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5. 제2차 아넥시 방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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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황이 임명한 성전군 사령관, 라모리 스텐던은 공격전 마지막 보고를 듣는다.
그의 휘하 연대장인 자프론 푸코데모스는 꼿꼿한 차려자세로 주먹 쥔 손의 엄지손가락 부분을 가슴에 부딪친다. 쇠 장갑과 흉갑이 닿아 쇳소리를 낸다. 절도 있는 북방식 경례이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음, 다녀오게.”
자프론은 몸을 돌리고 투구를 쓴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내쉬며 정신적인 예열을 한다. 부하들과 함께 사지가 될지 모르는 장소로 들어가는 것이다.
“자프론 경! 힘내십시오! 힘드시면 언제라도 바꿔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부탁하겠네.”
같은 라모리 휘하 보병 연대장인 기직스 미슈람 알메르타트가 응원일지 조롱일지 모를 말을 한다.
아마 성격이 급하기는 해도 성실한 기직스의 특성상 악의없이 진지한 응원일 것이다. 자프론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서두르자!”
“네, 연대장님!”
부관을 재촉해 서둘러 부하들에게 향한다··· 라고는 하지만 부하들의 후미가 바로 코 앞이다. 전장이 되는 광장이 너무 좁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실 공격은 이미 시작되었다. 워낙 좁아서, 공격을 위해 대열을 짜면 이미 적과의 거리는 총기 사격거리 안쪽이다.
결국 얇은 카드 형태의 횡대로 대열을 짜서 조금씩 투입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후열이 아직 자기 위치를 찾아가는 중이지만, 전열은 이미 바리케이드에 도착해 교전을 시작하고 있었다.
탕! 타탕! 탕!
타타탕! 타당!
양측에서 쏴대는 총탄이 산발적으로 오가고, 세 곳의 지점에 집중적으로 투입된 근접 보병들이 바리케이드를 뚫기 위해 접근하고 있었다.
꽈광!
“으아아아악!”
“커헉!”
많지는 않고 대구경도 아니지만, 적군은 포병을 보유하고 있었다. 때가 되면 쏴대는 산탄이 성전군의 얇은 공격 대열을 찢어 놓는다.
오히려 지금처럼 종심이 깊지 않은 상황이 다행이라고 해야하나, 피해가 크지는 않다. 그래도 몇 명이 피투성이가 되어 포장된 돌바닥 위에 쓰러진다.
하지만 적은 엄폐물이 있고, 아군은 개활지에 노출된 상태. 숫자로 밀어붙이지 못하는 사격전은 힘겨웠다. 그나마 성전군이 할 수 있는 것은 한 줄씩 바꿔가면서 사격하고, 자리를 내 주며 한 걸음씩 나아가는 교대 사격이었다.
혼란스럽고 병력으로 가득한 공간이다. 공간으로만 따지자면 폭은 겨우 50여 미터, 너비로는 150미터 정도의 공간에 1천 명에 가까운 병력이 꽉꽉 들어차 있는 상황이다.
언듯 사람으로 가득해서 멱살잡이하며 죽네사네 하는 힘싸움이 벌어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상황이기에 전방 지휘관인 연대장은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했다.
자프론이 평생을 따라온 총대장, 라모리 스텐던이 자신을 이 시점에 전방 지휘를 맡긴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젊고 과감한 기직스는 여기까지의 공세를 지휘하며 잘 싸워줬다. 이제는 그동안 큰 전투를 피하며 뒤따라온 자프론의 연대가 노련함을 보여줄 차례였다.
“4중대가 공격 위치에 도착했습니다!”
“공격 개시! 3중대를 측면에서 지원한다.
“알겠습니다!”
“사격전이 길어질 것 같다. 화약을 충분히 공급하도록.”
“넵, 대장님!”
중앙 광장으로 통하는 길은 하나같이 공격을 기다리는 병력과 장비로 꽉꽉 들어차 있다. 자프론은 이걸 파악하고 있다가 제때 병력을 공격, 후퇴시키며 적 방어선을 돌파할 임무가 있다.
주변에서 열심히 도끼질하며 공간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노력은 해도 없는 공간을 만들어 낼 수는 없었다.
밭둑을 덮고 자란 잡목들이야 어떻게 걷어낸다고 치자. 하지만 그 밑에서 수백 년 간 차근차근 쌓여온 밭둑 자체는 성벽처럼 단단해서 부수기가 쉽지 않았다.
아주 오랜 시간동안 조금씩 쌓여온 잡석 더미가 기묘할 정도로 효율적으로 짜맞춰 져 서로 지탱하고 있었고, 거기 자리 잡은 잡목의 뿌리가 얽히면서 굳히기에 들어간다. 마치 세상이 시작될 때부터 하나였던 느낌이다.
며칠 전에 공병대에서 공성용 지근거리 폭뢰인 페타드라도 터뜨려 보자고 했지만, 괜히 비싼 화약 무기만 날렸다. 표면만 조금 걷어냈을 뿐, 오랜 세월 굳어진 안쪽은 전혀 상처가 없었다.
땅을 파고 들어가 붕괴시키자는 의견도 각하. 표층의 흙을 걷어내자, 아란 제국 시절부터 꾹꾹 눌려 굳어진 지층이 모습을 드러냈다. 돌처럼 단단해서 도저히 파낼 수가 없었다.
결국 나무와 풀을 제거해 시야만 조금 더 확보했을 뿐이다. 밭둑 자체를 없앨 수는 없어서 진격로가 제한된 것은 여전했다.
골목에 골목이 이어지는 괴상한 지형에서의 전투는 격화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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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익, 딱! 피잉! 핑!
파팍! 팍!
트랑카벨 영지군, 제19 델레망드 연대가 배치된 바리케이드에는 쉴 새 없이 총알이 날아온다. 총알이 튕기거나 박히는 소리가 귀가 아프도록 끊이질 않는다.
“으으윽!”
바리케이드 너머로 상체를 내밀고 총을 조준하던 병사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쓰러진다.
어깨 바로 아래쪽에 총을 맞았다. 마치 쪼개진 것처럼 철제 흉갑이 갈라지고, 심장에 가까운 혈관을 다쳐 피가 울컥울컥 쏟아져 나온다. 치명상이다.
“적 화력이 엄청나군···.”
“연대장님도 좀 뒤로 빠지십쇼!”
“여기서 어디로 빠지겠나! 전장 보려면 여기 있어야 해.”
제19 연대장 넬리프는 총구를 쑤시는 손을 멈추지 않으면서 부관에게 말했다. 폭 100미터, 너비 150미터의 손바닥만 한 전장이다. 전장 끝에서 끝을 저격할 판인데 ‘후방’이라니, 아이러니한 말이다.
당장 바리케이드 전면에 있는 적군만 해도, 아군의 2배는 충분히 되어 보인다. 저 후방에서 꾸역꾸역 밀려 나오며 대기하고 있는 숫자를 합치면 서너 배는 될 것이다.
그런데 제19 연대는 그나마 열세인 병력도 여기 집결하지 못했다. 아무리 여기가 중요한 거점이라고는 해도 다른 미로 역시 지켜야 했기 때문이다.
그냥 내버려뒀다가 적이 통과해서 반대편으로 나오기라도 한다면 그게 더 큰 일이다.
많은 병력은 많은 화력을 의미한다. 좁은 전장을 이용해 어떻게든 접적 면적을 줄여가면서 싸우고는 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계속해서 로테이션으로 전열을 교체해가며 사격을 유지할 수 있는 적군의 화력이 압도적인 것은 당연했다.
이쪽에서 한 발 쏘는 동안, 적은 3~5발은 쏜다. 아무리 바리케이드가 있다지만 장전부터 사격하는 동안 상체를 드러내야 하는 이상 사상자는 꾸준히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연대장인 넬리프가 총을 든 이유도, 사상자가 속출해 비는 총이 생겼기 때문이다.
“장전 완료!”
건너편에서 포를 지휘하던 포술장이 외친다.
“자, 하나둘 하면 치우고 쏜다!”
“옛!”
“하나, 둘, 치워!”
둘까지 외친 순간, 바리케이드 사이를 가리고 있던 두꺼운 나무판자가 미닫이문 열리듯 빠져나간다. 포수들이 후방에 대기하던 야포를 밀어 올린다.
굴러가던 포가의 바퀴가 미리 받쳐놓은 흔들림 방지 턱에 딱 맞는다.
“발사!”
뻐엉!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포구가 갑자기 불을 뿜자, 저 앞의 적병들이 몸을 수그린다. 하지만 이번에는 산탄이 아니다. 평범한 한 발의 구형 포탄이 허공을 가르고 날아간다.
앞에서 움찔거린 적병 사이로 날아간 뜨겁게 달궈진 쇠 구슬은 살짝 허공을 치솟나 싶더니, 후방 입구 쪽에서 진입을 준비하던 적 예비대 한가운데로 떨어진다.
“끼아아악!”
“컥, 뭐야!”
정말 재수도 없이, 밀집하고 있던 보병들이 그대로 쓸려나간다. 갑작스럽게 터져 나오는 아우성에 비명이 여기까지 들린다. 거리가 100미터도 안되기 때문이다.
핑! 파캉!
“으윽!”
“문 닫아! 문 닫아!”
“앗, 아 제기랄! 너 맞았냐?”
“으으으으···.”
하지만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사격의 반동으로 포가가 뒤로 밀려나고 방어용 판자가 원위치로 돌아오기 전에 적의 사격이 집중된 것이다.
“이런! 포술장! 괜찮나?”
놀란 넬리프가 묻는다. 포는 방어선 전체에 3문밖에 없다. 수적으로 열세인 아군에게 아주 중요한 화력이었다.
“으으, 한 명이 당했습니다! 자네는 괜찮아?”
“저는 스쳤습니다··· 으윽, 따갑지만 괜찮습니다.”
“가만있어 봐. 내가 붕대 감아 줄게.”
사망한 동료의 시체를 뒤로 옮기고 부상을 치료하는 한편, 다시 포구를 통해 다음 탄환을 장전한다. 그 모습이 참으로 기특하고 믿음직스럽다. 하지만 안타깝기도 했다.
원래라면 비교적 안전한 위치에서, 보호받으며 사격을 해야 할 포병들이다. 하지만 전장이 워낙 좁다 보니 그런 것도 불가능하다. 포수들의 안전 문제가 아니라 화력 유지의 문제니까.
“창병이 온다!”
“창병이 옵니다!”
“드디어 오는군. 제19 델레망드! 백병전 준비잇!”
화력으로 압도한다 생각했기 때문일까. 전방에서 화력을 퍼붓던 적 총병대 일부가 후방으로 빠지더니 창병들이 나온다. 정확히는, 창을 들고 대열을 맞춘 병력 일부에 짧은 백병전 무기를 갖춘 병력이 섞여 있다.
대열을 억지로 돌파하기 위한 돌격대이다.
장소가 넓다면 창병 대결에서는 병력 숫자가 훨씬 정직하게 적용된다. 다만 현재 공간이 좁아서 숫적 우위를 살리기 어려우니까, 변칙적인 전술을 쓰는 모양이다.
물론 백병전 병력이 투입됐다고 화력이 줄어든 것은 아니다. 전면에 배치된 총병의 숫자가 줄었을 뿐, 퇴각한 총병들은 거대한 로테이션 행렬의 뒤로 옮긴 모양이다.
5명이 번갈아가며 사격하던 교대 사격 대열이 8명으로 늘어났다면, 그만큼 단위 면적당 화력은 높아진다는 이야기니까, 화력 압박도 더 커질 것이다.
“창벽 싸움에서 지면 바리케이드에서 밀려난다! 죽어도 밀리면 안 돼!”
“예, 대장님!”
일부 백병전 보조 병력 말고는 후방에 배치되어 있던 제19 연대 소속의 창병들도 얕지만 촘촘한 대열을 이루고 앞으로 나온다.
수그린 자세로 총격전을 벌이는 총병들의 머리 위로 길고 긴 장창이 가지런히 나온다.
만약에 창병 싸움에서 밀려서, 적의 장창이 이쪽 바리케이드 너머로 넘어오게 된다면 총병들은 사격 위치에서 밀려난다.
그러면 적이 바리케이드에 의지해 사격하고, 아군은 오히려 거기서 밀려나 무방비로 학살당하는 최악의 상황이 된다. 그것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죽을 각오로 버텨야 한다.
“온다! 온다!”
“발사!”
타타타탕! 타탕!
타타탕! 피잉!
창병 충돌 직전, 마지막 지원이라는 듯 적의 일제사격이 쏟아진다. 트랑카벨 군 총병들도 물러서지 않고 결사적인 반격을 이어간다.
양측 모두 적지 않은 숫자의 병사들이 비명과 함께 쓰러진다. 그러나 어느 쪽도 물러서지 않는다. 성전군은 베테랑의 침착함으로. 트랑카벨 군은 방어자의 절박함으로.
“온다아! 바짝 붙어!”
“으아아아아!”
“흐야아압! 물러서지 마!”
따다닥! 창병 대열의 충돌 순간, 수 백 개의 단단하지만, 탄력 있는 창대가 서로 부딪치는 소리는 상상 이상으로 시끄럽다. 마지막 사격을 마치고 몸을 낮춘 총병이 놀랄 정도로 요란한 소리가 바리케이드 위로 울린다.
“어어, 저 새끼들 옆으로 빠져나온다!”
“막아!”
막 충돌한 창병 대열의 옆으로 짧은 무기로 무장한 성전군 보병들이 바리케이드를 넘으려 한다. 사나운 기세로 바리케이드를 타고 넘는 적병들이 아직 준비가 안 된 트랑카벨 총병들을 노렸다.
“히, 히이익!”
“죽어!”
막 바리케이드를 타고 넘은 적병이 검을 휘둘렀다. 백병전에 대비를 못 한 총병이 공포에 질려 머리를 숙이자, 다행히도 휘둘러진 검이 단단한 투구에 명중한다. 쇠가 부딪히는 소리를 내며 튕겨 나온다.
“죽긴 뭘 죽어!”
“으윽!”
튕겨나온 무기의 기세에 허우적대던 적병의 옆구리를 넬리프의 검이 찔렀다. 그 상대는 상처를 움켜쥐며 쓰러졌지만 다른 적이 계속 넘어온다.
다행히 시간 맞춰 달려온 예비 창병들이 짧게 잡은 창을 찔러 바리케이드를 넘으려는 적을 막아낸다. 그 틈에 장전을 마친 총병들이 사격, 다섯 놈쯤 쓰러뜨리자 적의 기세가 줄어든다.
바로 옆에서는 창병들이 상대 창벽을 부수기 위해 부딪히고 있었고, 여기서는 별로 높지도 않은 바리케이드 안팎에서 치열한 백병전이 계속되고 있었다.
바리케이드를 아예 못 넘어오게 하는 게 좋았지만, 그럴 정도로 완전히 벽을 쌓기에는 아군은 너무 적고, 적군은 너무 많았다. 게다가 바리케이드도 너무 낮다.
“일어나라! 자네도 제19 델레망드가 아닌가?”
“죄, 죄송합니다 연대장님!”
넬리프가 방금 공포에 질려 굳어버렸던 병사의 팔을 잡아 일으켜준다. 아직 어려 보이는 병사다.
“죄송할 건 없고, 이제부터 여기서 함께 싸워보자. 믿고 맡겨도 되겠나?”
“옛, 연대장님!”
“좋아, 여기 딱 붙어 있어라! 재장전!”
“알겠습니다!”
백병전의 혼란에서 잠시 벗어난 넬리프는 주변을 돌아보며 지휘할 병력이 있는지 찾아보았다.
다행히 근처에는 압도적으로 밀리는 곳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백병전은 트랑카벨 군이 이기고 있었다.
그 한가운데, 제19 연대의 부연대장인 악셀 엑스코르쥬의 양손 검술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