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184화 (184/556)

24-26. 제2차 아넥시 방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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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흐흐헉!”

방어 교회 사제, 요한 린데만 폰 아인푸르트는 격렬한 기침과 함께 상체를 일으켰다. 기침이 간신히 멎었나 싶더니, 다시 숨을 들이쉬려다가 연이어 기침이 나온다.

“사제님! 사제님!”

“이걸 어쩌지? 물이라도 좀 가져와!”

한참이 지나서야, 요한 사제는 기침을 멈추고 정신을 차렸다. 녹초가 되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주변을 돌아본다.

주민 대표 루옹과, 제자 아르옌 그로반의 얼굴이 보인다.

“이번엔 정말 죽는 줄 알았소이다! 사제 양반!”

“하아··· 저도 그런 줄··· 이 아니라! 아직 주신께서는 저를 데려가고 싶지 않으신 모양입니다.”

“하아··· 스승님, 정말 걱정했습니다. 꼬박 열 시간이 지났습니다.”

“뭐? 열 시간? 그렇게나 오래··· 어흑··· 머리가···.”

요한은 자신의 머리를 만져보다가, 익숙하지 않은 감촉에 놀랐다. 찌르는 듯한 통증에 눈살을 찌푸린 것은 물론이다.

“잠시 가만히 계십시오. 머리를 심하게 부딪치셔서 큰 혹이 났습니다.”

“어으윽··· 그랬군. 허헛, 주신께서 이번에는 조금 큰 시련을 주셨구··· 으으윽, 아프다.”

상체를 움직여서는 침대에 걸터앉은 상태로 벽에 기대어 앉는다. 얼굴은 식은땀으로 찐득거리고 머리는 흙투성이로 헝클어진 엉망진창인 상태지만, 그 눈은 예기로 빛나고 있다.

“열 시간··· 두 사람이 여기 계신 것을 보니 다행히 아넥시는 무사한가 봅니다.”

“그러엄! 성전군 놈들이 뻥포 하나 끌고 왔다고 순식간에 넘어갈 만큼 아넥시는 만만하지 않지!”

루옹이 호기롭게 말했으나, 그 표정은 썩 좋아 보이지 않는다. 요한 역시 차마 맞장구를 치지 못한다.

“아르옌 수사, 적이 드디어 중포를 끌고 온 것인가?”

“그렇습니다, 스승님. 한 문이기는 하지만요···.”

“허어··· 성벽 상태는 어떤가?”

“저는 스승님만큼 축성술에 조예가 있지는 않습니다만··· 아마 힘들 것 같습니다.”

“내일은 버틸 수 있을까?”

“....”

대답은 없었다. 그러나 요한은 제자와 루옹의 표정을 보고 상황을 추측할 수 있었다.

상황은 절망적이다.

아마 다음 공격에서, 적은 성벽을 무너뜨릴 것이다.

수비군에게 그걸 막을 방법은 없으리라.

하지만 요한은 빙긋 웃었다. 바라던 바는 아니지만 예상하지 못한 바는 아니다. 오히려 겨우 1천 남짓의 민병대로 열 배가 넘는 법황청의 대군을 상대로 잘 싸워왔다.

“성벽이 무너진 다음은 준비되었습니까?”

“물론이오. 미리 예정했던 대로 이중으로 바리케이드를 세웠지!”

“시가전 준비도 했습니다, 스승님. 성벽을 잃으면 각자 후퇴할 지역도 새로 교육했습니다.”

다행히, 루옹을 비롯한 수비군의 주력인 민병들은 아넥시를 쉽게 내줄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원래 무사히 걸어서 나갈 생각은 하지 않고 들어온 성채이다. 하지만 예상보다 오래 버텼고, 앞으로도 한동안은 싸워볼 만할 것 같다.

이 블랑독의 작은 성채가 하루 더 버티고, 침략자를 한 명이라도 더 쓰러뜨리면, 이는 불명예로 법황에게 보고될 것이다.

반대로 방어 교회에는 위대한 항쟁의 역사로 남겠지. 평생의 성직 생활을 포기하고 방어 교회의 일원이 된 자라면 누구나 그 길고 긴 이름 목록에 남고 싶어하는 법이다.

“그럼 잠시 방어 준비를 둘러보도록 하지요··· 읏쌰··· 커헉!”

“어차피 적도 해가 떠야 쳐들어오지 않겠습니까? 오늘은 일단 쉬시고, 내일 상처를 다시 보지요.”

“으으··· 그래도 여유가 있을 때··· 어휴··· 죽겠구나.”

아무리 굳은 결심을 해도 불가능한 것이 있긴 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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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해가 뜨자마자 아넥시에 찾아온 것은 다행히도 공성포가 쏜 포탄은 아니었다. 아직 새벽녘 어둑어둑한 와중, 백기를 든 한 무리의 기병 호위를 받는 성직자가 찾아왔다.

“주신의 유일무이한 지상 대리인, 자비로우신 법황 성하께서 세우신 원칙에 따라서, 아넥시의 거주자 모두에게 성채를 떠날 기회를 드리고자 하오.”

내용은 다소 오만하긴 하나, 예의바른 어투로 성직자가 말한다. 성벽 위에서는 당연히 아무런 대답이 없다.

“아넥시의 모든 이들은, 참된 신앙을 가졌든, 그렇지 않았든 모두 안전하게 성채를 떠날 수 있소. 이 페르곤 주교가 모두의 아전을 보장하겠소.”

페르곤 주교는 수비군의 반응을 보려는 듯, 잠시 말을 멈춘다. 하지만 역시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다. 분노한 외침이 터져 나올 법도 하지만, 오히려 성벽에서 내려다 보는 눈들은 별다른 감정이 없어 보인다.

기다리다 못한 페르곤이 다시 입을 열려 한 순간, 가로채는 목소리가 있었다.

“주교님, 만약 저희가 아넥시를 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디세메테의 생존자들처럼,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나가야 합니까?”

그 말을 들은 페르곤의 선해 보이는 얼굴이 살짝 찌푸려졌다.

“아, 자기소개가 늦었습니다. 제 이름은 요한 린데만 폰 아인푸르트, 그룬발트 출신의 어리석은 사제입니다.”

“요한? 그대는 참된 주신의 신앙을 따르는 자가 아니오? 어찌하여 남부 이단들과 함께하고 있는 것이오?”

“어쩌다 보니, 주신의 명을 받은 목자로서 이들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주신의 사역을 하는 자가 이단자들의 무리에 있다니... 안타까운 일이오."

선입견 가득하긴 하지만, 페르곤의 말투 자체는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는 느낌이다.

이 사람은 빈정거림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다... 라 생각한 요한은 슬픈 미소만 짓고 더는 입을 열지는 않는다. 상대는 일단 교섭 사절이니까.

"알몸이라니... 그런 가엾은 일은 하지 않아요. 여러분은 어떤 옷이든 입을 수 있고, 심지어 갑옷도 좋소이다. 재산도 본인이 들고 갈 수 있는 만큼 챙겨가도 좋소. 단 무기는 놓고 가야 하고."

공성전 항복의 조건, 심지어 함락 직전 요새에 전해지는 조건치고는 좋은 편이다. 무기가 없는 것은 가혹하지만. 아마도 안전을 보장한다는 것도 진실일 것이다.

다만... 이 사람 좋아 보이는 주교는 그리 생각할지 몰라도, 일부 거친 용병들이 '독단적인' 행위를 할 가능성이 있기야 하겠지.

"주교님, 잠시 생각할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한 시간을 드리겠소. 만약 법황 성하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성벽에 하얀 깃발을 걸어주시오. 시간을 많이 주지 못해 미안하구려... 하지만 이는 우리 성전군 측의 결정사항이라."

"알겠습니다."

요한은 페르곤 주교가 허튼 말로 안타까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알겠지만, 1시간은 조금 아쉬웠다. 아마 공격 준비가 되는 대로 즉시 공격을 하겠다는 결정이겠지.

어차피 이미 대답은 정해져 있다. 시간을 달라고 한 것은 시간을 벌기 위해서일 뿐. 하지만 속인다는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상대도 알고는 있을 것이다.

이미 죽음을 각오한 수비병도, 살아남을 길이 있다는 것을 알면 동요하기 때문이다. 일치단결하여 오랫동안 농성해오던 요새도 관대한 항복 권고 한 번에 자중지란을 일으키는 경우가 있으니까.

하지만, 감히 주신의 이름으로 확신하지만, 아넥시는 그럴 일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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펑 퍼펑!

콰아앙!

고만고만한 포성 속에, 갑작스레 천지를 뒤흔드는 듯한 엄청난 폭발음이 섞인다. 다음 순간, 아넥시의 성벽이 뒤흔들린다.

오늘은 포격이 집중되는 쪽 부근 성벽에는 아예 수비병이 배치되지 않았다. 성벽이 무너질 것을 안다는 암묵적인 동의였다. 만약에라도 포탄이 다 빗나가서 성벽이 버텨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통과 자루로 보강하고, 임시방편을 삼고... 모두 기반이 되는 성벽이 멀쩡하다는 가정하에서나 의미 있는 일이다. 어차피 무너질 성벽에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었다.

"사제님, 아까는 말씀을 잘해 주셔서 고맙소."

"저는 그냥 사실만 이야기했을 뿐인데요."

"그래도 속이 시원하게 한마디 해 주면 좋았을 텐데!"

"...그건 재수 없는 꼰대 양반들에게나 해야지, 그 주교처럼 진지한 사람에게 했다가는 괜히 우리만 이상한 사람들 될 겁니다."

"파하하, 그건 그렇지."

포탄이 계속해서 떨어지고, 어깨 위로 벽돌이 부서지며 쏟아지는 흙먼지가 내려앉는 와중이다. 하지만 주민 대표 루옹은 평범하게 웃으며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전에 아넥시를 공격했던 사제는 얼마나 재수 없는 인간이었는지. 얼마나 이상하게 생겼었는지. 성녀님이 얼마나 성스러워 보였는지. 구원을 위해 찾아주신 성녀님을 처음에 얼마나 문전박대했었는지.

그러자 '나는 마을에 들여도 된다 생각했는데 루옹 당신이 괜히 성질 부린 것 아니오!' 라는 핀잔이 날아온다. '내가 언제 그랬냐'는 루옹의 발끈함에 사방에서 웃음보가 터진다.

콰직!

쿠쿵, 쿵.

연이은 포탄의 집중에 견디지 못한 성벽의 안쪽도 무너지기 시작한다. 내부 충전물이 빠져나간 성벽은 빈 껍데기나 마찬가지다. 벽돌이 바스러져 쏟아지듯 바닥으로 떨어진다.

오랫동안, 어쩌면 천 년 이상 아넥시를 지켜온 성벽이 그 수명을 다하려 하고 있다.

"그런데 성녀님 이름이 뭐였지?"

"아 성녀님 이름도 몰랐는가? 이거 신도 실격이구만!"

"트랑카벨 가문의 아쥬흐 성녀님 아닌가!"

"아 그랬구먼, 하하하! 나는 성녀님 처음 오셨을 적엔 여기 없었어서."

순간, 요한은 조금 충격을 받았다.

'성녀가... 실존 인물이었어?'

당연히 뭐 가상의 인물이거나... 정순파에 내려오는 구전이거나... 그런 줄 알았지.

"스승님, 상처는 괜찮으십니까?"

"계속 누가 머리를 때리는 느낌이지만 괜찮다네."

"네? 그럼 큰일 아닙니까?"

"그보다 아르옌 수사, 혹시 성녀라는 인물이 실존 인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는가?"

"아, 블랑독의 영주인 트랑카벨 자작 가문의 장녀 아닙니까?"

"어... 알고 있다니 됐네."

욱신거리는 머리가 점점 더 아파져 왔다. 아니 살아있는 성녀라니... 그건 이단이잖아... 라는 생각이 먼저 드는 것을 보니 역시 자신은 머리가 굳어 있었다.

생각해보니 자기도 언젠가 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 콘도티에레와 함께 방문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콘도티에레가 성녀상을 들고왔다, 뭐 그런 거라고 멋대로 뇌내 변환해서 받아들였었다.

"그나저나 이야기 들어보면 대단한 인물이던데요, 정말 그런 아가씨가 존재할까요?"

"음... 다소 과장된 점은 있지 않겠나...."

제자인 아르옌은 큰 의심 없이 받아들였던 모양이다. 자신은 좀 더 열린 마음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자성하게 된다.

"어라 저기! 루옹씨! 사제님! 저기!"

갑자기 성벽이 소란스러워진다.

혹시 성벽이 무너졌나?

아니다. 상태가 처참하기는 하지만 아직 견디고 있다.

그렇다면?

성벽 위에서 뭔가 외치는 이들의 손가락은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다.

"지원군이다! 지원군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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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 지원군이 왔다!"

성전군 사령부는 갑자기 부산스러워졌다.

공성전은 지루한 일이었다. 방침이 명확하게 정해진 이상, 상급 지휘관은 거의 할 일이 없다. 당장 공격에 투입될 부대가 아니라면, 아니 그렇다 해도 전술 지휘는 대부분 중견 지휘관들이 할 일이다.

그저 띄엄띄엄 이어지는 포격을 구경하면서 뭔가 중요한 생각을 하는 척 시간을 보낼 뿐이다.

하지만 그게 아니게 되었다.

"방향은? 숫자는?"

"북동쪽입니다! 병력은 확실치 않으나 현재 확인된 병력은 300기 정도입니다!"

"북동쪽? 우리 점령지 방향이 아닌가? 어째서 그 방향에서?"

"모, 모르겠습니다...."

"아무래도 좋다. 당장 숫자는 적으나 대군의 선봉일 수 있다. 대기병 방어 준비가 필요해!"

"알겠습니다!"

성전군에서 각자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 상급 지휘관들이 자기 부대에 동원령을 내리고 바삐 전장으로 향한다.

"아! 포병대는 어떻게 할까요?"

현재 전군의 포병은 아넥시 성벽을 부수는 데 동원된 상태이다.

모두 서로의 눈치를 본다. 왜냐하면, 공성전 동원은 바로 아르누아 루케 추기경이 직접 내린 명령이었기 때문이다. 설령 자신 소유의 부대라 할지라도 멋대로 빼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

"...저 벼락을 맞을 도시를 부수고 있는 포들은 그대로 두게."

한참 후에, 아르누아 추기경이 말했다.

"하지만 추기경 예하...."

"귀하들은 성전군의 일원, 신의 군대를 이끄는 장수들이 아닌가!"

아르누아 추기경이 버럭 고함을 지르자 어수선하던 천막 내부가 갑자기 조용해진다. 바삐 움직이던 전령들의 발도 멈춘다.

"우리 주신의 군대는 수만에 이르는 대군이오! 이단자들의 무리가 얼마나 되든 상대할 수 있소! 그렇지 않소?"

"...."

"설마 언젠가 주신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화약 무기 몇 개가 없어서 이단자들을 당해내지 못했다 말할 셈이오?"

"그, 그렇지 않습니다!"

추기경의 말은 다소 과장된 점은 있으나 논리가 없지는 않다. 적이 나타나긴 했으나, 지평선 너머에 기병 소수가 모습을 드러냈을 뿐이다.

"이단자들의 퇴치는 저희가 맡겠습니다!"

"저희야말로 신실한 군대의 힘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모두는 아니지만, 신앙의 힘을 믿고 성전군에 합류한 이들이다. 추기경이 이런 말 까지 했는데 아무렇지 않을 리 없었다.

"모두 적을 향해 나아가시오! 주신을 섬기는 신앙이 그대들의 방패가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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