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163화 (163/556)

24-5. 제2차 아넥시 방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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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브리치오 델 로카라소는 아침 일찍 일어나 형인 법황청의 페르곤 보좌주교와 함께 간단히 아침을 먹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 생각이냐? 조만간 추기경님을 뵙고 인사드리도록 하자.”

“제가 이 전장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려 합니다, 형님.”

“참여하고 싶은 부대가 있느냐? 원한다면 공문을 보내 도움을 요청해 줄 수는 있으니 언제든 말 하거라. 법황청 산하 용병들을 맡겨줄 수도 있고···.”

오랜만에 보는 막내 동생이 퍽 걱정되는지, 보좌주교 페르곤은 신경을 많이 써주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형님. 하지만 잠시 병영을 돌아보고 싶군요. 추기경님을 뵙기 전까지는 제가 할 일을 찾아보겠습니다.”

하지만 나브리치오는 거절한다. 필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신이 생각하는 순서가 있었다.

전 대륙에 큰 영향을 끼치는 교단의 정점에 가까운 추기경의 보좌주교인 형. 그리고 소속마저 없는 떠돌이 용병이 된 동생.

신분이나 외형만 보아도 이질적이다. 도저히 친형제로는 보이지 않는다. 워낙 삶의 궤적이 다르다 보니, 일년에 한 번 만날까 말까 형제지만 두 사람의 대화에는 어떤 신뢰가 느껴진다.

“그렇게 하도록 하여라. 통행증을 써 주마. 그리고 절대로 말썽을 일으키지 않는다 맹세하거라.”

“네네, 맹세합니다.”

“농담이 아니다, 나브리치오! 나는 추기경님을 보좌하며 성전군 내의 크고 작은 분쟁을 관리하는 입장이다.”

선선히 동생의 말을 들어주던 페르곤 보좌주교가 이마를 찡그리더니 다소 언성을 높인다.

“모두에게 공정해야 하기에, 만약 네가 문제를 일으킨다면··· 그때는 네 편을 들어줄 수가 없다는 말이다.”

“맹세하겠습니다. 델 로카라소 가문의 이름과, 안텔레 형님께 제가 가지는 존경심을 걸고요.”

“후우··· 그래. 잘 해주리라 믿는다.”

페르곤은 금방 엄한 표정을 푼다. 막 도착한 동생은 잘 모르지만, 그의 형은 성전군 내에서 인격자로 유명했다. 귀족은 존중하고 평민들은 배려하려 노력했기에, 성전군 내에서 그를 싫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해도 좋았다.

어찌보면 집에서 의절당할 지경으로 말썽을 일으키던 막내 동생에게 지금까지 형 대접을 받고 있다는 것만 보아도 보통 사람은 아닐지도 모른다.

“명심하겠습니다. 반드시 형님과, 추기경 예하께 도움이 되는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그 길로 막사를 나선 그는 물어 물어 어느 총병 부대를 찾아갔다.

“훈련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말씀이시오?”

하얀색 깃털 장식이 달린 붉은 모자를 쓴 초로의 총병 지휘관이 놀란 표정으로 되묻는다. 불쾌하다는 표정은 아니다. 다만 어째서 그런 요청을 하는지 궁금하다는 표정이다.

“그렇습니다. 가능하다면 견학을 하고 싶습니다.”

“흐음, 이유를 물어도 되겠소이까?”

“주변에 성전군 최고의 총병을 만나면 어디로 가야 하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다들 여기를 추천해 주시더군요. 루오시아 전투를 이야기 하면서 말입니다.”

“호오··· 흐음, 음. 그랬나요?”

총병 지휘관은 티를 내지 않으려 하는 것 같지만, 하얗게 변한 수염으로 덮인 뺨이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사실 누가 칭찬을 하는데 싫어하겠는가. 특히나 군인에게 그 솜씨를 칭찬하는데.

“크흠, 큼. 루오시아는 격전이었지. 루오시아에 틀어 박힌 알디온 반란군이 어찌나 끝 없이 몰려오는지.”

“그 이야기도 언젠가 듣고 싶군요.”

“기회가 된다면 말이오. 그런데, 혹시 어느 분의 막하에 계신 분이신지?”

“저는 나브리치오 델 로카라소입니다. 추기경부 산하에 있는 식객입니다. 주디칼리 법황령 출신이지요.”

“오호, 그러시군요.”

죄를 씻고 천국행을 위한 공덕을 쌓을 수 있는 성전이다.

진심으로 그것을 믿든지, 혹은 그저 자신의 솜씨를 보이고 싶어서든지, 운을 시험하고 출세하고 싶어서든지. 그렇게 개인 자격으로 참여해 종군하는 귀족 청년의 숫자는 상당히 많았다.

아마도 나브리치오 역시 그런 이들 중 하나라 생각했으리라. 추기경의 산하에 있다면 나름 사회적 신분이나 재산이 있는 귀족, 혹은 그 아들일테니 용병들 입장에서도 친해두면 나쁜 일은 아니다.

“뭐 좋소이다. 견학이야 얼마든지 하시오. 다만, 오늘은 실탄 사격 예정은 없소만···.”

"그래도 많은 것을 알 수 있지요. 그래서 훈련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호오, 나브리치오 경은 총기류를 다룬 경험이 꽤 있으신가보오."

"관심이 있어서 좀 배워 본 정도입니다."

"그럼 좋소이다. 귀족 분들 눈에는 우리 신병들이 어떻게 보이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신병이 많습니까?"

"루오시아에서 적의 공세가 워낙 거세서 말이오... 이번에 새롭게 모집하면서 숫자를 늘리기도 했고요."

그렇게 나브리치오는 이 총병대의 훈련에 따라가게 되었다. 특별히 훈련장이 있는 것은 아니고, 병영의 뒤 편, 말뚝을 몇 개 박아둔 허허벌판이 훈련 장소였다.

"다들 점화 되었나 확인하고! 장전!"

40명 정도의 신병들이 바쁘게 손을 움직인다.

"장전 끝났으면 대기해! 총구는 항상 전방이나 하늘을 향한다!"

긴장해서 유난히 늦는 일부를 빼면, 대부분 장전을 완료하고 총기를 수직으로 세운다. 기초 훈련은 괜찮게 받은 모양이다.

"조준!"

장전이 완료된 총기들이 일제히 전방을 향한다. 표적은 전방에 서있는 여러개의 말뚝이다. 물론 실탄 사격이 아니니 조준이 크게 의미는 없겠지만.

"발사!"

팡! 퓨퓽! 푸슝!

경쾌하거나 빡빡한 '탕' 소리 대신에 어딘가 김빠진 듯한 소리가 난다. 장약을 평소보다 오 분의 일에서 팔 분의 일 정도만 넣은 연습 사격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폭발로 인한 총기의 흔들림과 반동, 눈 앞을 가리는 뿌연 화약 연기 등의 현장감은 대단하다. 때문에 기초적인 훈련을 마친 신병들은 반드시 거치는 과정이다. 빈 총으로 화승도 안 끼워진 격철을 당기는 것 과는 진지함에서 차원이 다르다.

소량의 화약만 채운 빈 총이니 발사체는 없어야 하지만... 그게 있다. 누군가의 총구에서 뭔가가 발사되었다.

"빌어먹을! 어느 자식이냐!"

훈련 교관을 맡고 있던 총병 지휘관이 고함을 버럭 지른다. 나브리치오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자신은 그런 실수를 한 적이 없지만, 항상 누군가는 저런 실수를 한다.

"장전 끝내고 꽂을대는 뽑아서 원래 위치에 두라고 몇 번이나 이야기 했나! 이 얼간이들아!"

방금 발사된 미상의 발사체는 다름 아닌 화약을 다지고 총알을 밀어 넣는 용도인 긴 막대이다. 장전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화약을 다진 이후 뽑아내지 않고 방아쇠를 당긴 것이다.

훈련 중에 아주 흔한 실수이다. 심지어 실전에서도 자주 발생한다. 저렇게 꽂을대를 날려버리면 그 전투 중에 다시 장전을 할 수 없음은 당연했다.

"휴... 정말 답답하군. 꽂을대를 날려먹은 놈들은 다음 봉급에서 까겠다! 정신 차려라!"

"옛, 대장님!"

실수가 있기야 했지만, 전체적으로 무난한 훈련이었다. 꽂을대 날린 것 정도는. 장전 도중 폭발하거나, 사격 명령 전에 발사하거나 하는 심각한 문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니까.

"이거 부끄럽군요... 어떻게 보셨소이까?"

훈련을 마치고 총병 지휘관이 와서 묻는다.

"저야 뭐 그냥 견학인데, 어떻고 말고가 있겠습니까."

"그래도 사격을 배우셨다니, 우리 신병들에게 조언은 하실 수 있지 않겠소이까."

"흐음...."

나브리치오는 잠시 고민한다.

조언이라....

멀리서 보기에도 가늠자가 완전히 틀어져서 조준선 정렬이 전혀 안 되어 보인다. 신병들이 애초에 가늠자와 가늠쇠의 역할도 모르는 것 같았다.

장전할 때 화약을 너무 힘 줘서 빡빡 누른다. 무조건 잘 다지면 좋은 것이 아니다. 실제로는 적절한 힘으로 균일한 밀도를 유지시켜 주는 것이 좋다.

점화용의 고운 화약을 너무 많이, 대충 넣느라 많이 흘린다.

견착이 잘 되지 않아서 점화시 총구가 옆으로 흐른다. 반동이 훨씬 강한 정식 사격이라면 더 문제가 클 것이다.

왼손이 너무 앞으로 나온다. 사격 자세야 개인 차가 있다지만, 이러면 총기의 무게를 견디면서 조준하기가 쉽지 않다.

...등등. 할 말이야 많지만, 참는다. 이걸 다 말하면 싸우자는 것이고, 나름 실전에서 싸우는 상대의 자부심을 깎아내리는 행위이다.

현실적으로 평범한 총병에게는 정확한 조준 사격보다는 연사가 중요하다. 혼란스러운 전장에서 전열을 유지하면서도 꾸준히 총을 격발하는 것, 야전 총병의 최우선 미덕이다.

물론 위의 사항들을 꾸준히 교육하고 납득시키며 조금씩 개선해가면 좋겠지만... 그런 잘 짜여진 조직을 가진 군대는 아마 엘랑키아에 없을 것이다. 기사에 비해 총병이 천시받는 나라니까.

물론 제대로 된 총병이라면 끊임없이 더 나은 사격을 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지휘관은 끊임 없이 교육해야 한다.

암만 정확히 보다 많이 쏘는 게 중요하다고는 해도, 숙련 사수에게 이 두 가지가 모두 얻는 게 불가능한 능력은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정확한 사격은 생각보다 중요할 때가 많다.

의외로 뛰어난 저격수는 전장에서 여러가지를 할 수 있다. 지금부터 나브리치오가 보여줄 생각이지만. 그리고 이 활약은, '화승총은 어차피 사거리가 짧고 명중률이 낮다, 이 거리에서 맞출 수 있을리가 없어' 라는 생각의 틈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아직 미숙한 병사들도 보입니다만, 치명적인 실수가 없는 것만 해도 어디입니까. 대장님의 지휘 아래 정예군으로 성장하겠지요."

나브리치오는 어른스럽게 행동하기로 했다. 총병대 지휘관의 얼굴을 보면 성공적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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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앞에는 오랜만에 보는 지빌링엔 반연대의 지휘관인 에르만 슈피리와, 부하 간부인 알골 딘다르트가 서 있었다. 그 뒤로는 처음 보는 얼굴들이 보인다. 하나같이 강인해 보이는 전사의 얼굴이다.

아, 그리고 에르만의 종자이자 동생인 스테펜 슈피리도 보인다. 아직 어린 나이인데 형님을 따라 전장을 전전하는, 안쓰럽고도 장한 꼬마이다.

방금 북 로데브 강 부근의 아군 보급 거점에 도착한 지빌링엔의 간부들과, 트랑카벨 가문 재무책임자인 아쥬흐 사이에 새로운 계약이 있었다.

새롭게 트랑카벨 가문에 용병 계약 의사를 밝힌 지빌링엔 출신 용병들과의 추가 계약이다. 병력이 충분한 숫자에 이르렀기에 기존의 지빌링엔 반연대는 '반'을 떼고 정식 연대로 개편되었다. 또한 연대장인 에르만 슈피리는 추가로 지빌링엔 출신자 중에서 신병을 모집할 권리를 얻었다.

"모두 트랑카벨 영지군의 일원이 되어주어서 고마워요. 앞으로 용감하게 싸워줄 것으로 믿어요."

"트랑카벨을 위해 피를 흘리겠습니다!"

"후후, 피는 적게 흐르면 좋겠네요."

"아, 알겠습니다!"

피를 흘린다는 것은 지빌링엔 특유의 맹세 구호 같은 것이다. 아마도 그들의 별명인, '피 흘리는 흑곰'에서 온 말이겠지.

"뒤에 계신 분들은 처음 뵙네요."

아쥬흐가 뒤에 선 두 명의 새로운 지빌링엔 용병 간부에게 인사를 하자, 두 사람이 자기 소개를 한다.

"저는 피노트 베레입니다. 빈더갈렌 중대를 지휘하게 되었습니다, 아쥬흐 영주영애님."

"마로크 보르칼테라 불러주십시오. 휘어브루넨 중대를 지휘합니다, 영주영애님!"

빈더갈렌이나 휘어브루넨은 지빌링엔의 지방 이름이라고 한다. 기존에 트랑카벨 영지군과 함께 싸웠던 에르만의 용병들은 뮈다켄 출신이다. 즉, 저 두 사람은 다른 지역 출신의 용병대를 지휘해온 장교들이다.

그런데... 지빌링엔의 각 지역들은 서로 사이가 좋지만은 않다고 들었다. 한 부대에 속하게 되었으니 서로 싸우지야 않겠지만.

"여기 선물이 있어요. 지빌링엔의 문화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해서 무례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아쥬흐의 말에 내가 내가 두툼한 천 뭉치를 내민다. 몸종 같은 일이 아니다. 이건 엄연히, 지휘관이 해야 하는 일이다. 에르만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천 뭉치를 받아든다.

"트랑카벨의 일원으로 싸우는 동안은, 이 깃발을 사용해 주면 좋겠어요."

"어...."

에르만이 천천히 깃발을 펼쳐든다. 워낙 커서 혼자 펼치기 힘든 모양이다. 측근인 알골 딘다르트가 반대편에서 받아준다. 촘촘하게 박음질된 테두리 안쪽으로, 정교하게 수 놓인 그림이 드러난다.

"이... 이건!"

"트랑카벨 영지군, 지빌링엔 연대의 연대기예요. 부디 사용해주시면 감사하겠어요."

옅은 노란색 바탕의 한 가운데에는 포효하는 검은 곰이 그려져있다. 오른 쪽 앞다리를 크게 휘두르고 있으며, 옆구리에는 부러진 창이 꽂혀있다. 그리고 왼 쪽 앞다리로는 방패를 감싸고 있다. 크게 벌린 시뻘건 아가리와 거기 솟은 하얀 이빨은 보기에도 소름이 끼칠 정도로 리얼하다.

"방패에 그려진 문양은 설마...."

"트랑카벨의 상징인 올리브 문양이에요. 부디, 블랑독을 지키는 흑곰이 되어 주시길 바라는 마음에서 만들었어요."

"흐읍... 네엡!"

"잘 부탁드려요. 피 흘리는 흑곰 연대 여러분."

"모, 목숨을 바쳐 받들겠습니다!"

에르만의 눈에서는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고 있었다. 연대기가 자신의 눈물로 더럽혀질 것으로 생각했는지, 붕대로 감싸인 소매로 거칠게 닦아낸다. 지난 전투에서 중상을 입은 그는, 지금도 온 몸이 붕대투성이이다.

샹다메리 승리를 함께 이끌었던 알골도, 새로 참여한 두 명의 신임 장교들도 눈물이 멈추지 않는 모양이다.

약간은 이해가 갈 것도 같다. 지빌링엔은 오랫동안 내전을 거치면서, 외부 침입을 거치면서 정체성을 잃어갔다. 한 때 대륙을 호령하던 피 흘리는 흑곰의 이름도 사용하지 못할 지경으로 약체화 되었다.

용병대가 이름을 자칭하려면 최소한 연대급은 되어야 하는데, 분열된 까닭에 1개 연대조차 채우기 힘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겨우, 트랑카벨 가문의 후원으로 독립된 지빌링엔 연대가 결성되었다. 나는 소속감은 별로 강한 편이 아니지만...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소중한 것을 되찾아 오열하는 지빌링엔 용병들을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냉혈한은 아니다.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다. 정말 수고했고,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슬슬 보병들도 도착하기 시작한다. 이들이 활약할 전장도 정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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