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23. 제2차 아넥시 방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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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방의 자프론 푸코데모스 경이 전령을 보내셨습니다!”
“알겠다. 뭐라고 하던가?”
“제 힘으로는 역부족, 후퇴 허가를 요청드린다 하였습니다.”
“흐음. 후퇴를 허락한다 전해라. 본대는 지원에 나서도록 하겠다.”
“옛, 대장님!”
라모리 스텐던은 무표정하게 명령을 전달했다.
“라모리 경! 한가지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이번에는 예비대로 전황을 지켜보고 있던, 보병 연대장인 기직스 미슈람 알메르타트가 입을 연다. 전장이 협소해 기직스의 연대는 후위에 배치되어 있었기에, 연대장인 그는 라모리의 지휘부에 머물고 있었다.
라모리는 이 혈기넘치는 젊은 보병대장이 무슨 말을 할지 알 것 같았으나, 고개를 끄덕여 발언을 허가한다.
“이번에는 저를 보내주십시오. 아직 아군은 수적으로 우세하지 않습니까? 여기서 패배했다가는··· 패배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기직스가 하려다 멈춘 말,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말은 ‘성전군 사령부의 명령도 없이 남쪽으로 강을 건넜는데 패해서 돌아가면 더 문제가 되지 않겠는가?’ 라는 말이겠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물론 기직스의 의도는 지휘관인 라모리를 비난하고자 함은 아니다. 오히려 경애하는 상관이 추기경인지 뭔지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이 싫다는 것에 가까웠다.
그의 마음은 고맙지만, 라모리의 생각과는 다르다. 그래서 빙긋 웃으며 대답한다.
“기왕 패배할 거라면 병력이라도 무사히 살려서 가야 하지 않겠나?”
“그, 그렇게 말씀드리지는···.”
“농담이네. 애초에 성전군 본대 몰래 슬그머니 강을 건넌 목적은 대충 이루지 않았나?”
“그건 그렇습니다만···.”
“이제는 슬슬 가봐야겠군. 기직스 경, 귀관의 연대가 후위를 맡아야 하네. 가서 준비해주게.”
“알겠습니다, 대장님!”
“강이 얕다고는 해도, 강 건너 퇴각한다는 것은 강 건너 공격하는 것보다 어려운 법이라네.”
“맡겨주십시오!”
다시 팔팔해진 기직스가 자신의 부대로 돌아간다. 라모리는 자신의 직속부대에도 명령을 내려 최전방의 자프론 연대를 지원하도록 한다.
북 로데브 강을 건너 남쪽으로 진격한 것은 절반은 충동적으로 저지른 일이 맞다. 하지만 나머지 절반은 앞으로의 전쟁을 고려하여 계산적으로 한 일이다.
현재 총지휘권을 행사하고 있는 추기경이 자신을 홀대하는 것은 오히려 상관이 없었다. 오히려, 아르누아 추기경은 라모리를 홀대한다는 인식 자체가 없을 수도 있다. 묘하게 공평한 인간이니까.
성전군에 참여한 기라성같은 인물들, 특히 힘 있는 귀족들에게 화려한 무대를 마련해줘야 한다는 것은 라뫄리 자신도 동의한 일이었다. 그만한 전력을 돈도 안 주고 쓰는 건데, 그 정도는 해줘야지.
오히려 돈 받는 용병인 라모리로서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자신은 돈을 받는 대신 덜 화려한 일을 하고, 그들은 자기 돈을 쓰는 대신 보기 좋은 일을 시켜주는 것이니까.
거기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아르누아 추기경이 무언가 알기 어려운 목적으로 블랑독 중부의 한 도시에 집착한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단순히 도시에 집착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그걸 전략적 목적으로 삼아버린 것이 문제였다.
그도 그럴 것이, 전략적으로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손바닥만한 도시에 1만이 넘는 대군을 투입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말이다. 심지어 금방 함락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라 함락은 기약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만약에 그 도시에 불필요하게 집착하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그 시기의 적인 이단자들··· 트랑카벨의 군대는 왕실군과의 전투를 막 끝낸 직후라 전력적 공백이 있는 상태였다. 그 황금같은 순간에 병력을 남쪽으로 파견했으면 어땠을까···.
전장을 더 남쪽으로 옮길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럼 전략적인 우위도 더 얻을 수 있었을텐데. 잃어서는 안되는 전략적 지점을 끼고 싸우는 전략가는 제한되는 게 많으니까.
아니, 단순히 전략적 우위만을 생각한다면, 지금까지 지도에 색칠하듯 점령지 하나하나 점거하면서 남하한 행동 자체가 말이 안되는 일이다.
다만 이 전쟁은 ‘성스러운 전쟁’ 이니까. 자신은 돈 받고 남의 싸움 대신 해주는 전쟁꾼일 뿐이니까, 고용주의 목적대로 행동하는 것은 당연했다. 이런 점에 아쉬워해서 용병을 어떻게 해 먹겠나.
좀 더 적극적으로 추기경과 다른 성전군의 힘 있는 이들을 적극적으로 설득하지 않은 자신의 잘못일까?
하지만 오랫동안 대신 싸워주고 받은 돈으로 밥을 먹으면서 생긴 통찰이 있다. 바로 설득해도 될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보통은 설득해보고 안되면 말아야지··· 라고 생각하는데 설득 시도했다가 실패하면 손해인 부류가 있다. 정확히 아르누아 추기경이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 경우라면, 굳이 자신의 의도를 전달하기 보다는 얌전히 ‘저 놈은 말 잘 듣는 놈이다’로 인식되는 편이 장기적으로 더 낫다는 것이고.
어쩌면 이번에 말도 없이 강 건너 남쪽으로 진격한 것이 그런 신뢰를 깨는 일이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들지만··· 아마 잘 설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류의 사람에게는 자신의 지시를 어겼느냐 아니냐가 매우 중요한 법이니까.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직접적으로 지시를 어기지는 않았다는 것이 중요하다.
다만 그러기 위해서, 나름 휘하 병력을 잘 지켜서 돌아가야 하겠지만.
“울터의 기병대에 전령을 보내라. 퇴각 준비, 측방 엄호를 부탁한다고.”
“알겠습니다!”
원래 일방적으로 이기고 돌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예상에서 벗어난 게 있다.
바로 적군이 생각보다 너무 강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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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면에 적군! 측면에 적군입니다!”
갑작스러운 정찰병의 보고에 나는 어리둥절해졌다. 지금 좁은 강변 전장을 아군이 가득 채우고 있는데··· 측면이라니?
“측면? 이 전장에 측면이 있나?”
“네에, 콘도티에레... 보고는 좌측 쪽에서 왔네요! 적은 강 건너에 있어요!”
“아!”
그러지. 강이 얕다보니까, 사람이 걸어서 건널 수 있는 정도니까 충분히 측면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다.
우측면은 비탈길에다 올라가면 ‘녹색의 미로’가 있으니까, 막힌 측면이 맞다. 하지만 좌측면은 그냥 사람이 건널 수 있는 얕은 물이니까.
강 건너를 바라본다. 기병이 여럿 보인다. 강변까지 바짝 다가온 자들은 대부분은 가볍게 무장한 경기병으로 보이지만. 저 뒤편으로 모래 먼지가 이는 것을 보면 숫자는 상당한 것으로 보이네.
아마도 적은 처음부터 북 로데브 강의 이쪽과 저쪽을 다 이용할 생각이었을지도 모른다. 전투는 이쪽에서 하지만, 시야는 강 건너도 보고 있었다는 것인가.
아무리 기병이고 얕은 물이라고 해도 강 건너 돌격해오는 것은 쉽지 않겠지. 강변에 수비군을 배치하면 반드시 격퇴할 수 있다.
하지만 상당히 넓은 유역에 병력을 배치해야 한다는 것이고··· 자칫 병력을 얇게 펼쳐놨다가 어딘가 뚫리기라도 하면 안 배치하느니만 못한 꼴이 될 것이다.
우리 후방, 더 상류쪽으로 이동해서 단번에 강을 건너지 않았다는 것은 또 나름의 생각이 있다는 것인가···.
“으으음, 이거 답답하네···.”
“네에, 뭐가 말인가요 콘도티에레?”
“적장이 자꾸 나한테 선택지를 던지고 있는데, 둘 다 별로 선택하고 싶지가 않아.”
“네에? 적장이요오? 선택지 던져주는 것은 콘도티에레의 특권인데, 못된 녀석이네요!”
“아니 딱히 특권은 아니지···.”
확실히, 나는 상대방이 뭘 골라도 손해라는 느낌으로 몰아넣는 전술을 선호한다.
실제로 선택지를 보여주고 ‘이거 골라라!’ 한다는 이야기는 물론 아니고. 적의 택할 수 있는 방향을 그렇게 제한한 다음, 무엇을 택하든 거기 맞춰 대응한다는 말이지만.
그런데 이번 적장은 뭔가 느낌이 다르다! 나도 전쟁터 다니면서 먹은 밥이 있는데, 이런 기분나쁜 느낌은 거의 처음인 것 같다.
대놓고 선택지를 보여주면서 둘 중 하나 골라라! 고 강요하는 듯한 느낌. 이렇게 뚜렷하게 보이는 것은 처음인데 참.
···설마 나한테 당한 상대들도 이런 느낌 받았나? 그건 아니겠지 설마.
“저, 콘도티에레? 강 건너의 적은 그냥 둬도 될까요?”
“아니 그럼 안될 것 같긴 하네.”
나는 다시 전장을 파악한다. 적의 측면을 강렬하게 타격한 지빌링엔 연대의 지금도 계속되는 상태이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다. 격렬한 공격을 위해서, 아군 역시 질서 없이 공격했고 뒷심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연대 후속 병력이 뒤따르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진격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은 적이 후퇴하고 있다는 말이겠지. 적은 확연하게 날개를 접으면서 병력을 뒤로 빼고 있었다.
하지만 그 움직임에 패배감은 보이지 않는다. 져서 도망가는건 아니지. 오히려 덤빌 테면 덤벼 보라는 식의 도발에 가깝다고나 할까.
아군의 승리는 지엽적인 것이었고, 이걸 전면적인 승리로 만드는 것은 그냥 두고는 보지 않겠다는 것이겠지.
그 유연한 후퇴에서는 오히려 여유조차 느껴진다.
“후우··· 오늘 전투는 운이 좋았으니까, 여기까지로 해야겠다. 너무 욕심 부리면 독박 쓰는건 우리 병사들이니까.”
“네에··· 그럼 어떻게 할까요 콘도티에레?”
“지빌링엔 연대에 전령! 현재 위치를 유지할 것!”
“네에! 지빌링엔 연대에, 현재 위치를 유지할 것!”
“그리고 제51 연대에 전령! 좌측을 강화하고 측면 공세에 유의할 것!”
“네에! 제 51 연대에, 좌측을 강화해 측면을 공세에 유의!”
진격을 멈추기로 결정한다. 그래, 이 정도 털어먹었으면 더 욕심 부리지는 않아도 되겠지.
“저 그럼, 적은 측면을 공격해올까요?”
전령들을 보낸 첼레스티나가 물어온다.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마 그러진 않을 거다.
“우리가 공격을 계속 했다면 그랬겠지만, 아마 아닐 거야.”
“그런가요오?”
“내가 보기엔 그래. 적장도 별로 싸우고 싶어하진 않거든.”
“네에··· 뭔가 대단하네요! 그런 게 보이시는 거예요?”
“흐음, 글쎄. 아니면 싸워주면 되겠지?”
“네에! 강 건너오면 저희 포병대가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첼레스티나의 호승심 넘치는 말에 나는 그냥 웃어주었다. 믿음직하지만, 아마 오늘은 더 이상 첼레스티나의 포병대가 불을 뿜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천천히 부상병들을 수용할 준비를 해줘. 오늘은 아쥬흐 양이 너무 바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전투는 격렬했지만 지엽적이었으니까, 아마도 그렇겠지?
“아앗! 강 건너에 병력이 늘어났어요! 콘도티에레, 보세요!”
“어? 뭐라고? 진짜네!”
정말이다. 서쪽에서 도착한 것인가. 검은 옷을 입은 기병대가 도착했다. 아니 저거···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어디서 본 기병대였더라.
젠장, 기억이 나질 않는다. 이번에 성전군과의 전장에서 만난 적인가?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설마 트랑카벨 가문과 계약하기 전에 그룬발트 어디에서 만난 기병대인가?
철저하게 종교 기사단의 느낌이 팍팍 풍기는 병력이다. 숫자는 그렇게 많지 않지만 직접 상대하려면 꽤나 고생좀 할 것 같은 기세인데.
이거 무리해서 공격을 이어가지 않기를 잘했네. 설마 적은 미리 이걸 예상하고 함정을 판 걸까? 자칫해서 예비대 없이 총공격을 했으면, 이미 치열한 전투를 벌여 지친 제19 연대가 적을 상대해야 할 뻔 했다.
“첼레스티나, 제19 연대에도 전령을 보내줘.”
“네에! 어떻게 보낼까요?”
“현 위치에서 사각 대형을 유지하고 대기! 만에 하나 모를 적의 우회에 대비할 것!”
“네에, 현 위치 사각 대형 대기! 혹시 모를 적의 우회를 대비할 것!”
후위대가 있어서 다행이다. 정면을 향하던 대형이었으나, 다행히 깊이까지 들어가진 않았으니 좌향좌만 하면 되려나.
중앙에 진출된 제51 연대 주력, 측면에서 이를 보조하는 제19 연대와 지빌링엔 연대. 음, 뭐 이대로 한 번 더 싸워도 지지는 않겠네.
그래도 기왕이면 오늘은 여기서 끝내고 싶다. 더 싸워서 얻을 게 하나도 없잖아··· 우리가 이겨도, 적이 이겨도 서로 마찬가지 아닐까?
“콘도티에레, 적 보병대가 강을 건너서 물러나네요.”
정말이다. 정면에 대치하고 있던 적이 신속하게 강을 건너 북쪽으로 물러나고 있었다. 혼란스럽지도 않고, 질서정연하다. 추격한다면 일전을 거부하지는 않겠다는 예기조차 보인다.
“아니 이럴거면 진작 퇴각하지 뭐하러 여기서 버틴 거야?”
“그러게요!”
말로는 한마디 했지만, 속으로는 남몰래 한숨을 쉰다. 나도 참, 정말 더는 싸우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뭐, 결국 다른 전장에서 또 만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은 강하게 들지만 말이다. 그건 나중 일이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