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22. 제2차 아넥시 방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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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빌링엔, 피 흘리는 흑곰들이 함성을 지르며 달려나간다. 나는 다급하게 첼레스티나에게 외친다.
“첼레스티나! 사격 중지! 사격 중지! 아군 맞추면 안 돼!”
“네에, 콘도티에레! 일단 장전만 시켰어요오! 다음 표적을 지정하시겠어요?”
“잘 했어! 다음 포격은 첼레스티나의 센스에 맡길게!”
“네에! 첼레스티나의 센스를 보여 드릴게요!”
농담같지만 진지한 명령과 수행이다. 내 말을 들은 첼레스티나는 내가 믿어준다는 사실이 기분 좋았는지 활짝 웃으면서 포대로 돌아간다.
첼레스티나는 전체적인 공간 파악 능력이 정말 뛰어나다. 포탄 한 발 한 발을 적이 가장 아픈 지역에 꽂아 넣어 줄 테지.
치명적인 길 찾기 능력 부족을 생각하면 대체 어떻게 가능한가 궁금하지만··· 아마 하늘이 길찾기 능력을 거둬가면서 보상으로 준 것 같기도 하고···. 아니, 농담이 아니고 그게 아니면 설명이 안 되니까.
아무튼 오히려 내가 이것저것 직접 명령하는 것보다 훨씬 뛰어나게 다음 표적을 정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나는 말을 몰아 오른편으로 이동한다. 지빌링엔 연대가 깊은 종심으로 적진으로 돌격하고 있는 쪽이다. 깊은 종심으로 돌격하는 이유는, 물론 우리 포병들의 사격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오오, 콘도티에레!”
“콘도티에레 만세!”
후위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지빌링엔 용병들이 나를 보고 함성을 지르며 환영해준다. 나는 멋쩍게 손을 흔들어 화답해 주고, 전투가 벌어지는 우익 전장에 집중한다.
“3열 발사! 적 머리통에 바람구멍을 내 줘라!”
“쏴라아!”
타타탕! 타탕!
선두에 선 아군 총병들이 일제사격을 쏟아낸다. 포격에 이어 선두를 빼곡하게 채운 지빌링엔 총병들의 연달은 일제사격에 적은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어찌 보면 평범한 총병간의 사격 교환이지만, 아군이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그냥 보아도 적 밀집대형의 선두가 뭉텅이로 쓰러져가고 있었다.
멀리서 보면 장창의 숲이 마치 벼락 맞아 쓰러지는 나무처럼 우수수 쓰러져간다. 저 밑에서는 근거리 사격에 당한 적 창병이 죽거나 중상을 입었겠지.
현재의 총격전 우위는 우리 지빌링엔 총병이 특별히 뛰어난 사수들이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오히려 트랑카벨 정규 연대의 총병들에 비해 사격술 자체는 떨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빌링엔 총병들은 적과 근접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굳이 총병들만 그런 것은 아니고 창병과 근접보병들을 포함해서 무지막지한 배짱이 특징이기는 하지만··· 과연 피 흘리는 흑곰이라는 이름이 그냥 지어낸 것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사격 부대라는 특성상, 총병들은 적과 거리를 유지하며 사격을 지속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는 단순한 자기보호 본능 때문만은 아니다. 그게 전술적으로 유리한 방향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빌링엔 총병들은 그런 계산 따위를 하지 않는다. 사격을 마친 다음 순간은 어찌 되어도 좋겠다는 것처럼, 적의 코앞까지 다가가서 총을 대고 방아쇠를 당기는데 거리낌이 없다.
‘총병 싸움에서는 쪼는 쪽이 뒤지는 거야!’
언젠가 지빌링엔 장교가 농담처럼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이 말이 그들의 싸움 방식을 완벽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적군은 집중된 포격에 너덜너덜하게 찢긴 상태에서, 두 차례의 총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고 있었다. 거기에 3열 째의 총병은 대담하게 적 코앞까지 다가가서 일제사격을 가했다.
적군은 이런 식으로 대응하지 못한다. 대열의 중심은 창병이 지켜야 한다는 선입견··· 이 아니라 상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선두 대열의 대부분을 창병이 채우고, 그 빈자리에서 총병이 지원하는 형태가 된다. 이러니 선두 대열에 노출된 총구의 숫자가 비교되지 않는다. 사격전에서 일방적으로 밀릴 수밖에.
전장의 상식. 그렇다. ‘상식’이다. 상식대로면 적군의 대응이 맞기는 하는데···.
상식대로만 행동하면 상대의 미친 짓··· 이 아니라 변칙적인 행동에 당황하기 쉽지.
콰쾅! 쾅!
투콰악! 퍽!
“우아앗!”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지빌링엔 총병 제3 열이 일제사격을 마친 직후, 반격을 위해 대열을 정돈하던 적진에 첼레스티나의 포대가 발사한 포탄이 떨어졌다.
“끄허억!”
“으아아아아아!”
“어, 어디서 쏜 거야?”
“멈추지 마! 대열이 무너지면 다 죽는다!”
숙련도가 떨어지는데다 벼락치기로 급조된 포대다. 하지만 절반 이상의 포탄이 적진을 비스듬히 긁고 지나갔다.
비명소리와 함께 흙먼지가 일어나며 부서진 장비 조각이 사방으로 튄다. 어디를 어떻게 맞았는지, 인간의 몸이 허수아비처럼 허공으로 날아 올라가기도 한다. 차라리 깨끗하게 관통하고 날아가는 편이 나아 보일 정도이다.
적의 바로 앞까지 다가가서 총격을 가한 지빌링엔 총병들은 더는 기다리지 않았다. 그들이 창병의 엄호를 받지 않고 선두로 나선 것은 단순히 무모하기 때문은 아니었다.
백병전으로도 적을 이길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피 흘리는 흑곰 앞으로오!”
“돌격!”
“으아아아아아아아!”
“돌격! 가즈아아!”
본래라면 총병이 물러서고, 창병이 나서야 한다. 그리고 파이크 푸쉬 전술을 통해 적의 창병을 밀어낸다.
그렇게 적이 밀려난 만큼 전장의 ‘공간’을 차지하고 승리를 향해 다가간다. 적에게서 빼앗은 전장의 공간은 적의 측면을 노리고 후방을 기습할 수 있는 일방적인 권리가 된다.
이게 전장의 상식이다. 사람 키의 두 배가 넘는 긴 장창을 가지런히 앞세운 밀집 대형은 다른 방법으로는 이길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식대로 행동하지 않는다.
전방의 적 창벽은 여기저기 구멍이 뚫려있다. 연이은 포격과 총격에 상처를 입고 울부짖는 적병이 잔뜩 보인다. 대열 통제가 되지 않아 창끝이 가지런히 모이지도 못한다.
본래라면 적은 창벽을 전진시켜 사격하겠다며 무모하게 접근한 총병들을 제압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다.
적은 약해져 있다.
피 흘리는 흑곰은 약해진 적을 물어뜯기 위해 굳이 상식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이야아아아!”
“크아악! 어억!”
“물러나! 물러난다!”
크게 휘두른 화승총의 개머리판에 투구를 맞은 적병이 그대로 무릎을 꿇더니 쓰러진다. 그 빈자리로 짤막하지만 폭이 두꺼운 갑옷 관통용 단검을 가진 지빌링엔 용병이 뛰어들어 적을 난도질한다.
총병과 창병의 대열을 교체하고, 밀집 대형을 갖춰 천천히 전진해 적을 밀어내고··· 이런 시간 낭비는 하지 않았다.
그대로 뛰어든다. 총병의 선두가 그대로 돌격대의 선두가 되어, 거대한 창날의 첨단이 되어 적진을 뚫고 들어간다. 아니, 적을 부수고 찢어버리며 돌입하는 기세를 보면 창날 보다는 도끼날이 어울릴지도 모른다.
너무 빨랐다. 적의 예상을 뛰어넘었기에 적은 대비하지 못했다. 선두 병력이 너무 많이 쓰러져 아직 복구하지 못한 창병 대열에 짧은 무기를 가진 지빌링엔 돌격대가 붙어 버린 것이다.
장창 대열은 적이 다가오지 못하게 하기에 강하다.
이미 대열 내부로 적이 들어와 버리면 그저 불편한 긴 장대를 든 만만한 상대일 뿐이다.
“돌격! 적의 측면을 장악한다!”
“지빌링엔! 휘어브루넨!”
“적을 밀어버려! 후속부대가 온다!”
총병들이 보조 근접 무기를 꺼내 들거나, 화승총 그 자체를 휘두르며 적진을 밀어낸다. 기습적인 돌격에 적은 큰 피해를 입으며 밀리긴 했으나 결국 돌격은 한계에 도달한다.
왜냐하면 적군 역시 제법 경험 있는 용병들이기 때문이다. 치명적인 기습 돌격에 완전히 사기를 잃고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방어선을 새롭게 세워 전면적 붕괴를 막은 것은 칭찬할 만하다.
하지만 그 때 나서는 것이 지빌링엔의 후속부대였다.
단단한 방어벽을 부수는 철거반.
중장보병의 투구와 갑옷을 통째로 따버리는 인간 백정들.
일그러진 모양새지만 간신히 새로운 대열을 구축한 적 사각 대형. 그 모서리에서부터 유혈사태가 시작된다.
“으악!”
“측면을 막아! 포위당하면 끝이다!”
“우리 총병들은 뭐 하는 거야?”
“아까 다 뒤졌잖아! 끄아악!”
창벽의 약점일 수밖에 없는 모서리 쪽으로 열 명 정도로 이루어진 지빌링엔 특수 근접병들이 밀고 들어간다. 미늘창으로 무장한 이들은 평소에는 창병 대열을 이끄는 장교들이라고 한다. 즉, 중대 최고의 숙련병들이다.
지빌링엔 연대, 휘어브루넨 중대는 고집스럽게 옛 피 흘리는 흑곰의 전통을 따르고 있었다. 창벽을 부수는 것은 미늘창이라는 옛 전통이다.
안타깝지만, 현재의 전장에서 이 공식은 사장된 전술이다. 과거와 비교하면 창병 밀집 대형의 대응 능력도 향상되었고 총병의 비율이 커졌기 때문이다.
결국 밀집 창벽으로 온갖 적의 접근을 막으며, 총병으로 한 발이라도 더 쏴대는 것이 유리한 현실이 오늘날의 전장 표준을 만들었다. 오로지 창병과 총병의 5:5 비율로 편성된 트랑카벨 정규 연대가 이를 따르고 있고 말이다.
하지만, 슈토르히 연대가 방패와 검으로 무장한 돌격대를 유지하고 있듯, ‘특수한 환경’ 아래에서 이 구식 병종들은 남다른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아마··· 간신히 안정시킨 적의 방어선을 측면에서부터 찢어버리기 시작한 모습을 보면, 휘어브루넨 출신의 용병들이 고집스럽게 지켜온 전통이 가지는 가치도 그럭저럭 증명된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전령! 제51 연대의 로이작 연대장에게 전령!”
“옛, 콘도티애래!”
“전군 전진! 이상!”
“옛, 콘도티에레, 전군 전진을 전하겠습니다!”
변칙적인 방법으로 승기를 잡았으니, 정석적인 방법으로 승리를 굳힌다. 제51 포르망제 의용보병 연대에 진격 명령을 내린다.
전령이 연대장에게, 그리고 연대장에게서 휘하 중대들에게로 부지런히 달린다. 지금껏 대기만 하고 있던 거대한 예비대가 서서히 깨어나기 시작한다.
“우리 차례다! 갈 준비 됐지?”
“대열 정돈해!”
“적은 다 죽어간다고? 우리가 한 방만 잘 때리면 돼!”
장교들이 고함을 지르는 소리가 전선을 오간다. 동료들이 포탄을 날리고, 적의 측면을 노리고 돌격하는 사이 쉬고 있던 병사들이 차근차근 공격을 준비한다.
“우리가 선두다! 준비됐나?”
“옛, 중대장님!”
“이 전투는 우리 연대의 첫 전투지만, 우리 북부 출신들에게는 첫 전투가 아니다! 저 빌어먹을 자식들을 무찌르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옛!”
“자 가자! 돈 받고 싸우는 친구들에게 뒤처져서 되겠나?”
선두 대열이 강변의 부드러운 흙을 밟고 나아간다.
제51 포르망제 의용보병 연대의 첫 출전. 한 번도 적과 창을 마주한 적 없고, 사격을 맞은 적도 없는 신병 연대이다.
하지만 방금 중대장의 말대로, 연대를 구성하는 블랑독 북부 출신의 병사들에게는 첫 출전이 아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안전한 남쪽으로 떠나는 것을 거부하고 고향에 남기를 선택했던 사나이들. 하지만 그 결과는 거대한 성전군의 군세에 고향과 가족을 유린당하는 것이었다.
연대장인 로이작 드 포르망제 남작부터가, 어쩌면 뤼나메르 교차로에서 가신들과 함께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끝까지 싸우던 블랑독 북부의 영주였다. 그와 함께 교차로 언덕을 지켰던 병사들이 제51 연대의 핵심 인원들이다.
지금 그들의 고향은 성전군의 점령 아래에 있다. 어쩌면 가족과 친지들도 고향에 두고 왔을지도 모른다. 싸움을 포기하지는 않았으나, 끝내 고향을 지키는 것에는 실패했으니까.
지금까지 잘 참아주었다. 이제 그들은 대륙 어디에 내놓아도 부족하지 않을 전술과 장비를 갖추고 있다.
“콘도티에레, 가보겠습니다!”
부하들을 이끌고 선두로 나온 연대장 로이작 드 포르망제가 말 위에서 경례하며 말한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전진을 명한다.
“제51 포르망제! 앞으로!”
“전진!”
“전 중대 전진 앞으로!”
지빌링엔 연대의 다소 막무가내로 보였던 종심 돌격과는 다르게, 철저하게 대열을 갖춘 제51 연대가 전장을 가로지르기 시작한다.
좌측에는 북 로데브 강을 끼고, 우측에는 지빌링엔 연대의 전장을 두고서.
전투를 끝내는 힘을 가지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