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3. 제2차 아넥시 방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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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의 저희를 굽어살피시는 영이시여! 제 행동이 믿음에 어긋나지 않기를 바라나이다!”
요한 린데만 폰 아인푸르트, 아넥시를 지키는 방어 교회의 사제는 빠르게 기도문을 읊조린 후, 불 붙은 항아리를 힘껏 밀쳤다.
“이거나 처먹어라! 주신의 이름으로!”
끝에는 명백히 기도문이 아닌 한 마디가 더해졌다. 아무 말이나 하고 뒤에 신의 이름을 가져다 붙인다고 기도문이 되는 것은 아니다.
마치 아무 행위나 저지르고 신의 뜻을 행한 것이라 가져다 붙인다고 신성한 일이 되는 것은 아니듯이 말이다.
“흐아아아악!”
“그만 밀어! 길이 없다고!”
“저거 뭐야?”
“모두 피해!”
콰창!
와장창!
불균형한 무게중심 탓에 타원형 궤도로 빙글빙글 돌며 떨어져 내린 항아리는 바닥에, 아니 아우성치는 돌격대 병사들의 위로 떨어져 박살났다. 하나는 투구를 쓴 머리에, 하나는 흉갑을 입은 어깨에.
맨 머리면 모를까, 금속 방어구 위라면 이 정도로 치명상이 될 리는 없다. 맞은 병사야 상당히 아프겠으나 중상은 아니다. 깨진 질그릇 조각은 사람을 죽일 마큼 날카롭지도 않고.
하지만 항아리에 가득한 것은 술을 증류해 도수가 상당히 높아진 주정, 즉 알코올이다. 주변 병사들이 알코올에 흠뻑 젖어버렸다.
자극적인 술 냄새가 사방에 퍼질 사이도 없이···.
항아리 뚜껑을 단단히 봉한 천에 붙어있던 불이 알코올에 번졌다. 순식간에 확 하고 불이 퍼진다.
“으아아아악!”
“갸아아아아아악!”
가뜩이나 밀집해 있던 병사들 십 수명이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인다. 날카로운 비명이 운이 좋았던 동료의 귀를 찌른다.
“물러서!”
“조심···!
도수가 매우 높은 알코올은 통상적인 ‘연료’인 기름처럼 불이 붙는다고 진득하게 타오르지는 않는다. 알코올을 빨아올리는 심지나 공급량을 조절하는 잔, 램프와 같은 장치가 있지 않다면 확 하고 타오를 뿐이다.
특히 지금처럼 어딘가 끼얹어진 경우가 그렇다. 불이 옮겨붙을 다른 가연성 물질이 딱히 없다면 잠깐 거세게 타오를 뿐, 놀라울 정도로 금방 꺼진다. 음식에 향을 낼 때 독주에 불을 붙이는 경우가 있지만, 살짝 그슬리는 정도에서 꺼져버리는 것과 같다.
거듭 말하자면 ‘가연성 물질’이 없다면 말이다.
여기, 아넥시 성벽 앞에는 완벽하고도 예민한 가연성 물질이 잔뜩 있었다.
팍! 파팍!
“으아앗! 이, 이게 뭐야!”
갑자기 얼굴로 시뻘겋고 걸쭉한 뭔가가 튄 병사가 놀라서 눈을 거칠게 문지른다. 눈을 손바닥으로 닦아내고서야, 자기 손바닥에 묻은 게 뭔지 알게 된다.
누군가의 살점과 옷감이 뒤섞인, 찐득찐득한 핏덩이.
“히이익! 히이이익!”
그 병사가 기겁하며 비명을 지른 것은 얼굴에 피가 튀어서는 아니다. 그의 앞에 끔찍한 몰골의 동료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방금까지 살아서 선봉의 명예를 얻겠다며 기세 좋게 돌진하던 동료의 가슴은 시뻘건 짐승의 아가리처럼 쩍 벌어져 있었다. 열려서는 안 될 흉강이 열려 마치 펌프처럼 핏줄기를 쭈욱 쭈욱 뿜어내고 있었다.
마치 지옥의 깊은 곳으로 연결된 펌프 관처럼. 소름 끼치는 액체를 뿜어내는 지옥의 분수대.
“끄아아악!”
“억! 커헉!”
빵, 파팡! 파파파팍!
타다닥! 파팡!
여기저기서 연쇄적으로 탁한 폭발소리가 들린다. 비슷한 빈도로 여기저기서 핏줄기와 조금 더 기분 나쁜 뭔가가 치솟아 올라 주변에 뿌려진다.
지금 아넥시 성문을 향해 쇄도해 온 돌격대는 총병들이다. 조금 전까지 사격 대형을 이루고 성문 위의 성가퀴로 아무도 고개를 내밀지 못하도록 집중사격을 가하던 부대라는 말이다.
총병은 당연히 빠른 사격을 위해 예비 화약을 휴대한다. 당연히 손 닿는 곳에 있어야 빠르게 장전하고 다음 사격을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 방식은 개인이나 부대마다 차이는 있다. 다만 보통은 한 발 분량씩 적절히 소분하여 발사체인 납탄과 함께 포장하여서 다닌다. 띠에 둘러서 대각선으로 몸에 걸치기도 하고, 가방 하나에 넣어 허리쯤에 고정하기도 한다.
소분한 화약을 안전히 휴대하기 위해서, 보통은 잘 말린 나무로 된 통에 보관하거나 종이로 단단히 감싼다. 비용이나 버릇에 따라 다르지만 쉽게 구할 수 있는 제품들이기도 하고.
그런데 마른 나무도, 종이도 일부러 불쏘시개로 쓸 정도로 불이 잘 붙는 물건들이다.
그리고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은···.
파칵!
“그어억! 그르르륵!”
턱이 반쯤 사라진 병사가 피 거품을 뿜으며 무릎을 꿇었다. 가슴 앞에서 폭발한 화약의 여파가 흉갑을 타고 올라가 턱을 때린 것이다. 깨끗하게 쪼개진 턱이 떨어져 나가고 기도가 막힌 병사는 결국 순식간에 절명했다.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몸에 밀착한 상태에서 폭발한 화약의 위력은 가공할 만했다. 따로 쇳조각과 같은 파편을 섞지도 않았는데. 총신과 같이 폭발력을 한군데로 모을 수단도 없는데.
무섭게도, 여전히 인간의 신체 일부를 없애버릴 정도의 위력은 보여준다.
원래는 총열 내부에서 폭발해야 할 화약. 납탄을 밀어내 적을 쓰러뜨렸어야 할 화약이 소유자의 품에서 폭발하고 있었다.
“으··· 으어어! 으아아! 내 손!”
양손이 손목에서 없어진 병사가 고통으로 경련하며 비틀비틀 걷는다. 폭발하기 전에 탄약띠를 붙잡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몸에서 떨어뜨리는 데는 실패한 모양이다.
그 운 없던 병사는 마침내 무언가에 발이 걸려 넘어진다. 지근거리 폭발 때문에 가슴과 옆구리에 큰 상처가 난 동료의 시체였다. 양 손이 없어진 병사는 한참이나 일어서지 못하고 비척댄다. 하지만 혼란 통에 그를 도와주는 사람은 없었다.
지근거리 화약 폭발로 생긴 상처는 유난히 끔찍하다. 눈으로 보기에도 그렇다. 베이거나 꿰뚫린 상처와는 다르다. 마치 무지막지한 악력으로 한 움큼 뜯어낸 것과 같은 큰 상처이다.
그 때문에 다른 상처처럼 붕대 따위로 압박하는 식으로 막을 수도 없다. 피가 흐르던 혈관을 통째로 뜯어내기라도 한 듯, 어마어마한 피가 흐른다. 마치 몸속의 피를 다 꺼내기라도 할 기세로.
위치나 폭발력에 따라서는, 외부에 노출되면 안 되는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도 있었다. 지금 여기, 세로로 비스듬히 길게 뚫린 상처에서 나오려는 창자를 가까스로 붙잡고 있는 성전군 병사처럼 말이다.
“으아아아! 으아아악!”
“사, 살려줘···.”
“히이익, 도망쳐! 도망쳐!”
“아아아아아악! 뜨거워!”
소분된 화약은 사방으로 폭압을 뿜어낼 뿐, 화염을 동반한 큰 폭발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연쇄적으로 바짝 달라붙어 연쇄적으로 폭발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지는 않았다.
···물론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점화용으로 쓸 고운 화약을 담은 통을 따로 들고 다녔던 병사의 주위에서는··· 좀 더 참혹하고 끔찍한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20명에 가까운 병사들이 도저히 치료할 수 없어 보이는 끔찍한 상처를 입었다.
다른 20여 명의 보다 운 좋은 병사들은 화상을 비롯한 작은 상처를 입었다.
상처를 입지 않은 나머지도, 잘게 갈린 동료의 시체 일부를 뒤집어쓰거나 방금 전까지 ‘동료였던 것’이 폭산하여 피안개를 뿌리는 것을 보고야 말았다.
“으아아아! 으어어어!”
“사, 살려줘어!”
순식간에 감당 불가능한 패닉이 아넥시 성벽 앞을 휩쓸었다. 지휘관이고 간부고 병사고, 비명을 지르며 앞을 다투어 벗어난다.
결국 성벽 앞에는 죽은 자와, 살았지만 자력으로 벗어나기 어려운 자들만 남는다. 신체, 혹은 정신 일부가 결여되어 버린 희생자들이다.
이 성문 돌파 작전의 실패가 원인이 되어, 성전군의 공성부대 전체에 후퇴 명령이 내려진다. 성벽을 공격하던 병력이 빠르게 병력을 수습해 물러난다. 일시적으로나마 적을 몰아낸 성벽 위의 수비군들 사이에 함성이 메아리친다.
“주신이시여, 영이시여, 검의 대리인이시여! 제가 스스로 옳다 생각한 일을 행하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러나 이는 너무도 참혹하나이다!”
동료 수비군들의 함성을 들으면서도, 자신이 행한 대전과를 보고 창백해져 버린 방어 교회의 요한 사제는 연거푸 기도문을 읊조렸다.
“그, 사제님은 무서운 일을 해놓고 후, 후회하는 거요?”
요한과 함께 항아리를 떨구었던 40대의 민병이 이상하게 여겨졌는지 묻는다. 그 역시, 몇 미터 아래 성벽 앞에서 벌어진 아비규환의 모습에 조금 질린 것 같기는 했지만.
“후회라니요, 결단코 후회하지 않습니다!”
요한은 씩씩하고도 당당하게 대답한다. 괴로운 표정으로 기도문을 읊조리던 때와는 사뭇 다른 반응이다.
“그, 그럼 어째서 그렇게나 힘들어하시면서 기도를 올리시는 거요?”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현실이 괴로워서 그렇습니다. 하지만 누군가 죄를 지어야 한다면, 차라리 사제 된 몸으로 짊어지는 게 마땅하겠지요! 주신의 뜻을 행한 검의 대리인처럼 말입니다!”
“그, 그렇구려.”
“언젠가 이 몸이 주신의 심판대에 서게 될 때 그 죗값은 기꺼이 질 것입니다!”
주변의 수비병들은 대부분 정순파 교리를 믿는다. 그래서 엄밀히 따지자면, 주신교 본 신앙 교단의 교리를 따르는 요한 사제와는 믿음의 형태가 조금 다르다. 방금 요한이 읊조린 기도는 정순파의 교리 구조와는 모순되는 내용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 사제의 굳은 결의를 의심하거나, 지적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평신도들 처지에서 자기가 믿는 종파의 교리를 정확히 알지 못했기도 했지만, 너무도 단호한 요한의 기백에 압도당하기도 한 것이다.
어찌 되었든, 이렇게까지 온 상황에서 요한 사제를 믿지 않는 아넥시 수비병은 아무도 없었기도 하고.
“스승님! 폭발을 보았습니다!”
“오오, 아르옌 수사. 상대의 첫 성문 공격은 성공적으로 막았다네!”
같은 방어 교회 소속의 수도사이자 제자인, 아르옌 그로반이 달려오자 반갑게 인사한다. 하지만 방금 너무 많은 사람을 자기 손으로, 그것도 참혹하게 죽였기 때문인지 얼굴이 조금 핼쑥해 보인다.
“성문을 완전히 막아둔 것이 아주 주효했네요!”
“음음, 그렇고말고. 트랑카벨의 콘도티에레라는 지휘관은 아주 냉철한 지휘관이야.”
“스승님이 보시기에도 그렇습니까?”
“그렇다네. 우리 방어 교회가 아무리 방어의 전문가들이라지만, 성문을 아예 통과 불가 수준으로 막아 버리고 그 자체를 적을 끌어들이는 함정으로 쓰겠다는 발성은 없었다네.”
“그렇군요··· 저도 많이 놀랐습니다.”
현재 아넥시의 성문은 쓰이지 않는 건물을 허물면서 만들어낸 벽돌과 자갈로 꽉꽉 채워 막혀있었다. 때문에 페타드를 이용해 성문을 뚫었으면서도 바로 앞에서 막혀 버린 것이다.
물론 충분히 시간을 들인다면 언젠가 뚫을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몇 톤이나 되는 석재와, 몇 미터 깊이나 되는 벽을 뚫는 것은 그냥 성벽을 뚫는 노력이나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도시에서 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스승님.”
“하하하! 도시가 안전해지면 다시 치워서 길을 뚫어야겠지! 허나 전투 중에 나갈 일이 있겠나? 참고로 뒷문도 마찬가지로 막아 놓았다네!”
"이겨야 나갈 수 있겠군요!"
"바로 그렇다네!"
유쾌함을 되찾은 요한이 껄껄거리며 말한다. 제자인 아르옌 수사 역시 빙그레 웃음을 짓는다.
"사격 포인트를 관찰한 결과는 어땠나?"
"음... 트랑카벨 가문에서 만들어 줬다던 방어 계획서에 지정도니 사항이 워낙 완벽해서 손을 댈 것이 없었습니다."
"오오, 그 정도인가!"
"예. 성공적인 대응 사격을 통해서 수월하게 싸울 수 있었습니다."
아르옌 수사가 들고 있는 화승총에서는, 방금까지도 사격한 듯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 자신도 뛰어난 사수이자, 방어 교회에서 방어 배치를 공부한 그는 아넥시 사격부대의 배치를 '조언'하는 역할이었다.
다행히도 아넥시에 도착한 이래로 항상 보여준 헌신적인 모습에, 그의 '조언'을 따르지 않는 수비군은 없는 모양이다. 어떤 의미로 이 성실한 제자는 다소 부적절한 언행을 했던 스승 보다 신뢰받고 있었으니까.
"거 보라구. 콘도티에레와 그 부관님이 아넥시에 머물면서 만들어주신 문서라니까? 성녀께서 보내주신 사도 분들이 실수하실 리가 없지 않은가! 성녀의 도시 아넥시는 난공불락이라고!"
아넥시 주민 대표이자 수비 책임자이기도 한 루옹이 마치 자기 자랑이라도 하듯 말한다. 자기 집에 있는 금송아지를 자랑하기라도 하는 말투이다. 그의 흉갑과 가죽 코트는 점점이 튄 선혈로 더럽혀져 있었고, 옆에 세운 육중한 벌목 도끼에는 진득한 피가 묻어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굴은 활짝 웃고 있다. 오늘도 무사히 승리했으니까.
"이렇게 버티고 있으면, 결정적인 순간에 성녀의 사도, 콘도티에레가 이끄는 군대가 올 것이오! 성녀의 도시는 함락되지 않는다!”
“우와아아아아아!”
아넥시 수비군의 주력은 민병들이지만, 그 기세는 실로 대단하다. 왜냐하면, 그들의 절반은 과거 아넥시 방어전에 참전해 ‘성녀의 기적’을 목도했던 용사들이며, 나머지 절반은 안전한 피난길을 거부하고 굳이 위험한 아넥시로 찾아온 정순파 신도들이었기 때문이다.
모두가 전설처럼 내려오는 ‘성녀가 지켜낸 도시’ 이야기를 믿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전투에서 패배해 붙잡히면 이단으로 참혹한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찾아온 이들이 약할 리가 없었다.
얼굴 모를 성녀의 사도라는 콘도티에레는 아넥시 수비군을 완벽하게 조직해 놓고 갔다. 방어 교회의 사제가 처음 마을에 도착하면 친해지고 유대를 쌓는 일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방어군의 조직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이미 방어 지구까지 철저하게 지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숙련도는 낮지만 사기가 높고 적극적인 수비병들을 가장 효율적으로 활용한다. 서로 위험을 분담하면서 한 가지 일에 몰두하도록 하는 것이다.
무릅쓰는 위험이 서로 간의 유대를 깊게 하면서, 한 가지 일만 하면서 숙련도도 자연스럽게 올라간다. 결과적으로 성벽은 무너져도 수비병은 무너지지 않을 이상적인 상태가 된다.
나름 방어 전문가라는 자부심을 가진 요한은 역시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넥시는 역시 쉽게 함락되지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