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168화 (168/556)

24-10. 제2차 아넥시 방어전

‘아군이 북 로데브 강을 건너 공격했다’

아넥시 공격을 계속하느냐, 다른 건을 우선시하느냐로 마무리될 것 같았던 성전군의 회의는 전령의 도착으로 다시 어수선해졌다.

모두가 이 회의의 최상급자, 아르누아 루케 추기경의 눈치를 본다.

추기경이 거듭 말해온 중요한 목표로 지정한 도시인 아넥시 함락도 예상대로 될지 안될지 모르는 상황이다. 당연히 심기가 편할 리 없었다.

그나마 페르곤 보좌주교의 중재로 지휘관들과 합의점을 찾아가려던 와중이었다.

그런데··· 대놓고 추기경 본인의 명령, ‘전 성전군 아넥시 집결’을 어긴 보고가 들어온 것이다.

“대체 라모리 스텐던 경이 누구입니까?”

“법황께서 성전군 사령관으로 임명하신 용병 지휘관 말입니다. 타비뇽에 머물 때 보시지 않았습니까?”

“아··· 그 곱슬머리 장발의 용병대장 말이군요. 법황께서 임명하신 사령관인 줄은 몰랐네요.”

“지금은 이단심문관들과 함께 외곽을 돌며 점령지를 접수 중이라고 하더군요.”

라모리는 그다지 유명한 인물이 아닌지, 탁자에 앉아있던 성전군 간부들도 잘 알지는 못하는 눈치였다.

“법황께 직접 임명받은 사령관이 어째서 그런 한직에···.”

“명목상은 제2군을 이끄는 부사령관이라지만··· 아무래도 추기경님의 신뢰를 잃은 게 아니냐고 하는···.”

“성전 초기에 패주하는 이단자들을 추격하다가 실패한 적이 있다고 하더군요.”

“쉿, 드러내놓고 할 이야기는 아니지요.”

옆에서 소근거리는 법황령의 제후들을 본 발란트는 혐오감을 느꼈다. 이들은 대부분 안전한 법황령에 영지를 가지고 있는 법황의 세속 제후들이다..

이번 기회에 ‘성전군 참전 용사’ 라는 타이틀을 따고 싶어서 따라온 귀족이다. 무예를 연마한 기사일지는 몰라도 군인은 아니다.

물론 드라멜른 기사단의 발란트 자신도 라모리라는 이름의 용병대장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작전 회의에는 참여했으나, 대부분 조용히 듣기만 했던 모습이다.

위계상 추기경 바로 아래의 고급 장교였으나, 자신의 의견을 내세우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블랑독 동쪽 외곽을 돌게 된 것도, 특별히 추기경이 홀대해서는 아니다.

발란트가 알기에는 그렇다. 오히려 뒤늦게 합류한 세력들에게 활약할 자리를 만들어 주다 보니 한직으로 밀려난 것에 가깝다는 것이다.

우는 아이에게 떡을 하나씩 주다보니, 조용한 아이는 하나도 못 먹은 격이라고 해야 할까.

어쨌든, 그렇게 수동적으로 행동하던 라모리 스텐던이 갑자기 명령을 어긴 이유에 대해서는 발란트 자신도 호기심이 생겼다.

아니 방금, 전령이 ‘동쪽 끝에 있어서 미처 전령을 받지 못했던 것 같다’고 했던가.

어쩌면 받지 ‘못한’ 게 아니라, 받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라모리는 성전군의 장교들 중 블랑독에 가장 먼저 도착했고, 직책상 지휘체계나 전투서열에 익숙한 사람이다. 원한다면 행군 속도를 조절해서 ‘원하는 명령만 골라서 받는’것도 가능했으리라.

전령은 정해진 가장 효율적인 루트로 이동할 테니까, 작전 일정과 지도를 잘 알고 있다면 우연을 가장해 전령을 피해 다니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그럼 설마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는지도···.

“대체··· 대체 무슨 생각이지? 라모리 경은!”

아르누아 추기경은 상당히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그 모습만 보아도, 라모리 스텐던을 상당히 신뢰는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 애매한 분위기를 해결한 것도, 보좌주교 페르곤이었다.

“추기경 예하, 우선은 제가 라모리 경에게 전령을 보내 전후사정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으음···.”

“라모리 경은 법황 성하께서 임명하신 사령관이시지요. 그리고 지금까지 성전군을 위해 헌신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렇긴 하지요.”

“제 생각에 그러던 분이 갑자기 항명 행위를 하시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합니다. 분명 명령을 받지 못했다거나, 다른 이유가 있겠습니다.”

아르누아 추기경은 불쾌한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인다. 여지껏 조용히 지내서 인지를 못했을 뿐이지, 법황이 소집한 성전군에 법황이 임명한 사령관이다.

법황의 대리인인 아르누아 추기경보다 서열이 아래라고는 하지만, 지휘체계상의 문제는 다소 애매한 것도 사실이다.

“자, 라모리 경에 대해서는 제가 알아보도록 하지요. 그럼 여러분들은 아까 말씀드린 대로, 향후 우리 군의 목표 설정에 대해서 내일까지 의견 준비를 부탁합니다.”

자칫 대혼란으로 흐를 수 있었던 성전군 사령부의 분위기는 페르곤의 중재로 순식간에 진정되어간다.

“그럼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해도 되겠지요?”

우선 회의는 그렇게 마무리되었으나 참여자들의 마음에는 많은 것들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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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이구··· 하루도 조용히 지나가는 날이 없구나.”

늦도록 일을 처리한 페르곤 보좌주교가 딱딱한 나무 의자에 등을 기대며 중얼거리듯 말한다.

안락함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각진 나무토막으로 만들어진 의자이지만, 지금 그에게는 어떤 안락의자보다도 편하게 느껴진다.

“수고하셨습니다, 형님.”

따끔따끔 쑤시는 눈을 비비는 젊은 보좌주교를 맞이한 것은 친동생인 나브리치오 델 로카라소이다. 숙련된 화승총 저격 사수인 그는 포도주가 든 잔을 형에게 내민다.

“성전군의 장수들이 많이 지친 것이 보이더구나. 요새를 공격하다 지쳤다기보다는, 의미도 없이 시간과 병력을 허비하는 것에 지쳐 보였다.”

“그러시군요···. 제가 결과를 내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죄송합니다, 형님.”

“허허, 그런 의미로 한 말은 아니다. 너 역시도 나름의 성과를 내고 있다고 하더구나. 적의 대응 화력이 약해졌다면서?”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나브리치오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와 그의 벼락치기 저격수들은 나름의 결과를 내고는 있었다. 하지만 그만큼 이쪽의 희생도 늘고 있었다.

대체 적은 어떻게 이쪽의 의도를 알아내는 것일까. 일부러 아군 총병대의 사격에 섞여 쏘면서 의도를 숨기기 위해 노력했는데.

민병들이 지킨다는 이런 촌구석 요새에서 그런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최신 사격 전술에 해박한 전술가가 있을 리는 없고··· 혹시 굉장히 냉철하고 판단력이 뛰어난 포수가 있나?

전자는 말도 안 되고, 후자라면 가능성이 있었다. 늑대나 곰 같은 야생동물을 총으로 사냥하던 사냥꾼들은 이상하게 감이 발달하곤 하니까.

어찌됐든 돈과 권위로 진중에서 긁어모은 벼락치기 저격수들은 숙련될 틈도 없이 죽어나가고 있었다. 성 안의 화승총 사수들도 비슷하게 줄어들고 있었고.

···병력 면에서 압도적인 성전군 측에 바람직한 현상일 수도 있다. 하지만 기껏 그런 일을 위해 반평생을 공부하고 연구해온 것은 아니다. 일부러 숙련된 사수들을 스카웃해 특수 부대를 편성한 것이 아니다.

내색은 하지 않았으나, 나브리치오는 자존심에 심한 상처를 입고 있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구나. 다만··· 조만간 병력 이동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잠시 페르곤 보좌사제는 자신의 동생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평생을 수도원과 교단에서 지낸 자신과 다르게, 평생을 밖에서 떠돌던 동생.

희멀건 자신의 피부와 왜소한 체구와 너무도 다른 구릿빛 피부와 딱 벌어진 어깨. 친형제이기는 하지만 함께 지낸 시간이 그다지 길지는 않았다.

“마지막으로 총력을 다한 공격이 있을 것 같구나. 그때는 너도 작전 회의에 들어오거라.”

“아, 알겠습니다, 형님!”

“후우··· 성직자가 된 몸으로 전쟁에 관여하는 것이 옳은지는 모르겠구나.”

페르곤은, 아니 나브리치오의 형 안텔레 델 로카라소는 생각이 복잡해 보였다. 그는 모든 일에 성실할 뿐, 결코 타고난 군인은 아니었다.

“하지만 성전이 아니겠느냐. 패배하면 전쟁을 계속하기 위한 추기경 예하의 권위가 흔들리니,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구나.”

“무슨 말씀인지 이해합니다.”

나브리치오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확실히 지금 진중의 분위기는 좋지 않다. 별 소득 없이 공성전이 계속되어 염증을 느끼는 것도 있겠다. 하지만 성직자인 추기경이 전쟁을 지휘하는 것에 대한 불만도 있었다.

그렇다고 지금 놔 버리면 교단의 권위가 실추된다. 처음부터 위임해 왔으면 몰라도 말이다.

참 느긋한 말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전쟁의 승패만큼 중요한 것이 성전의 정당성을 이어가는 것이니 뭐가 옳다 그르다 판단하기도 어렵다.

그래서 나브리치오는 자신만의 기준을 정했다. 자신과, 형인 페르곤 보좌사제를 위해 움직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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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랑독에서 가장 큰 강인 로데브 강은 블랑독의 젖줄이다. 엘랑키아 블랑독 지방의 남부와 북부를 가르는 자연지형이기도 하고.

로데브 강은 몽세나 산맥에서 발원하여, 크게 한 번 휘돌아서는 블랑독의 중앙을 가로질러 바다로 흘러간다.

이 한 번 북쪽으로 돌았다가 동쪽으로 바다를 향해 흐르는 강을 따라서 트랑카벨의 영토가 쭈욱 이어져 있다. 약 400년 전, 블랑독에 터전을 완성한 트랑카벨의 조상들이 로데브 강을 따라 세력을 확장했던 것이다.

지금도 트랑카벨 가문의 성채와 요새들은 로데브 유역을 따라 빈틈없이 늘어서 있다. 과거, 블랑독의 패권을 쥐기 위해 싸우던 시절의 흔적일 것이다.

동쪽으로 유유히 흐르던 로데브 강은 북안에 있는 도시, 벨모제를 지나 큰 지류로 갈라진다. 여기서 북쪽으로 흐르는 지류를 ‘북 로데브 강’이라고 본류와 구분해서 부른다.

로데브 본류와 북부 지류 사이를 ‘델레망드 삼각주’라고 부른다. 로데브 본류 남안에 있는 트랑카벨 가문의 도시, 델레망드의 이름 역시 여기서 따 온 것이다.

당연히 트랑카벨 가문이 보유한 4개의 자작령 중 하나인 델레망드 자작령에 속한다.

삼각주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대단히 비옥한 곳이다. 게다가 수많은 작은 지류들이 흐를 뿐 아니라 관개 공사도 완벽하게 해놓아 굉장히 좋은 농경지였다. 블랑독의 주요 곡창 중 하나임은 당연하다.

다만 큰 도시나, 거대한 석조 요새 등 방어 거점이 없었기 때문에 방비는 다소 약한 상태이기도 했다.

때문에 트랑카벨 영지군 중, 제19 델레망드 보병 연대가 이 지역에 상주하며 방어하고 있었다.

물론 제19 델레망드 연대는 그냥 주둔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발사!”

타타타탕!

타다당! 따당!

계단식으로 만들어진 농지 측면에 교묘하게 배치된 총병 진지에서 폭음과 함께 하얀 화약 연기가 뿜어져 나온다.

“흐어억!”

“적이다! 모두 멈춰!”

“총병 앞으로!”

“어어, 밀지 마! 밀지 말라고!”

좁은 밭둑길을 따라 이동하던 성전군 보병 대열이 순식간에 얼어붙는다. 반격을 위해 움직이려 하지만 공간이 좁아 쉽게 나아가기도 힘들고, 자리를 비켜주기도 힘들었다.

“으윽!”

첨벙! 또 한 번 총소리가 울리자 총에 맞은 병사가 농수로에 빠져든다. 뒤늦게 앞으로 나선 총병들이 반격해보지만 총병 진지에 적이 남아있는지도 알 수 없다.

밭을 둘러싼 밭둑은 아주 단단하게 다져져서 돌벽처럼 느껴진다. 그 위로 빽빽하게 자란 나무들은 몇 년 동안이나 얽히고설키면서 식물 줄기로 된 벽을 밭둑 위로 올린다.

이는 칼과 같은 날붙이로는 뚫지 못할 정도로 질겼고, 도끼로도 한참은 뚫어내야 할 정도로 단단한 경계선이 되었다.

제19 델레망드 연대의 구성원 중 절반은 이 델레망드 삼각주 출신이다. 그렇지 않더라도 여기 주둔하면서 반년 이상을 보냈다.

이 남부 엘랑키아 특유의 밭둑길 전투에 전문가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크아악! 찔렸어!”

“시발 뭐야!”

빽빽하게 자란 밭둑 잡목림은 자연물인 만큼, 당연히 균일한 상태는 아니다. 중간마다 폭이 좁은 곳, 구멍이 뚫린 곳도 있다.

이건 미리 기다리던 쪽이 아니면 알 수 없는 정보이다. 나무 사이의 틈으로 창이 쑤욱 하고 나오더니 갑옷으로 보호되지 못한 허벅지를 찌른 것이다.

찔린 쪽에서도 당연히 자신들의 창으로 잡목림 너머를 찌르려 하지만, 살아있는 나무줄기의 벽은 창을 통과시키지 않는다. 아니라 탄력 있지만 거친 표면으로 창대를 잡아 놓지 않는다.

“후퇴! 후퇴하라!”

“순서대로 물러선다! 대열 유지해!”

버티지 못한 성전군 용병들이 물러서기 시작한다. 반격은 포기하고, 똘똘 뭉쳐서 혹시 모를 다른 공격에 대비한다.

타타타탕! 타탕!

“흐으윽!”

“악! 맞았어!”

“맞은 놈은 먼저 빠져!”

하지만 추격은 없다. 밭둑길이 시야가 트여있다 생각해 진격로로 삼은 것이 실수였다. 시야가 트여있다는 건, 적의 사격에 고스란히 노출된다는 이야기니까.

몇 차례 어디서 날아오는지도 모를 사격에 피해를 더 입고, 시체를 남긴 상태로 비참하게 후퇴한다.

“적이 퇴각했다! 혹시 생존자나 매복이 있는지 확인!”

“옛!”

잠시 시간이 지나고 전장에 자욱하던 화약 연기가 사라졌을 무렵, 여기저기서 머리가 불쑥불쑥 올라온다.

적은 아군을 발견조차 못했다는 자신감이 트랑카벨 병사들의 가슴을 가득 채웠다. 적이 몇 번을 오건, 똑같은 꼴을 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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