키아의 두 고위 귀족, 라몽 드 레뮤즈 백작과 가스텔 드 누아 백작의 만남이다. 그간 서로 바빴기에 이 두 사람도 꽤 오랜만에 만나는 모양이지만.

격의없어 보이지만, 사실 두 사람의 관계는 명명백백한 적대 관계이다.

한 사람은 엘랑키아 국왕의 뜻을 따라 성전군의 편에, 한 사람은 블랑독 연맹군의 편에.

실제로 드 누아 영지군은 상당히 많은 숫자의 병력을 동맹인 트랑카벨 가문에 파견해 함께 싸우고 있다.

드 레뮤즈 영지군 역시 상당한 병력을 소집해놓고 있었고. 한때는 남쪽의 드 누아 영지 침공을 ‘시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두 사람의 사이에 노골적인 적의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매우 유쾌한 미소를 지은 가스텔과 달리 라몽의 표정이 엉망으로 일그러져 있음에도 말이다.

“시간이 늦었으니 일이나 합시다, 백작님.”

“그러시게나. 기다리는 사람들도 많이 있을 테니.”

오늘 두 사람은 공적인 업무를 위해 만났다. 바로 포로 교환을 위한 목적이다. 물론 엄밀히 따지면 ‘포로 교환’ 보다는 거의 일방적인 ‘석방 협상’ 쪽에 가깝겠지만.

트랑카벨 자작가를 대표로 하는 블랑독 연맹군은 샹다메리의 대전투를 비롯한 여러 전투에서 다수의 성전군 포로를 획득했다.

그에 비해서 엘랑키아 성전군은 보유한 포로가 거의 없었다.

작은 교전에서 부상 등으로 사로잡은 경우가 없지는 않았지만, 통상 말하는 교환 가치가 있는 포로는 전혀 없었다.

게다가 현재 상황이 다소 애매하다는 점도, 이렇게 우회적인 포로 관련 협상이 진행되는 데 영향을 끼쳤다.

먼저 엘랑키아 성전군은 엄밀히 따지면 ‘그냥 성전군’ 이다. 주신의 유일한 지상 대리인, 법황의 소집령에 응해 집결한 성전군에게는 출신도 국경도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에티엔 드 크레이가 지휘했던 대군 역시, 전투 서열상 아르누아 루케 추기경의 휘하에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전원이 신의 의지에 감복하여 무기를 쥐고 일어선 교단의 전사!

그들 사이에서는 세속의 지위도, 은원관계도, 국적조차도 의미가 없는 것이다!

라는 개소리를 진지하게 믿는 이는 아무도 없다. 물론 일부 어리석을 정도로 신실한 이들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대부분은 아니다.

엘랑키아 성전군은 누가 보아도 엘랑키아 국왕, 다고베르 2세의 군대이다.

무엇보다 국왕의 금고에서 막대한 양의 자금이 나왔고. 다수의 귀족들이 모인 이유도 국왕에 대한 충성심과 향후 보상에 대한 기대 때문이니.

이런 ‘A라고 쓰고 B로 읽는다’라고 눈 가리고 아웅 하는 행위는 이기는 동안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계속 이기는 한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 완전히 이긴 후에는 승리의 과실을 나누면 되었을 것이고.

다만 문제는 졌다는 것이다. 그것도 엄청난 숫자의 사상자와, ‘포로’가 발생한 대참패.

여기서 애매해진 것은, 과연 패배이후 책임을 지는 주체가 누구냐는 것이다. 단순히 누가 잘하고 잘못해서의 문제가 아니다.

말 그대로 이후의 일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포로 석방 협상이다.

만약 평범한 엘랑키아 왕국의 군대라면 당연히 엘랑키아 국왕을 비롯한 정부의 책임이다.

하지만 성전군인데···? 이걸 엘랑키아 국왕이 나서는 것은 명백한 월권이다.

게다가 엘랑키아 왕실과 트랑카벨 자작가는 전쟁 중도 아니다! 표면상 아무 적대 관계가 없는데 갑자기 포로가 대량으로 발생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그렇다면 이론상 소속인 법황청? 그들은 엘랑키아 성전군에 누가 소속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안다고 해도 개입하지 않으려고 했을 테고.

이런 상황에서 결국 양자는 ‘각 가문에서 자발적으로 나서 대표단을 만들어 협상한다’는 전통적인 방식을 택하게 되었다.

그렇게, 양측의 대표로 적합해보이는 두 백작이 나서게 된 것이다.

“빌어먹을 귀족 녀석들! 그냥 북쪽에서 잘 먹고 잘 살 것이지! 왜 남쪽까지 내려와서는, 쯧!”

“푸하하하, 말이 너무 심하지 않으신가.”

포로의 명단과 책정된 석방 비용 등이 적힌 종이들을 보면서 라몽이 분통을 터뜨린다.

“물론 가스텔 백작께서야 적당히 돌려보내시면 그게 다 돈이니 기분이 좋으시겠지요!”

“허헛, 그렇다고 이 늙은이 주머니에 들어오는 거겠소? 다 전쟁 비용으로 충당되는 것이지.”

“이쪽은 북방의 멍청이들 때문에 일만 많아졌단 말이죠! 그런데 협상이 잘된다고 돈 한푼 들어오는 것도 없어요.”

“허어···.”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은 아니다. 현재 드 레뮤즈 가문이 맡은 일은 동료 귀족의 의무나 호의 같은 것이지, 수수료 받는 대행 업무는 아니니까.

“머저리들 집에 갈 때 통행세를 거둘 수도 없고 말이죠, 쯧. 어차피 빈털터리라 돈도 없을 거고.”

“그래도 대신 석방 협상을 진행해준 것이니, 이후 북부 귀족들에게 빚을 지운 게 아니시오?”

“제발 머저리들과는 인연을 좀 끊고 싶은데 받아내지도 못할 빚은 무슨 빚!”

라몽은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이 일이 죽도록 싫은 모양이다. 서류를 보는 손이 점점 거칠게 변한다.

“그나마 다행히··· 문서 정리는 깔끔해서 다행이군요. 드 누아에는 유능한 서기관이 있습니까?”

“허허헛, 그거 트랑카벨의 영애의 솜씨라네.”

“...북쪽 놈들이나 남쪽 놈들이나 맘에 드는 놈이 하나도 없고··· 미운 놈들이 또 일은 또··· 젠장할!”

“하하하하하!”

“아니 웃을 일이 아니라고요!”

온갖 욕과 저주를 퍼부으면서도, 서류를 끝까지 대조하며 확인하는 것은 깐깐한 성격 때문이다. 결국 라몽은 한참이나 서류를 더 읽어야 했다.

엘랑키아의 크고 작은 14개 가문이 석방 협상 의사를 밝혀왔다. 트랑카벨 가문에서는 모든 협상에 응했으나, 딱 한가지 조건만 걸었다.

바로 단일 가문에 소속한 모든 인원의 협상을 ‘동시에’ 진행하겠다는 것.

같은 가문 소속이면 졸병 한 명 까지 몽땅 데려가야지, 후계자나 주요 가신만 쏙 빼가는 일을 금지한 것이다.

결국 협상의 규모가 거대해질 수밖에 없었다.

“대충 마무리는 된 것 같군요. 이대로 진행하도록 하지요.”

한참만에 서류 확인을 마친 라몽이 피곤한지 눈을 비비며 말한다. 가스텔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한다. 사실 이렇게까지 확인하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아넥시 전역의 이야기는 들으셨소? 법황의 군대가 크게 당했다는 소식 말이오.”

“내가 트랑카벨 놈들이나 좋아할 소식을 왜 알아야 합니까!”

“그야··· 우리가 전쟁 중이니까?”

“으으으으! 미운 녀석들이 서류든 전쟁이든 일은 또 잘하니 정말 환장하겠군요!”

특이하게도, 라몽은 입으로 짜증을 부리는 만큼 정말 화가 난 것 같지는 않다. 가스텔은 그렇게 느꼈다.

사실 라몽 백작은 블랑독의 누구보다도 아넥시 근처에서 벌어진 일련의 전투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정보원들을 가득 보내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잘 아는 가스텔은 굳이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백작님도 조심하셔야 해요. 법황청이 라솔에도 손을 뻗은 모양이니.”

“라솔이?”

“그리고 최근에 타라트라바 공국의 공위 계승이 무사히 끝났다고요. 라솔 국왕의 큰 근심거리가 하나 줄어든 거죠.”

라솔은 엘랑키아 서쪽의 대국이므로, 드 레뮤즈와 드 누아 가문의 영토 모두가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서로가 예민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국왕과 법황이 보낸 성전군이 전부 깨졌는데, 이제와서?”

“저도 그럼 좋겠지만.”

라몽은 뭔가 더 할 말이 있었던 듯 하지만, 두통이 심한지 표정을 찡그리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많이 괴로운지 꽉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린다.

가스텔은 안타까운 마음에 혀를 찬다. 이 젊은 귀족은 누구보다도 똑똑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너무 많은 질병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만약 그가 건강했다면, 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한참후에야, 조금 편해진 땀투성이 얼굴로 말을 잇는다.

“득도 없는 광신자들 전쟁은 이쯤에서 끝나면 좋겠는데요.”

“나도 그렇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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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법황이 임명한 성전군 사령관, 라모리 스텐던 휘하의 보병대장, 기직스 미슈람 알메르타트는 기겁했다. 참혹한 꼴로 길을 가득 메운 패잔병들을 보고 놀랐기 때문이다.

“자, 자네들 아넥시에서 오는 건가? 소속이 어디지?”

혼이 나간 듯한 패잔병들은 그의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고 그저 북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졌다는 소식이야 들었다. 라모리 스텐던의 휘하 병력이 북 로데브 강을 건너 미로와도 같은 지형에서 싸우다 귀환하는 길이었다.

라모리 경 본인은 마중하러 나온 드라멜른 기사단의 호위대와 함께 서둘러 본진으로 돌아갔다. 심지어 현재 본진이 어딘지도 몰라서 찾아봐야 한다고 한다.

최소한의 질서조차 유지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어이가 없었다.

기직스는 휘하 병력과 함께,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추격에 대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가능하면 패잔병들을 수습하라는 명령도 있었지만··· 아마도 불가능할 것 같다. 혼이 빠진 듯한 패잔병들의 모습에서 약간의 전의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직접적인 상하관계가 없는 상황에서 억지로 패잔병들을 잡아보았자 소용 없다. 오히려 믿을 수 없는 자들과 함께 대열을 짜는 것을 부하들이 거부하겠지.

“어이, 자네들 괜찮아?”

“천천히 먹으라고.”

패잔병 하나는 휘하 병사들이 내준 물과 식량을 게걸스럽게 먹더니, 갑자기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다.

한참을 몫놓아 울더니, 고개를 들고 더듬더듬 말을 시작한다. 그의 얼굴은 시퍼렇게 질려있다.

“완전히 당했어··· 그건··· 인간의 군대가 아니야. 악마의 군대라고!”

“그게 뭔 소리야 대체···.”

“아무것도 없는 황야에서 갑자기 기병 수천 명이 튀어나왔다고! 그러지 않았으면 우린 지지 않았을 거야.”

패잔병은 횡설수설하며, 자신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태도에 억울한지 가슴을 쳤다.

“마, 마녀! 마녀의 짓이야! 아넥시는 마녀들의 소굴이라고!”

“마녀? 탕년지 마년지··· 그런 이야기가 있기는 했지?”

“그렇다니까! 이단자들은 가슴에 총알을 맞아도 멈추지 않아! 악마에 씌였다고! 아니, 지옥에서 소환한 악마들이야!”

“흐음···.”

하지만 기직스의 부하 병사들은 쉽게 믿기 어려웠다. 그들 역시 바로 얼마 전, 델레망드 삼각주에서 트랑카벨 군과 맞서 싸웠던 것이다.

물론 적은 매우 강하고 완강했지만, 도저히 상대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악마라니··· 쉽게 믿을 수는 없다.

그날 저녁, 방어 준비를 마친 기직스는 패잔병을 만난 부하들이 모은 정보를 취합하게 했다. 결과는 놀랄만한 내용이었다.

- 아넥시는 마녀가 다스리는 도시이다. 그 우두머리는 트랑카벨의 탕녀이고, 악마와 동침한 마왕의 신부이다

- 포로는 트랑카벨의 탕녀에게 고문당한 후 악마에게 제물로 바쳐지니 절대 잡혀서는 안된다

- 블랑독에는 악마병이 있다. 악마병은 창에 찔리거나 총에 맞아도 쓰러지지 않고 계속 다가온다

- 악마병은 도구 없이도 불을 다룬다. 거리가 좀 떨어져 있더라도 안심할 수는 없다

- 적은 악마의 힘으로 부대를 숨길 수 있다. 한 두번이 아니다. 정신을 차려보면 분명 아무도 없던 측면과 후방에서 적이 덮쳐온다

- 마녀의 사악한 주술로 인해 성전군의 발밑에서 화산이 폭발했다

- 아넥시의 성벽을 이룬 벽돌이 허연빛을 띄는 이유는, 이전에 공격했다가 패배한 성전군의 뼛가루를 섞어 지었기 때문이다

- 동쪽에서 강을 건넌 동료들도 돌아오지 못했다고 한다. 강 건너 남쪽은 악마가 깃든 땅이라고 한다

부관으로부터 여기까지 보고를 들은 기직스는 감상을 한마디로 표현했다.

“미친 새끼들.”

말만 들었는데도 피곤했다. 손바닥으로 지끈거리는 이마를 싸쥐고 손끝으로 관자놀이를 누른다.

아마도 ‘동쪽에서 강을 건넌 동료’는 자신들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것은 여러모로 악마의 땅이라고 할 수는 있겠다만··· 사전적 의미 그대로 ‘악마’들이 사는 땅은 아니다.

“여기 있다가는 우리도 큰일 나겠다. 천천히 북쪽으로 이동하자. 적의 추격은 없는 모양이니까.”

“알겠습니다, 대장님.”

다행히도 정신 나간 패잔병들이 퍼뜨리는 헛소문에 의연하게 대처하는 부하들이 고마웠다.

하지만 세 사람의 말이면 맹수를 만든다고, 안 좋은 소문에 거듭 노출되어 좋을 것은 없었다. 이대로 거둬 동료로 쓸 수도 없어 보이고 말이다.

문득 오래전, 라모리 경이 했던 말이 기억난다. 자신들이 한직에 밀려난 것에 분통을 터뜨렸을때 해 주었던 말이다.

지금은 비록 가문과 세력에 밀려 한직에 있지만, 적이 생각보다 강해 성전군이 패배하는 경우.

자신들에게 기회가 올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후방에 머물던 자신들은 만반의 준비를 해, 약화된 적을 이기면 된다는 내용이었는데···.

‘기회는 온 것 같은데··· 이게 과연 기회일까요?’

라모리 총대장을 만나면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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