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2. 제2차 아넥시 방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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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대체 무슨··· 보고가 잘못된 건 아닌가?”
“죄송합니다 대장님··· 제가 전방에서 직접 받아온 보고입니다. 제가 본 전황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습니다.”
성전군 보병 연대장 기직스 미슈람 알메르타트는 또다시 우회로 확보에 실패했다는 보고를 받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법황이 임명한 성전군 사령관, 라모리 스텐던의 용병단 휘하에서 싸워온 지 벌써 10년이 넘었다. 물론 항상 성전군으로 싸웠던 것은 아니지만, 반대로 말하면 라모리는 ‘법황도 인정할 정도로’ 유능한 용병대장이었으니까.
그 과정에서 실력을 인정받아 연대장 자리에까지 올랐다. 이번 기습적인 남방 공격 작전에서 선봉을 맡아 기뻤다. 부하들을 이끌고 적극적으로 나섰다.
강 반대편에 배치된 적군의 화력은 상당했다. 심지어 대포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올지 모른다! 나를 따르라!’
다혈질인 기직스는 앞장서서 강물에 뛰어들려고 하다가 참모들에게 붙잡혀 선봉에 서지는 못했다. 하지만 허벅지까지 강물에 담글 정도로 가까이 다가가 전투를 지휘했다.
한여름 갈수기에 수량이 줄어들어 수심은 허리 정도였다. 그만큼 건너편의 적과 가깝다. 자칫하면 적의 눈먼 탄환에 개죽음을 당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의 적극적인 지휘가 오랫동안 함께해온 부하 용병들의 마음에 불을 붙였다. 게다가 강물과 강바닥의 부드러운 모래가 포탄의 위력을 약화시켰다.
덕분에 기직스의 용맹한 보병들은 생각보다 쉽게 강을 건널 수 있었다. 강을 건너는 내내 일방적으로 사격에 당한 데다가, 반대편 강둑에 오르기가 무섭게 화승총의 일제사격에 노출된다.
반대로 허리까지 차는 강을 건너느라 이쪽에서는 제대로 된 반격을 할 수 없었다. 사격은커녕, 총과 화약에 젖지 않도록 하는 것도 큰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버텼다. 악착같이 버티며 강의 반대편에 집결한다.
강둑 바로 위에서 쏴대는 총탄에 속절없이 쓰러져 가면서도, 강둑을 기어오를 충분한 병력이 모일 때까지 버텼다.
마침내 충분한 병력이 집결해 함성을 지르며 비탈을 달려 오른다. 일방적으로 당하던 폭력을 갚아주기 위해서. 달콤한 복수를 위해서.
그런데··· 적이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당연히 강둑을 틀어막고 버틸 것으로 생각했는데 말이다. 조금만 있으면 상류 쪽으로 우회한 기병대가 적의 측면을 공격할 수도 있었는데.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적은 미련없이 내륙 쪽으로 후퇴해 버렸다. 미리부터 준비했는지, 포병 진지 가설용의 말뚝까지 뽑아서 깔끔하게 철수했다. 버려진 무기 하나 남아있지 않았다.
그렇게 서두르지도 않고, 창날을 꼿꼿하게 세운 빈틈 없는 밀집 대형. 마치 올 거면 와 보라는 듯한 당당한 철수.
치열한 백병전을 각오했던 기직스의 연대는 잠시 허탈감에 빠져당황했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하면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가장 큰 고비로 생각했던 도강 작전을 무사히 끝마친 것이다.
물론 강둑 아래에 숱하게 누워있는 희생자들은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적이 격렬하게 저항했으면 훨씬 많은 사상자가 나왔을 수도 있었다.
적이 빨리 도망치는 바람에 피해를 거의 못 끼친 것은 찝찝했지만···. 전술적 목표를 완수했다.
‘적의 주력은 로데브 강 북쪽에서 아군 주력을 견제하고 있겠지! 이 지역의 적은 훈련도가 낮은 2선 급 부대다! 전투는 끝난 것이나 다름없어!’
부하들과 함께 강을 건너와, 잠시 휴식을 취하고 신발을 말리면서 기직스 자신이 했던 호언장담이었다.
헛소리를 했던 과거의 자신이 저주스럽다. 전투가 끝난 것이나 다름 없기는 개뿔. 오히려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자신들이 강을 건너 공세를 취하자 도망쳤다 생각했던 적들이 여기저기서 출몰하기 시작했다. 훈련도와 사기가 낮은 2선급 부대가 절대 아니었다. 별 것 없는 농촌이라 생각했던 지형은 녹색의 지옥이 되었다.
기세좋게 진격했던 부하들은 여기저기서 적의 습격을 당해 그대로 멈춰섰다. 하나같이 하는 말이 ‘적은 별 것 아니니 우회해서 측면을 공격하면 뚫을 수 있다’ 였다.
···그런데 그 우회로를 찾으라고 보낸 병력도 똑같은 말을 하더란 말이다.
딱 한 군데만 뚫으면 무너뜨릴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한 군데를 찾을 수가 없다.
아니, 애초에 한 군데라도 뚫린 길을 찾아낸다면 굳이 우회할 필요도 없었다는 것이 현실이다! 그냥 그 길로 진격하면 되는데. 급해진 적군이 병력 철수하고 막으려 들면 그때나 유리한 지점 찾아서 싸워주면 될 테고.
이 터무니없는 아이러니가 계속해서 젊은 보병 지휘관 기직스를 괴롭혔다.
왠지 유리해야 할 것 같은데, 불리하다.
조금만 잘하면 이길 수 있는데, 그 조금의 실마리가 잡히지를 않는다.
“대장님! 총대장께서 전령을 보내셨습니다! 전황을 묻고 계십니다.”
“뭐? 라모리 경이? 으으...!”
뒤쪽, 방금 그들이 건너온 여울목을 보니 본대가 강을 건너고 있었다. 용병대장 라모리 스텐던 본인이 이끄는 주력군이었다.
“뭐, 뭐라고 보고드릴까요?”
전령은 엉망으로 일그러진 기직스의 표정을 보더니 눈치를 살핀다. 기직스는 마침내 포기하고 한숨을 쉰다. 어차피 거짓 보고를 해 봤자, 라모리 대장은 다 알 것이다.
“적의 방어가 생각보다 완강하여 진격로 확보에 실패하였다고 보고해라. 적의 방어 전술이 기묘하여 기직스로서는 역부족이니, 조언을 청한다고도 말씀드려라.”
“아, 알겠습니다!”
비교적 어린 나이로, 보병 연대를 지휘하며 출세하긴 했다. 하지만 라모리를 실망시킨 것은 이번이 처음도 아니다. 못 하는 건 못 한다고 정직하게 말하자.
어설프게 고집부리다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하느니, 미리 털리는 게 낫다.
그리고 아마도 라모리 총대장은 해결책을 알려 줄 것이다. 믿고 따른다면,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다시 교전 상황을 파악해 보고하라!”
“옛, 알겠습니다!”
어차피 망신을 당한다면 일찍 당하는 쪽이 낫다. 솔직하게 까발리는 게 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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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하랄드 시장에 간다네
백리향 향기 가득한 비탈을 거꾸로 오르며!
뮈다켄을 지나 휘어브루넨으로 가는 길
약초 가득한 바구니를 든 그녀를 찾을 수 있어요!
나는 하랄드 시장에 간다네
깨끗한 천으로 지은 새 옷으로 산양을 타고!
뮈다켄을 지나 휘어브루넨으로 가는길
금발에 파란 눈 어여쁜 그녀를 찾을 수 있어요!
커다란 문짝을 지고 북 로데브 강을 건너는 건장한 청년들이 고래고래 고함에 가까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아마도 지빌링엔 지역의 민요인 모양이다. 굳이 말하자면 꽤 아름다운 멜로디를 가진 노래 같다. 원래 이렇게 부르는 게 맞나 싶지만.
나는 보병 2개 연대와 함께 북 로데브 강을 건너고 있었다. 두 연대 중 선두는 이 노래를 부르는 지빌링엔, 신생 ‘피 흘리는 흑곰’ 연대이다.
“아하하하하! 이거 재미있어요!”
“흐으음··· 그렇네요··· 리타 간호사.”
건장한 지빌링엔 용병들이 짊어지고 있는 큼직한 문짝 위에 탄 것은 다름 아닌 두 명의 미녀였다.
우리 트랑카벨 영지군의 정신적, 물질적 지주이자 의료적 지주이기도 한 아쥬흐, 그리고 의무대 소속의 ‘기마 간호사’ 리타 드 리스바쥬이다.
“금발에 파란 눈 어여쁜 그녀를 찾을 수 있어요!”
지빌링엔 용병들은 자신들의 고용주에 대한 경의를 표시하려는 것인지, 유난히 그 후렴구를 열심히 불러댔다.
트랑카벨 의무대 소속 간호사인 리타는 강물 위를 첨벙거리면서 잘도 나아가는 문짝 가마가 기분 좋은지 무척 신난 표정으로 양팔을 벌리고 깔깔거리고 있었다.
그에 비해서 아쥬흐는 혹시라도 문짝이 뒤집힐까 걱정이 되는지 미묘한 미소를 짓고 정 중앙에 다소곳한 자세로 앉아있다. 하얀 손바닥까지 문짝에 붙인 것을 보니, 최대한 접촉 면적을 늘려 안정감을 찾으려는 것 같았다.
“의무대장님! 정말 재밌어요! 일어서 보세요!”
“흐으으음··· 저기 리타 간호사, 무척 날씬한 몸이라 생각은 하는데요, 그렇게 움직이면 강을 건너시는 용병분들이 힘드시지 않을까요?”
“조금도 힘들지 않습니다 아쥬흐 영주영애님! 설령 열 배로 무거워지셔도 지빌링엔의 무릎은 꺾이지 않을 겁니다!”
“....”
“아하하하하!”
문짝을 이고 움직이던 지빌링엔 청년들이 눈치도 없이 대신 대답하자, 아쥬흐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말을 잃은 것 같다.
덤으로 바로 뒤에서 말을 타고 함께 강을 건너고 있던 나도 웃음을 참느라 무진 애를 써야 했고.
그렇게 우리 기묘한 도강 행렬은 유유히 흐르는 북 로데브 강을 가로질러 반대편에 도착할 때 까지 이어졌다.
그 사이에 하랄드 시장에 금발에 파란 눈 그녀 어쩌고 하는 노래는 스무 번쯤 들은 것 같다. 악다구니 쓰는 노래지만 듣다 보니 좀 좋은 것 같기도 하고 음음. 나는 하랄드 시장에 간다네!
“흐음, 흠.”
반대편에 도착한 문짝 가마꾼들은 놀라울 정도로 세심하고 일사불란하게 문짝을 낮춰 아쥬흐가 내릴 수 있도록 했다.
“덕분에 편하게 건널 수 있었네요. 고마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영주영애님!”
원래도 하얀 편인 아쥬흐의 얼굴은 완전히 창백하게 변해 전혀 편해 보이지 않았다. 어쨌거나 자신을 강 건너로 나르느라 고생한 병사들에게 감사를 표하는 것은 잊지 않았다.
도강 작전 직전에, 지빌링엔 연대의 지휘관들이 가장 키가 큰 청년 여덟 명과 함께 찾아왔었다.
'지빌링엔이 섬기는 주군은 강물을 건널 때 발이 젖는 법이 없습니다'
뭐 그런 게 있나 보다. 단화를 벗고 앞치마를 걷어 올리며 강을 건널 준비를 하던 아쥬흐와 리타 두 사람이 문짝 가마에 타게 된 이유였다.
아쥬흐는 극구 사양을 했었는데... 평소의 겸양인 줄 알았지 이렇게 무서워할 줄은 몰랐네. 나도 같이 말려줄 걸 그랬다.
온 몸에 파편이 박혀 비명을 지르는 부상병도 침착하게 붙잡고 살려내는 모습에 익숙해서인지, 그녀도 평범하게 무서워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다시 확인하자 오히려 신선하다.
그렇게 무사히 '발이 젖어서는 안 되는 주군' 아쥬흐를 강 건너편까지 옮긴 지빌링엔 연대의 사기는 높아진 모양이다. 아마도 자기네 전통을 존중해준 것이 기쁘기도 했겠지.
아무튼 최근, 고용주인 아쥬흐 트랑카벨이 공식적으로 '피흘리는 흑곰'을 인정했던 연대기 수여식 이후 힘이 넘쳤었으니까. 고용주와 유대까지 강해진다면 고무적인 일이다.
우리가 이렇게 서두르고 있는 이유는, 기습적으로 북 로데브 강을 건너온 적에 대한 대응 때문이다.
북 로데브 강 이남을 지키고 있던 제19 델레망드 보병 연대로부터의 마지막 보고를 받은 지가 꽤 되었다.
제19 연대장, 넬리프 몽타니에는 애향심 넘치는 성실하고 열정적인 장교였다. 처음 만났을 당시에도 '제 고향 델레망드 삼각주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라는 태도가 무척 마음에 들었었다.
아마 밭과 밭둑과 개울이 끝도 없이 이어지는 답답한 지형은 적의 진격을 상당히 막을 것이다. 하나하나는 뭐 아무것도 아니지만, 넘으면 또 나오고 또 나오고 하니 피로도도 상당할 것이고. 게다가 그걸 지키는 것은 완강한 델레망드 사나이들이니까.
"콘도티에레! 제51 연대도 도강을 시작했어요!"
"아, 알았어. 첼레스티나."
이번에 함께하는 2개 연대 중, 지빌링엔 연대에 후속하는 부대는 제51 포르망제 의용보병 연대이다. 전쟁 초반에 자신의 영토인 포르망제 성을 잃고 피난해온 로이작 드 포르망제 남작이 연대장이다.
뤼나메르 교차로 전투에서 언덕을 지키며 함께 싸웠던 이들을 중심으로 개편된 블랑독 연맹군 소속의 부대이다. 드 포르망제 가문과 그 주변 귀족들의 잔존병력, 그리고 에테인 산맥 출신의 광부들 말이다.
이들은 뤼나메르 교차로를 지키며 언덕을 오르려는 성전군을 끝까지 막아냈으며, 승리에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부족한 무기와 물자는 트랑카벨 가문이 '지원'하지만 트랑카벨 영지군 소속은 아니다.
병력은 약 1600명으로, 단일 연대로는 네그라타 연대 다음으로 큰 규모이다. 이후로도 합류한, 싸울 준비가 된 블랑독 출신들을 모아서 배치했기 때문이다.
일부러 모은 것은 아니지만, 드 포르망제 남작의 군대와 지빌링엔 용병단은 뤼나메르 교차로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웠었고, 함께 혁혁한 전공을 세웠었다.
분명, 이번에도 협력하여 전공을 세워주겠지.
"늦었습니다, 콘도티에레! 나머지 병력이 강을 건너는 대로 따라가도록 하겠습니다!"
로이작 드 포르망제 연대장이 방금 강을 건너며 물에 젖은 말을 타고 나타나 보고한다.
"늦지 않았으니 천천히, 확실하게 진행합시다. 우리가 도와주러 가는 아군은 그렇게 약하지 않거든요."
"알겠습니다, 콘도티에레!"
믿음직한 병사들이다. 이제 어떻게 이기면 될지 정보를 모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