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4. 제2차 아넥시 방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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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랑카벨 영지군 소속의 총병 하나가 밭둑에 기대 총을 겨누고 있었다. 그가 외쳤다.
“서둘러! 빨리!”
그 뒤로 한 무리의 병사들이 밭둑 사이의 좁은 길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오랫동안 전투에서 싸웠기에, 하나같이 탄매와 흙먼지에 절어 지저분한 몰골이 된 병사들은 다급해 보인다.
병사들의 무리는 총 다섯 명이다. 그 중 한 명은 부상인지 절뚝거리고 있었으며, 두 명은 그를 부축한다. 나머지 두 명은 천천히 걸으면서 총을 재장전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장전이 익숙하지 않기 때문인지, 급해서 마음처럼 잘 안 되기 때문인지 장전이 잘 안 되는 모양이다.
“시발 온다! 서둘러!”
맨 뒤에 기대서 좁은 길 끝을 보고 있던 병사가 외친다. 길모퉁이에서 적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적 역시 그를 발견하고 무기를 치켜들며 뭐라 외친다.
“겁쟁이들 덤벼라!”
“닥치고 이거나 처먹어라!”
타앙! 하얀 연기와 화염이 뿜어져 나오며 총알이 발사된다. 워낙 좁은 골목 길이라 순식간에 하얀 연기가 가득 차서 맞았는지 확인은 안 된다.
총병은 방아쇠를 당기자마자 절뚝거리며 퇴각하는 동료를 따라 움직였다. 영리한 선택이었다. 방금까지 그가 서 있던 자리에 퍽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총탄이 날아와 박혔기 때문이다.
이제 정말 위험했다. 상처를 입은 병사도 안간힘을 다해 움직인다. 이제 모퉁이 하나만, 모퉁이 하나만 돌면 된다.
“이 새끼들 잡아!”
“어디냐!”
뒤에서 추격병들이 외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정말 간발의 차이다. 걸으면서 장전하던 병사가 이제서야 장전을 마쳤는지 총을 가슴 높이로 들고 힐끔힐끔 뒤를 돌아본다.
“저기다! 잡아 이 새끼··· 으윽!”
타앙! 날카로운 기병도를 든 적병이 모습을 드러내자 망설이지 않고 방아쇠를 당긴다. 상체가 휙 하고 뒤로 꺾인 적병이 쓰러진다.
이제 아마 다시 장전할 기회는 없겠지. 마지막 사격을 마친 총병은 도망치는 동료와 합류한다.
“조금만 더!”
“으, 시발, 다 왔다!”
초조해진다.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된다.
그들은 모퉁이에서 마지막까지 지연전을 하던 병사들이다. 하지만 한 명이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예상보다 늦어버렸다.
“으윽!”
뒤에서 고함소리와 함께 총소리가 난다. 맞은 것은 아니지만, 자신도 모르게 어깨가 움찔거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적도 알고 쏘는 건지, 모르고 쏘는 건지.
그래도 요행히, 간발의 차이로 추격을 떨쳐내고 목표 지점에 도착할 수 있었다.
좁은 길이 갑자기 확 하고 넓어진다. 군화가 오랜 세월 사람과 가축이 다녀 단단히 다져진 흙바닥 대신, 납작한 돌로 포장된 돌 바닥을 딛는다.
계속되던 밭둑과 잡목림이 사라지고 꽤 넓은 공간이 나타난다.
“비켜! 옆으로 비켜!”
외치는 소리에, 도망치던 병사들이 재빠르게 좌우로 흩어진다. 10초쯤 지났을까, 그 뒤를 따라 나타난 성전군의 추격자들은···.
타탕! 탕!
“으윽! 악!”
“후퇴해! 후퇴!”
기다리고 있던 병사 몇 명의 사격에 쫓겨난다. 어차피 위협사격, 거리도 멀고 기를 쓰고 맞추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죽은 자는 없다.
“모두 고생했다! 부상한 동료를 버리지 않았군! 그래야 제19 델레망드지!”
“여, 연대장님···.”
“잠깐 바리케이드 좀 열어줘. 저 친구들도 들어와야지.”
제19 델레망드 보병 연대장, 넬리프 몽타니에가 나서서 무사히 도주한 병사들이 방어선 안쪽으로 넘어올 수 있도록 돕는다.
그렇다, 방어선이다.
아무리 후퇴를 통해 공간을 주고 시간을 번다고 해도, 절대로 내줄 수 없는 곳이 있게 마련이다. 그게 바로 이 장소. 델레망드 삼각주 한가운데에 있는 넓은 공간이다.
대략 남북으로 100여 미터, 동서로 150미터 정도 되는 둥그스름한 작은 공간. 이 공간이 원래 무엇이었는지는 아마 아무도 모를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것도 남은 게 없다는 것이다.
지금은 여기저기 틈을 비집고 웃자란 잡초와 판석을 뚫고 뿌리를 내린 나무 때문에 허술해지기는 했지만. 이 정도 너비의 땅을 평평하게 고르고, 넓적한 돌을 빈틈없이 깔아 포장하는 것은 보통 노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게다가 그 위로, 아름드리 거대한 기둥의 잔해가 못해도 십 수개는 굴러다니고 있다. 지금은 온통 깨지고 바스러져 흔적만 남아있긴 하지만. 주춧돌의 흔적을 보자면 당시에는 수십 개의 장대한 기둥이 빽빽하게 늘어선 압도적인 공간이었으리라.
어쩌면 늘어선 기둥을 지그시 누르는 아름다운 지붕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전체적으로 평평한 델레망드 삼각주 어디에서나 보이는 장려한 건축물이었겠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오랜 세월 비바람에 시달려 흔적밖에 남지 않은 데다가, 옮길 수 있는 석재는 모조리 옮겨 건물 짓는 데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정확히 언제, 누가, 어떤 목적으로 만들었는지 모를 고대 아란 제국의 폐허이다. 아마 언제인지도 모를 까마득한 옛날에는 이 장소가 델레망드 삼각주의 중심지였는지도 모른다.
“여긴 대체 뭐 하는 곳이지?”
“응? 여기 곡물 창고잖아. 가을에는 와 보지 않았냐?”
“아니 그게 아니라··· 과거에 어떤 곳이었나 궁금해서.”
“글쎄··· 아무튼 대단한 분들이 사는 곳이겠지. 우리 집 벽난로 쌓은 돌도 여기서 가져온 돌이라던데.”
나무와 돌을 적절히 쌓은 바리케이드 뒤편에서 병사들이 대화를 나누었다. 제19 델레망드 연대의 약 반수가 이 광장과 그 주변 지역에 방어선을 건설해놓고 있었다.
원래 이 자리에는 추수철이 되면 항상 가득 차지만 지금은 비어있는 목재 창고가 서 있었다. 그리고 모두 병사들의 손에 고스란히 해체되어 바리케이드 재료로 사용되었다.
쓰러진 고대의 아름드리 기둥의 잔해를 이용하다 보니 약간 복잡한 선을 가지게 된 방어선은 아주 단단해 보인다.
연대가 보유한 4문의 야포 중, 3문이 조심스럽게 만들어진 포좌에 알뜰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나머지 한 문은 너무 멀리 배치되어서 광장의 전투에는 참여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광장은 눈감고 마구 뜯어낸 빵조각처럼, 불규칙게 중첩된 삼각주 특유의 농장들 한 가운데 위치한다. 게다가 모두 일곱 개의 농장 샛길이 모이는 교통의 요지이다.
지금까지의 전투에서 제19 델레망드 연대가 우위를 점했던 이유는 이 광장을 통해 전령들이 오갔다는 점이 크다. 아무리 길에 익숙하다고는 해도, 녹색의 미로를 달려야 하는 전령은 불안하다.
그런 상황에서 어디까지만 가면 반드시 지휘부를 만날 수 있다는 확신은 중요하다. 전방 지휘관들과 전령들의 심적 부담을 줄여주고, 실제로도 정보 전달 안정성을 높인다.
'평소에 교통의 요지는, 전시에는 정보 전달의 요지입니다. 여기만 꽉 붙잡고 있어도 적의 눈과 귀는 절반은 가려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점을 정확하게 파악한 콘도티에레의 지시가 있었다. 그 이후 제19 델레망드 연대는 이 중앙 광장을 중심으로 방사형으로 펼쳐진 방어선을 켜켜이 쌓아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켜켜이 쌓인 방어선을 적은 계속 뚫고 들어왔다. 상당한 피를 흘리고, 병사들의 체력을 지불하면서, 끈덕진 교차 공격으로 밀고 들어온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물러설 수 없다.
지금까지는 제19 연대의 병사들이 피를 흘리는 대신, 금쪽같은 델레망드의 영토를 내주며 버텨 왔다.
"제19 델레망드! 이제 우리가 피를 흘릴 차례다!"
"예엡!"
"아, 지금까지 촌구석에서 편하고 좋았는데 말이야! 나쁜 놈들, 여기까지 쳐들어오는구나!"
"하하하하하하!"
부하들에게 농담을 한 연대장 넬리프 몽타니에는 바리케이드에 올라 적이 다가오고 있는 방향을 바라본다. 아직 적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 '기운'은 느껴진다.
거대한 군대가 풍기는 기세.
제19 델레망드 연대를 쓰러뜨리고, 델레망드 삼각주를 짓밟은 다음 트랑카벨의 영토로 향하겠다는 더러운 욕망이 느껴진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있다. 적은 넬리프와 부하들을 쓰러뜨리기 전에는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하리라.
"지원군은 오고 있겠죠?"
"온다! 온다고 했으니 반드시 온다! 트랑카벨이 약속을 어기는 것을 본 적 있나?"
"그게... 아직 약속을 해 본 적이 없어서...."
"이런 불경한 놈! 트랑카벨 가문이 네 친구냐?"
"파하하하하하!"
연대장과 중대장의 만담에 병사들이 배를 잡고 웃는다. 대부분 같은 동네 출신, 멀어도 남쪽 강변 사람들이다.
칼 같이 날 선 군기나 상명하복은 없다. 그러나 오랫동안 함께해온 인연, 끈끈하다 못해 질척질척한 동향 사람 끼리의 무언가는 있다. 당장 연대장인 넬리프가 어릴 때 농장과 농장 사이를 뛰어다니면서 함께 놀았던 친구들이 장교와 병사로 복무 중이니까.
문득, 옛 친구가 보냈던 편지가 생각난다. 쥐그 드 푸로니. 그는 제15 델레망드 보병 연대의 연대장이다. 신생 트랑카벨 영지군에서 최초로 편성된 4개 연대 중 하나였기에 자부심이 대단했다. 가끔 놀리듯 편지를 써서 보내곤 했다.
넬리프는 삼각주에 세력을 가진 지주의 아들이었고, 쥐그는 델레망드 자작령을 총괄하는 재무관의 아들이다. 즉 세금을 내는 쪽과 걷어가는 쪽이다. 당연히 사이가 좋을 리는 없었지만, 세금 내러 자주 오가다 보니 어느새 친구가 되어 있었다.
'콘도티에레의 지휘를 받을 기회가 온다면 머리 비우고 그분의 지시를 따르게. 그게 이기는 길이네. 그냥 따르다 보면 어느새 전투가 이겨져 있단 말이네. 승리가 복사가 된다고. 행여나 쓸 곳 없는 생각을 해서 콘도티에레의 승리를 방해하는 없도록 하게나.'
최근 살아가는 이야기를 하던 친구는 항상 그렇듯 얄미운 소리를 하며 편지를 끝냈다.
'내가 자네보다는 조금 똑똑한 정도라 생각했네만, 격이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 내가 얼마나 무지했나를 깨닫게 되네. 자네나 나는 저 물웅덩이에 사는 물벌레나 다름없더란 말일세. 내가 물방개라면 자네는 소금쟁이쯤 되겠지.'
대체 무슨 의도인지 상상도 안가는 비유지만, 읽다 보니 왠지 화딱지가 났다. 물방개와 소금쟁이 중 어느 쪽이 더 나은 것인지? 이따위 것에 진지하게 고민한 자신에게 짜증이 날 지경이다.
'아무튼, 반드시 이겨서 건강하게 살아 돌아오시게나.'
그래야지. 이기고, 건강하게 살아 돌아가는 것은 당연하고. 전공을 세워 훈장인지 뭔지를 받아서 옛 친구의 코를 납작하게 해 줘야겠다.
"연대장님. 적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주력인가?"
"그런 것... 같습니다."
중대장의 말대로였다. 끝없이 이어지는 무기와 깃발의 대열이 좁은 입구에서 나오고 있었다.
"전투 준비! 한번 해 보자고!"
지금까지 느슨했던 방어선에 칼날처럼 날카로운 긴장의 선이 그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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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델레망드 삼각주에 간다네
화약 향기 가득한 강변을 거슬러 지나며!
벨모제를 지나 델레망드로 가는 길
붕대 가득한 바구니를 든 성녀님을 찾을 수 있어요!
나는 델레망드 삼각주에 간다네
깨끗한 천으로 지은 새 옷으로 무기를 들고!
벨모제를 지나 델레망드로 가는 길
금발에 파란 눈 어여쁜 성녀님을 찾을 수 있어요!
선봉에서 피 흘리는 흑곰의 군기를 펄럭이며 나아가는 지빌링엔 용병들이 힘차게 군가를 부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가사가 은근슬쩍 바뀌어 있었다. 음... 성녀라면 역시 아쥬흐를 말하는 거겠지?
트랑카벨 성녀 전설은 어느새 지빌링엔 신입들에게도 파고든 모양이다. 아니 사실, 원래 이런 소문은 잘 모르는 신참들에게 잘 먹히긴 하지. 전장에 나가는 와중에 뭐 하나라도 기원할 상대가 있는 것은 좋은 일이기도 하고.
쑥스러워하면서도 정색하지 않는 것은 아쥬흐의 훌륭한 점이다. 암, 이게 성녀지.
"잠시 조용! 조용!"
멀리 앞장서고 있던 정찰병 소대에서 한 명이 달려오며 양팔을 흔든다. 힘차게 부르던 지빌링엔 민요'군가 2차 변형'이 뚝 끊긴다.
"전방에서 포성이 들립니다! 전투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아, 나도 들린다."
음, 그렇네. 멀리서 쿠웅, 쿠웅 하고 울리는 포성이 분명하게 들리고 있었다.
"콘도티에레! 행군 속도를 올릴까요?"
신생 '피 흘리는 흑곰' 연대장 에르만 슈피리가 달려와 내게 묻는다. 그 옆에는 언제나 그의 곁을 따라다니는 친동생 종자, 스테펜 슈피리가 함께한다.
"아직은 지금 속도를 유지합니다. 행군로는 미리 계획된 방향을 유지하고요."
"알겠습니다, 콘도티에레!"
"첼레스티나, 우리는 잠시 지형을 살피러 가자."
"네에, 콘도티에레!"
분위기도 좋고, 접근하는 방향도 좋다. 적은 우리가 접근하는 것을 알고 있을까? 설령 알더라도, 대응하기 전에 선공을 날릴 수 있다면 더 좋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