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175화 (175/556)

24-17. 제2차 아넥시 방어전

“히얏하!”

“겁쟁이들 덤벼 봐!”

가지런히 창날을 앞으로 하고 전진하는 부연대장 악셀 엑스코르쥬가 이끄는 잡탕 부대에 소수의 성전군 기병들이 다가와 도발한다.

주력끼리의 전투를 앞두고 소수 병력이 전초전을 벌이는 것은 흔한 일이다. 본질적으로 주 전투 전에 해도 그만 하지 않아도 그만인 심리전이다.

하지만 당하는 측에서는 자칫하면 도발에 당해 질서가 무너지는 때도 있다. 일부가 대열을 벗어나 추격에 나서는 때도 있고.

무엇보다 최악은 쏘면 안 되는 상황에서 사격 통제를 못 하고 쏴 버리는 경우다. 그런 경우 강력한 보병 사각대형 하나가 순식간의 기병대의 밥으로 잡아먹히기도 하니까.

“거북이 새끼들 집 밖으로 나오지도 못하나!”

“이거나 먹어라!”

탕! 탕!

“으윽!”

운 나쁜 창병이 멀리서 쏜 권총에 맞은 모양이다. 치명상은 아닌지, 잠시 웅크렸다가 다시 일어서 후열로 빠진다. 지나가는 길의 동료가 그의 어깨를 두드려주고, 뒤이어 다음 병사가 빈자리를 채운다.

아무리 영웅도 농부도 공평하게 한 방인 화약의 시대라고 해도 갑주는 중요하다. 특히 잘 만들어진 투구와 흉갑은 멀리서 쏜 총탄에 상당한 방호력을 보여준다.

방금 상처 입은 총병도 후방에서 응급처치하면 전선에 복귀할 것이다.

그렇게, 트랑카벨 군은 도발에 이끌리지 않고 잘 버텨주고 있다. 다소 사상자가 발생해도 질서는 유지되었으며 꾸준히 전진하는 모습이 그 증거이다.

비록 대열의 깊이는 얕은데다가, 창병의 숫자는 얼마 되지도 않는 어수선한 대열이다. 하지만 병사 간의 깊은 신뢰와 자신감이 대열을 강하게 지켜주고 있었다.

처음으로 전투에서 부대 하나를 지휘하는 악셀의 마음이 벅차올랐다. 이거라면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적 기병이 대열을 정돈하고 빠른 속도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시작이다.

“적이 온다!”

“죽어도 대열은 유지한다 자식들아!”

대열의 모서리에 배치된 창병 부사관들의 외침이 전파된다. 이들이야말로 대열의 모서리를 유지하는 숨은 공신들이다. 아마 그들이 없다면, 적의 공격에 조금만 움직여도 대열이 바로 무너져 버릴 것이다.

“제19 델레망드! 적의 돌입에 대비한다!”

“총병 앞으로!”

“대열을 유지해!”

악셀 역시 양손검을 가슴 앞에서 비스듬히 상단으로 겨눈다. 기병의 돌격을 상대하는 자세이다.

물론 무기가 긴 창기병이나, 거리를 두고 권총 사격을 가하는 카라콜 전술 상대로는 효과가 없겠지만. 이번에는 아마도 적은 난전을 통해 돌파하고 싶어할 것이다.

그래야 방어선을 지키는 아군, 트랑카벨 군의 후방을 마음대로 짓밟을 수 있을 테니까. 그러니 적도 시간이 별로 없다. 백병전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온다! 온다!”

“총병은 각자 판단으로 사격하라!”

“말을 노려라!”

두두두두. 말발굽 소리가 빠르게 가까워져 온다. 말에 탄 적병의 모습이 또렷해진다.

성전군 기병은 전력질주를 하지는 않는다. 창병이 이쪽을 향하고 있는데 빠른 속도로 돌입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말의 다리가 땅에서 떨어지지 않는 총총걸음이라도, 인간이 빠르게 뛰는 속도 정도이다. 게다가 위압적인 말의 높이.

제19 델레망드 연대는 이번 전투가 첫 실전이다. 농장과 밭둑을 벌이는 소규모 접전은 경험했으나 기병의 돌격에 대응하는 것은 처음이다.

꽤 많은 병사의 몸이 긴장으로 굳는다. 자기도 모르게 눈이 커지고, 입이 벌려진다. 공포와 부담감으로 신체가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는 것이다.

타타탕! 탕탕!

먼저 창병의 보호를 받으며 장창 사이에 쪼그려 앉아있던 총병들이 먼저 방아쇠를 당긴다. 뒤이어 창병의 측면에 배치된 총병들 역시 총을 쏜다.

하얀 연기와 함께 쏘아져 나간 총탄이 돌진해오는 적 기병 대열에 명중해 전과를 올린다. 몇몇 말이 슬프게 울며 무릎을 꿇고, 기병이 낙마해 질질 끌린다. 작게나마 아군 대열에서 승리의 환성이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충분치 않다.

적 기병은 너무도 많고, 기세는 대단하다. 그 기세를 격돌 전에 늦추려면 압도적인 화력이 필요하다.

전열의 말들을 최대한 많이 죽이거나 패닉상태에 빠뜨려, 물리적으로 돌격을 막는다. 혹은 티가 날 정도로 많은 숫자의 기병들을 참혹하게 말에서 떨궈, 후속하는 동료들의 사기를 꺾는다.

지금은 둘 중 무엇하나도 가능한 상황이 아니다. 화승총이 발사된 거리는 겨우 50미터 정도, 이제는 도망치기도 늦었다.

“으아아아아!”

대열 선두의 누군가가 외친다. 전의가 폭발했기 때문인지, 공포에 이성을 잃었기 때문인지. 어쨌거나 힘찬 외침이 전염되듯 퍼져 나간다.

“우와아아아!”

“트랑카벨! 델레망드으!”

“이야아아아아!”

적 기병의 거리는 30미터. 선두 대열이 잠시 속도를 늦추고 손에 든 것을 겨눈다. 권총이다.

타타탕! 투퉁!

타타타탕!

“으아아! 으윽!”

“크허억!”

총탄의 폭풍이 제19 연대를 훑고 지나간다. 부하들 앞에서 약한 모습은 보이지 않겠다 결심한 부연대장 악셀조차도 눈앞까지 달려온 적병이 권총을 내밀 때는 자신도 모르게 잠깐 눈을 찔끔 감고 말았다.

목검으로 휘두르는 공격을 정면에서 막을 때, 조금이라도 눈을 감으면 아버지께 크게 혼났었다.

그 생각을 하며 다시는 눈을 감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며 눈을 부릅뜬다. 눈앞의 하얀 연기 너머로 총을 치우고 칼을 뽑아드는 적병의 모습이 보인다.

특별한 충격이 없는 것으로 보아, 다행히 맞지는 않은 것 같다. 하지만 주변을 둘러보니 여기저기 선두 대열에 빈자리가 보인다. 어지러이 늘어선 창대 사이로 앞으로 엎어지듯 사망한 부하들도 보인다.

유난히 바닥에 널브러진 창대가 여럿 보인다. 아마 총에 맞아 죽거나 치명상을 입어 창을 놓쳐서 그렇겠지. 그제야 알았다.

악셀의 부대는 애초에 급조된 밀집 대형이라, 창병의 숫자가 별로 많지 않다. 기병의 공격을 완전히 찾아오는 철저한 창벽 따위는 처음부터 기대할 수 없었다.

그래서 적은 창을 가진 보병들을 우선하여 노린 것 같다. 빌어먹을, 악셀은 속으로 욕을 하며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이단들을 쓸어버려라!”

“돌겨억! 돌격!”

칼을 뽑아든 기병들이 돌입해온다. 듬성듬성한 창벽따위, 힘으로 밀어 버린다는 자신감이 충만하다.

“죽어도 버틴다!”

“트랑카벨! 델레망드!”

“델레망드를 지켜라!”

쾅! 콰직!

퍼어억!

돌격의 순간은 서로 전력질주를 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밖에서 보면 너무 느린 것 아냐? 하는 정도인 속보로 돌격해왔다.

하지만 그 와중에서도 인간과 인간이 부딪히는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기 힘들 정도로 요란한 소리가 들린다.

“크아아악!”

비스듬히 접근하며 창날을 쳐낸다고 쳐냈지만, 뒤에서 새롭게 밀어 올려진 창날은 피하지 못했다. 창끝이 말의 가슴 쪽에 길게 베인 상처를 냈고, 고통에 몸부림치던 말이 기수를 떨군다.

“컥! 허어억!”

한편 무기로 견제하는 데 실패해 말에 치인 병사는 그대로 동료를 밀치며 뒤로 날아가 버린다.

아무리 사람이 뛰는 정도의 속도라고 해도 수백 킬로그램은 나가는 말에 부딪힌 것이다. 숨쉬기 어려운 것은 당연하고, 뼈가 부러졌을지도 모른다.

보병으로서 기병을 상대하게 되면, ‘일단 끌어들인 후에 바짝 붙어서 잡으면 되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게 된다. 머릿속으로는 그럴듯한 시뮬레이션도 돌리면서 말이다.

하지만 실제로 기병을 마주하면 그런 생각은 머릿속에서 날아가 버린다. 그리고 괜히 쉽게 생각했던 과거의 자신을 저주하게 된다.

말은 생각보다 크고 무서우며 쉴 새 없이 움직인다. 위에 탄 기병은 은근히 잘 무장되어 때릴 데가 안 보인다. 높은 곳에서 내려치는 공격은 한 발 한 발이 묵직하다.

그나마 그런 기병이 딱 한 명이라면 숫자로 어떻게 밀어보겠지만, 왼쪽도 오른쪽도 뒤에서도 끊임없이 밀고 들어온다는 것이 문제다. 포위는커녕, 당장 안 죽고 버티기에 급급해진다.

악셀 역시 대기병전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래도 그에게는 남다른 체력과 반사신경, 그리고 어린 시절 고문에 가까운 수련을 통해 익힌 검술이 있었다.

콰드득, 하는 살덩이와 철갑옷이 동시에 갈리는 끔찍한 소리와 함께, 검에 묵직한 무게가 느껴진다.

“끄어어어억! 흐에아아악!”

움직이는 기병을 검으로 맞추는 것은 힘든 일이다. 그래서 시도도 하지 않았다. 대신, 상체를 낮추고 다리를 벌린 굳건한 자세로 기다렸다.

자신을 노린 기병이 다가온다. 무기를 한껏 치켜올린다. 마지막 순간까지 기병도의 궤적을 지켜본 후 기병도를 튕겨낸다.

참격을 정면으로 받았다면, 말의 속도와 높은 기수 쪽의 위치에너지가 더해져 자세를 유지할 수 없다. 그러니 비스듬히 칼의 측면으로 튕겨낼 수 있도록 했다.

사아악, 하는 쇠 긁는 소리에 목 뒤의 솜털이 죄다 일어나긴 했지만, 어쨌든 튕겨내는 데 성공한다.

그렇게, 적 기병의 동작이 크게 흐트러진다. 방어를 부수고 치명상을 입히거나, 그렇진 않더라도 자세를 무너뜨리고 뚫고 지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한 적병으로서는 의외의 반응이었기 때문이다.

거기서는 특별한 동작이 필요 없었다. 하체는 다리를 벌려 선 안정적 자세 그대로. 묵직한 칼끝만 적의 상체를 향한다.

흉갑에 툭 하고 부딪친 칼끝이 끼기긱 소리를 내며 매끈한 갑주 표면을 긁고 지나갔다. 그리고 덜컥 소리와 함께 걸린 곳은 겨드랑이를 덮은 사슬 부분이었다.

그 다음은 콰드득, 소리와 함께 허공으로 붕 떠오른 적병의 모습이다. 참혹한 비명과 함께 날아올랐다가 바닥에 떨어진 적병은 오른팔이 어깨에서 거의 잘려 나와 있었다.

“크에엑! 끄으윽! 컥!”

바닥에 널브러져 돼지처럼 비명 지르던 적병의 목을 찔러 숨통을 끊는다. 곧바로 주변을 살핀다. 당장 악셀 자신을 노리고 달려오는 적은 없었다.

대신 주변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다. 역시 기병들을 접근도 하기 전에 밀어내는 것은 어려웠다. 창병이 너무 부족하다.

그래도 밀리지는 않는다. 이번이 첫 전투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트랑카벨 병사들은 사자처럼 용감히 싸운다. 적 기병을 고착시키는 데는 성공했고, 이는 절반의 성공은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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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이 물러난다!”

“적이 물러납니다! 몰아냈습니다!”

“와아아아아!”

한 번 더 살아남았다.

제19 델레망드 연대장, 넬리프 몽타니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닦았다. 땀과 함께 끈적거리는 핏방울이 함께 묻어나왔다.

자신의 피는 아니다. 적의 피도 아니었다. 근처에서 적이 휘두른 철퇴를 맞아 사망한 부하의 피였다.

난리통에 원수를 갚아주지도 못했다. 적은 이를 드러내며 위협하면서 도망치는 동료들 사이로 끼어들었기 때문이다.

적이 물러나긴 한다. 하지만 쉴 수는 없다. 그 이유야···.

“또 옵니다!”

“전부 준비해! 빌어먹을 새끼들, 몇 번을 오는 거야?”

“재장전! 재장전!”

“남는 총 있으면 줘!”

곧바로 다음 대열이 접근하기 때문이다. 명백하게 제파 공격을 취하고 있다. 장소는 좁고 숫자는 많으니 나름 합리적인 전술이다.

“잠깐 방어 준비를 부탁하네. 다른 방어선을 보고 와야겠어.”

“알겠습니다, 연대장님!”

휘하 중대장에게 지휘를 맡기고, 잠시 자리를 벗어난다. 바로 옆에서 피에 젖은 붕대로 팔을 묶은 포병이 포구로 포탄을 밀어 넣느라 애쓰고 있었다.

예비 무기와 부상병을 옮기던 병사들을 지나, 방어선의 우측 끝을 바라본다. 방어선 구속이라고 해야, 100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좁은 밭둑길, 녹색의 미로를 뚫고 몰려온 적 기병들을 부연대장 악셀 엑스코르쥬의 부대가 잘 막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냥 보아도 위태로웠다. 잘 싸우고 있는 것은 오로지 장소가 좁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적이 차지한 영역은 넓어질 것이고, 틈이 생기는 순간 기병들이 쏟아져 들어올 것이다.

연대장 넬리프는 주변을 돌아본다. 여기 적 기병이 수십 기만 들어온다 생각해도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미 예비대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두가 방어선에 달라붙어 있었다.

그런데 그 후방으로 적이 몰려온다면 파멸이다. 조금도 버틸 수 없다.

차라리 혼전 속에 활약을 못하는 대포를 모아 저쪽으로 보내줄까?

아니다, 어차피 저기도 혼전인 것은 마찬가지다. 기병 한가운데 쏠 수 있으면 대박이긴 하겠지만, 괜히 포구 들이민다고 전선 열었다가 적이 먼저 들어오면 망한다.

어떻게든 도와야 하는데··· 이걸 어떻게 한다. 넬리프는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어?”

뭔가가 잘못되었다.

그의 눈에 보이면 안 되는 것이 보이고 있었다.

분명 조금 전까지 아군이 지키고 있던 길목에서 기병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좁은 길이라 아직 소수만이 모습을 드러냈으나, 깃발이나 복장을 보았을 때 저건 분명 적군이다.

분명 제2 중대장이 사망하여 정보 전달 속도가 늦춰진 탓일 것이다.

부연대장의 부대가 위험하다!

“이봐, 포 돌려! 포 돌리라고!”

“여, 연대장님?”

“새로운 적이 나타났다. 후방의 아군을 지원한다!”

“아, 알겠습니다.”

돌아버릴 것 같았다. 지금이라도 악셀의 부대를 포기해야 할까? 그들이 시간을 끌면서 전멸하도록 놔두고, 나머지 연대라도 수습해 새로운 방어선을 건설하는 것이 나을까?

그런다고 연대를 살릴 수는 있을까?

델레망드 삼각주를 지킬 수 있을까?

“빌어먹을, 쫄리면 뒈지는 거지!”

어차피 손바닥만 한 공간이다. 한동안은 버틸 수 있겠지. 자칫하면 자신은 트랑카벨 영지군 창설 이래로, 처음으로 연대를 말아먹은 얼간이 연대장이 된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하지만 부끄러운 짓을 할 수는 없다.

믿고 중책을 맡겨준 아롱드 트랑카벨 영주님에게, 마음 써준 콘도티에레에게, 연대의 부하 장병에게, 자신만 믿고 피난한 고향 사람들에게, 가족들에게, 15연대를 지휘하는 밉살스러운 친구 쥐그에게.

“지금부터 내 지휘에 따라 포격한다!”

“옛, 연대장님!”

무력하게 짐승이 학살당하듯 전멸하지는 않겠다. 넬리프는 머리속에 새로운 방어선을 설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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