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177화 (177/556)

24-19. 제2차 아넥시 방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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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군 기병대장 울터 콜린스는 현재 상황에 불만이 많았다. 이기고 있는데 후퇴해야만 하는 상황 말이다.

분명하게 말하지만, 이 ‘유리한’ 상황은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였다.

좁아터진 골목을 뚫고 적의 거점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피해.

말에서 내린 부하들이 농장 벽을 타고 넘으며 수도 없이 저격당했다.

무리하지만 불가피한 돌파 과정에서도 적지 않은 희생이 발생했다.

부하 만큼은 아니지만 귀중한 말도 많이 잃었다.

이런 참혹한 전투를 겪어내고 간신히 확보한 우위였다. 부하들의 피를 카펫처럼 깔고서야 비로소 도착한 승리로의 지름길이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걸 다 포기하고 후퇴하라니. 여기까지 오면서 죽어간 부하들의 얼굴을 볼 낯이 없다.

울터 자신이 직접 중기병대를 이끌고 좁은 골목을 돌고 돌아 도착한 곳은 전장의 측면이었다. 심지어 비스듬히 적의 후방이 보이는 완벽한 위치.

용감히 저항하는 적군이 보이기는 했으나, 고작 한 줌. 두 방향에서 공격할 수 있는 절호의 위치이다. 똘똘 뭉친 적은 완강해 보였으나 창병의 숫자가 많지는 않았다. 숙련된 울터 휘하 중기병의 상대는 되지 못한다.

10분. 딱 10분만 있었으면 결정적인 승리를 가져올 최후의 돌격을 할 수 있었다. 병력을 재배치하고, 한쪽부터 적을 밀어 버리며, 전열이 붕괴하여 도주하는 적을 추격한다.

블랑독에 들어온 이후, 울터와 그의 부하들이 굶주려 있던 성공적인 기병 돌격을 수행하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는 말이다!

“후우우···.”

흔들리는 말 위에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포기의 한숨, 체념의 한숨이었다.

‘뭐라고? 다시 말해봐!’

‘즈, 즉시 공세를 멈추고 퇴각하시라는 명령입니다.’

‘확실해? 수령처가 우리 연대가 맞나?’

‘그, 그렇습니다. 라모리 경께서 직접 내리셨습니다!’

하필이면, 막 돌격을 위해 부대를 전개하던 상황이었다. 즉시 퇴각 명령을 받은 것은.

머리로는 정말 별생각을 다 했다. 사실 전장의 다른 국면에서는 아군이 밀리고 있는 상황일까? 뭔가 오해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라모리 총대장이 정신이 나갔나? 전령이 사실 적이 보낸 첩자일까?

차라리 명령을 못 받은 셈 칠까? 자신은 상당한 자율권을 가진 기병대장이다. ‘현지 판단’으로 더 타당하다 생각한 판단을 따를 수도···.

생각은 많다. 하지만 무엇하나 자기 자신도 설득하지는 못했다. 오히려 마음 깊은 곳에서는 이미 이해하고 있었다.

라모리 총대장을 따라야 한다.

‘빌어먹을, 알겠다. 후퇴하도록 하지.’

명령을 전해 들은 휘하 장교들도 어이가 없다는 반응이었다.

그들도 눈이 있고, 상상력이 있다. 누가 보아도 훤히 드러낸 적의 옆구리와 후방. 돌격하면 무너뜨리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기병 장교로서 평생 기회가 몇 번 있을까 말까 한 이상적인 돌격 상황이다.

‘총대장의 명령이다. 최대한 신속하게, 온 길로 퇴각한다. 집결지는 도강했던 강변이다.’

오랫동안 함께해온 부하들이다. 군소리 없이 따르기는 하지만, 불만이 많다는 것은 안다. 울터 자신도 속이 뒤집힐 지경이었으니.

적 소부대와 교전하던 기병까지 후퇴시킨다. 결사적으로 싸우던 적군은 어리둥절한 모습이다. 그야 그렇겠지. 우리도 어리둥절하니까. 정말 조금만 시간이 있었어도... 모조리 쓸어버릴 수 있었는데.

자기 자신을 설득하고자 하는 안간힘처럼, 마지막으로 한번, 머릿속으로 다른 ‘경우의 수’를 생각해본다. 이대로 휘하 기병대를 집결해 북쪽이 아니라 남쪽으로 향하는 것이다.

현재 적의 대응 능력은 바닥까지 떨어진 상태, 남쪽으로 향하는 길을 잘 찾으면 이대로 적의 후방, 풍요로운 블랑독 남부로 들어갈 수 있다.

적이 본토 방위를 위해 병력을 얼마나 남겼을지는 모르나, 1천 기 이상의 기병에 즉시 대응할 수 있을만한 병력은 없을 가능성이 높다. 갑자기 병력을 긁어모아 봤자, 그런 벼락치기 병력에는 절대로 잡히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적의 병력이 위협적이다? 그럼 도망친다.

적의 병력이 만만하다? 기동성으로 괴롭히다 잡아먹는다.

전선에서 떨어진 적 후방에서 약탈로 물자를 조달하며 적을 뒤흔드는 것은 울터에게 자신 있는 전략이기도 했다.

차라리 이번에 그렇게 해보는 것은 어떨까? 라모리 총대장 역시, 눈 가리고 아웅이긴 했지만 성전군 사령부의 의향과 관계없이 자신의 판단대로 행동한 것이지 않은가?

잠시 장밋빛 미래를 그려본 라모리는 고개를 저었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역시 어렵다. 두 가지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첫째로, 이번 공세를 위해 총대장은 일부러 울터의 부대에게 정예 기병을 몰아주었다.

그런데 그걸 몽땅 가지고 남쪽으로 떠나버리면, 전략 자체는 성공적이라 쳐도 라모리는 기동 전력을 상실하고 말 것이다. 적진 후방 교란 하자고 전선에서 싸울 주력이 빠져 버리면 주객전도가 된다.

둘째로, 더 남쪽으로 가려면 강을 하나 더 건너야 한다.

이미 건너온 북쪽의 강은 걸어서 건널 수 있을 정도이긴 했지만, 북부 지류이다. 로데브 강 본류는 갈수기라고는 해도 기병이라 해도 쉽게 건너지 못할 수도 있었다.

만약에 강을 건너 남쪽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이 녹색의 미로 삼각주 안에 갇혀 버린다. 정말 최악의 상황이다.

아마 라모리 총대장은 이런 경우의 수도 다 생각을 해 두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시가 없었다는 것은 문제점도 같이 파악했다는 것일 테고.

확실히, 라모리 스텐던은 자신과 다른 세상을 본다. 자신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느낀다. 벌써 여러 번 전장에서 느꼈다. 그 중 몇 번은 울터 자신의 목숨을 살리기도 했고.

입 다물고 그냥 명령이나 따르자.

그래도, 그래도 정말로 아쉬운 것이 있었다.

만약에 명령 전달이 조금 늦거나, 돌격 준비가 빨랐다면···.

지금쯤 울터가 앞장선 기병대의 돌격이 적의 후방에 꽂히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이럴수록, 뤼나메르 교차로 전투에서 잃은 부하들이 아쉬워진다. 직접 명령이 없이도, 눈치와 깃발 신호만으로 자유자재로 병력을 움직이던 심복들.

뤼나메르의 언덕을 오르다가, 적의 산탄에 맞고 산산이 조각나버렸지. 지금 기병대 장교들도 좋은 녀석들이지만, 표정만 봐도 심중을 알아채던 옛 부하들 같지는 않다.

아마 그들이 있었다면 미로 돌파도 훨씬 빨랐고, 이번처럼 병력 전개하느라 시간을 낭비하지도 않았을 텐데.

그랬다면 분명 라모리의 명령이 오기 전에 돌격은 성공했고, 적진은 붕괴하였을 것이다. 그럼 전략적인 선택지도 조금 늘어났을 텐데.

정말 아쉬웠다. 언제 다시 그 수준의 기병대를 키워낼 수 있을지. 병력을 수습해 북쪽으로 이동하면서, 울터 콜린스는 더 이상은 어리석은 판단으로 부하를 잃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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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넬리프 몽타니에 연대장께서 병력을 이끌고 후미에서 행군 중이셔요!”

“그래··· 힘들 텐데 고생이 많네.”

막 힘든 전투를 끝낸 제19 델레망드 연대에게는 휴식하라고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넬리프 연대장은 그 자리에서 병력을 재편성하더니 약 500명 정도의 전투부대를 편성해 따라오는 모양이었다.

그들에게는 이번이 첫 전투인데. 다들 이렇게 경험이 쌓이며 믿음직한 전투 부대가 되어간다.

“정찰대에서 전령! 강변에 적이 집결하고 있다고 해요!”

“그래, 예상대로네.”

“추격 속도를 올릴까요?”

“아니, 그대로 유지 해. 다른 방향에서 접근 중인 제51 연대에게도 유지하라고 전해줘.”

“네에, 콘도티에레!”

완벽히는 아니지만, 델레망드 삼각주에서의 전투는 예상했다.

주 전장이 서쪽으로 옮겨진 사이, 적의 별동대는 반드시 북 로데브 강을 건널 것은 예상했다.

유리한 지형에 힘입어 제19 연대가 용맹히 싸워 버텨낼 것도 예상했다.

너무 늦지 않게 지원군을 보낼 수 있으리라는 것도 예상했다.

하지만 예상하지 못한 것은 적의 능력을 과소평가했다는 점이다. 내 분명한 실책이다.

우선 적의 진격이 너무 빨랐다. 그리고 강했다. 그 결과 생각보다 깊이까지 적이 진격해왔다. 중앙 광장에서의 전투는 준비는 했으나, 실제로 적이 여기까지 올줄은 몰랐다.

적은 판단이 정확했고 과감했으며, 델레망드 삼각주 농장 특유의 지형을 신속하게 파악했다. 설마, 적장의 출신지에 이런 지형이 있을지도 모르지···. 뭐 이런 특이한 밭둑은 블랑독에만 있는 것은 아니니까.

때문에 내가 더 오래 버텨줄 것으로 생각했던 농장 방어선들이 훨씬 빨리 무너졌다. 그 결과 적이 깊숙이 들어온 것이 현 상황이었고.

하지만 내가 정말 놀란 것은, 내가 이끄는 지원군이 모습을 드러내자 신속하게 퇴각했다는 점이다. 정말 어떤 미련도 없다는 듯이, 순식간에 병력을 뺐다.

아니 솔직히, 전장에 도착하면 적이 혼란해 할 것으로 생각했지. 그래서 동네방네 소문나라고 시끄럽게 나팔 불면서 진격한 것이고.

그런데 우리가 진격 중에 만난 것은 무질서하게 이동하는 순례자들이었다. 전투력으로 따져서 성전군 최하위, 한마디로 잡병이란 말이다.

이들을 상대하느라 시간 낭비를 꽤 했고, 잠시 목표를 놓쳤다. 약한 병력을 미끼로 던져 시간을 끈다. 비열하고 냉혹한 전술이기는 하지만 분명 효과적이었다.

덕분에 ‘당연히 적의 후방’을 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나와 지빌링엔 연대는 허탕을 치고 말았다. 아니 이렇게 명령 전달도 힘들고, 농장 너머는 보이지도 않는 데서 무슨 짓을 한 거지? 언제부터 알고 있던 건지 모르겠다.

섬뜩했다.

보통 공격이 신속하고 기세가 강한 적은 후방이 약하다. 당연히 후방을 확보하고 주변을 감시할 여력까지 진격에 쏟아붓기 때문이다.

그런데, 젠장, 이번 적은 뒤통수에 눈이라도 달린 모양이다. 시야와 정보가 방해받는 상황에서 부대를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었다는 이야기고.

제19 연대의 넬리프 몽타니에 연대장이 눈물을 흘리면서 고마워했었다. 간발의 차이였다면서.

아니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게 마냥 좋은 말은 아니다. 까놓고 말해서 그런 상황이 되기 전에 진작진작 왔어야지.

물론 내가 일부러 클라이막스에 등장하는 주인공 흉내를 내려고 한 건 아니지만. 당연히 여유 있게 등장하려 했는데 적이 너무 빠르고 교묘했던 것이고.

전투 경과를 보고받았을 때, 정말로 큰일이었다는 것도 알았다. 그리고 경악했다.

전황이 위험해서 경악한 것이 아니다. 아니, 그것도 있겠지만··· 내가 느낀 것은 ‘이걸 참아’ 였다. 그렇게 완벽한 돌격 타이밍을 잡고서도 돌격을 하지 않아?

만약에 마지막에 적 기병이 돌격했다고 가정하자.

그렇다면 혼전이 한참 이어졌을 것이다. 제19 연대도 불리하다고 호락호락하게 전선을 포기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천천히, 그리고 용맹하게 죽어갔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적을 물고 늘어졌을 것이고. 적어도 지빌링엔 연대가 지원군으로 도착할 때까지는 시간을 벌어 주었겠지.

결과적으로 정면과 측면 모두에서 공격당한 제19 델레망드 연대는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하지만 적의 후방을 지빌링엔 연대가 강타하였을 테고, 후속하는 제51 의용보병 연대가 포위망을 완성했겠지.

아마 적은 다섯 명에 한 명도 빠져나가지 못했을 것이다. 희생은 컸겠지만, 결과적으로 아군의 완승이었으리라.

명령 전달 속도를 생각해보면, 적장은 한참 전부터 아군의 접근을 알고 있었다. 전장의 모습을 훤히 파악하고 있었겠지.

그래서 도저히 시간 내로 제19 연대를 섬멸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자, 곧바로 전군에 퇴각명령을 내린다. 그러면서 약체인 '잡병 부대'를 버림 말로 뿌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은 휘하 부대, 아마도 정예 부대에 명령을 내려 병력을 수습하고 순식간에 떠나버렸다.

···부러울 정도의 엄청난 전장 통제력이다.

지휘관으로 전장에 나서면, 안전하고 시야도 좋은 후방에서 객관적으로 생각하며 판단하기는 비교적 쉽다.

하지만 전방에서도 그럴까? 부하들이 죽어나가고 그 피를 뒤집어 쓰면서도? 피가 끓고 뼈가 울리는데 객관성은 얼어 죽을. 그래서 가장 충실한 병사들조차 갑자기 명령 전달이 안 되면서 통제가 어려워지는 경우가 생긴다.

그런데 그걸 해 냈다 이거지···. 아마 부하 지휘관에게 강하게 신뢰 받고 있으리라. 그 좁고 복잡한 길에서, 낙오병까지 남김없이 챙겨가면서 후퇴한 것을 보면 상당히 유능할테고.

“이제 곧 녹색 미로의 끝이에요, 콘도티에레!”

“후우, 이제 도착했나.”

온갖 근심을 하며 좁은 밭둑 사이의 후텁지근한 길을 걷다가 갑자기 탁 트인 장소로 나오자, 시원한 강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몽땅 여기 모여있었네!”

“하, 짜식들 빠르네!”

주변에서 지빌링엔 병사들이 호전적으로 한마디씩 하는 것이 들린다. 나도 같은 심정이다. 이놈들 정말 빠르다.

강을 등진 진형. 형태상 배수진이지만, 스스로 퇴로를 차단한다는 의미의 배수진은 아니다. 갈수기라 강물은 허리 정도로 얼마든지 건널 수 있으니까.

실제로 건너편에 상당수의 기병과 소수의 보병 부대를 보내놓고 있다. 만약에라도 별동대로 강 건너편을 막을까 걱정이 된 모양이지. 강 주변의 평지는 좁으니까, 필요한 경우 활동할 수 있도록 기병들을 미리 보내둔 모양이다.

뭐 이번에는 나도 여유 병력이 없어서 우회 공격은 무리지만.

"강을 아직 안 건넜네요! 싸울 생각일까요, 콘도티에레?"

"음, 글쎄...."

적의 '배수진'을 분석해본다. 하나의 거대한 덩어리가 아닌, 선과 면을 적절히 활용한 모범적인 보병 대열. 병력은 3천 명에서 4천 명 쯤 될까. 상당히 방어적인 대형이다.

"아마 아닐 것 같기는 한데...."

소극적인 대형이긴 하다. 솔직히 어딘가 엉성해 보인다. 그런데 왠지... 저기 들어갔다가는 본전도 못 찾을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포병 앞으로, 첼레스티나."

"네에, 콘도티에레! 포병 준비할게요!"

"이번에도 포술 지휘 부탁해도 될까?"

"네에? 네에! 물론이에요, 콘도티에레! 기꺼이!"

첼레스티나가 신나서 달려간다. 보기에는 저래도 훌륭한 포술 전문가니까. 51연대나 19연대의 포수들은 신병이 많겠지만, 첼레스티나라면 잘 이끌 수 있겠지.

적이 무슨 짓을 하려는 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서 물어보려고 한다.

포격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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