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164화 (164/556)

24-6. 제2차 아넥시 방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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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이 조금 틀어졌다.

내 원래 계획은 성전군 주력과의 결전을 늦추는 것이었다. 아넥시는 적을 ‘잠깐’ 묶어 둘 미끼였다. ‘잠깐 동안’ 말이다. 그 사이 아군이 이득을 볼 셈이었고.

적의 보급선이 충분히 늘어나고, 충분히 분산배치 될 때까지 기다린다. 게다가 일부러 상대하지 않아서, 한동안 승승장구하도록 내버려 둔다. 빈 땅에 들어가 깃발을 꽂고 주신의 이름으로 해방하는 것도 승리는 승리니까.

주신의 뜻을 받드는 신성한 기사님들은 이 '신에게 바칠 전공'을 위해서 블랑독 방방곡곡의 도시와 마을로 흩어져 나아가겠지. 그렇게 충분히 흩어진 이후에야, 아군을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다.

내가 그 기준으로 잡은 것이 바로 아넥시에서 전투가 시작되는 시점이다.

적의 선두가 아넥시에 도달하면, 공격하게 내버려 둔다. 대신 아넥시로 들어오려는 후속 전력을 철저하게 노려 때려 부순다.

특히 공성포와 공성병기 제작용 목재 등 공성에 도움이 되는 물건을 보유한 수송부대는 철저하게 막아야 한다.

식량 수송부대 역시 최대한 털어먹는다. 하지만 공성병기에 비하면 우선순위는 떨어진다. 초반 몇 차례의 습격이 지난 이후에는 적도 바보가 아닌 한 방비를 해오므로 불필요한 전투는 최대한 피한다.

어차피 성전군은 법황청이라는 대륙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막강한 배후가 있다. 보급선도 길지 않아서 현실적으로 식량 차단은 불가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본격적인 전투부대의 우선순위는 더더욱 떨어진다. 초반에야 몇 번 기습해서 재미를 보았지만, 이제는 잘 가려서 싸워야 한다.

숫자가 적거나 약해 보이는 적은 기습하여 섬멸하되, 대규모 전투 부대는 굳이 차단하지 않는다. 아군 기습부대의 흔적을 계속 보여줘서 행군을 늦추는 정보로 충분하다.

결국 아넥시를 공격하는 적은 충분한 공성 전력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로 공격하게 된다. 보병의 숫자가 많으니 요새를 포위하고 육탄 공격이야 할 수 있겠지.

물론 겉으로 보기에야 금방 함락될 것처럼 보일 것이다. 언제 지어졌는지도 모를, 고대의 구닥다리 성벽. 성벽이 있다고는 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요새라기보다는 그저 벽을 두른 변경 촌락에 가까운 규모.

성벽 위에 올라있는 적은 정규군이 아니라 민병이 태반이다. 수비군 중에는 전력이 안 될 것 같은 늙은이들도 많이 보인다. 조잡한 구식 갑주에, 활과 쇠뇌 등 시대착오적인 무기들이 보인다.

굳이 현대적인 공성 전술을 활용할 필요도 없다. 압도적인 병력으로 사다리를 놓고 오르면 금방이다. 얼마 안 되는 방어군 따위 힘으로 눌러 주마. 그렇게 머리를 굴린 성전군은 자신 있게 공격을 선택할 것이다.

하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겠지. 그게, 아넥시니까.

이까짓 시골 성채 도시, 빠르면 사흘, 늦어도 일주일이면 함락할 수 있다. 평균적인 지휘관이라면 대충 그쯤 생각하리라. 그런 마인드로 공격한 성전군은 생각보다 완강한 공격에 직면하겠지.

그래도 겨울 동안, 각종 화기를 비롯해 무기와 방어구를 최대한 공급했다. 그래서 생각보다 화기의 수가 많고, 민병들의 무장 상태도 나쁘지 않다.

방어 계획은 슈토르히 연대 최고의 사격 무기 전문가, 첼레스티나가 이틀 간 고민해서 짰다. 성벽 안팎에서 공격도 후퇴도, 계속 사상자를 감수하지 않으면 하지 못하도록 동선도 짜 놓았다.

분명 아무것도 아닌 줄 알았는데 좀처럼 함락되지 않는다. 그래서 공격을 하고 또 해 본다.

며칠 공격하다 보면 어느새 정신을 차린다. 금방 떨어질 줄 알았던 아넥시 성은 여전히 견고하다. 어느덧 생각보다 많은 병력을 잃었다. 지금까지의 공격을 거듭해봤자 얻을 것은 없어 보인다.

어느새 허술해 보였던, 평지에 덩그러니 세워진 볼품없는 요새가 아니다. 적지 않은 병사들의 피를 빨아먹은 개미지옥처럼 보인다. 공격에 차출된 병사들이 차츰 활력을 잃어간다.

그저 블랑독 남쪽의 심장부로 진격하는 길에 점령하고 갈 생각이었던 요새가 아니다. 이건 뭔가 이상하다. 계산이 틀려먹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는다.

다시 냉정하게 생각해 본다. 뭔가 홀린 것처럼 병력을 투입해가며 아넥시를 공격하고 있었지만, 사실 아무 가치 없는 변경 도시일 뿐이다.

어차피 안에 아군의 진격을 방해할 만한 기동 전력이 있지는 않을 것이다. 늙다리 민병들이 태반인 도시인데. 설령 그렇더라도 최소한의 견제 병력만 남겨두고 우회하면 된다.

포위 중인 병력은 좀 더 유용하게 쓰자. 집결해서 후방을 교란하는 적을 공격해도 되고, 그대로 진격해 트랑카벨의 남부로 들어가도 된다. 그렇게 생각해서 포위를 풀게 되겠지.

그럼 그때는 우리 블랑독 연맹군 본대가 다시 나선다.

계속 적의 후방을 교란하며 병력을 깎아 먹어도 되고, 무리해서 로데브 강을 건너려는 적을 공격해도 된다. 최대한 이득을 볼 수 있는 상황을 만들면 지지는 않겠지.

아무튼 그 후로는 내가 잘 해봐야 할 일이고, 확실한 것은 아넥시는 해방된다는 것이다.

그게 내 계획이었다. 나름 많이 고민했고 합리적이라 생각했던 전략이다.

그런데 실패했다! 실패했다! 실패했다!!!

“정말 완벽한 계획이었어요오··· 콘도티에레!”

“완벽은 무슨 완벽이야, 첼레스티나. 완전히 실패했구만.”

“네에? 그건 적이 이상해서 그래요! 그렇잖아요? 성전군이 합리적으로 움직였다면 이렇게 될 리 없었다구요···.”

“...그건 그렇긴 하네.”

실패한 원인을 나름 분석해 보았다.

원인은 두 가지 정도 있는 것 같다.

“첼레스티나, 우리가 몇 번 이겼지?”

“네에, 볼까요? 베티제 언덕 전투, 무롱세 전투, 리솔 전투, 브륄랑시 전투··· 본대가 네 번 이겼고, 파견대를 포함하면 총 열한 번 이겼네요, 콘도티에레!”

“어느새 그렇게나··· 다들 참 부지런하게 살았구나.”

첫 번째 원인은 아마도 단기간에 너무 많이 이겼기 때문이다.

큰 전투는 아니라고는 해도 반 이상이 천명 단위 이상의 의미 있는 교전이었다. 무롱세 전투는 비록 쭉정이였다고는 하지만, 숫자가 3천 이상은 되는 중견 연대를 거의 궤멸시켰고 말이다.

결국 적은 생각보다 빨리 대응하기 시작했다. 마을이나 숲 같은 거점에 틀어박혀서는 나오질 않는다. 후속 지원군이 도착하면 그제야 조심조심 행군하는 통에, 이전처럼 기병 기습 공격으로 지리멸렬하게 만들어 털어먹는 전술은 불가능해졌다.

물론 싸운다면 이기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론상 무한한 인적 자원을 가진 성전군과 다르다. 소모전을 한다면 빠르게 병력이 고갈되어 전쟁을 할 수가 없다.

결국 소극적이 된 아군은 소규모 정찰 정도 외에는 블랑독 북동부에서 의미 있는 군사 행동을 하기가 힘들어졌다.

두 번째, 더 큰 원인은 어째서인지 적이 아넥시에 집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손해를 보면서도 병력을 빼지를 않는다. 대체 왜 변경의 보잘것없는 도시에 집착하는 것인지?

진격로에 방해가 된다기에는 볼품 없는 민병들이 지키는 곳이다. 이들이 아넥시를 나와서 활동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

추가적인 진격을 위한 보급기지로 쓴다고? 로데브 강 이북의 도시들 중, 성전군에 항복하지 않은 도시와 마을은 손으로 꼽힐 정도인데 굳이 집착할 이유가 없었다.

소문에 의하면 성전군의 총 책임자인 아르누아 추기경이라는 양반이 아넥시에 집착하는 모양이다. 대체 왜? 예전 아넥시 방어전에서 쓰러뜨렸던 용병 중에 친척이라도 있는가?

“추기경이라는 아저씨가 아넥시 성문 앞에서 성대한 의식을 집전했다고 해요! 정찰병들도 멀리서 구경했다 하더라고요, 콘도티에레. 음··· 무슨 성직자를 기린다고 했어요!”

“성직자를 기린다고?”

“네에, 무슨 성직자가 순교한 도시라면서 꼭 함락한다! 성사 중에 이런 말을 했다 하네요오···.”

“아넥시 전투에 성직자가··· 있었던가?”

내 기억으로 당시에 아넥시에서 죽은 용병 중에 성직자는 없었다. 뭐, 복장을 벗고 갑옷을 입었다면야 알아볼 방도가 없긴 하지만.

아··· 그러고 보니 수도사가 한 명 있었지. 이름이··· 뭐였더라. 보세낙? 보스낙? 뭐 그런 이름의 고블린 닮은 사제가 한 명 있기는 했다.

하지만 도망쳤잖아? 당시 아넥시 주민들에게 포로로 잡힌 용병들도 그렇게 증언했고. 아마 전투 중 불리해지자 바로 도망친 모양인데··· 그걸 왜 아넥시에 물고 늘어지는지 참 알 수가 없었다. 교단 놈들, 트집 잡는 건 아주 선수야 선수.

아무튼··· 확실한 것은 계획이 또 꼬여 버렸다는 것이다.

“첼레스티나··· 혹시 우리가 함정에 빠진 것이라면 어떡하지?”

“네에? 그건 무슨 말씀이신가요?”

“사실 이 모든게 냉철한 성전군 측 전술가의 계획이라면? 우리가 그자의 손바닥 위에 있는 거라면?”

“네에? 네에에? 말도 안 돼요, 콘도티에레! 최근 잠이 부족하신가요오? 열나고 계신가요?”

첼레스티나는 정색을 하며 내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댄다. 아니, 잠이 부족해서 피곤하긴 하지만 열 따위는 나지 않는다.

“평범하게 생각하셔야 할 것 같아요, 콘도티에레! 적이 이상하게 움직이는 건, 적이 큰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이상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으음... 아마 그렇겠지?"

확실히 요즘 첼레스티나가 진리와 통하는 이야기를 많이 해주고는 한다. 그녀의 말이 맞다. 조심하는 것도 어느 정도지, 이것도 저것도 다 함정이라고 생각하면 전쟁을 어떻게 하나. 그건 사령관이 아니라 과대망상증 환자지.

"고마워, 첼레스티나. 잘못하면 또 내가 저 망상의 심해로 빠질 뻔했네."

"헤헤헤, 다헹이에요, 콘도티에레! 그럼... 아넥시를 구하러 가나요?"

"음... 아니야, 아직은 준비가 부족해. 기병은 모여있지만, 보병은 아직 2개 연대밖에 집결을 못했잖아?"

"네에.... 확실히 그래요오."

첼레스티나는 걱정이 되는지, 이전에 자신이 작성했던 아넥시 방어 지도의 복제본을 들여다본다.

자와 각도기, 컴퍼스를 이용해 깔끔하게 그려진 지도에는 어울리지 않는 꼼꼼하고 귀여운 글씨체로,

- 여기가 아넥시 요새의 어깨!!!

- 저격 거리가 조금 기니 명사수를 배치할 것☆

- 방패판을 설치하면 측면으로 부터 안전~

등의 코멘트가 쓰여 있다. 물론 그거 하나하나가 황금 같은 조언이다. 일자 형태의 구식 성곽이라 다중 방어가 어려운 것을, 성벽 바로 뒤의 창고 건물을 이용해서 보강하기도 했고.

이전 아넥시 방어전에서 나와 모리츠가 사용했던 건물이기는 하지만, 그 때는 이렇게까지 훌륭하게는 이용하지 못 했으니까.

"아넥시를 당장 구하지는 못하지만, 아넥시로 가는 적은 약화시킬 수 있겠지. 로베르 드 나뵈프 경을 불러줄래?"

"네에, 콘도티에레!"

첼레스티나가 곧 로베르 경을 데리고 왔다. 다소 무표정하지만, 언제나 진중하고 성실한 정찰 연대장. 평소처럼 반듯한 자세로 내 명령을 기다린다.

"장거리 위력 정찰 임무를 맡아주셨으면 합니다. 평소보다 조금 멀리까지 다녀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어디든 명령만 내려 주시기 바랍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수행하겠습니다, 콘도티에레."

로베르는 다소 굳은 표정으로, 예상했던 대답을 한다. 분명히 로베르라면, 내가 그룬발트까지 다녀오라고 해도 이의 없이 다녀오겠지. 그것도 어떻게든 최단 루트를 찾아서 말이다.

다행이 이번에 갈 곳은 그룬발트보다는 많이 가까운 곳이다.

"뤼나메르 교차로, 기억하십니까?"

"뤼나메르... 아군의 전승지로 기억합니다, 콘도티에레. 드 포르망제 남작이 이끄는 현지인 보병을 지휘하시어 광신도들을 격퇴하셨던 전투 말입니다."

"하하, 로베르 경이 때 마침 적 후방을 기습하셔서, 그 광신도 적장을 쓰러뜨리는 전공을 세우셨었죠."

"길을 잃어 헤매다 늦은 것이 부끄러울 뿐입니다."

자신의 공은 언급도 하지 않는 점이 역시 로베르 답다.

사실 그 때 로베르가 길을 잃은 것은 아니었다. 내가 명확하게 집결지를 딱 찍어준 것도 아니고. 조우전이 거듭되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고대의 포장도로를 찾아 달렸던 것은 아주 훌륭한 판단이었다.

결과론적인 이야기라 함부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나폴레옹의 마지막 전투가 생각난다. 별동대를 이끌었던 원수가 로베르였다면 전장에 제시간에 도착하지 않았을까?

"그 쪽에 다시 가 주셔야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콘도티에레."

"그럼 자세한 임무를 설명하겠습니다, 로베르 연대장."

첼레스티나가 기다렸다는 듯, 블랑독의 지도를 펼친다. 내가 무슨 명령을 내릴지 궁금한지, 첼레스티나와 로베르의 눈이 초롱초롱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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