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33. 제2차 아넥시 방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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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이 녹아내린다. 그것도 눈앞에서.
발란트 디아모프 폰 잘렌펠트. 드라멜른 기사단의 서열 4위 집행관이며, 성전군 파견대를 이끌고 있는 독실한 수도 기사는 조금 전까지 희망을 품고 있었다.
아넥시를 포위하고 있던 성전군은 현재 심각한 문제에 처해 있었다.
전략의 실패.
전술의 실수.
병사의 방심.
설명을 하고자 한다면야 온갖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만 지금 와선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어쨌든 근 2만에 가깝던 대군의 절반이 붕괴하여 전혀 통제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발란트가 전투를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공격적인 대형을 유지하며 전장을 떠나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아직 싸우고자 하는 아군이 있었다.
그의 좌측에는 빌다우 기사단의 바콘 스트로치크가 이끄는 공성부대가 있다.
회색 복장이 특징인 빌다우 기사단을 기간병력으로 해서, 다른 부대에서 뽑아온 공성 돌격대를 보강한 상당한 정예부대이다.
특히 이들에게는 아넥시 주변 성전군이 가진 야포가 전부 몰려있었기 때문에 상당한 화력을 자랑한다.
다음으로 우측에는 북부 주디칼리 출신의 ‘용병대공’ 아소모 델 안프로니오 대공의 연대가 있다.
용병대공이라는 별명에서 알 수 있듯, 아소모 대공은 신하들을 이끌고 용병으로 활동하며 잔뼈가 굵은 명장이었다.
오늘의 심각한 실패의 원인이 되었던, 북동쪽에서 적 기병대가 출현했을 때 가장 먼저 움직인 인물이다. 그래서 적이 습격해온 남동쪽에서 가장 먼 귀퉁이에 있었다는 천운도 있었다.
아소모 대공의 부대는 잘 훈련된 약 1500명의 완편 보병 연대이므로 비슷하거나 좀 더 많은 숫자의 적 공격을 얼마든지 버텨낼 수 있었다.
자신의 병력 약 5000명, 빌다우 기사단의 약 3000명, 안프로니오 연대의 약 1500명이 협력하면 단숨에 적군의 두 배 가까이 된다.
그러면 여기 마지막 방어선을 긋고 버틸 수 있다. 적이 아무리 강력한 위력을 보여주고 기세가 오른 기병의 대군일지라도 말이다.
기병이 보병에 비해 우위에 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작정하고 버티는 사각 대형을 기병만으로 뚫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게다가 지금까지 싸워오면서 많이 지쳤을테니까.
그러니, 발란트가 희망을 가지고 싸워 볼 생각을 했던 것도 근거가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무엇보다 이런 전투는 시간을 오래 끌면 끌수록 도망쳤던 아군들이 조금씩 복귀해서 아군이 보강되기에 장기전으로 끌고 가면 분명히 유리했다.
애초에 기동성과 충격력을 가지고 기습해온 적이 단기 결전을 원하는 것은 분명했다. 수적 우세를 가지고 끈기 있게 싸우면 적어도 전황은 다시 반반 상황으로 되돌릴 수 있으리라.
아직 싸울 수 있다!
아직 이길 수 있다!
···라고 생각했던 발란트는 현재 좌절감에 빠져있었다.
약 1분 전, 전장에 남은 성전군 부대는 그가 이끄는 드라멜른 기사단밖에 없어졌기 때문이다.
빌다우 기사단을 비롯한 아넥시 돌격대는 ‘원인 불명’의 대폭발에 휘말렸다. 아마도 공성중에 모아둔 예비 화약이 폭발한 모양이다. 하늘까지 닿을 기세의 폭발이었다.
이로 인해 혼란에 빠진 부대는 적 기병의 난입을 허용하고 만다. 이어서 몰려온 본대에 완전히 붕괴한 빌다우 기사단은 방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반대편의 안프로니오 연대는··· 도주··· 아니 ‘뒤로 진격’ 해버렸다.
완벽한 대열을 갖추고, 휘황찬란한 깃발을 휘두르고 나팔과 북소리를 울리면서 눈앞의 ‘적 기병대’를 향해 진격한 것은 좋았다.
하지만 바보가 아니고서야 적 기병대가 그걸 정면으로 상대할 리가 없었다. 당연히 옆으로 비켜났고··· 안프로니오 연대는 ‘진격을 계속’했다.
보무도 당당하게. 깃발을 펄럭이고 차분한 북소리에 발을 맞춰서. 지금은 저 북동쪽 언덕을 막 넘어가고 있었다.
어떤 점에서 ‘기병을 상대로 한 보병의 후퇴’ 라는 점에서 상당히 모범적인 행동이었다. 모두의 사기를 높이고, 허세를 부리며 적의 접근을 거부하는.
하지만 발란트의 입장에서는 마지막 남은 카드가 손을 떠나 버린 것이다.
이제는 싸울 수 없다.
이미 패배했다.
좌절감에 발란트는 이마를 싸쥐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트랑카벨 군의 선봉 기병대가 포위망의 남쪽을 타격했을 때로부터, 이제 30분도 지나지 않았다.
겨우 25분 남짓한 순간, 약 2만에 이르던 대군이 완전히 붕괴하였다.
“발란트 경···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기사단 참모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묻는다. 그들이 마주한 정면에 속속 적군의 기병이 모여든다. 대군을 쓸어버린 직후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힘이 넘치고 강해 보인다.
싸우든, 물러서든 지금 결정해야 한다.
아니, 싸우려고 한다면 상대 쪽에서도 맞서 줄 것인가.
물러서려고 한다면 물러가게 놔둘 것인가.
머리속이 복잡해진다.
마음같아서는 좀 더 남아서 싸워보고 싶다. ‘전투의 의식’을 치르지 않더라도 드라멜른 기사단은 강군이고 숫적으로도 호각이다.
어쨌든 버텨서 싸운다면 조금이라도 도망친 아군을 수습할 수 있으리라. 여기서 병력을 어느 정도 수습한다면, 적도 곤란해지리라.
아넥시를 구원한다는 전술적 목적은 달성하되, 성전군을 섬멸한다는 전략적 목적은 달성되지 않는다.
하지만···.
“물러섭시다. 적의 기세가 강하고 전황은 궤멸적이니. 더 이상은 싸우는 게 무의미할 것 같군. 그리고 우리는··· 추기경 예하를 호위하고 있으니.”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발란트 경.”
만약에라도 일이 잘못되어 아르누아 루케 추기경이 적에게 당하면 큰일이다. 아니, 차라리 당하는 게 낫지 포로로 잡히기라도 한다면··· 그 이상은 상상하기도 싫었다.
비록 대군을 잃었지만, 법황의 대리인이자 성전의 총책임자인 아르누아 추기경까지 잃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돌아갑시다··· 나중에 돌아올지는 모르겠지만.”
추기경 일행을 호위한 채로 병력을 서서히 물린다. 다행히도 적군이 추격하는 기색은 없다.
지금까지의 전과로 만족한 것인지, 아니면 보기보다 피해가 커서 추격전을 못할 정도로 피폐한 상태인지 알 수 없다.
무수히 많은 동료의 시체를 뒤에 남겨둔 성전군 마지막 부대가 전장을 빠져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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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겼나···.”
위풍당당하게 벽을 만들고 있던 검은 기사단의 대열이 멀어져간다.
부하들 거의 전부를 전장에 보내놓고 긴장하던 아실 트랑카벨은 아프도록 쥐고 있던 주먹을 그제야 폈다. 접혔던 부분과 손톱이 닿았던 손바닥 부분이 얼얼하다.
이겼다. 물론 승리가 처음은 아니지만, 이런 대규모 전투, 그것도 전력 면에서 열세에서 승리한 전투는 완전히 처음이다.
"아군의 승리는 확고하나 아직 전투가 끝난 것은 아닙니다, 아실 자작님!"
"아 그렇죠!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리츠 경."
"적을 더 추격하시지 않으신다면, 이대로 소탕전으로 이행하는 것을 건의 드립니다!"
"네, 그렇게 해주세요."
마지막까지 빈틈을 보일 수 없다. 하마터면 긴장을 풀 뻔 한 자신을 자책하면서 아실은 모리츠의 건의를 받아들인다.
"적이 항복을 청한다면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만약 저항을 멈추지 않는다면...."
그리고 한 마디 더 붙인다.
"용서하지 말아 주세요."
"잘 알겠습니다, 아실 자작님!"
바로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적으로 가득했던 아넥시 주변의 황야는 완전히 수복되었다.
남은 것은 여전히 도망치고 있는 약간 운 좋은 도망자들과, 유난히 완고한 저항자 한 줌뿐이다.
물론 사방이 적대적인 기병으로 가득한 상황에 도망도 저항도 포기해버린 자들도 있지만.
인간과 말, 그리고 강철로 만들어진 파도가 전장을 몇 번이나 훑고 지나간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목숨을 부지했다는 것은 굉장히 운이 좋았다는 이야기이다.
"어이, 떨리는 거 다 보이거든? 살고 싶으면 얼른 일어나!"
"히, 히익! 살려, 살려주시오!"
"셋 셀 때까지 일어나면 살려준다. 하나!"
"이, 일어났소!"
살아남은 자들을 불러 모아 밧줄로 엮고 임시 포로수용소로 보낸다.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살아남았다는 안도, 이단자들에게 당했다는 분노,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했다는 치욕.
각양각색의 반응이지만 분위기는 그나마 평화롭다.
"주신이시여! 저에게 힘을! 이단자들에게 굴하지는 않겠다!"
타앙!
"억!"
저항하는 자들은 모두 죽었기 때문이다.
타타탕! 타타타탕!
"사, 살려주... 으윽!"
"카아악!"
최후의 최후에 종교에 미친 동료의 곁에 서 있었다는 죄였다. 지금까지는 살아남을 만큼 운 좋았던 성전군 병사들이 죽어간다.
짧았지만 치열한 전투로 지친데다 예민해진 블랑독 병사들은 봐 줄 여유가 없었다.
게다가 적은 아직 무기를 손에서 놓지도 않았다. 전투에서 다 이겨놓고 적의 사정을 봐주다 다쳐서야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대부분은 큰 희생 없이 마무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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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넥시가 보이는 경계에 도착한 것은 전투가 완전히 끝난 다음 날이었다.
전령과 길이 엇갈렸는지 중간에 만나지 못했다. 그래서 전투가 완전히, 그것도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다는 말을 듣고 조금 놀랐다.
내가 준비했던 것은... 혹시라도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밑작업을 부지런히 했던 것뿐이다.
아넥시 주변의 적이 도저히 감당 못할 수준까지 강해지지 않도록 약체화를 유도했고.
대규모 기병 운용에 무리가 없도록 미리미리 모아놓고 훈련과 실전도 경험하고.
우리 트랑카벨 가문의 미래이자 희망인 아실 자작님은 미리미리 전쟁터도 데리고 다녔고. 또 훌륭한 부관인 모리츠를 붙여 보좌하도록 했다.
병력이 모자라지 않도록 먼저 기병 연대 완편을 지시하고, 프리스마라 연대도 불러오고.
카르카냑 병기고에서 개선된 신품 수석총도 공급하고.
...생각해보니 이것저것 한 게 많긴 하구나. 그래도, 이 정도는 해 놓아야 대응이 가능한 대규모 병력이니까.
그래서 나는 판단했다. 지금쯤 기습적인 기병 돌격으로 아넥시 포위망을 돌파하는 것까지는 예상했다. 하지만 그뿐, 적이 초기 충격에서 벗어나 반격을 시작하면 반드시 난전을 피해야 했다.
그러니 대충... 지금쯤이면 아넥시 포위를 풀어놓고 충격에서 벗어나 야전 진형으로 재편성된 적군과 대치하고 있을 것으로 예상했지.
단번의 돌격으로 적을 완전히 붕괴시키고 적 야전군의 주력을 반쯤 섬멸해 버렸을 줄은 몰랐다는 것이다.
"사망한 적의 숫자는 대략 1만 명 안팎으로 추산했습니다. 포로는 모두 834명입니다!”
“허어···.”
1만을 쓰러뜨렸다라. 격퇴가 아니고. 게다가 숫자에 깐깐한 모리츠의 보고이다. 아마 대단히 보수적으로, 확실한 전과만 추산했겠지.
그렇다면 실제 전과는 약 20퍼센트 정도는 높게 잡아도 틀림이 없으리라.
전장에서 적 1만을 죽이려면··· 대체 얼만큼의 병력으로 포위하고, 화력을 쏟아 붓고 해야 가능할 일일지.
내가 자리 비운 사이에 정말 엄청난 일을 해냈구나.
“아군 피해가 얼마라고?”
“사망자는 480명입니다만, 중상자가 있어서 더 늘어날지도 모릅니다.”
480명··· 대략 10퍼센트 정도의 사상자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약 절반 정도는 아넥시 수비군의 피해이다.
어찌 보면 전장에서 우리 병사들이 입어야 할 피해를, 반쯤은 민간인인 아넥시 수비군에게 아웃소싱한 것 같아서 기분이 좋지만은 않다.
하지만 그것을 고려해도 어마어마한 승리라는 것이 변하지는 않는다.
“추가로 적이 보급 기지를 그대로 두고 도망쳤기 때문에 막대한 물자를 노획했습니다. 대부분은 식량과 무기입니다. 군자금도 상당량 있습니다.”
정말 적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탈탈 털렸구나. 좀 불쌍할 정도이다.
“다만 적의 예비 화약은 아넥시 정면에서의 교전에서 인화하여 대폭발을 일으킬 때 소실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화약 재고는 거의 없었습니다.”
“그건 들었다. 중화상자들을 잘 보살펴주도록 해. 아쥬흐 의무대장님도 곧 오실 테니까.”
“물론입니다, 콘도티에레!”
뭔가 게임에 자동사냥이라도 돌려놓고 왔더니 대박이 난 느낌이다. 아실도, 모리츠도, 나머지 우리 병사들도 정말 고생했다.
모리츠가 보고하는 옆에서, 아실이 싱글벙글 웃고 있다. 너무 화려하지는 않지만 정갈한 트랑카벨 지휘관의 갑주를 입고. 머리에는 내가 선물로 준 나폴레옹 모자를 쓰고서.
도저히 방금 5천 기의 기병 대군을 이끌고 2만에 가까운 적 주력군을 갈아버린 모습으로 보이지 않는다.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아실 자작님. 이제 저 없어도 되겠네요.”
“그럼 큰일 납니다. 절대로 안 돼요.”
여전히 싱글벙글 웃고 있지만, 말투가 유난히 딱딱해진 것은 내 기분 탓이겠지. 역시 아롱드나 아쥬흐나 아실이나···. 트랑카벨 사람들은 방심할 수가 없어.
유일하게 사령관급 지휘부를 잡지 못한 것이 아쉽다. 법황청 소속의 고급 성직자를 한 명 정도 잡았다면 상징적이었을 텐데.
그나저나 이렇게 심하게 털린 적의 사령관은 누구였을까? 부디 앞으로도 계속 만나기를 빈다.
적 사령관 하니, 델레망드에서 만났던 적장이 계속 마음에 걸린다.
만약, 이번 아넥시 포위군을 지휘했던 것이 그 적장이었다면··· 이렇게 일이 쉽게 풀릴 수 있었을까?
어렵다고 본다. 설령 내가 있었다고 해도 쉽게 대응할 수 있었을지 모르겠네. 그런 점에서는 미리 그런 위험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것은 귀중한 성과이다.
아무튼, 걱정했던 아넥시는 이렇게 지켜졌다.
이 성녀의 도시는 여전히 블랑독 연맹군의 최전선으로 흔들림 없이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