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29. 제2차 아넥시 방어전
“콘도티에레께서 미리 연락을 주셔서 늦지는 않았지만··· 위험해 보입니다.”
“그렇습니다만, 그렇기에 적시 원군! 역시 콘도티에레께서 이런 날을 예비하시고 트랑카벨 기병 사령부를 설치, 별도의 지휘체계를 통합해두신 겁니다!”
두 사람이 이야기하는 동안, 그들이 이끌고 온 기병의 무리가 행군 대형에서 전투 대형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제가 조금만 더 서둘렀어도···.”
“보병이라면 늦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기병의 대군! 충분히 제시간에 도착해 아넥시를 해방할 수 있다.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휴우, 긴장됩니다, 모리츠 경.”
“벌써 몇 번이나 하셨던 일입니다! 지금은 규모가 조금 클 뿐이고요. 무엇보다, 아실 자작님은 콘도티에레가 인정한 남자가 아닙니까!”
“윽! 그런 말을 들으니 더 긴장되는데요?”
“하하하하! 거기에 이 모리츠 디트마르 폰 뮌타우젠이 보잘것없는 목을 걸고 한 마디 보태겠습니다!”
아실은 말은 조심스러우면서도, 표정은 한결 편해 보인다. 그가 아는 가장 위대한 기적의 명장 콘도티에레 에트와, 그가 신뢰하는 심복 모리츠가 자신을 인정해준다.
부담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기쁘고 힘이 난다.
콘도티에레가, 누님이, 그리고 현 트랑카벨 가문의 주인이자 할아버지인 아롱드 트랑카벨이 자신을 믿고 군대를 맡겨주었다.
게다가 콘도티에레가 직접 만들어 낸 막강한 군대. 심지어 엘랑키아 국왕이 보낸 군대마저도 정면으로 싸워 격퇴해낸 정예군이 아실을 따르고 신뢰해주고 있었다.
자신을 믿어주는 이들을 실망하게 할 수는 없다. 자신이 바랬든 바라지 않았든, 통치자의 운명을 타고난 이 소년에게는 그것이 지상 과제였다.
“아실 자작님! 드 누아 기병연대, 배치를 끝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브라소 남작님.”
“선봉을 맡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드 누아 기사들의 힘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믿음직스럽네요.”
드 누아 가문의 기병대장, 브라소 드 마르지엘 남작이 씨익 웃는다.
그는 샹다메리 전투에서도 드 누아 기병대를 이끌고 참전했었으며, 전투 중 투구를 총에 맞아 큰 부상을 당한 상태에서도 끝까지 돌격해 국왕군의 기병 연대 하나를 격파했었다.
특히 명문 백작가의 후계자인 연대장을 포로로 잡기까지 한 수훈자이다.
그와 부하들의 말 안장에는, 그들이 그토록 가지고 싶어했던 치륜식 권총들이 한 자루 이상씩 꽂혀 있었다. 그만큼 샹다메리 전투에서 노획한 무기의 양이 막대했던 것이다.
이번 전투에서는 ‘블랑독 연맹 소속 최고위 귀족’인 가스텔 드 누아 백작을 ‘빽’으로 이용해 선봉 자리를 쟁취했다.
그렇기에 가장 먼저 병력을 배치하고 보고를 하는 것이다.
“나머지 병력이 공세 위치에 도착할 때까지,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옛, 자작님. 언제라도 공격 명령을 부탁드립니다.”
물론 아실이 데리고 온 병력은 드 누아 기병대 뿐만이 아니다.
트랑카벨 기병 사령부의 본대이자, 트랑카벨 최선임 기병 연대인 제7 카르카냑 기병 연대가 아실의 바로 뒤에 완벽한 전투 대형을 갖추고 있다.
기병대의 좌측으로, 간발의 차이로 선임을 뺏긴 마브리엘 마슈레의 제8 벨모제 기병 연대가 늠름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가지런히 대열을 갖춘 총기병대의 측면에 자리하는 용기병들이 들고있는 총은 모두 신품의 수석식 소총이다. 사소한 문제점이 해결된 신형 총기이다.
그 뒤로 다소 둔하기는 하지만, 동종 병과의 기동성을 따져보면 믿을 수 없을 만큼 신속한 기마견인포병들이 바짝 따라붙고 있었다.
언제 어디서든, 약간의 시간과 장소만 확보되면 치명적인 화력이 적을 괴롭히리라.
반대편인 우측에는 다른 부대들보다는 다소 어수선하지만, 숫자가 많은 병력이 있다. 바로 프리스마라 용병 기병대이다.
제35 프리스마라 중기병 연대를 선두로, 제37 프리스마라 경기병 연대가 따르는 형태이다. 그래서 숫자는 2천 기를 훌쩍 뛰어넘는다.
제35 연대의 지휘관인 코바르 리메니에디가 뾰족한 턱을 쓰다듬으며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입가에는 특유의 약간 신비스러운 미소가 걸려있다.
3천기가 넘는 대규모 기마 용병단을 이끄는 이 동부 출신의 남자는 어딘가 의도를 알 수 없는 행동을 하곤 했다. 하지만 아실 입장에서는 굳이 의도를 알 필요는 없었다.
그와 콘도티에레는 서로 굳게 신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거면 충분했다.
이번에도 굳이 와서 보고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전투 준비가 끝났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프리스마라 기병대의 힘은 완벽하게 짜인 규율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양동으로 보낸 프리스마라 기병들도 잘 해주고 있는 모양입니다!”
북서쪽에서 모습을 드러낸 기병대는 제36 프리스마라 경기병 연대이다.
비정규전의 달인이자 기마 용병단의 부단장인 제콜라슈 오르밧이 이끄는 이 부대는 전쟁 내내 성전군의 후방을 교란하는 데 혁혁한 전공을 세운 바 있다.
이번에는 적의 시선을 끌기 위해, 크게 전장을 우회해 북서쪽에서 접근해 적에게 스트레스를 주고 있었다.
한편, 아실과 모리츠가 속한 트랑카벨 군 본대는 전장의 북동쪽 상황은 알지 못했다.
로베르 드 나뵈프가 이끄는 제31 몽세나 정찰 연대가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은 모른다는 것이다. 물론 로베르 연대장 역시도 본대가 반대편에 아군이 도착했다는 사실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콘도티에레의 명을 받아, 부지런히 블랑독 북부까지 들쑤시고 다니며 적의 후방을 괴롭힌 끝에 남쪽으로 돌아온 결과, 그들에게 기회가 왔다는 것은 분명했다.
북동쪽과 북서쪽에서 각각 나타난 적 기병의 출현에 놀란 성전군이 방어 준비를 한답시고 절반 이상의 병력을 북쪽에 배치해 버렸기 때문이다.
“모두 준비가 된 모양입니다.”
“예, 모리츠 경.”
아실은 잠시 눈을 감고 숨을 내쉬었다. 무의식적으로 안장에 매달린, 아름답게 장식된 권총의 손잡이를 만진다. 은으로 장식된 차가운 권총의 감촉이 장갑 너머로 느껴진다.
처음 전장에 나섰을 때, 리니 능선의 전투를 떠올린다. 처음으로 콘도티에레와 함께 나갔던 전장. 트랑카벨의 백성들로 이루어진 신병 부대는 얼마나 멋지게 싸웠던가.
당시의 자신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다. 그저 구경꾼이었고, 적의 행동에 놀라고, 콘도티에레의 전술에 감탄하는 미력한 존재였다.
그때만 해도, 자신이 직접 군대를 지휘하게 될 것이란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러면 안 된다 생각했다.
전쟁은 좀 더 훌륭한, 콘도티에레와 같은 대전략가들의 영역이다. 자신은 나서서 설치면 안 된다.
마치 유능한 부하 장군의 병권을 빼앗아 스스로 몰락의 길을 걸었던 많은 폭군들처럼 되고 말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 지나친 겸손함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해한다. 트랑카벨의 계승자이자 블랑독의 영주로 산다는 것은 이끄는 자가 된다는 것이다.
영지군을 만들기 위해 먹이고 무장시키고 훈련하여 전장에 세운 트랑카벨의 백성. 가문에 대한 굳은 신뢰를 보이며 소중한 병력을 맡겨준 동맹군. 거기에 계약으로 묶인 용병들까지.
어쩌면 가문 전체의 군권을 믿고 맡긴 콘도티에레 에트 자신까지도.
언제까지나 전쟁을 남의 손에만 맡겨 둘 수 없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결국,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 언제까지나 콘도티에레, 또 다른 명장이 자신의 곁에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을.
“후우···.”
살짝 한숨을 내쉬며 허리에서 검을 뽑는다. 처음 검을 받았을 때만 해도, 매우 크고 무겁다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도 키가 크고 팔심도 늘었기에 아주 익숙해졌다.
5천기를 훌쩍 넘는 대군. 아마도 블랑독 역사상 가장 거대했을 단일 기병대가 아실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는 할 수 있다.
콘도티에레가 지휘하는 전투의 참관인으로서 함께했던 전투.
훌륭한 참모역인 모리츠의 도움을 받아 직접 지휘권을 행사했던 작았지만, 성과를 얻은 전투.
자기가 어린 시절이라면 상상도 못했을, 막대한 대군과 대군이 격돌했던 샹다메리. 처음으로 전투의 ‘방관자’가 아니라, 콘도티에레의 부관으로 참전했던 그 전투.
그 경험들이 할 수 있다는 확신을 주었다.
“전군!”
흠집 하나 없이 고른 표면을 가진 트랑카벨 가문의 명검이 허공을 향했다. 확연하게 주변 분위기가 변한다. 고요하지만, 상상도 못할 힘이 축적된 느낌.
개전 명령은 처음이 아니다. 콘도티에레는 자신이 참관하는 전투에서 항상 결정적인 명령을 자신에게 내리게 하거나, 판단을 묻고는 했다.
그때는 왜 그런지 몰랐다. 어차피 준비도 콘도티에레가 다 했고, 지휘도 콘도티에레가 할 예정이다.
그런데 굳이 자신을 끼워주는 것이 민망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다. 콘도티에레가 열심히 닦아준 넓고 편한 길로 자신만 혼자 편하게 가는 것 같아서 말이다.
이제는 왜 그랬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바로 이날을 위해서이다.
한편으로는 안심되기도 한다. 이 전투는 콘도티에레가 그려둔 커다란 계획의 일부이다.
조금 스케일이 커지기는 했지만, 자신은 여전히 콘도티에레가 닦아준 길을 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여기 안심감을 느끼는 것은 지휘관 실격일지도 모르지만.
“침략자를 토벌하고 아넥시를 구원한다! 트랑카벨을 위하여!”
“트랑카벨을 위하여어!”
아실의 외침에 이어 함성소리가 기병 대열을 파도처럼 훑고 지나간다. 몇 초 뒤, 아실의 검이 빠르게 내려와 전방을 향한다.
“전진 앞으로!”
“가자! 트랑카벨을 위하여!”
“전진! 전진!”
거대한 기병대가 파도가 되어 한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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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궂게도 자신들을 구하기 위한 트랑카벨의 기병 대군이 지축을 박차는 그 순간까지도, 아넥시는 모르고 있었다.
당면한 사건, 무너진 성벽과 그 성벽으로 쇄도해오는 성전군 돌격대가 너무 심각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요새에서 그나마 높은 언덕 쪽 망루에 배치된 감시병들도 경험이 부족하다 보니, 멀리까지 확인하지 못했다.
또한 아넥시를 포위하고 있던 성전군에게도 이 소식은 아직 전해지지 않았다. 상대적 지대가 낮은 평지에 있는 본진에서 잘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이미 전투 준비가 시작된 정신 없는 상황에서 공성포 소리가 울리는 판이라 멀리서 울리는 말발굽 소리는 들리지도 않았다.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포위망의 남쪽 외곽을 감시하던 성전군의 광역 정찰대이다.
그들이 죽으라고 말을 달려 성전군 사령부에 도착했다. 몇 번이나 전투 준비 중인 아군과 부딪칠 뻔도 하고, 기사들에게 욕을 먹기도 했다.
사령부로 쓰이는 아르누아 루케 추기경의 거대한 천막에 도착하긴 했다. 그러나 거품을 뿜던 말이 그대로 쓰러져 버릴 정도였다.
전령 자신도 바닥에 굴러 온몸이 쑤시고 숨이 찼지만, 전령 임무를 마치기 전에는 쓰러질 수 없었다.
“전령! 전령! 새로운 적입니다!”
땀을 뻘뻘 흘리며 바닥에 굴러 흙투성이가 된 전령이 다급히 사령부 안으로 들어온다. 호위병들이 놀랄 정도로 사색이 된 얼굴로.
하지만 전령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무슨 일인가.”
넓은 천막 안이 거의 텅 비어 있었기 때문이다.
“보고하게.”
천막 안은 아르누아 루케 추기경과, 소수 성직자들, 그리고 경비병들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잠시 당황했던 전령은 추기경의 말에 머리를 조아리며 보고를 시작한다.
“남쪽 방향에 다수의 기병이 발견되었습니다! 트랑카벨 가문의 깃발이 확인되었으며, 확인된 숫자만 약 2천, 언덕 너머에서 계속해서 후속 병력이 접근하고 있습니다!”
“무, 무슨?”
보고를 듣던 아르누아 추기경과 성직자들의 눈이 놀라움으로 커졌다.
“중갑을 입은 중기병과, 타국 출신 용병으로 보이는 경기병이 섞여 있었습니다.”
“이미 북방의 두 군데에서 상당한 규모의 적 기병이 발견되지 않았는가? 그런데 이번에는 또, 남쪽에서 나타났다고?”
“부, 북쪽 소식은 제가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희 남쪽 광역 정찰대는 처음으로 적을 발견했습니다!”
“으으음! 누군가 가서 다시 확인해 보아라.”
“예! 추기경님.”
전령은 아연실색했다. 하급 귀족 출신인 그는 나름 전장에서 뼈가 굵은 기병 출신이다. 그래서 광역 정찰대의 전령이라는 중요 직함을 맡고 있던 것이고.
그래서 자신이 가진 정보의 귀중함과, 현 상황의 시급함을 이해하고 있다. 적, 그것도 기병이 몇 킬로미터 밖에 있다. 그게 지금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사령부 상황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즉각 대응해야 할 지휘관들은 어디 있는가? 성전군의 각 부대로 달려가야 할 전령들은 어디 있는가?
“수고했네. 돌아가 보게. 페르곤 주교, 이자에게 물과 식사를 주게.”
“알겠습니다, 추기경님.”
물론 물이 간절하다. 하지만··· 지금 자기가 여기서 물이나 마시면서 쉬다가는 성전군이 파멸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