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1. 제2차 아넥시 방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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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둘러! 나를 따르라."
"주변을 경계한다!"
한 무리의 성전군 기병대가 해안 도로를 따라 달리고 있었다.
말이 좋아 해안 도로지, 그냥 밭둑을 높이 쌓은 농장과, 파도가 부딪쳐 하얗게 부서지는 바위 해안가 사이에 자연적으로 생긴 좁은 길이다.
길이 구불구불한 데다가 넓어졌다가 좁아졌다 하는 바람에 기병들은 2열 종대로 위태위태하게 달리고 있었다. 처음 들어가는 적지에서 적합한 대형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위험을 무릅쓰고 달려야 하는 이유가 있다.
이 농장과 농장 사이를 구분 짓는 기이한 흙벽으로 이루어진 미로 같은 지형은 아군 보병의 공세를 상당히 성가시게 만들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성전군 기병대에게는 농장 자체를 우회하는 길을 찾는 임무가 내려왔다.
적은 좁은 길목을 틀어막고 응전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만큼 후방은 방심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우회로를 발견하면 적의 후방을 공격해 길을 억지로 뚫어낼 수도 있고, 그대로 진격해 적의 후방을 교란할 수도 있었다.
그룬발트에서 어느 지방 변경백의 계승권 분쟁에 참전했을 때, 울터 콜린스의 기병대는 그렇게 성공한 적이 있다.
비탈길을 선점한 참칭자 반군은 이틀 동안 용감히 싸웠다. 그러나, 울터 콜린스의 기병대가 산을 반 바퀴 돌아 후방을 공격하자 그대로 무너져 버렸었다. 불과 300여 기의 기병이 여섯 배의 적 보병을 추격해 섬멸했었다.
아마 이번도 그렇게 될 것이다. 라모리 스텐던 휘하의 기병대장, 울터 콜린스는 자신이 신뢰하는 정예들에 우회 임무를 맡겼다. 때로는 적절한 위치에 배치된 소수 기병이 정면에서 달려드는 다수 기병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잘 아는 베테랑들이다.
혼란스러운 미로 속에서도 방향을 유지하며, 필요한 경우 부대를 분산시켜도 전투력이 무너지지 않으리라. 그렇게 지휘부의 기대를 받은 기병 500여 기가 트랑카벨의 영토, 델레망드 삼각주 외곽을 따라 달리고 있었다.
제법 한참을 달려왔지만 아직까지는 적군도, 민간인도 보이지 않았다.
타앙! 따당!
"큭!"
선두를 달리던 기병이 비명을 지르며 휘청였다. 철제 흉갑의 옆구리 쪽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요행히 치명상은 피한 듯, 낙마하지 않고 이를 악문 채 계속 달리고 있었다.
"적이다!"
"선두 소대 추격! 선두 소대만 추격!"
멀리 다섯 명 정도의 보병이 보인다. 멀리서 쏜 총이라 대부분 빗나간 모양이다. 선두 기병 20기 정도가 속도를 올린다. 적군은 허겁지겁 반대편으로 도망친다.
거리가 멀어 잡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이 도망치는 방향이 이 미로의 출구일지도 모른다. 그런 기대를 하며 선두 기병이 속도를 높인다. 저마다 검이나 권총을 뽑아들어 하늘로 치켜든다.
"적이 모퉁이를 돌아들어 갑니다!"
"하, 함정인가?"
잠깐 선두 기병들 사이에 망설임이 깃든다. 누가 보아도 어설픈 유인으로 보인다. 잘못 뛰어들었다가는 큰 손해를 입을지도 모른다.
"어설픈 함정이라면 부수고 들어간다! 내가 선두에 선다!"
"옛, 대장님!"
어차피 척후대는 위험을 각오할 수밖에 없다. 갑작스러운 조우라는 것은 적도 마찬가지다.
함정이라면 돌파한다. 적이 감당할 수 있는 것 이상의 충격과 속도로 돌입한다. 그것이 기병의 강점이니까. 적은 상당한 전력을 전방에 배치하고 있다. 후방까지 강력한 병력을 배치하지는 못하고 있을 것이다.
아마도.
"나를 따르라!"
"우와아아아아!"
모퉁이를 도는 순간, 선두 기병대가 함성을 지르며 기세를 올린다. 어떤 적이 기다리고 있어도 맞서 싸울 기세로.
"이런 시팔!"
다음 순간, 눈앞에 적이 나타난다. 적의 전력을 파악하기까지 약 1초. 그동안에도 말은 몇 미터나 전진한다.
"미친놈들 대포를 왜 여기...."
꽈광!
따다다당! 타탕!
약 30여 미터 거리에서, 온갖 사이즈의 납탄이 만들어내는 폭풍이 20여기의 선두 기병대를 덮쳤다.
뒤따르던 기병대가 볼 수 있었던 것은 선두 동료들이 박살이 나면서 흩날리는 피 안개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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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랑카벨 영지의 동쪽 끝, 델레망드 자작령을 지키는 제19 델레망드 보병 연대는 강군은 아니다.
오히려 창설 시기도 늦었을뿐더러, 트랑카벨 영지군이 겪었던 주요 전투에 참여한 경험도 없는 신병 부대이다.
트랑카벨 뿐 아니라 블랑독 연맹 전체가 거의 전력을 모아 투사했던 샹다메리 전투에도 참여하지 않았던 2개 연대 중 하나이다. 그렇기에 약체 연대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3중대에서 적을 격퇴했다는 전령이 왔습니다!”
“수고했다. 적이 둑길을 포기하고 농수로를 따라 접근할 수도 있으니 방비를 늦추지 말고 전해라.”
“알겠습니다, 연대장님!”
제19 연대의 야전지휘부는 지금도 정신이 없었다. 쉴 새 없이 전령들이 들락거린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제19 연대는 현재 모두 다섯 곳의 방어선을 동시에 지휘하고 있었다. 필요하면 더 늘어날 수도 있었다.
“피난민으로 위장해 간첩을 침투시킬지도 모르니 조심해야겠네.”
“여기서 말입니까? 길 몰라서 두리번거리면 바로 간첩인 것 들킬 텐데요?”
“하하, 하긴 그렇겠지?”
제19 연대의 연대장, 넬리프 몽타니에는 참모와 둘러보며 웃었다.
넬리프와 참모, 그리고 제19 연대 장병들의 대부분, 거기다가 전령으로 도와주는 소년들이나 후방에서 지원해주는 민병대까지 모두가 델레망드 자작령 출신이다.
대부분은 삼각주 출신의 농민들이다. 연대장인 넬리프 몽타니에 역시 삼각주에 제법 큰 농장을 두 개 가진 지주 집안 출신이다. 그 때문에 삼각주 특유의 지형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전체적으로 굴곡은 있으나, 평지가 많고 기름진 삼각주 지역은 거의 전체가 농경지로 개발되었다.
블럭 형태로 평평하게 개간된 농경지 주변에는 나지막한 밭둑이 세워진다. 오랜 세월 경작하면서 흙과 돌을 쌓아 높아진 밭둑에서는 나무가 자란다. 그 나무는 점점 단단한 살아있는 벽이 되어 사람 키를 훌쩍 넘길 만큼 높아진다.
그 잡목림의 벽 사이로, 유난히 좁고 단단히 다져진 길이 지난다. 넓어봐야 수레 한 대가 간신히 지날 정도의 좁은 길. 좁으면 겨우 사람 한 명이 지날 수준인 길인지도 모를 애매한 공간이 된다.
밭이 먼저 생겼고, 길이 나중에 생겼기에 길은 구불구불한 뱀처럼 농경지를 싸고돈다.
처음 온 사람은, 겨우 100미터도 이어지지 않지만, 끝없이 이어지는 길에 직면한다. 사방은 사람 키보다 훨씬 높은 밭둑 잡목림으로 가려진 미로나 다름없다. 바로 앞에 뭐가 있는지, 내가 지나는 길옆에 누가 있는지도 알 수 없다.
거기에 사방팔방으로 흐르는 작은 개울과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농수로가 더해진다. 지주들이 서로의 경계를 정하기 위해 세운 보다 높은 밭둑 역시 침략자를 막는 요새처럼 모습을 드러낸다.
그 뿐인가. 접경지에서 개간을 포기한 작은 숲. 바위투성이 언덕. 대체 무슨 용도였는지 모를, 덩굴 식물로 뒤덮인 고대 아란 제국의 폐허가 드문드문 자리한다.
문제는 이게 다 비슷비슷하게 생긴데다 잘 보이지도 않아서 길을 찾는 지표 역할조차 못한다는 것이다. 최소한 처음 오는 사람들에게는 말이다.
그리고 델레망드 삼각주의 주민들은 모두 이것을 잘 알고 있다.
왜냐하면 자기들도 이웃 마을 처음 가면 똑같이 느끼기 때문이다.
넬리프 몽타니에는 연대장이 된 후, 동부 영토의 수비를 맡게 되었을 때 조금 실망했다. 왜냐하면, 그 자신도 콘도티에레를 따르며, 대군의 일부가 되어 적과 싸워 승리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여기는 정말 멋진 지형이군요. 성벽도, 망루도 없지만 열 명으로 백 명을 막을 수 있는 지상의 요새입니다. 음음, 말로는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하지만 아직 서늘하던 시기, 방어전을 준비하며 삼각주에 도착한 콘도티에레는 어린아이처럼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좋아했다.
신이 나서 이리저리 돌아다닌다. 바닥과 밭둑의 흙을 손으로 만져본다. 끙끙대며 잡목림에 매달리더니 기어 올라가 본다.
‘음음, 여기가 이렇게 돼 있구나. 오오··· 이 잡목림은 사람이 올라설 수 있을 정도로 단단하네요! 널빤지를 깔면··· 위에 사수를 배치할 수 있을지도?’
‘코, 콘도티에레! 위험해요! 떨어지시면 어떡해요?’
‘아아, 괜찮아. 여기 진짜 단단하다고. 나무로 쌓은 성벽 같아. 이렇게··· 으아앗!’
‘콘도티에레에!’
그렇게 한참을 돌아다니던 콘도티에레는 순식간에 방어 계획을 시작했다. 최우선 과제는 강가에서 강을 건너는 적을 막아내는 것이다.
하지만 1개 연대의 수비군으로 완벽하게 적을 막아내는 것은 힘들다. 여름이 되어 갈수기가 오고, 강물이 줄어들면 걸어서 건널 수 있다. 그러면 강변에 집착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차라리 최대한 피해만 입힐 뿐, 반드시 강가에서 차단한다는 생각은 하지 말자. 어차피 적이 강을 건너봤자 만나는 것은 녹색의 미로일 뿐이다.
‘하지만 그 미로의 답을 우리는 알고, 적은 모릅니다.’
콘도티에레가 했던 그 말은 신임 연대장인 넬리프에게 굉장히 인상 깊게 다가왔다. 평생 삼각주에서 나고 자란 그는 그런 측면으로는 생각하지 못했다.
밭둑으로 둘러싸인 농장 하나하나를 요새화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삼각주 전체를 완전히 통제할 수 있는 전장으로 생각하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병력의 전진과 후퇴, 교전의 유리함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보의 전달 속도. 적은 어디서 전투가 벌어지는지, 다른 아군이 어디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게 될 겁니다. 그리고 전투가 길어질수록, 그건 점점 심해지겠죠.’
바닥에 그림을 그려주며 한 콘도티에레의 설명은 이랬다. 전투 초반에는, 적 역시 대략 서로의 위치를 예상하고 있을 것이다.
소리같은 청각 정보나, 연기 및 직접 밭둑 위에 올라가 관측한 시각 정보를 통해서 말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정보는 예상과는 거리가 멀어진다. 그 예측과 실제의 괴리는 시간에 비례해서 점점 쌓여 갈 것이다.
마침내 후방에서 지휘하고 있을 적장은 아군의 정보를 완전히 잃어버린다.
정보가 없어 캄캄해진 전장에서, 가끔 전령이 도착할 때만 부분적으로 불이 비치는 것처럼 일부만 알 수 있다.
하지만 전령을 돌려보내면?
다시 전장은 캄캄해진다. 그 뿐 아니라, 전령이 부대까지 이동하는 시간 동안에도 오차는 점점 누적되어간다.
마침내 적은 일선 부대도, 후속 부대도, 지휘관도 서로의 위치를 알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는 것이다.
이 상황은 물론 아군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지형에 익숙한 길잡이들을 부대에 나눠 배치하고, 지휘관이 분명한 위치를 고수하며, 샛길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전령에 따라 극복될 수 있다.
너무도 간단명료하게 말하는 콘도티에레의 말에, 넬리프는 매료되었었다.
빨리 그의 말대로 싸워보고 싶었다.
자신의 고향이, 삶의 터전이 전장이 되는 것은 유쾌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를 바탕으로 적을 끌어들여 일방적으로 두들겨 패고 싶다는 생각 또한 들었다.
그저 방문만 열고 나오면 매일같이 보이던 따분한 풍경이, 적을 끌어들여 묶어놓을 수 있는 함정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마치 처음으로 구슬치기를 배워 눈만 감으면 게임판이 떠오를 때와 같았다.
‘그리고 제19 델레망드는 혼자가 아닙니다. 잠시 고향을, 이웃을, 영토를 지키고 있으면 반드시 우군이 달려옵니다. 그때까지 연대를 이끌면서 의연히 싸워주시기를 바랍니다.’
그 말이 그렇게 고맙고 든든할 수가 없었다. 왠지 콧등이 시큰해지고 눈물이 흐를 것 같았다.
델레망드는 트랑카벨 가문의 영토이다. 정확히는 가문의 큰 어른인 아롱드 트랑카벨 자작의 땅이다. 여태껏 세금을 내고 섬겨왔으나, 보호를 받는다고 느꼈던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때 확신했다. 자신이 트랑카벨을 힘을 다해 섬기는 만큼, 트랑카벨 역시 델레망드 영지를 지켜 줄것이라는 것을.
‘우리의 홈 그라운드에서 길을 잃으면 농담거리도 못 되죠. 제19 델레망드의 전 장병은 삼각주의 지리를 확실하게 익혀두셔야 합니다. 충분히 하실 수 있습니다!’
그렇게 콘도티에레는 제19 연대의 지휘부와 함께 며칠 간 머물면서 지도를 작성하고 방어 계획을 세웠다. 긴장되는 시기였지만, 한편으로는 즐겁기도 했다. 어딘가 고향에 대한 자부심도 느껴지곤 했고 말이다.
···그리고 작은 해프닝도 있었다.
지형 답사 마지막 날, 측량을 위해 나섰던 콘도티에레의 미녀 부관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이다. 결국, 2개 중대가 수색에 나섰으나 찾을 수 없었다.
카르카냑에서도, 델레망드에서도 항상 침착했던 콘도티에레의 얼굴이 사색이 된 것은 처음 보았다.
다행히 다음 날, 실종되었던 첼레스티나라는 이름의 여성 부관은 동네 아낙의 손을 잡고 훌쩍이며 귀환했다. 듣기로는 길을 잃었고 어느새 삼각주의 북동쪽 끝까지 가버린 모양이다.
아무튼 콘도티에레가 조심성 없는 부관을 나무라면서 해프닝은 종결되었다.
다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조금 다르게 생각이 든다. 아마도 그 부관님은 밭둑길 미로의 효용성을 보여주려고 일부러 길을 잃은 척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지 않았으면 그렇게까지 길을 잃을 일은 없기 때문이다. 가만히 있기만 했어도 우리가 금방 찾았을 텐데···.
무엇보다 북동쪽 끝까지 간 것이 말이 되지 않는다. 이동 거리를 생각하면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로 빠른 속도니까. 길을 알면서 확신을 가지고 성큼성큼 걸어도 거기까지 갈 수 있을지 없을지 싶은 정도이다.
그래도 그 사건은 제19 델레망드 연대의 장병 모두에게 인상 깊은 사건으로 각인되었다. 어떤 적이라도, 이 푸른 미로에 빠뜨릴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다행히, 지금 푸른 미로는 확실하게 동작하고 있었다.
“6중대 쪽에서 전령! 이번에는 적 기병입니다!”
“호오, 해안 길을 따라 돌아보려는 생각인가? 전투 상황은?”
“적은 해안 도로를 봉쇄한 방책에 당황한 듯합니다! 우회로를 찾아보려는 듯, 측면으로 접근했다 합니다!”
“좋아, 멋대로 빙빙 돌게 놔두자고. 상황을 유지한다.”
“옛, 연대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