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188화 (188/556)

24-30. 제2차 아넥시 방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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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하지 말고 쉬게나. 자네의 임무는 끝났으니. 우리, 주신께서 가호해주시는 성전군은 이리도 강대하다네.’

추기경의 호언장담을 듣고, 전령은 불안해졌다. 그래서 잠시 원초적인 욕망을 참고 정보를 전달할 다른 고급 지휘관을 찾아다녔다.

혹은 ‘이대로 가다가는 다 죽겠다’는 베테랑 군인으로서의 예감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는 서둘러 누군가 책임급 지휘관을 찾아 나선 것이다.

그가 막 휘하 기사단을 전투 대기 상태로 만든 드라멜른 기사단의 발란트를 만난 것은 어쩌면 정말로 주신의 가호 덕분일지도 모른다.

“적 기병의 대군?”

목이 말라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전령에게 보고를 받은 발란트는 충격을 받은 표정이다. 정말 운이 없게도, 성전군 전체에서 동쪽에 배치된 드라멜른 기사단의 진영에서는 아넥시에 가려서 반대편이 보이지 않는다.

부하들에게 우선 전투 준비를 위해 대열 편성을 명령한 발란트는 말을 몰아 아넥시의 정면, 포병대의 배후를 가로지른다.

1문의 공성포의 20여 문의 야포들은 역할을 다 하고 쉬고 있었다. 포병들은 오랫동안 무거운 포탄을 나르고 시끄러운 포성에 노출되었기 때문인지 매우 피곤해보인다.

그 너머로는 성벽에 새카맣게 달라붙은 성전군 병사들이 보인다. 성벽의 한 귀퉁이가 흉하게 무너져 완만한 비탈을 이룬 것도 보인다.

많은 수의 성전군 돌격대가 이를 통해 돌입했거나, 돌입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제 아넥시 함락은 시간문제겠지.

시간문제? 사실 시간에 쫓기는 것은 아군은 아닐까? 불길한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한참을 달려 아넥시 정면을 벗어나자, 탁 트인 황량한 초원이 펼쳐진다.

“하아···.”

발란트는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쉰다.

“이이이··· 이게 무슨!”

“발란트 집행관님, 대응이 필요합니다!”

그를 따라온 호위 기사들도 당황해서 한마디씩 한다.

넓고 울퉁불퉁한 지평선이 온통 기병으로 가득했다.

멀리 보이는 먼지 구름은 거대한 회색의 장벽처럼 아넥시의 남서쪽으로 넓게 드리웠다.

정면에서 서두르지도 않고 속보로 달려오는 기병대가 입은 갑옷은 얼마나 갑옷을 잘 손질했는지, 햇빛이 반사되어 눈이 부실 정도이다.

화려한 색으로 칠해져 말이 달릴 때마다 상하로 일정한 리듬으로 움직이는 수많은 기병창의 대열은 잘 만들어진 기계장치 같았다.

숫자가 얼마나 될까? 3천? 5천? 어쩌면 그 이상?

도착하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5분? 7분? 확실한 것은 어리둥절해서 혼란에 빠진 주변의 성전군을 하나의 전투부대로 조직할 만큼 충분한 시간은 없다는 것이다.

현재 아넥시 주변에 있는 성전군의 대략적인 배치를 그려본다.

전체를 100으로 나눌 경우.

대략 10이 북동쪽에서 갑자기 나타났던 기병에 대비하고 있다.

대략 25가 북서쪽에서 유난히 소란을 부리는 두 번째로 나타난 기병에 대비하고 있다.

대략 25가 아넥시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에 나서고 있다. 병력의 질이나 화포의 보유라는 점에서 이 지점이 무척 중요했다.

또 발란트 자신이 보유한 드라멜른 기사단은 대략 20 정도의 전력이다. 지금 순간 전투 대비가 된 병력이므로 유용하게 써야 한다.

나머지 15 정도의 병력이 편성이 되지 않은 상태로, 어디서 누구 휘하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빠른 대응이 필요하다. 자네는 추기경의 천막으로 가라. 그리고 이 상황을 알리고 즉시 동쪽으로 피신하도록 전해라.”

“예, 옛! 대장님.”

“보고 직후 근위대장을 끌고 저 모습을 보여줘라. 아마 성직자들은 현 상황을 이해 못할 테니.”

“알겠습니다!”

첫 호위 기사가 진영 중심의 추기경 천막을 향해 달려간다.

“자네는 여기서 저 방향, 북동쪽으로 달리면서 ‘남서방향 적습’을 외친다. 연대급 부대를 발견하면 즉각 지휘관을 찾아 이 상황을 설명하고. 가능한 많은 부대에 알린다.”

“옛 집행관님!”

“자네는 저 방향, 북서쪽으로 달리면서 마찬가지로 외친다. 연대급 부대를 발견하면 지휘관에게 이 상황을 설명하고. 잘 편성된 부대가 많이 있는 쪽이다. 부탁한다.”

“옛, 알겠습니다!”

다시 두 명의 기사가 자신이 맡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달려간다. 두 명의 젊은 청년들이 외치는 ‘남서방향 적습’이 혼란스러운 진영에 울린다. 조금이라도 많은 숫자가 적습 전에 알아차려야 한다.

···하지만 알아차린다고 바로 대응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저만한 숫자의 기병대군, 제대로 된 창병과 총병의 밀집 대형이 아니면 조금도 버틸 수 없다.

다음은 무엇을 해야 할까··· 어떻게든 유의미한 방어 병력을 찾아야 한다. 단 수백 명일지라도, 대열만 잘 갖추면 최소한 적이라는 해일을 막는 방파제가 되어서 전면적인 붕괴는 막을 수 있었다.

“저는 여기 남아 방어선을 재조직해보겠습니다.”

“귀관···.”

“저 정도는 되어야 성전군 소속의 동맹 병사들도 말을 따라주겠지요.”

발란트는 놀란 눈으로 쑥스러운 듯, 회색 콧수염을 만지작거리는 초로의 기사대장을 바라본다. 직속 기병대의 지휘관이었다.

객관적으로 봐도 멋진 흑색과 백색의 기사단 복, 당당한 체구, 반백의 머리카락과 수염. 이 정도 외모와 경륜은 되어야 누군지도 모를 성전군 소속 병사들을 통솔할 수 있다는 이야기겠지.

하지만 여기는 적과 접경한 곳, 제대로 준비하지 않으면 순식간에 쓸려나갈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아직 대열도 갖추지 못한 오합지졸을 지휘한다는 것은···.

사실상 죽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부탁합니다. 기사대장.”

“집행관님, 어서 부대로 돌아가십시오. 제 생각에는 아넥시를 공성중인 돌격대를 빼서 재편성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은 편제가 유지되는 부대가 귀합니다.”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시간이 없었다. 초로의 기사대장은 주먹의 엄지손가락 쪽을 가슴에 대는 북방식 경례를 마친 후, 말을 돌려 반대편으로 달려간다.

장교로 차려입은 성전군을 보면 모두 불러모아 뭔가를 지시한다.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병사들을 모은다. 이 자리에 새로운 방어선을 만든다는 이야기겠지.

그가 벌어줄 시간··· 아니 시간을 벌 수 있을지조차 미지수이다. 복잡한 보병 밀집 대형을 세우는 데는 때로는 한 시간에 넘게 걸리기도 한다.

그걸 평소 함께 싸워본 적도 없는 오합지졸을 긁어모아 만든다는 것은···.

제발 그의 희생이 헛되지 않기를 바라며, 온 길을 되짚어 달린다. 그의 말대로 아넥시를 공격중인 돌격대를 되돌려야 한다.

다행히 아넥시를 공성중이던 포병대가 거기 몰려있다. 포의 방향을 돌리고 정예부대가 대부분인 돌격대를 재배치하면 최소한 거기서는 화력의 우세, 안정된 전선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가자!”

“예, 집행관님!”

그리고 그 뒤를 온전한 드라멜른 기사단이 지원한다면, 승부를 다시 원점으로 돌릴 수는 있으리라 생각이 들었다.

이미 늦었다. 감히 적을 격퇴하고 승리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지금은 ‘성전군’이 정체성을 잃고 궤멸해 버리는 것을 피하는 것만 생각하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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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억, 허억!”

“뭐지? 적이 물러난다?”

아넥시 수비군은 거친 숨을 내쉬며 어리둥절해하고 있었다.

“으으윽, 어이구 다리야.”

루옹 역시 허벅지 통증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에 철퍼덕 앉아버렸다. 베인 상처는 깊지는 않지만, 유난히 신경쓰이고, 피가 흘러 불쾌했다.

“뭐지? 왜 물러난 거죠?”

“우리한테 쫄았겠지!”

“아하하! 그러면 좋겠는데!”

호기롭게 말은 했지만, 루옹은 알고 있었다. 아니, 이 자리에 있는 아넥시 수비군 모두가 알고 있었다.

아넥시는 풍전등화였다.

지금까지 성벽과, 성벽의 일부가 무너져 돌입을 허용한 후에는 바리케이드에 의존해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하지만 이후 돌입해온 적은 실로 정예부대였다. 바리케이드와 장대 무기로 어떻게든 적의 접근을 막자, 이번에는 적이 장창 부대를 투입해왔다.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성전군 소속의 정예 창병과, 의욕만 있을 뿐 벼락치기인 아넥시 민병 사이의 격차는 말로도 못할 정도였다.

결국 두 겹의 바리케이드 중, 첫 번째는 그대로 함락되었다. 두 번째는 뚫리기 직전이다. 아니, 조금만 더 밀어붙였으면 반드시 뚫렸다.

그 후에는 시가지 안쪽으로 들어가 2차 저지선을 펴는 계획은 있었지만··· 지칠 대로 지친 병력은 대부분 이동하기도 전에 따라잡혀 죽을 것이다.

이미 전문 전투 병력과 평지에서 맞붙는 이상, 전투가 지속은 되지만 유의미한 결과는 내기 어려운 소탕전이 될 것이었다.

그런데 그 직전에 후퇴해 버렸다. 적 역시 불리한 상황에서 여기까지 오기 위해 많은 희생을 냈다. 무너진 성벽 안팎에 쓰러진 시체들은 대부분 성전군의 시체이다.

갑자기 후퇴한 이유를 알 수 없다. 마치 머리를 자르기 위해 떨어지던 단두대가 살가죽에 닿기 직전에 멈춰버린 느낌이다.

“루옹 대표님··· 잠깐 이것 좀 보십시오.”

요한 사제의 목소리이다. 기진맥진한 루옹은 고개를 들어 사제를 올려다본다.

항상 예의가 바른 요한 사제가 자신의 얼굴을 보지도 않고 멀리 성벽 너머를 손가락질하면서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하늘의 군대! 성녀님의 군대가 왔다아!”

“만세! 만세에!”

조금 전까지의 치열한 공격과 포격이 멈춰 이상할 정도로 조용한 아넥시에도 들리기 시작한다.

‘성녀가 보내주신 구원군’의 말발굽 소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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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격 명령이 내려왔다! 속도를 올린다!”

“옛!”

드 누아 기병 연대의 지휘관, 브라소 드 마르지엘 남작은 창을 치켜들며 신호를 보냈다. 이번에도 대열의 선두이다.

이제는 연대장이니, 너무 나서지 말고 후위에서 부대를 총괄하는 역할도 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자신도 머리로는 그게 맞다는 생각은 하지만, 역시 기병 돌격의 선두를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처럼, 가장 앞에서 적진의 상황을 누구보다 먼저 정확하게 살피고 부대를 이끌어야 하기 때문이다.

전방의 적은 누가 봐도 허둥대고 있었다. 여기저기 허물어진 천막이 보이는 숙영지의 귀퉁이다. 걱정했던 마방책이나 다른 장애물은 보이지 않는다. 대포도 보이지 않는다. 다행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적은, 누가 봐도 허둥대고 있었다. 기습효과는 분명하다.

창병들은 어수선하게 한 데 모여있을 뿐, 아직 사각 대형조차 만들지 못했다. 총병들은 두 줄 혹은 세 줄로 서 있기는 하지만, 전혀 통제가 되지 않고 어디를 봐야 하는지도 모르는 모양이다.

몇몇 지휘관으로 보이는 자들이 고함을 지르며 병사들이 대열을 유지하도록 윽박지르고 있었다. 하지만 병사들도 눈이 있고 생각이 있다.

이미 무슨짓을 해도, 적 기병의 대군이 지척까지 도달해있다. 그들이 여기 도달하기까지 대열을 갖추는 것은 불가능했다.

창병들은 전방으로 나서는 것을 거부하고, 총병들은 자꾸 슬금슬금 물러난다. 적 장교들의 속 터지는 얼굴이 눈에 보이는 듯 싶다.

그건 이 쪽이 신경써 줄 일은 아니지만.

샹다메리가 생각났다. 기습효과를 위해, 평소보다 조금 일찍 돌격을 시작한다. 말이 다소 빨리 지치겠지만, 충격 효과가 더 중요한 것으로 판단된다.

사전에 약속된 ‘그 구호’를 외친다.

“총 내놔라아!”

“총 내놔라아아!”

“총 내놔아아아아!”

쩌렁쩌렁한 외침이 브라소의 뒤를 따르는 기병대의 전방을 뒤흔든다.

물론 이미 총은 있다. 하나는 안장에 달린 권총집에, 하나는 고삐를 쥔 왼 손에. 물론 둘 다 장전이 된 상태이다.

콘도티에레의 조언에 따라, 피나는 연습을 통해 오른 손에는 기병창을, 왼손에는 권총을 쥐고 말을 타는 법을 연습했다.

안타깝게도 이 묘기는 모든 부하들이 익히지는 못했다.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기병들은 왼손에 무기를 들지 말도록 엄격하게 통제받았다.

자칫하면 잘해야 허공, 최악의 경우 동료나 자기 말을 쏘는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제 총은 충분하다. 하지만 더 많은 전리품이 필요하다.

“돌격 앞으로오오!”

“돌겨억! 돌겨억!”

“돌격이다! 뒤쳐지지 마!”

상체를 숙이고 안장에 붙은 허벅지에 힘을 준다. 수직으로 서 있던 기병창을 수평으로 내리고 팔꿈치를 몸에 붙인다. 말이 서서히 속도를 올리다 모둠발로 뛰기 시작한다.

잘 훈련받아 모둠발로 뛰는 군마의 위는 오히려 흔들림이 거의 없다. 지금까지 엉덩이와 척추를 괴롭히던 흔들림이 사라지고 각종 냄새가 섞인 전장의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갈 때는 기묘한 느낌이다.

마치 꿈 속을 달리기라도 하는 듯.

하지만 이곳은 꿈 속의 아름다운 초원이 아니다. 바닥은 파아란 초원 대신, 여기저기 회색 흙이 흉하게 드러난 메마른 개활지이다. 서로가 일으킨 모래먼지로 공기가 뿌옇게 변해 선명한 햇빛도 없다.

탕! 탕!

타탕! 탕!

눈 앞에서 띄엄띄엄 총소리가 들리며 하얀 총연이 피어오른다. 제대로 사격통제를 받지 못한 적이 엉망진창으로 사격하고 있었다.

타타탕! 타다당!

타타타탕!

눈 앞에 하얀 총연으로 빼곡해진다. 놀라울 정도로 많은 총탄이 발사된다. 몇 발인가 귓가를 스치고 지나는 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바닥에 처 박혀 흙먼지를 일으키기도 한다.

언젠가 콘도티에레의 지휘관 교육이 생각난다.

‘공포에 질린 총병은 빨리 어디로든 총을 쏴버리고 뒤로 물러날 생각밖에 하지 않게 됩니다.’

그런 머저리가 어디 있나 싶었는데, 지금이 그런 상황이었다. 제대로 된 창병의 보조를 받지 못한 총병들은 엉거주춤한 모습으로 되는대로 총을 쏴 버린 모양이다.

달려오는 적 방향으로라도 쐈으면 양반이다. 대부분은 허공으로 헛되이 사라져 버렸다.

적군의 사격은, 브라소에게 매캐한 냄새를 풍기는 것 이외의 위협은 주지 못한 것이 확실했다.

“으아아아아아!”

“이야아아!”

“으랴아아아아!”

격돌을 앞에 두고 돌격중인 드 누아 기병대가 기합을 지른다. 브라소 역시 마찬가지이다.

서로 밀치며 도망치려는 적군의 모습이 확연하다. 대열을 갖추지 못한 창병, 어거지로 배치해 통제되지 않는 총병.

전혀 무서워보이지 않는다.

“흐아아압!”

팔다리에 힘을 꽉 주며, 창 끝을 화려해보이는 모자를 쓴 적 장교를 향한다.

성전군이 지키고자 했던 외곽 방어 라인에 창병들이 배치되기 전에, 드 누아 기병대가 먼저 들어가 버렸다.

어이가 없을 정도로 쉽게 적진에 돌입한 기병들이 본 것은 막 붕괴하기 시작한 보병 대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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