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186화 (186/556)

24-28. 제2차 아넥시 방어전

발란트 디아모프 폰 잘렌펠트는 얼마 전, 전령 책임자가 되어 ‘이론상’ 성전군의 ‘일인지하 만인지상’ 사령관인 라모리 스텐던에게 전령을 보냈었다.

전령은 먼저 동쪽 바닷가 부근에 주둔하고 있는 드라멜른 기사단 소속의 병력에게 도착했다. 그리고 함께 출발했다.

대외적으로는 ‘혹시 라모리 경이 다른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압박한다’는 명목이었으나, 실제로는 라모리 경의 전투를 돕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간 양보만 거듭해온 라모리 경이 어찌 그런 과감한 움직임을 선택했는지 궁금했지만, 한편으로는 이해도 갔다.

발란트 자신도 수만의 대군을 이끌고 블랑독 지방에 도착했으면서도, 구석구석 시골 마을까지 몽땅 장악하겠다며 나서는 것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아넥시에 집착하는 것도 거기의 연장이다. 점령해봤자 성전군이 얻을 게 뭐가 있다고.

하지만 무려 2만 명이 모여 집착하고 있다. 접근로가 좁아서 한번에 투입될 수 있는 병력은 얼마 되지 않는데도 말이다.

적이 대응 준비를 하기 전에 남쪽으로 향했다면··· 하는 아쉬운 생각이 계속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아넥시 주변의 지도를 보며, 그가 소재를 알고 있는 군주와 주교, 기사단들의 병력을 차근차근 표시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발란트의 노력은 벽에 부딪쳤다. 다들 호기롭게 ‘어디로 가겠다’고 말만 했지, 실제로 어디 갔는지 알 수 없다.

하물며 전장에 나가서 엉뚱한 장소로 갔다면? 전장에서 공간 점유 문제 때문에, 실제와 계획이 달라지는 것은 다반사이다.

이래서는 무리다. 오히려 부정확한 작전 지도가 아군에게 해가 될 수도 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드라멜른 기사단 소속 부하 장교들이라도 데려올 걸 그랬다.

완벽한 전투준비를 위해, 이럴 때 도움이 될 능숙한 기사대장들은 기사단 본대와 함께하고 있었다. 부관과 호위 역할을 하는 젊은 기사들은 충성스럽기는 하지만 참모로서는 역부족이다.

“휴우···.”

포기하고 종이와 펜을 내려 놓는다. 이래서는 하나 마나이다. 자료를 기록해서 남도 보여주기 어렵고, 나 자신에 대한 참고도 되지 않는다면 기록할 이유가 무엇인가.

“전령! 전령입니다!”

미처 한숨이 끝나기도 전에, 전령이 막사로 들어온다. 아르누아 추기경, 발란트를 포함해 사령부에 남아있던 모두의 눈이 전령을 향한다.

“새로운 적 발견! 북서쪽입니다!”

“병력은?”

“최소한 1천기 이상의 기병!”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다. 밖으로 나간다. 대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것인지.

만약의 사태가 터지면 막을 병력은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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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넥시 성벽 위는 환호성으로 가득하다.

“지원군? 지원군이 왔어!”

“기병의 대군이다!”

“성녀님이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어!”

현재 아넥시는 성벽을 무너뜨리기 위한 공성포 1문 및 크고 작은 화포 20여 문의 집중포격 외에는 전투가 벌어지지 않고 있었다.

성전군 입장에서는 일부 공성부대 외에 대부분의 병력이 외부에서의 위협을 막는데 차출되어, 병력을 아끼고 있는 것이다.

성벽이 무너지면 그때 일제 공격을 해오려는 것이다. 정예 돌격대가 무너진 성벽 틈으로 진입하고, 나머지 병력은 멀쩡한 성벽을 공격해 수비군을 묶어두려는 것.

사실 이미 성벽의 일부는 반쯤 무너졌다. 이미 잡석더미가 되어버린 벽돌의 비탈을 타고 오르면 성 안으로 진입할 수 있을 정도이다.

하지만 공성군은 단 한번의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꼼꼼하게 포격을 계속하여 파손부위를 늘리고 있었다. 그래야 접근로가 넓어지고 비탈도 완만해지기 때문이다.

물론 그 정도는 지휘관의 판단에 달린 것으로, 언제라도 포격을 멈추고 일제 공격은 시작될 수 있었다. 때문에 수비군은 모두 빈틈없이 자기 자리에서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이기에 저 멀리 지평선에 거대한 모래 구름을 만들며 다가오는 기병의 대군에는 매료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압도적인 대군의 무리 한 가운데 홀로, 마치 외딴 섬처럼 버티던 수비군에게. 두 번 연속으로 아군 기병이 모습을 드러냈다.

구원이 머지 않았다는 가슴 벅참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여전히 공성포의 포탄이 성벽을 두드리는 진동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와중에도 말이다.

“드디어 성녀님의 구원군인가!”

로용 역시 활짝 웃으며 외치듯 말한다. 그의 주름진 뺨에 눈물이 흘러내린다.

자신들의 싸움은 외로운 것이 아니었다. 성녀께서는 우리의 싸움을 지켜보고 계셨다. 아넥시의 희생은 헛되지 않았다.

그런 벅차오름에 자신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이다.

한편, 그 옆에서 요한 사제와 아르옌 수사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온통 환희 분위기인 주변과 다르게, 이 사제의 대화는 다소 가라앉아 있었다.

“기병의 숫자가 얼마로 보이나, 아르옌 수사?”

“모래 먼지가 심해서 확인은 되지 않지만 1천여 기는 확실히 넘어 보입니다.”

“으음··· 모래 구름은 혹시 일부러···?”

“...그럴 수도 있습니다.”

기병이 일부러 거대한 모래 구름을 만드는 것은 병력을 불려 보이기 위한 오랜 기만책이다.

‘아군은 이만큼 세력이 강하다. 각오해라!’

라고 말하는, 싸움에 앞서 깃털을 활짝 펼쳐 몸을 크게 보이기 위해 애를 쓰는 새와 같은 맥락이다.

역으로 생각한다면 아넥시 수비군이 기대한 만큼의 병력은 아직 도착하지 못했다는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최소 1천기 이상. 결코 적은 병력은 아니다. 동수의 보병으로는 도무지 상대할 수 없는 강력한 전력이다. 기동성이 있기에 그 위력은 배가된다.

제대로 싸울 수 있을까. 그래서 이길 수 있을까.

아직은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다.

농성전에서 상당히 위험한 상황이다. 구원군이 온 줄 알고 환희에 젖어 있었는데, 포위군에 격퇴되어 버리는 상황.

엄동설한, 바람을 피할 곳도 없는 요새의 성벽을 오랫동안 지켜온 노병이 있었다.

끝없이 성벽을 기어오르는 적군도, 쏟아지는 화살과 총탄도, 적정량에 턱없이 부족한 식량 배급도 노병을 무너뜨리지 못했다. 묵묵히 매일 성벽에 올라 자신의 영역을 지켰으며 대빙벽에서 몰아쳐오는 삭풍을 견뎠다.

이 노병을 무너뜨렸던 것은 다름 아닌, ‘구원하지 못한 구원군’ 이었다. 기세 좋게 찾아왔던 아군은, 미리 준비한 적의 기습에 어이없이 격퇴당했던 것이다.

그 때, 반드시 구원해주리라 믿었던 주군의 군대가 형편없이 퇴각하는 모습을 보던 노병의 눈은 죽은 사람과 같았다고 한다.

다음 날 새벽, 노병은 성벽 위에서 동사한 채로 발견되었다. 이미 몇 달 동안이나 버텨냈던 삭풍이지만 마음이 무너지자 하루도 견디지 못했던 것이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나중에 포위 공격중인 적장이 이런 상황을 일부러 연출했다는 것을 알고 소름이 돋았었다.

함락 직전의 요새를 쉽게 점거하기 위해 함정을 파 적군을 불러들인 것이다.

당시에는 복수라는 생각조차 못 했었다. 대군의 지휘관인 적장과 어린 소년인 자신은 신분도, 세력도, 지식과 능력의 격차도 비교를 할 수 없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젠가 자신도 그런 상황에 처할지 모르며, 그때는 의연하게 대처하겠다 다짐만 했었다.

“루옹 대표님, 잠시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요?”

환희가 넘치는 성벽에서 내려와, 요한은 루옹에게 설명한다. 역으로 위험한 상황일 수도 있다, 실제로는 트랑카벨 군의 지원이 닿기 힘든 상황일지도 모른다는 말을 말이다.

“성녀님의 의도를 의심하는 것은 안되는 일이오! 적어도 여기 아넥시에서 만큼은!”

“그, 그게 아닙니다, 루옹 대표님···.”

루옹은 짐짓 엄격한 얼굴로 호통치듯 말을 시작한다. 요한은 이것을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괴로운 마음이 된다. 그러나, 다행히도 설득할 필요는 없었다.

“하하핫, 사제님 말씀은 알겠소이다. 아직 성녀님의 군대가 아넥시에 도착하기에 시간이 부족할지도 모른다는 것이지요?”

“아··· 그렇습니다···.”

“그럴 수 있소, 그럴 수 있지.”

“네?”

의외로 루옹의 태도는 시원시원하다. 오히려 요한이 어리둥절한 모양이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사제님. 우리 아넥시 사람들은 구원 받는다는 확신이 있어서 요새에 남은 것은 아니니까.”

“하지만! 그래도···.”

“뭐, 사제님과 수사님은 그런 확신이 있어서 이 멀리 촌동네까지 오신 것이오?”

“....”

“우리도 순교자가 되고 싶지는 않소이다. 하지만 순교자가 될 운명이라면 피할 생각은 또 없고.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조금은 이해가 갈 것 같다. 요한은 문득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신앙으로 무장했으니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아넥시 수비군은 그렇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이건 이미 자신의 신앙은 참된 신앙이요, 저들의 신앙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부끄러웠다.

신앙의 방식이 다를 뿐이지, 저들의 신앙은 그릇된 것이 아니다. 박해받는 이들을 위해 싸우겠다 서원했으면서도 철저하게 그러지 못한 자신이 부끄러웠다.

뻐엉!

콰쾅! 우드득, 우지직!

요한이 자괴감에 빠져있던 사이, 전에 없던 요란한 소리가 난다. 무너져가는 성벽에서 조금 떨어져 있음에도 느껴지는 엄청난 진동. 요한, 루옹, 아르옌 세 사람의 눈이 약속이라도 한 듯 한 방향을 향한다.

“서, 성벽이!”

성벽과, 임시로 지탱해 둔 나무 기둥이 무너지고 있었다. 과도한 무게를 견디지 못한 팔뚝만한 통나무 구조물이 마치 나뭇가지처럼 꺾이고 있었다.

포격에 의한 석벽의 붕괴는 대체로 이런 식이다. 서로간의 무게와 균형, 마찰력으로 유지되던 벽은, 집요한 외부의 충격에 조금씩 깎여나간다.

손상된 부분이 커져갈 수록, 가만히 뒀으면 수천 년도 버텼을 석재 사이의 균형이 무너지는 것이다. 이윽고 한계에 도달하면 외부에 층층이 쌓아 올린 벽돌이 무너져 내리고, 내부 충전물이 쏟아진다.

그렇게, 아넥시 성벽의 넓은 부분이 무너진다. 요한의 계산보다 조금 이른 시간이었다. 안타까웠다.

“방어 준비를 해야 합니다!”

막 나서려는 요한을 루옹이 막는다.

“사제님은 성벽을 지켜주시오! 미리 계획하지 않았소이까? 무너진 부분은 우리 ‘아넥시 베테랑’들이 알아서 해 보겠소!”

“윽··· 알겠습니다.”

“사제님, 하나만 묻겠소! 만약에 여기서 죽으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것이오? 혹시 사제님은 바른 신앙을 가지셨으니 주신님의 곁에 가고, 우리는 반역했으니 지옥에 떨어지는 것이오?”

상상도 못한 교리적 질문이다. 요한은 충격을 받았다. 설마 루옹이 이런 생각을 하는 줄은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다.

“...주신께서는 자기 자식들을 그런 식으로 차별하시지는 않습니다. 다소 섬기는 방식이 다를 뿐입니다.”

“그런가, 다행이군.”

“그리고 만약에 그렇다 할지라도, 저 역시 반역자인 것은 마찬가지죠. 지옥에 떨어진다면 다 함께 가겠지요.”

“파하하핫! 그것도 나쁘지는 않겠소이다!”

루옹은 홀가분해진 모습이다. 요한 역시도 어딘가 가슴 속이 후련해지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알게 모르게 평생 흐릿했던 머리속이 맑아진 느낌으로.

“자, 그럼 가보겠소. 부디 무사하시오, 사제님, 수사님.”

“알겠습니다! 아르옌 수사, 갑시다!”

“옛, 스승님!”

세 사람은 각자의 위치로 달려간다. 한치 앞의 미래도 알 수 없지만, 후회는 없을 것 같다는 확신을 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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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진정해, 진정해. 착하지?”

흥분하여 푸르륵거리는 말을 진정시키는 소년이 있다. 소년의 부드러운 손길을 받은 말은 곧 얌전해진다. 다시 상체를 든 소년의 눈에는 외딴 요새가 보인다.

적대적인 대군에 둘러싸인, 외딴 섬과도 같은 요새.

빈말로도 아름답다고도 할 수 없다. 언덕 사이에 엉거주춤 자리한 마을은 본질적으로 그저 그런 시골 마을이다. 게다가 주변을 둘러싼 흙색의 조잡한 성벽은 여기저기가 심하게 무너져있다.

게다가 누가 보아도 위태위태해보인다. 성벽을 공격하는 대포들의 요란한 포성이 여기까지도 들린다.

그러나, 소년은 그 볼품없는 요새에게서 친근감을 느꼈다.

“여기가 누님께서 지키셨다던 도시로군요.”

“그렇습니다. 이야, 정말 대단한 싸움이었죠! 영주영애님도, 콘도티에레도 전설속의 영웅처럼 지켜내셨습니다!”

“아! 저도 눈으로 보고 싶었는데.”

하얀 피부에 푸른 눈, 결이 좋은 눈부신 금발. 소년의 단정한 외모는 저 고립된 요새 사람들이 성녀로 모시는 누군가와 닮아있었다.

그 옆에서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대답해주는 남자는 유난히도 덩치가 큰 거한이다. 자신처럼 거대한 말에 올라, 복잡한 시선으로 함락 직전의 요새를 바라본다.

“이번에는, 자작님께서 그 전설이 되시는 겁니다!”

“허엇!”

놀라서 숨을 삼키는 소년의 이름은 아실 트랑카벨. 트랑카벨 자작가의 계승자이다. 그리고 아넥시 주민들이 섬기는 성녀, 아쥬흐 트랑카벨의 유일한 친동생이기도 하다.

처음, 성녀가 자신의 사도 콘도티에레를 데리고 아넥시에 도착했을 때, 200명의 기병대를 이끌고 있었다 전해진다.

그리고 지금, 성녀의 동생이 아넥시에 도착했다. 그가 이끄는 기병대는 200명 수준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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