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8. 제2차 아넥시 방어전
“포격 준비 완료되었습니다!”
“좋다! 이제부터 내 지휘에 따라 발사한다.”
“알겠습니다, 연대장님!”
제19 델레망드 연대장 넬리프 몽타니에는 아직 어려보이는 포술장의 굳은 표정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포구는 부연대장 악셀이 이끌고 있는 우측 부대의 측면을 겨누고 있다. 그 방향에서 적 기병이 돌입해온다면 측면을 훑고 지나갈 것이다. 한 발뿐이지만, 분명 아픈 한 방이 되리라.
“명령 전에는 절대로 쏘지 마라!”
“옛, 알겠습니다!”
혼전이 벌어지면 몇 번이나 쏠 수는 없다. 그러니 조심해서 한 발에 최대한의 피해를 입혀야 한다.
적을 기다리면서, 넬리프는 속으로 생각을 해본다. 자신의 연대에서 예비대로 몇이나 뽑을 수 있을지. 악셀의 부대를 지원할 병력, 특히 창병이 필요하다.
하지만 주 방어선에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얼마나 확보할 수 있을까. 30? 50? 못해도 수백 기의 갑자기 나타난 적 기병을 그 정도로 상대할 수 있을까?
빌어먹을, 못 막으면 뒈지는 거지 뭐. 최악의 경우, 화약 통에 불 붙여서 굴려서라도 막는다. 개자식들, 델레망드 땅은 한 치도 더 못 내준다.
“어, 어어? 연대장님?”
“뭔가, 포술장?”
“적이··· 적 기병이 이상합니다!”
“...뭐?”
포술장의 말을 듣고 적정을 살핀다. 뭔가 이상하긴 하다. 악셀의 얼마 안되는 우측 예비대를 금방이라도 공격할 것 같던 적 기병들이 물러서고 있다.
어중간한 거리에서 포위하고 서로 총격전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 같은 분위기는 아니다. 갑자기 왜 저러지?
“후퇴? 후퇴하나?”
“아앗! 저쪽 골목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뭐, 진짜?”
정말이다. 적 기병들이 방금 들어온 길목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분명 적 입장에서는 고생고생하며 뚫어온 길목일 텐데··· 어째서 이런 식으로 빠져 나가는 거지?
“연대장님! 주 방어선의 적도 후퇴합니다! 보병 대열이 후퇴하고 있습니다!”
“뭐?”
이번에는 헐레벌떡 뛰어온 연대 참모가 말한다. 정말이다. 방금 전까지 나무 바리케이드를 어떻게든 넘으려고 악착같이 달려들던 적군이 후퇴하고 있었다.
무수히 많은 시체와 버려진 무기를 남겨두고서.
“저, 적이 물러난다!”
“살았어! 살았다!”
“다신 오지 마라 이 자식들아!”
방어선의 병사들이 외치는 모습이 보인다.
이겼다. 제19 델레망드 연대는 적의 공세를 버텨냈다.
실감이 가지 않는다. 연대장으로서 부끄러운 일이지만, 이대로 전투가 계속되었으면 패배는 확정이나 다름없었다. 주 방어선은 한계나 다름 없어 언제 뚫릴지 몰랐고, 측방은 기병에게 돌입당하기 직전이었다.
자신은 그것을 조금이라도 늦추기 위해 사방팔방으로 뛰어 다니고 있었다. 그마저도 이제 끝이 아닌가 하던 차에···.
그때 멀리서 우우웅, 하고 낮게 울리는 나팔소리가 들린다.
“지원군이··· 왔구나!”
역시, 늦지 않았다! 지금까지 제19 델레망드의 소중한 부하들의 희생이 헛된 일이 아니었다. 자신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이 흐른다.
“아직이다!”
하지만 곧바로, 거칠게 팔뚝으로 눈물을 닦는다. 연대장이 당장 승리했다고 질질 짜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부상자를 옮기고 무기를 재분배한다! 아직 전투는 끝나지 않았다, 제19 델레망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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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생 지빌링엔, 피 흘리는 흑곰 연대의 공세는 신속하고 과감했다.
“이 새끼들이 왜 여기서 나와!”
“막아라! 커허억!”
“히이익!”
나는 지빌링엔들의 절반을 30명에서 40명 정도의 분견대로 나누어 전위로 내보냈다. 물론 길을 잘 아는 현지인 출신의 길잡이들을 붙여서 말이다.
“흐아악! 뭐야? 커헉!”
“거기 서 자식들아!”
“으아아아악!”
덧붙여 대량의 도끼를 지급했다. 필요한 경우 밭둑의 잡목림을 뚫어 안쪽으로의 길을 내는 용도로 쓰라고 한 것인데···. 녹색의 미로 안쪽에서 요란하게 들리는 소리만 해도 원래의 용도만으로 쓰이지만은 않는 것 같았다.
중간중간 총소리도 들리지만, 주로 들리는 소리는 고함과 비명이다. 대부분 짧게 끝나는 것으로 봐서 전투다운 전투도 벌어지지 않는 모양이다.
선봉 지휘관은 빈더갈렌 중대의 피노트 베레였다.
‘빈더갈렌 출신은 지빌링엔 최강의 나무꾼과 사냥꾼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맡겨주십시오.’
비록 ‘지빌링엔 최강’을 말할 때 다른 지역 출신들이 야유를 보내기는 했다. 그래도 어지간한 남자 허벅지보다도 굵어 보이는 엄청난 팔뚝을 보면 어느정도 진실인 것 같기도 했다.
“콘도티에레, 전선에 너무 가까이 오신 게 아닐까요? 길이 좁아서··· 조금 걱정이 되네요!”
“주변에 호위병이 이렇게나 많은데 뭐.”
“네에···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요오.”
나와 첼레스티나의 주변에는 장창과 화승총으로 무장한 지빌링엔 용병들이 흉흉한 기세로 행군하고 있었다. 만약 선봉의 분견대들이 강한 저항에 직면하면 바로 출동할 예정이었지만 아직 소식은 없다.
물론 나도 이 녹색의 미로에서 전선 가까이 나가는 것이 다소 걱정이 되긴 한다. 적의 기습이 걱정되어서는 아니다. 혹시라도 사령부가 계속 움직이면 제때 전선의 보고를 받지 못할까 걱정이 돼서 그렇다.
하지만 아마 적군도 아군과 동일한 입장이겠지. 그렇다면 이미 전투가 벌어지고 있을 제19 델레망드 연대와 합류하기 위해 서두를 필요가 있기에 다소 위험을 무릅쓴다.
델레망드 삼각주의 이 특이한 지형에 대해서는 나도 조금 알고 있다. 아직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트랑카벨 영지들에 대한 방어 계획을 세우면서 오래 머물렀으니까.
결론적으로 방어에 매우 좋은 지형이기는 하지만, 이렇게 지원하러 가는데도 조심조심 나아가야 하는 것은 곤란한 일이다.
부우우웅! 하고 나팔수들이 주기적으로 낮고 웅장한 소리가 울리는 큰 나팔을 분다. 고막이 좀 아플 정도지만, 어쩔 수 없지.
이 지속적으로 울리는 소리는 지금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우리 전방 분견대와 전령에게 사령부의 위치를 전한다.
아마 가까이 있다면, 한참 수비전을 벌이고 있을 제19 연대도 들을 수 있으리라. 그렇다면 지원군이 도착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물론 적도 들을 수 있겠지. 하지만 적은 이 소리가 울리는 지점에 정확히 뭐가 있는지는 알 수 없지 않은가?
뭐, 확신을 가지고 찾아온다? 그러다면야 우리도 싸워 주는 거지! 그러기 위한 준비니까.
“거기 누구야!”
첼리스티나가 갑자기 날카롭게 외치며 비스듬한 왼쪽 전방으로 권총을 겨눈다. 주변의 호위병들도 일제히 무기를 겨눈다.
다행히 적은 아니다. 우렁찬 목소리가 자신을 소개한다.
“콘도티에레! 빈더갈렌의 피노트 베레입니다!”
“아아, 피노트 경! 다친 데는 없나?”
“물론입니다!”
아 솔직히 좀 놀랐다. 나지막한 밭둑 모퉁이에서 갑자기 큼직한게 불쑥 튀어나와서. 다행히 모습을 드러낸 것은 선봉을 맡은 거한, 빈더갈렌 중대장 피노트였다.
대체 무슨 전투를 치룬 건지, 그의 빛나던 철제 흉갑은 온통 붉은 피가 튀어 추상적인 모자이크 그림이라도 그린 꼴이다.
···그의 오른손에 들린 도끼, 오늘 아침에 벌목용으로 지급했던 도끼가 손잡이까지 시뻘겋게 피로 젖은 것으로 봐서는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하고.
“포로가 특이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보고를 하기 위해 왔습니다.”
“어··· 수고했네. 그, 그게 포로 였구나.”
왼손에 시뻘건 자루 같은 것을 들고 있길래, 설마 적군의 수급이라도 모아왔나 해서 놀랐다! 다행히 그건 아니었다. ‘그것’은 살아서 움직이고 있었다.
아니 그러니까··· 보통은 사람이 사람을 무슨 꾸러미 드는 것처럼 한 손으로 들지는 못하는게 정상이잖아. 내가 못 알아본 것도 무리는 아니다.
“예, 콘도티에레. 순례자들을 이끌던 법황청의 수도사인 모양입니다. 어이, 말해라.”
“흐흑, 사, 살려주시오!”
“살려줄테니 말해! 콘도티에레께서 기다리시잖아!”
“아, 알았소! 내, 내려주시오!”
피투성이인 수도사는 훌쩍거리며 조심조심 돌로 쌓인 밭둑에서 내려온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간신히 선다.
통이 넓은 수도복이 피투성이긴 하지만 본인의 피는 아닌 모양이다.
“사, 사령관 라모리 경이 후퇴 명령을 내렸습니다. 우리는 퇴각 중에 길을 잃어서··· 어, 저 자와 만나는 바람에··· 흐으···.”
“후퇴 명령? 전군에 말인가?”
“그렇습니다. 강을 건너온 그 자리로 집합하라고 했는데 도무지 길을 찾을 수가 없어서···.”
“후퇴 명령은 언제 내렸지?”
“벌써 한참··· 이십 분은 지났지요. 대, 대답했으니 살려주세요! 성전이고 뭐고 지긋지긋하다고요! 그, 이단을 믿으라 하면 믿을 테니까!”
그다지 신앙심이 깊어 보이지 않는 수도사였다. 지빌링엔 용병들이 눈을 부라리자 곧바로 신앙을 버렸으니 말이다.
첼레스티나의 명령으로 결박당하자, 오히려 마음은 편한 표정이다. 그 정도의 신앙심과 각오로 성전에 나서다니··· 평범한 참가자는 이 정도가 평균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피노트가 붙잡기 전에 좀 심하게 두들겨 팼거나. 음, 맞다 보면 신념 정도는 바뀔 수도 있지.
어쨌든 중요한 정보다. 후퇴 명령이 내려진지 20분이 넘었어? 우리가 막 근처에 와서 분견대를 나눠서 전진하기도 전부터 후퇴를 시작했다는 말이다.
대체 왜?
설마 제19 연대가 이겼나? 그 전력차로?
그건 아닐 것이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다. 막 제19 델레망드 연대라는 함정에 빠진 적의 측면을 공격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면서 왔는데.
“콘도티에레··· 함정일지도 몰라요?”
“하지만 적은 지리멸렬한 상태야. 조직적인 저항이 전혀 없는 걸.”
“네에, 그건 그렇지만요오.”
“행군속도를 올리자.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야겠어.”
“네에 콘도티에레!”
적어도 적이 느끼는 공포감, 소수의 지빌링엔 분견대에 제대로 저항도 못하고 무너지는 무질서는 진짜였다.
그렇다면 다소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상황을 확인해야 한다. 가는 수 밖에.
“콘도티에레! 저희 빈더갈렌이 선봉에서 길을 열겠습니다!”
“하하, 믿음직하네.”
“가자 얘들아! 빈더갈렌이 선봉이다!”
잡목림과 밭둑 너머에서 지빌링엔 용병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모두가 빈더갈렌 중대장 피노트 베레처럼 거한은 아니었지만, 흉흉한 기세로 앞장서서 나아가기 시작한다.
그래도 확실히 믿음직스럽긴 하네.
지빌링엔들이 적이 아니라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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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 콘도티에레! 이겼습니다! 저희가 이겼습니다!”
“만세! 트랑카벨 만세!”
“와아아아아!”
제19 델레망드 연대는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적의 측면을 공격하려는 의도를 접고, 중앙 광장쪽으로 최단거리로 움직였기 때문이다. 주변을 경계하고 있던 제19 연대의 경계병들과 선두 지빌링엔 용병들이 만나며 합류에 성공했다.
“...전투가 꽤 치열했던 것 같군요.”
“말씀대로입니다, 콘도티에레. 하지만 적은 갑자기 뒤돌아 도망쳤습니다! 분명, 이끌고 오신 지원군이 두려웠기 때문일 겁니다.”
내가 알기로 제19 연대장 넬리프 몽타니에는 더 진중한 남자였는데. 하기는 연대장으로서 첫 승리가 감동스럽기는 하겠다.
그의 보고를 들어보니, 상황은 내 생각보다 심각했었다. 적은 우리 방어 계획보다 훨씬, 최소 30퍼센트 이상 빠르게 침입해왔다.
그 와중에도 어떻게든 병력을 수습해 퇴각하고, 무사히 방어선을 만든 것이 다행이다. 분명 지리를 잘 알고 서로간의 유대가 깊은 델레망드 출신들이라 가능했겠지.
그렇게 절체절명의 상황까지 몰렸으나, 적은 갑자기 퇴각해버렸다.
대체 어째서.
아니, 어떻게가 맞겠다.
나는 머리속으로 몇가지 경우의 수··· 를 따져보려 노력했으나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이게··· 우리 지원군이 접근한다고는 해도 방향이나 알지 정확한 위치나 병력은 몰랐을 텐데. 다 이긴 것이나 다름없는 전장을 버리고 썰물 빠지듯 도망친 이유가 대체 뭔지 모르겠다.
내가 적이라고 생각해보자. 가장 무서운 것은 무엇일까?
“넬리프 연대장, 혹시 주변에 적은 없나요?”
“거듭 확인했습니다만, 없습니다! 정말로 전속력으로 북쪽으로 빠져나간 것 같습니다. 낙오병 하나 보지 못했습니다.”
“낙오병이 없어요?”
“네, 한 명도 못봤습니다.”
이게 무슨 소리지. 우리는 여기까지 오는 내내 적 도망병과 싸우면서 왔는데···.
아니 설마? 일부러?
내가 너무 좁은 전황만 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첼레스티나, 분견대들은 어떤 상황이야?”
“네에, 반 정도는 합류했지만 나머지는 소탕전을 하고 있어요, 콘도티에레.”
“합류하라고 전령을 보내줘! 추격전을 해야 할 것 같아.”
“네에? 추격전이요? 알겠어요, 전령 보내고 올게요!”
“그래,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