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190화 (190/556)

24-32. 제2차 아넥시 방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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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 누아 기병 연대장 브라소 드 마르지엘은 속도를 줄이고 병력을 재정돈한다.

정확한 전과나 사상자는 알 수 없었다. 알고자 하면 알 수야 있겠지만, 지금 병력을 세워놓고 그런 미친 짓을 할 여유는 없다.

그저 두 가지는 확실하다.

첫번째, 브라소의 부대는 적 진영 외곽을 수비하던 보병 부대를 완전 붕괴시키고, 진영 중심부까지 수백 미터나 밀고 들어왔다.

추격을 멈춘 현재, 운 좋게 살아남은 적은 여전히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치고 있었다.

두번째, 사상자의 숫자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가장 중요한 충격 기병 부대의 기능을 잃지 않았다.

그럼 됐다. 브라소의 부대는 아직 한참 더 싸울 수 있었다!

말도 기병들도 하나같이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으나 얼굴은 밝아 보인다. 부대를 오른편으로 방향을 전환해 배치하고 나니, 오른쪽 전방으로 아넥시 요새가 보인다.

여기까지 쉽게 온 이유는 분명했다. 적이 병력 숫자만 믿고 아넥시를 포위하겠다며 너무 넓은 영역에 병력을 흩뿌려놓았던 것이다.

게다가 막사가 늘어선 숙영지는 크고 작은 막사들 탓에 시야가 가려지고 공간이 좁아 방어하기 좋지 않다.

이를 위해서 숙영지 외곽에는 나무로 된 마방책을 비롯한 각종 방어 시설들을 배치해야 하는 것이 기본이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크게 필요성을 못 느꼈을 수도 있지만, 나무가 없었기 때문이다.

‘수송대 습격 최우선순위는 한눈에 봐도 크게 보이는 공성포. 다음 우선 순위는 목재입니다.’

콘도티에레가 전에 내렸던 작전 지시가 생각나서 소름이 돋는다. 설마 이런 상황이 되리라고 내다보았던 것일까?

만약 지금 눈앞에, 어설픈 나무 울타리라도 있다면 지금처럼 거침없이 돌격하는 것은 불가능하니까.

분명 아넥시 주변은 황무지라서 나무를 공급할 숲이 없다. 여기까지 생각했던 것이겠지.

식량 보급은 끊지 않아도 되느냐고 물었더니, 어차피 그렇게까지 장기전도 아닌 데다가 완전히 막기도 불가능하다는 대답이었다.

그 결과가 지금의 적진이다. 포위군이 지내는 막사들만 덩그러니 있을 뿐.

얼마 안 되는 나무는 몽땅 아넥시를 고립시키는 바리케이드나, 사다리를 비롯한 공성병기에 쓰이고 있었다.

···그 와중에 적진 한가운데의 거대한 무대처럼 생긴 제단을 보니 한심하다는 생각도 드는 것이다. 몇 그루 분량의 나무가 재료로 들어갔을까.

즉, 거대한 타원 형태의 적 포위망은 아넥시와 접한 ‘안쪽’은 방벽이 있지만, 반대인 바깥쪽은 아무런 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2만 가까이나 되는 대군이 모여있으니 굳이 필요가 없다 생각했겠다. 그러지 않고서야 나무를 저렇게 낭비했을 리는 없다.

어쨌든, 그렇게 멋진 판이 만들어졌으니 조금 더 달려볼 수밖에 없다. 기병 연대장 브라소는 다시 전진 명령을 내렸다.

대열을 갖춘 기병대가 반쯤 폐허가 되어버린 적진을 가로질러 아넥시 정면을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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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다! 적이 온다고!”

압도적인 화력을 이용한 거점 방어 및, 이어지는 반격을 준비하는 빌다우 기사단의 진영은 부산스럽다. 적 기병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아직도 준비되지 않았나? 병력을 더 붙여!”

“인력이 충분해도 포대 구조 때문에 어렵습니다.”

“그럼 우선 포대에서 빼낸 포부터 배치한다.

“아, 알겠습니다.”

시간이 없었다. 20문 전체를 방열하자니 한도 끝도 없었다. 특히 혼자 거목처럼 우뚝 솟아있는 대구경 공성포는 포대 자체를 헐어내기 전에는 도저히 빼낼 수 없었다.

성을 공격할 때야 클수록 좋았지만, 막상 재배치하게 되자 클수록 골칫덩이가 된 것이다.

“준비 됐나?”

“아, 아직입니다. 지금은 두 문만 완료됐습니다!”

빌다우 기사대장 바콘 스트로치크가 신경질적으로 묻자, 땀을 뻘뻘 흘리던 포술장이 대답한다.

“우선 준비된 포부터 포격 시작한다. 이러다가는 그대로 적에게 휩쓸리겠군.”

“하지만··· 그럼 사격 통제가···.”

“어차피 곧 여기는 전장이 된다. 늦을 것 같은 나머지 포대는 산탄부터 장전하도록.”

“알겠습니다 바콘 경!”

엉망진창이었다. 애초부터 여러 부대에서 추기경 명령으로 긁어 모은 포들이라, 크기도 구경도 제각각이다.

포탄이 호환 안되는 것은 당연했고 익숙하지 않은 포대에 배치되면 화약을 너무 많이 넣거나 적게 넣어 큰 문제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신속이다. 적이 다가오기 전에 단 몇 발이라도 쏴서 적의 대열을 흐트러뜨려야 했다. 그리고 다가오면, 준비된 포들로 산탄을 때려 넣는다.

이런 엘랑키아 촌구석의 이단자들은 기병 상대로 근거리 산탄 포격이 얼마나 위력적인지 상상도 못하겠지.

분명 여전히 전장을 지배하는 것은 갑옷 입은 기사라고 생각할 것이다. 멀리서 날아오는 포탄만 생각하며 거리를 좁혀온 적군은 한순간에 피투성이 누더기가 되리라.

펑! 퍼엉!

곧 두 발의 포탄이 발사된다. 첫 포격인 만큼 명중률은 엉망이었으나, 용케도 한 발이 기병대열을 스치고 지나간다.

발목이 부러진 말이 비명을 지르며 앞으로 넘어지고, 기수가 허공을 날아 나동그라진다. 목이 부러졌는지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나 적 기병은 조금도 움찔거리지 않고 착착 거리를 좁혀온다. 촌구석 이단자들 주제에 포격에 익숙한 척이라도 할 생각이냐! 바콘은 이를 부득 갈았다.

“잘했다. 포격을 이어가도록. 나머지도 준비를 서둘러라.”

“알겠습니다, 바콘 경.”

바콘은 빌다우 기사단의 보병들을 살폈다. 창병과 총병이 뒤섞인 전형적인 선형 대형을 갖춘 부하들은 늠름해 보인다.

회색 망토를 걸친 같은 기사단 소속의 형제들을 중심으로, 용병들이 협력하여 대열을 짰다. 용병이라지만 그냥 돈에 팔려온 자들이 아닌, 오랫동안 기사단과 함께해온 신뢰 깊은 동료들이다.

적 기병의 기세는 무서웠지만, 후속하는 병력을 합쳐도 1천 기 남짓한 숫자일 것이다. 공성전을 준비하느라 상당수 병력이 장창을 놓고 온 것이 뼈아팠지만, 빌다우 기사단 소속과 지원 배속받은 공성부대를 합치면 3천이 넘는다.

기병대가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하지만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빌다우 기병대는 블랑독 해안가를 약탈··· 이 아니라 복속시키러 갔다가 기습을 당해 치명적인 타격을 입은 상태였다.

“대장님! 바콘 경!”

“무슨 일인가?”

유난히 신경질적인 목소리에 바콘 자신도 놀랐다. 최근 기사단에 연달아 닥친 재앙에, 상상도 못할 정도로 날카로워져 있었던 모양이다.

다음부터 좀 더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는데··· 그의 눈앞에 이상한 것이 보인다. 포대를 향해 달려오는 한 무리의 볼품없는 민병들이었다.

“아넥시의 이단자들이 출성했습니다!”

“뭐? 적은 스스로 성문을 막았다지 않았나?”

“그··· 그게, 아군이 포격으로 뚫어 놓은 돌파구를 통해서···.”

눈 앞이 캄캄해진다.

"뭘 보고만 있어! 막아라! 이단자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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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아아앙!

“흐아악!”

“무슨 소리야!”

엄청난 굉음과 함께, 뜨거운 바람이 훅하고 불어온다. 여태껏 멈추지 않던 기병의 대열이 처음으로 움찔거리며 멈춘다.

“저게 뭐야?”

“와아아아아!”

시커먼 연기가 기둥 모양으로 뭉개뭉개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 사이로 사람 키보다도 훨씬 커 보이는 거대한 공성포가 조각조각 나서는 3미터 이상 날아올랐다가 떨어진다. 육중한 포신이 충격으로 깨지며 다시 요란한 소리를 낸다.

기병을 이끌던 브라소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상황 파악이 되지 않는다.

진격중인 휘하 기병대에 갑자기 포탄이 몇 발 떨어졌다. 그 직후 이쪽을 향해 방열된 적의 포구를 보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솔직히 방심했다.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으나, 안일했다. 결과적으로 자신은 적 포병대의 정면으로 부대를 몰고 말았다.

어쩌면 소중한 휘하 병력이 치명적인 피해를 입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주군인 가스텔 드 누아 백작에게, 그리고 믿고 선봉을 맡겨준 아실 트랑카벨 자작과 콘도티에레에게 너무 미안했다.

대피해를 각오한 그다음 순간, 아넥시의 무너진 성벽을 통해서 한 무리의 민병들이 달려나왔다! 그들로부터 포대까지의 거리는 정말 얼마 되지 않는다.

민병들이 포대에 도착했나 싶더니, 적 포대 한구석에서 대폭발이 일어났다.

설마··· 화약고라도 폭발한 것인가?

도대체 왜? 지금?

불굴의 기병대장, 브라소 드 마르지엘은 시커먼 연기에 뻘건 불꽃이 뒤섞여 마치 거대한 뱀처럼 하늘로 치솟는 거대한 폭발 구름에 공포를 느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의 불굴의 의지가 갑자기 빛나기 시작했다.

내가 공포를 느낀다면, 당연히 적도 느낄 것이다.

내가 놀랐다면, 당연히 적도 놀랐을 것이다.

들어가자. 결심을 굳힌 브라소는 진격하다 멈춘 상태로 우왕좌왕하는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행군 종대로 변경! 내가 선두로 들어가겠다."

"들어갑니까? 어디를요?"

"폭발지점을 통과한다. 반대편에는 적이 있겠지."

"지, 진심이십니까?"

"부관, 자네가 예상하지 못했다면 적도 예상하지 못하지 않을까?"

"...따르겠습니다. 전원 행군 종대로!"

"반대편에 도달하면 각자 판단에 따라 행동한다."

"옛!"

설령 자신이 죽더라도, 숙련된 드 누아의 기사들은 마지막까지 돌격을 수행할 것이다.

한 손에는 고삐를 한 손에는 검을 들고 시커먼 연기 기둥 안으로 들어간다. 숨을 참으면서. 무리해서 달리지는 않는다. 뭔가에 부딪치면 위험하다.

다행히 생각만큼 어둡지는 않았다. 눈이 따가울 정도로 매운 연기 속이지만 뿌옇게 사물은 분간할 수 있었다.

뭔가가 깨진 조각들이 말발굽에 부딪혀 기분 나쁜 소리가 난다.

포대를 보호하는 한편, 과열 등으로 자폭할 경우 주변으로 날리는 파편을 막기 위해 세워둔 나무로 엮은 바구니가 엎어져 있었다. 측면이 갈기갈기 찢어져, 마치 내장처럼 흙이 흘러나와 있다.

흙과 파편에 뒤덮여 시체인지, 마치 시체처럼 보이는 무엇인지가 스쳐 지나간다.

분명 얼마 되지 않는 거리일 텐데. 마치 끝이 없는 그림자 속을 걷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사실 자신은 이미 죽어서 지옥에 온 것이 아닐까? 온통 후끈한 열기와 매캐한 연기로 뒤덮인 지옥으로.

웅성웅성.

다행히 아니었다. 여기까지가 연기로 된 벽의 끝이다. 어쩐지 알 수 있었다. 건너편에서 적들이 웅성대는 소리가 들린다.

부하들은 뒤에서 잘 따라오고 있겠지? 굳이 확인하지 않는다. 안 따라오더라도 돌아갈 건 아니니까.

말에 박차를 가한다. 이 지옥 같은 폭발 연기 속을 함께 와준 경의를 담아, 부드럽게.

다각.

속도를 올린 말이 딱 두 걸음을 걷자 세계가 바뀐다. 연기 속 지옥같은 광경에서, 평범한 일상으로.

바로 전쟁 말이다.

"푸하핫!"

참았던 숨을 내쉬고, 맑은 공기를 마음껏 마신다. 물론 매캐한 화약 냄새와 쇠비린내가 섞인 데다 혓바닥이 깔깔해지는 전장의 공기였지만.

수백 개의 눈이 자신을 향한다. 폭발에 놀라 연기 기둥으로부터 반원 모양으로 거리를 둔 적병들의 눈이다.

"으오오오오오!"

오른편에서 고함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적의는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에게 힘을 실어주려는 듯한 외침.

땀으러 젖어 흐트러져 엉망이 된 머리카락을 가진 장년의 남자였다. 옆으로 넘어진 대포 위에 올라 핏발 선 눈으로 외치고 있었다.

아니, 외침이라기보다 짐승 같은 포효에 가까웠다.

"가라! 끝장내버려어!"

그가 머리 위로 흔들고 있는 무기는 큼직한 양손용 벌목 도끼였다. 무기에도, 입고있는 가죽조끼에도 온통 피가 묻어 있었다.

그제서야 알았다. 저자는 포대를 습격한 아넥시 민병대의 한 명이다. 위험을 무릅쓰고 포대를 공격했고, 드 누아 기병대는 집중 포격이라는 최악의 결과를 피할 수 있었다.

아마 이 대폭발도 저들이 일으킨 것이겠지.

그가 잡은 기회는 민병들이 목숨을 버려가며 만든 아주 특별한 기회였다.

무기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돌격! 나를 따르라아!"

등 뒤에서 부하들의 함성이 들린다. 역시 뒤를 돌아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던 적병들의 얼굴에 경악의 빛이 어린다. 말을 몰아가자 앞을 가로막는 적은 없었다. 무기도 휘두르지 않는다. 팔 힘을 아껴야 했다.

아넥시 민병대의 결사적인 출성 돌격과, 원인 모를 공성포대의 대폭발은 완벽한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우선 포대를 덮친 민병대를 격퇴하기 위해, 잠시 밀집대형을 푼 사이에, 드 누아 기병대가 흐트러진 적의 대형을 덮쳐버렸다.

"흐아압!"

"커억!"

속도를 올린 브라소는 단숨에 적진 가운데로 뛰어들었다. 두 명의 적을 밀치고, 막으려 드는 적 하나의 무기를 쳐내며 그대로 밀고 들어간다.

'기병과 기병대의 역할은 다릅니다. 기병의 역할은 적을 죽이는 것이지만, 기병대의 역할은 적 부대의 약점을 타격하는 것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인지 알 것 같았다. 브라소는 적이 잠시 밀집대형을 풀었다가 미처 수습하지 못한 틈으로 부대를 이끌었다.

최후의 반전을 노리던 빌다우 기사단은, 심장에 화살이 꽂힌 채로 전투를 시작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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