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189화 (189/556)

24-31. 제2차 아넥시 방어전

콰자작!

콰득!

“흐어어억!”

기병대가 달려들자, 돌격의 힘이 실린 창 끝은 총알도 튕겨내는 두터운 흉갑조차 뚫어 버린다. 창대가 부러지며 힘이 상쇄되었는데도, 여기저기서 창에 꿰뚫린 적병이 허공을 날아오른다.

물론 돌격하는 기병의 창이 총알 이상의 에너지를 가졌기 때문은 아니다. 창 촉의 형태와 각도, 그리고 단단함으로 인해 찔린 한 지점에 도저히 감당 못할 힘이 실렸기 때문이다.

무너질까 말까 하던 보병들의 측면으로 기병들이 마구 치고 들어간다. 보병들은 더 이상 참지도, 눈치도 보지 않는다. 그저 공포에 사로잡혀 후방을 향해 달린다.

“가자! 가라아!”

“전부 쓸어버려!”

어지러이 도망치는 보병 대열을 마구 헤치며 돌입하는 드 누아의 기병들은 몇 개 무리로 나뉘어져 있다. 드 누아 기병대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대열을 이룬 것이 아니다.

그 이유는 어차피 부분 부분 무너진 적진, 굳이 단단한 하나의 대열로 돌입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적이 단일한 대열로 철저하게 버티고 있다면, 이쪽도 그만큼 단단한 대열이 필요하다. 그렇게 정면으로 들이받고, 이쪽의 충격력과 질량을 적에게 전해줄 필요가 있으니까.

그렇게 한꺼번에 충격 당한 적 진영 내부에 피해와 공포, 그리고 물리적, 정신적 쏠림 현상이 이어지고 마침내 전열 붕괴에 이르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전장의 망치, 기병의 힘이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단단한 방어선 따위는 없었다. 강한 적, 즉 준비한 창병을 굳이 역상성 관계인 기병으로 들이받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먹음직한 살코기가 잔뜩 있는데 굳이 뼈를 억지로 씹어먹을 필요가 어디 있는가. 그저 적의 단단한 부분을 소규모 돌격대로 유연하게 피해가면서, 부드러운 부분을 아프게 도려내면 되는데.

결국 그나마 기병 돌격을 막을 가능성이 있는 창병 대열은 그대로 ‘무시’ 당한다.

마치 고슴도치처럼, 사방으로 창대를 세운 소규모 밀집 대형 몇개가 기병의 파도 사이의 위태로운 암초처럼 덩그러니 떠 있을 뿐이다.

대열을 갖추지 못한 창병은 이미 기세를 얻은 기병을 막지 못한다.

사격통제에 실패한 총병 역시 마찬가지다.

창도 총도 가지지 못한 오합지졸이나, 대열을 벗어나 무너지고 있는 도망병들은 말해야 입만 아프다.

어쩌다 버티려고 뭉쳐봤자, 기병의 숫자와 힘으로 밀어버린다. 말에 부딪히고 창에 찔렸으며 칼에 베인 사상자들의 아우성이 전장을 가득 채운다.

탕! 타탕! 탕!

“으윽!”

“탕! 타타탕!

“아악!”

“흑! 도망쳐!”

“멈춰! 도망치면 다 죽는다고!”

“이거 놔··· 으억!”

그나마 버티던 창병의 작은 대열은 주변을 맴돌며 여유롭게 권총을 사격하는 적 기병에 의해 무너져 내린다.

장전된 총의 수는 무한이 아니기에, 숫자가 줄고 대열이 좁아지더라도 무조건 버티는 쪽이 유리하다. 아마 창병들 역시 머리로는 알고 있을 것이다. 이토록 불리한 상황이 아니라면 용기를 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충격과 공포가 이성을 압도했다. 그나마 안전했던 대열을 벗어난 도망병들은 곧 살해당한다. 도망병들이 벗어나 이가 빠진 대열은 후속하는 기병대애게 짓밟히고 만다.

때로 용감하게 긴 창으로 저항해보려 달려드는 창병도 있다. 하지만 사람 키보다 2배를 훌쩍 넘는 장창은 도무지 휘두를 수 있는 무기가 아니다. 가만히 제자리에서 버티는 무기라는 말이다.

물론 기습적으로 일제히 전진하는 질서정연한 창병 대열이 절대적 역상성인 카라콜 대열을 격퇴하는 일도 있긴 하다.

하지만 이는 거대한 창날의 벽이 일제히 전진하기에 가능하다.

용감한 창병이 뭔가 해 보기도 전에, 비스듬히 뒤편에서 기병이 스쳐 지나간다.

철퇴가 휘둘러지더니 퍼억 하고, 도무지 형용하기 어려운 괴상한 타격음이 들린다. 바닥에 납작하게 엎어진 창병의 투구 주변에 걸죽한 피가 좌악하고 퍼져나간다.

도망치는 적병을 추월하며 투구와 목 사이를 깔끔하게 베어내며 승마술과 칼솜씨를 뽐낸다.

광분하여 무기를 허공에 마구 휘두르며 저항하는 기사의 방어를 뚫고 접근하더니, 낙엽이라도 줍듯 긴 창으로 쿡 하고 찔러 쓰러뜨리기도 한다.

기병은 너무 많고, 손쉬운 표적은 더더욱 많다. 일방적인 학살이 이어진다.

“이런 제길!”

그 거대한 일방적인 살륙의 축제 와중에, 연대장인 브라소 드 마르지엘은 정작 표적을 못 찾고 있었다.

처음 표적으로 찍었던 적 장교는 진작에 도망쳐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그 후로도 지휘를 하며 혼란속을 이리저리 이동하다보니, 오른손에 든 창도, 왼손에 든 총도 쓸 일이 없었다.

타앙!

“커헉!”

부하 한 명이 총에 맞아 상체를 뒤집으며 낙마한다. 한 줌의 적 보병과, 악을 쓰며 그들을 지휘해 저항하는 기사가 보인다.

방금 총소리는 초로의 기사의 손에 들린 권총이 발사되면서 난 소리로 보인다.

멋진 검은색과 흰색으로 된 외투와 망토. 점잖아보이는 흰색 콧수염. 전투가 계속되면서 다소 흐트러진 모습은 보이지만 품격있는 종교기사단의 상급 기사가 분명했다.

브라소 드 마르지엘은 묘한 고양감을 느꼈다. 저 자다. 드 누아의 기병대장에게 어울리는 첫 사냥감이다! 둘의 눈이 마주친다.

먼저 브라소가 창을 반쯤 치켜들어 도전의 신호를 보낸다. 초로의 적 기사가 권총을 버리고 칼을 뽑아든다. 고풍스럽고 전형적인, 폭이 두껍고 예리한 기사의 검이다.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짓는다. 입가가 뺨을 밀치고 송곳니가 드러나는 호전적인 미소. 그대로 창을 적을 향해 내리고 말에 박차를 가한다. 적도 마찬가지.

가슴이 뛴다. 수천의 인마가 뒤얽히는 전장에서, 연대장인 자신과 고풍스러운 적의 지휘관급 기사가 일대일로 격돌한다!

권총을 쓰거나, 안일하게 창으로 말을 찌르는 선택지는 처음부터 없었다. 반드시, 저 늙은 종교 기사의 은빛으로 빛나는 흉갑에 이 창끝을 박고야 말겠다.

“히야압!”

“카앗!”

거리는 순식간에 좁혀진다. 적은 상체를 숙이고 칼을 비스듬히 앞으로 겨누듯 내밀고 있었다. 창대를 쳐내고 그대로 찌르기를 하거나, 격돌시의 힘이 실린 참격을 할 수 있는 모범적인 기병전 자세이다.

쩌저적!

상대 역시, 말과 말을 부딪히게 위협하는 변칙 전술 따위는 쓰지 않는다.

두 기사. 말 그대로 몸도 마음도, 신분도 무장도 기사인 두 사람의 군마가 간발의 차이로 스치고 지나간다.

몇 걸음 지나가 말을 돌린다.

품위있어 보이는 노기사의 얼굴이 놀람과 격통으로 크게 일그러져 있고, 목젖이 보일 정도로 입이 크게 벌어진 것이 보인다.

하늘을 향해 누운 기사의 은빛 흉갑에는 부러져 나간 브라소의 창 끝이 꽂혀있었다. 멋드러진 흑백 기사복의 흰 부분이 자신이 흘린 피로 붉게 물들고 있었다.

승리였다.

난데없이 전투 와중에 기사끼리의 일대일 대결을 승리했다. 브라소 드 마르지엘은 온 몸이 저릿저릿할 정도의 희열을 느낀다.

허나, 그는 지휘관이다. 적 한 명을 쓰러뜨린 일따위로 일비일희하면 안 된다. 자기 역할을 다 하고 부러진 창은 던져버리고, 바로 검을 뽑는다.

이미 저 앞까지 달려간 부하들을 따라 달려간다.

“전부 죽여라아!”

호전적인 함성을 지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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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랑카벨 가문의 후계자, 벨모제의 영주 아실 트랑카벨은 굳은 표정으로 휘하 기병대의 장대한 돌격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멋졌다. 고함을 지르고 박수를 치고 싶을 정도로 멋졌다.

과거의 소년이었다면 그랬겠지만, 지금은 그러지 않는다. 더 이상은 소년이 아니니까. 트랑카벨 가문을 어깨에 짊어지고 있는 사령관이니까.

더 이상 기병대를 멋지다 그렇지 않다로 판단하면 안 된다. 그들은 자신의 가문이 보유한 강력한 병종이고, 살인 기계였다.

지금까지는 잘 진행되고 있었다. 아실의 기병대는 무서운 기세로 돌격했고, 아직도 진격이 계속되고 있다.

마치 불에 달구어 새빨갛게 달아오른 쇳덩이로 다져진 눈을 내리누르듯,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무너지는 적을 짓밟으며 나아간다. 말 그대로 적을 녹여버리면서.

“전령! 전령! 드 누아 기병 연대의 브라소 연대장께 명령을 전달하고 왔습니다!”

“그래, 뭐라고 하시던가?”

“전령! ‘선봉은 양보할 수 없음. 우측으로 기동해 아넥시 정면의 적을 섬멸하겠음’ 이상입니다!”

“하핫, 훌륭하시구나.”

동맹 가문인 드 누아 소속 연대장의 호승심 넘치는 답변을 들으며 아실은 웃음을 터뜨린다.

방금 전, 아실은 선봉인 드 누아 기병 연대에 전령을 보냈다.

내용은 ‘우선 정지, 병력을 추슬러 우측으로 기동, 아넥시를 구원하라’ 였고, 뒤이어 ‘피로가 심하다면 우익의 제8 연대가 선봉을 교대하겠다’를 보냈다.

뭐 예상대로, 답변은 저렇게 왔다.

아직 전황을 관망하고 있는 아실이 직접 지휘하는 본대, 제7 카르카냑 기병 연대의 우측 전면으로 두 언덕 사이에 낀 작은 성채 마을 아넥시가 보인다.

나지막한 구식 성벽 외에는 특별한 것도 없는 작은 요새가 스무배 가까운 적의 공세를 오랫동안 막아냈다.

용감한 민병대의 용맹과 노력은 결실을 맺었고, 나비효과가 되었다. 그 결과는 지금 눈앞에 보이는, 완벽한 트랑카벨 기병의 돌격이었다.

뻥! 퍼펑!

퍼엉!

한편, 좌익, 프리스마라 연대의 정면에서는 갑작스러운 포성이 들린다. 트랑카벨 기병 연대들이 빌려준, 기마견인포들이 일제히 발사하는 소리였다.

적진의 북서쪽 귀퉁이를 지키던 몇 개의 보병 사각 대형들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마치 표면장력으로 간신히 버티고 있던 물이 담긴 잔의 균형을 깨는, 마지막 단 한 방울의 물처럼.

사실 가벼운 무게와 기동력을 최우선시한데다, 4문밖에 안되는 소구경 견인포의 화력은 뻔하다. 장거리에서 하루 종일 쏴 봐야 심각한 타격은 못 입힌다.

하지만 프리스마라 기병대가 주변을 빙빙 돌면서, 딱 100미터 정도의 애매한 거리에서 계속 시간을 끌며 괴롭힌데다, 세 방향에 적 기병이 있다.

적군 역시 상당한 규모의 보병 사각 대형이 4개나 있었다. 안전한 중앙에는 다수는 아니지만 기병대도 있어 어느정도의 기동전 대응도 가능했다.

버티려면 하루 종일도 버틸 수 있다. 빠져나가자면 천천히 대열을 유지하며 전장을 벗어나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기습에 당한데다 삼면을 포위당한 상황에 정신적으로 몰린 성전군 대열이 안쪽에서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쪽 성전군 입장에서는, 북서쪽에서 나타난 기병대에 대응하기 위해 출동했더니, 난데없이 후방에서 훨씬 많은 적이 나타난 격이다.

포위당할지 모른다는 공포는, 실제 포위에 당하는 것 보다도 심각한 문제를 불러왔다.

견인포대의 지원 포격은 이미 무너진 대열 붕괴를 가속화시켰을 뿐이다.

“아라라라라라라라!”

“아라라라라라라!

“카라라라라!”

프리스마라 특유의 기이한 전투 함성이 이미 패주를 시작한 성전군 병사들의 심장을 완전히 뒤흔들어 놓았다.

총병과 창병, 심지어 거기에 기병까지 뒤섞인 엉망진창의 대열을 프리스마라 기병대가 덮친다.

“아라라라라라라라!”

프리스마라의 함성소리에, 운 없는 희생자들의 비명소리는 묻히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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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다우 기사단 소속의 기사대장, 바콘 스트로치크는 이제 아넥시가 지긋지긋했다.

아니, 블랑독이 지긋지긋했다. 성전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싶었다.

빌다우 기사단은 드라멜른 기사단에 조금도 떨어지지 않는 그룬발트 계통의 명문 기사단이다. 특유의 밝은 회색 망토 때문에 그들의 돌격은 유령의 돌격이라고도 불리며 공포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이번 성전에 참여해 블랑독에 도착한 이후로 악재가 이어지고 있었다. 법황에게 잘 보이기 위한 대가 치고는 너무도 많은 희생이다.

전쟁 초반에는 무난히 나가나 싶더니, 사령부의 명으로 이단 색출과 물자 조달을 위해 바닷가로 나갔던 별동대가 기습당해 완전히 전멸해 버렸다.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아넥시 공격이 시작된 이후 선봉에 지원했다. 그런데 이 작은 도시는 뭐가 이리 단단한지, 쉽게 얻을 과실에 욕심낸 선봉의 자리는 죽음의 자리가 되었다.

결국 전쟁이 시작한 이후, 함께 파견된 빌다우 기사단의 형제 셋 중 하나가 사망했다. 보조 병력인 용병대의 피해도 막대하다.

방금도 이 망할 도시를 겨우 점령하나 싶었더니, 곧바로 퇴각명령이 내려왔다. 적의 지원군이란다.

정말 30분, 아니 15분만 있으면 확실히 이길 수 있었다. 아넥시 성채 전체를 장악하지는 못해도, 큼직한 주요 건물을 접수하고 평지와 연결된 주 성벽을 점거하면 함락이나 다름 없으니까.

하지만 명령은 명령이다. 무수히 많은 형제들의 시체를 뒤에 남기고 물러서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제, 성전이 시작되고 처음으로 기회가 온 것 같았다.

멀리서 접근하는 이단자들의 군대가 있다.

그리고 바콘 기사대장에게는 다수의 야포가 있다. 바로 아넥시 성벽을때리던 대포 말이다.

한 줌 민병대가 지키는 초라한 시골 성채를 공격하기에는 어이가 없을 정도로 과도한 화력이다.

“서둘러라! 적이 곧 다가온다!”

“화력으로 적을 구워버리자.”

포병들이 안간힘을 쓰며 포대의 배치를 바꾸고 있었다. 포 사이 사이에는 흙으로 쌓은 방벽이 있어서 단순히 포의 방향만 돌리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평소보다 연사를 높인 까닭에, 혹시라도 과열되어 자폭할 경우 주변 포대에 파편을 뿌릴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지금은 포대 재배치를 방해하는 장애물일 뿐이다.

“서둘러!”

운 없는 성전군 동료들이 벌어주는 시간에도 한계가 있었다. 어느새 아군 진영의 중앙을 차지하고 이쪽을 향해 병력을 추스르는 것을 보면 금방이라도 돌진해올 것 같다.

하지만 이쪽에는 크고 작은 화포 20여 문이 있다. 그 뒤로는 전쟁 초기에 비해 숫자가 많이 줄기는 했으나, 여전히 용맹한 빌다우의 정예가 있고.

포격으로 기세를 줄이고 빌다우의 주력으로 역습한다. 블랑독 토벌전에 참전한 이후, 처음으로 전공을 세울 생각에 바콘의 입가가 올라간다.

"포격 준비는 멀었나?"

"곧 완료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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