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3. 제2차 아넥시 방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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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적의 공세가 강해졌다. 이제 전령이 도착해도 마음 편하게 승전보고를 기대하던 시간은 지나 버렸다.
벌써 몇 번의 피해 보고, 거점 상실 보고가 도착했다. 제19 델레망드 보병 연대의 넬리프 몽타니에는 긴장하며 이마의 땀을 닦았다. 제발 부하들이 자신의 초조함을 몰랐으면 싶었다.
“어쩔 수 없지! 안전하게 물러났으면 됐다. 다음 방어선에서 적을 맞이하자.”
“예, 연대장님!”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지고 둘째 날부터, 적의 움직임은 확연하게 변했다. 당황스러울 정도로 상대하기가 어려워졌다.
적은 여전히 녹색 미로 안에 있다. 그러나 미로 속에서 방향을 찾아내고 목적성을 가진 채 움직인다는 느낌이다.
연대장 넬리프는 멀리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본다. 적이 불을 놓은 흔적이다. 적이 새로운 돌파구 개척을 위해 불을 지른 것이다.
다소 건조한 여름이라지만, 생나무로 엮인 울타리가 쉽게 불에 타지는 않는다. 어지간히 거대한 들불이 아닌 이상 생목 울타리가 한꺼번에 타버리는 일 따위는 없다.
이건 일부러 화약이나 기름을 뿌려 불을 피웠거나, 농경지 사이에 드문드문 자리잡은 농가 건물을 불태운 것이 분명하다. 연기 색이 시커먼 것으로 보아 기름을 부어 불을 지른 것 같다.
단순히 홧김에, 혹은 약탈과 파괴 목적으로 불을 지른 것은 아니다. 콘도티에레가 분명하게 설명을 해 줬었다.
‘적이 불을 지르면 조심해야 합니다. 단순히 홧김에 질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크게 상관이 없지만···.’
콘도티에레는 잠시 고민하는 것 같았다. 실제로 그런 경우가 있을지, 여기까지 대비할 필요가 있나 생각하는 것 같았다.
‘방어에 나선 우리 군이 가진 최고의 장점은 지형을 잘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적은 깊이 들어올수록 전방 부대들이 서로의 위치도 알 수 없겠지요. 후방에 있는 사령부와의 연락도 갈수록 어려워질 것이 분명합니다.’
바로 얼마 전까지는 분명히 그랬다! 적의 움직임은 일차원적이었으며,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파 놓은 함정에 그대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정직하기 짝이 없는 움직임. 어차피 이 지역이 고향인 델레망드 사나이들이게 적의 우회로 탐색은 끝이 훤히 보이는 꼼수나 다름없었다. 적이 올 수밖에 없는 위치에 새롭게 매복을 하고 기다릴 뿐이다.
‘적이 불을 지른 이유가 따로 있다면 조심해야 합니다. 높이 피어오른 연기는 아주 멀리서도 보입니다. 그걸 통해서, 전방의 적군은 자신의 상대 위치를 알 수 있습니다. 마치 항해 중인 배에서, 항상 같은 장소에서 불을 밝히는 등대를 통해 자신의 위치를 아는 것처럼요.’
그 말을 들은 넬리프와 연대 참모들은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연기를 그런 방식으로 쓸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지리를 잘 아는 현지인의 맹점이었다.
어차피 길을 트기 위해 불을 질러 봐야, 생나무는 잘 옮겨붙지 않는다. 나무가 바짝 마른 늦가을이면 몰라도 말이다. 그러니 크게 신경은 쓰지 않아도 된다. 딱 그 정도가 넬리프가 생각할 수 있었던 영역의 한계였다.
‘그리고 진격한 적의 전방 부대가 새로운 불을 놓는다면, 이번에는 지휘부에서 전방 부대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게 되겠지요. 그럼 전령 도착의 딜레이에 의한 손해가 많이 상쇄됩니다.’
방금 전방 부대 쪽에서 작은 연기의 기둥, 아니 봉화가 또 올라왔다. 이건 분명했다. 적은 일부러 전진하는 와중에 땔감을 쌓아 놓고 불을 지르고 있었다. 자신들의 지휘부와 동료 부대에 위치를 알리기 위해서.
‘그럼 지금까지와 달리 적이 유기적으로 움직인다 생각해야 합니다. 그럼 더는 미로에 빠져서 눈 감고 싸우는 어설픈 적이 아니게 됩니다. 주의해야 해요.’
빌어먹을, 정확히 콘도티에레의 그 말대로였다.
어느 순간부터, 적의 움직임이 확실하게 바뀌었다. 어느 시점까지 전진할지, 어느 시점에 적대적인 지형을 바꾸고 새로운 길을 개척할지 아는 것 같았다.
그러는 한편 공격할 때는, 적극적으로 병력을 몰아넣어 확실하게 방어선을 부수고 몰아내려 했다. 막기 어려운, 확신을 한 움직임이다.
그 바람에 ‘조건부’로 완전했던 방어선이 무너져 내렸다. 여러 견고한 방어 진지의 측면이 노출되는 바람에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직 심각하지는 않았으나 피해도 점점 누적되고 있었다. 적의 숫자는 못해도 제19 델레망드 보병 연대의 세 배는 되어 보인다. 무작정 힘 싸움을 해서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그럼 아마도, 전장을 입체적으로 볼 수 있는 자가 적장이라는 것입니다.’
이미 놀랄 대로 놀란 넬리프의 표정을 보자, 콘도티에레는 다시 입을 다물고 고민에 들어갔다. 아마도 ‘이 원숭이 이하의 멍청이들을 어떻게 하면 알아듣게 할 수 있을까’ 정도의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연대장으로서 부끄러웠다.
‘대부분의 인간은 지형지물에 가려지면 반대편 장소를 보지 못합니다. 그거야 당연하죠. 하지만 지휘관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병력도 지휘해야 합니다.’
콘도티에레는 넬리프와 연대 참모들을 앞에 두고 차분하게 전술론 강의를 시작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반대편 장소와 병력의 움직임을 추측하려고 노력합니다. 보통은 전투 지역의 지도, 그리고 지휘관의 직관과 경험에 의존해 극복할 뿐입니다. 하지만 그게··· 보이는 인간들이 있습니다. 그렇게밖에 표현을 할 수가 없어요.’
지형지물에 가려 보이지 않는 반대편이 보이다니··· 설마 천리안 계통의 기프트인가.
‘물론 기프트는 아닙니다.’
아니었다.
‘그저 표현이 그렇다는 겁니다. 하지만 정말로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입체적으로 지휘하는 지휘관들이 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싸움은 조금 힘들어 질 겁니다.’
거기서부터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적이 명백하게 전투 방식을 바꿨는데, 이쪽은 싸우던 대로 전투 방식을 유지한다면 파멸한다. 이쪽도 대응해야 한다.
적이 측면을 공격하면 즉각적으로 반응한다. 무리해서 자리를 고수하지 말고 짧은 전투에서 이득만 보고 빠진다. 지형에 익숙하지 않은 적은 매복이 두려워 무리하게 추격하지는 않을 것이다.
두 차례에 걸친 강변에서의 전투에서, 제19 연대는 확실하게 승리했다. 넬리프 연대장 역시 그런 싸움은 나름의 자신이 있었다. 밭둑길을 지키는 싸움도 잘 해오고 있었다.
불리한 싸움을 무리해서 지속하지 않는다. 즉, 공간을 주고 시간을 버는 싸움을 해야 한다.
물론 고향 땅을 지키는 군인으로서, 적이 함부로 고향을 마구 짓밟도록 하는 것은 심리적 거부감이 심했다. 넬리프 자신의 농장들은 내륙 쪽에 있다지만, 지금 적에게 파괴당한 농장이 집인 병사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델레망드의 농장이라는 공간을 내어 준 대신 병력이 남는다. 소중한 휘하 병력, 델레망드 사나이들을 무사히 살려 후퇴할 수 있다. 그리고 살아남은 델레망드 사나이들은 새로운 방어선을 준비한다.
물론 무례한 손님에게서 통행료를 받아내는 것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농장 하나, 밭둑 잡목림 하나, 골목길 하나, 개울 하나가 전부 적의 피를 받아내는 요금소이다. 소중한 고향 땅이다. 무엇하나 공짜로 넘겨주지는 않는다.
다행히 델레망드 삼각주는 조금씩 잘라주면서 통행료로 적의 피 값을 받아 내기에 최적화된 지형이었다.
멀리서 새로운 연기가 피어오르면, 또 새로운 농장이 불탔겠구나 싶어 피가 거꾸로 솟는다. 하지만 적은 아마 그 농장을 점령하기 위해 적절한 피해를 지불했을 것이다.
그러고보니, 대략적인 방어 계획을 마무리 한 콘도티에레가 떠나기 전에, 한가지 질문을 했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아마 참모들도 궁금해했을 질문이다.
‘네? 저도 지형지물에 가려진 반대편이 보이는 종류의 인간이냐고요?’
의외의 질문을 받았다는 듯, 콘도티에레의 얼굴이 묘하게 변했다. 그리고 잠시 후,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1만이 넘는 대군을 자유자재로 지휘하는 사령관이라기보다는 평범한 동네 청년 같은 웃음이었다.
‘답은 아니다, 입니다. 결단코 아닙니다. 하하, 저도 반대편이 보이면 좋겠네요. 그랬다면 수레 끌고 사방천지 돌아다니며 일일이 발로 밟아 보지도 않았겠지요.’
확실히 그렇다. 콘도티에레는 마을에서 말 한 마리가 끄는 수레를 빌려서는 삼각주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지형을 살폈었지. 몇 번은 밭둑에서 떨어질 뻔하기도 하고.
‘아마 제19 델레망드 여러분은 대부분 이곳 출신이시겠지요? 태어나서 평생 살아온 터전을 적에게 내주기가 쉽지는 않으실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적이 떠나도 땅은 그 자리에 있을 겁니다.’
그 후에 콘도티에레가 해준 이야기가 감명 깊게 가슴에 남았다. 연대장으로서, 넬리프 몽타니에 역시 휘하 병사들에게 전해주고 싶었지만··· 그렇게 절절하게 가슴에 닿도록 전해주었는지는 모르겠다.
‘황폐해진 밭은 다시 갈면 됩니다. 불에 타고 무너진 농가는 다시 지으면 되죠. 저야 그쪽에는 아무 능력도 없지만, 트랑카벨 가문에서 도와줄 겁니다. 분명히요.’
그건 분명했다. 넬리프도, 연대 참모들도, 병사들도 그걸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니 다소 괴롭더라도 잠시만 버텨 주세요. 지원군은 반드시 옵니다. 다소 늦을지는 몰라도요. 트랑카벨 가문은 절대로 신하를 버리지 않아요. 제가 반드시 그렇게 만들겠습니다.’
빌어먹을, 그런 말까지 들었는데 어떻게 안 싸울 수 있겠나. 넬리프는 거칠게 맨손으로 얼굴을 쓸어냈다. 끈적거리는 땀과 망설임을 함께 씻어냈다.
후퇴 보고가 계속되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은 감당할 수 있는 영역이다. 계속해서, 조금씩, 꾸준하게 패배하고는 있다.
하지만 특별히 추격당해 큰 피해를 입었다거나 중견 지휘관이 전사하는 등 큰 타격은 없었다. 아직 연대 휘하의 각 중대는 훌륭하게 전투 부대로 실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어차피 지도에는 콘도티에레가 세워 놓은 계획이 있다. 세심하게 그에 따라 지시만 하면 된다. 중대장들은 모두 자신의 할 일을 잘 알고 있었다. 병사들도 모두가 잘 따라준다. 자랑스러운 부하들이다.
이대로 전선만 유지하면서 기다리자. 호언장담해준 콘도티에레를 믿고.
어차피 전투 시작하기도 전부터 믿기로 하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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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간발의 차이로 놓쳤다는 전령이다.
“두 개의 벽을 넘어 약 350미터를 추가로 전진했습니다. 농장 건물을 두고 약 15분간 전투가 진행됐습니다.”
“좋아. 아군의 피해는?”
“모두 26명이 죽거나 다쳤습니다.”
“적의 피해는?”
“...확인된 바는 없습니다.”
“그렇군.”
법황이 임명한, 명목상의 성전군 사령관인 라모리 스텐던은 무표정한 얼굴로 전령의 보고를 들었다.
원하는 보고를 하지 못했다는 듯, 전령이 몸 둘 바를 몰라하며 고개를 조아렸지만, 라모리는 그저 고개를 저어 물러나게 했다.
전황이 마음대로 돌아가지 않을 수도 있다. 게다가 어차피 전령의 잘못도 아니지 않은가. 괜히 전령에게 화풀이했다가는 그나마 정확한 보고조차 듣지 못하게 될 가능성도 있었다.
“라모리 경, 병력을 추가로 투입할까요?”
“아니, 그럴 필요는 없다. 다만 지원 요청이 오면 곧바로 투입할 수 있도록 위치를 분명히 파악하고 있도록.”
“알겠습니다!”
이기고는 있었다. 이기고는 있는데··· 영 개운치가 않았다.
적군은 정확한 위치에서 딱 적당한 만큼 싸우고는 미련 없이 물러난다. 이게 반복되니 이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 리가 없었다. 낚시로 치자면 '손맛'이 없어서 순조로운지 알기가 어려운 상황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래도 분명한 것은 알겠다. 적군은 성전군과 정면으로 싸우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현재 적이 택한 전술은 누가 봐도 전형적인 시간 끌기 전술이었다.
그럼 이걸 계속 파다 보면 적의 주력이 나온다는 말인데....
"기직스 경의 보고입니다! 3번 구역에서 개울을 건넜습니다. 다행히 아군 희생자는 없다고 합니다!"
"그거 좋은 소식이군.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고 잔해라."
"옛, 대장님!"
계속 후퇴하는 전투에 적의 대응도 점점 약해지고 있다. 아무리 계획적인 후퇴라고 해도 몸도 지치고 마음도 지쳐가겠지. 아마도 아군이 적이 매복 방어선에 배치되기 전에 대열을 뚫고 깊이까지 들어간 모양이다. 고무적인 소식이다.
아직 성전 초기에 있었던 전투가 생각난다. 뤼나메르 교차로의 언덕을 두고 싸웠던 전투였던가. 당시 라모리의 휘하 지휘관들이었던 울터 콜린스와 자프론 푸코데모스가 호되게 당했었지.
당시 적의 배치와 움직임은 기묘한 점이 있었다. 그의 휘하에서 잔뼈가 굵은 용병 장교들인 울터나 자프론 모두 녹록한 군인은 아니었는데, 그렇게나 농락당하듯 당할 줄은 몰랐다.
심지어 적 보병의 주력은 말 그대로 오합지졸이었다. 자신의 영지를 잃고 쫓기듯 도망온 북부 귀족의 잔당에, 현지에서 급히 모집한 잡병들이 대부분이었으니까. 그걸로 숫자가 훨씬 많은 성전군을 어떻게 막았던 것인지....
조사를 해 봐도 적 병력은 별것이 없었다. 추기경을 따라다니는 광신자들의 군대가 최소 두 차례나 이겼던 바로 그 병력이었다.
그렇다면 갑자기 변한 계기는 트랑카벨의 기병대와 함께 도착한 지휘관이겠지.
자신이 키운 용병들은 특별한 정예군은 아니지만, 대륙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을 숙련병들이다. 거듭 패배해 도망치던 오합지졸을 자기 용병들과 맞설 정도로 단기간에 바꿔낸 지휘관은 어떤 녀석일까.
어쩌면 이번에 상대하게 될지도 모른다. 교차로에서는 타이밍이 잘 맞지 않아서 싸울 기회가 없었지만.
지금 적군의 후퇴에서 느껴지는 용의주도함이 혹시 그 적장의 솜씨가 아닐까? 라모리는 자신만의 은근한 즐거움을 느끼며, 보병 중대 하나를 추가로 진격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