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 제2차 아넥시 방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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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가 지속된 아넥시 성벽은 엉망진창이 되어있었다. 여기저기 보강해놓은 임시 목재 방어 판들이 부서져 나가고, 흩뿌려진 공격자와 방어자의 혈흔이 역력하다.
탕! 타당!
타다당! 타탕!
아넥시의 성벽은 고대 아란 제국 시절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오랜 역사가 남아있는 돌벽에는 총알이 부딪친 흔적이 끝없이 늘고 있었다. 아마 성벽을 통째로 새로 짓지 않는 한, 이 흔적을 완전히 지우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며칠간 치열하게 계속된 전투는 싸우는 인간들 뿐 아니라 성벽에도 그만한 상처를 남기는 법이다.
성벽에서 비교적 가까운 곳에는 작은 바리케이드가 만들어져 있었다. 목재와 철로 보강된 방패 판과 각종 잡동사니로 이루어진 바리케이드였다.
거기 숨은 성전군 측 총병들이 성벽 위로 총탄을 쏘아대고 있었다.
탕탕! 타탕!
어중간한 거리에, 수비병들 역시 최대한 성벽 너머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해 당장 큰 피해는 없었다. 그렇지만 슬쩍 고개를 내밀 때마다 근처 성가퀴에 와서 부딪치는 총탄은 확실한 부담이었다.
사다리를 통한 등반 공격 역시 계속해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사다리를 통해서 어떻게든 성벽 안쪽으로 침입하려는 보병들과, 이를 필사적으로 막으려는 수비군 사이의 치열한 전투가 반복된다.
공격측의 보병이 신앙심과 전장의 명예, 그리고 공성전 특별 수당에 대한 욕심으로 무장하고 성벽에 도달한다. 그리고 각종 방해를 뚫고 사다리 끝에 올라간다.
그러면 수비군이 이를 막아내기 위해 고개를 내밀어야 한다. 이를 놓치지 않고 공격측의 총병들이 성벽 위를 노리고 있다. 슬쩍이라도 고개를 내밀면 귓가를 스치는 총알을 느낄 수 있고, 운 나쁘면 그대로 절명이다.
반대로, 수비측의 사격 부대, 총과 쇠뇌, 활 등이 사다리 위쪽을 노리는 성전군 총병을 노린다. 아무리 숙련되지 못한 사수였더라도, 며칠간의 전투를 거치면서 이제 다들 평균 이상은 하고 있었다.
“크아악! 아, 으아악!”
성벽 위를 조준하고 있던 성전군 총병의 얼굴에 총탄이 박혔다. 총병이 왼쪽 눈 아래를 손바닥으로 감싸고 절규한다.
“끄으으, 으으으윽! 시파알!”
“손 치워 봐!”
"아으으윽!"
“치료하면 뒤지진 않겠네! 다행이야!”
먼거리에서 날아온 납탄은 다행히도 힘을 거의 잃은 상태였고, 광대뼈를 뚫지 못했다. 대신 두개골의 표면을 갉아내면서 손가락 몇 마디 정도 파고들다 관자놀이 앞에서 튕겨 나갔다.
그 때문에 왼쪽 눈 아래의 얼굴 피부가 말 그대로 찢겨 나갔다. 동료의 말대로 꿰매고 잘 관리하면 죽지야 않겠지만··· 다시 전열에 복귀하려면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다. 흉터도 크게 남겠고.
바리케이드 쪽에서 잠시 소란이 있었지만, 부상자가 부축을 받아 치료를 위해 이동한 이후 다시 총격전이 재개된다.
이제 성전군 총병들 역시, 무작정 이단자들이 성벽 위로 고개를 내밀기만을 조준 상태로 기다리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한편 그 와중에 성벽 위에서는 신무기가 등장한다.
“으쌰아!”
마치 커다란 낫 모양 쇠붙이를 단단한 창대에 고정한 듯한 모양새이다. 수비병인 이것을 가지고 성전군이 가져다 댄 사다리에서 조금 떨어진 장소에 모습을 드러낸다.
상체를 최대한 숨기고, 성가퀴에 바짝 붙어서는 무기만 내민다. 그리고 사다리 쪽으로 뻗는다. 굳이 고개를 내밀어 그쪽을 볼 필요도 없었다.
큰 낫을 내밀고, 흔들어서 뭔가가 걸리면 당긴다.
적병의 무기가 걸리면 무기를 당긴다. 적병이 걸리면 적병을 당긴다. 사다리가 걸리면 사다리를 당긴다. 심지어 좌우에서 동시에 적으면 2개, 많으면 4개 이상의 낫이 한꺼번에 달려든다.
적병이나 무기가 걸리면 적병을 사다리에서 떨어지게 할 수 있었다. 사다리에 걸리면 디딤대를 부숴 버리거나, 최소한 흔들기라도 할 수 있었다.
“으랴아아!”
“어어어! 뭐야 이거! 어어!”
“조심해!”
자신의 무기로 낫을 쳐내려고 했으나, 반대편에서 접근하는 낫 대가리를 보지 못했다. 흉갑 사이의 틈에 낫이 걸린 병사가 비명을 지르며 사다리를 놓치고 만다. 치명상은 아니겠지만 낙하의 충격에 한동안 일어서지 못한다.
어찌 되었건 어딘가에 낫이 걸린 상태로 흔들기만 해도 기어오르는 적병을 방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적병 자체에 상처를 입히며 생선 찍어 내듯 찍어 떨굴 수 있다면 대박이고.
이 무기는 방어 교회 특제의 간략화된 수성 병기이다. 화약과 총기가 화약을 지배하는 시대, 장창이나 미늘창 등 일부 형태만 남기고 대부분의 장대 무기는 사라졌다.
이를 수성전이라는 특수한 목적을 위해 효율적으로 재현한 것이다. 물론 나름의 연구와 경험에서 오는 개량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방어 교회가 파견한 사제, 요한 린데만 폰 아인푸르트가 가지고 온 대량의 짐에 상당량이 포함되어 있었다. 쇠로 된 머리 부분만 잔뜩 모아서 노끈으로 칭칭 감아 부피를 최대한 줄였었다.
노끈으로 묶인 시커먼 쇳덩이를 본 아넥시 수비군들은 수상한 언행을 하는 사제가 뭔 농기구를 잔뜩 가져왔나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실제로 성벽 위에서 잘 쓰이고 있었다.
“요한 사제 양반이 가져온 이 무기 꽤 쓸만하네!”
“한눈팔지 말고 다음 놈 올라온다! 아예 모가지를 따 버리라고!”
“아 올라오기만 해 봐 이 자식들아!”
자칫 성벽 아래에서 쏴대는 사격에 위축될 수 있었던 수비군들에게 든든한 무기가 아닐 수 없었다.
이 수성 낫의 두 가지 장점 중 하나는 어느 정도 요령만 익히고 힘만 있으면 대단한 훈련 없이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머지 하나는 물론 성가퀴에 몸을 최대한 숨긴 상태에서, 그것도 사다리에서 떨어진 상태로 쓸 수 있다는 것이고. 적 지원 사격의 조준은 보통 사다리 바로 위쪽을 노리기 때문이다. 거기서 벗어난 것만으로도 상당히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
요한 사제가 가져온 신무기는 이것뿐이 아니었다. 좀 더 단순하지만 유용한 무기도 있었다.
적이 한창 기어오르고 있는 사다리 위로 작은 바구니가 내밀어지더니 뒤집힌다. 안에 들어있던 작은 쇳덩이들이 우르르 떨어진다.
“으으읏!”
사다리 위의 성전군 병사가 반사적으로 팔로 얼굴을 가렸지만, 쇳덩이는 그 자체로는 크게 위협적이지는 않았다. 투구나 흉갑에 부딪혀 탕탕 소리를 내며 그대로 밑으로 떨어진다.
하지만 진짜 역할은 그때 부터 시작이다.
“마름쇠다! 마름쇠야! 조심해!”
“으아아악! 밟았어! 아아아!”
“마름쇠 치우고 시작한다!”
네 개의 모서리를 가진 검은 마름쇠가 떨어져 흩어진 것이다. 어떤 각도로 떨어져 어디로 떨어지더라도, 항상 네 개의 뾰족한 가시 중 하나는 하늘을 보게 된다. 부주의한 누군가가 이를 밟으면 발등이 뚫릴 정도의 중상을 입는다.
특별히 안 보이게 특수 처리를 한 것도 아니고, 위치를 알면 피해 갈 수야 있다. 하지만 문제는 사다리를 고정하고 기어오르기 위해 공성군이 바글거리는 장소에 뿌려졌다는 것이다!
결국 일시적으로 마름쇠들을 치우기 위해서 시간이 낭비되고, 그동안 사다리는 위태로워지는 것이다.
그리고 또 공격이 이어졌다 싶으면 다시 마름쇠가 쏟아진다. 한꺼번에 많이 쏟아지는 것도 아니다. 방어군 측 역시 마름쇠의 수가 무한은 아닐 테니, 한 번에 네 개 혹은 다섯 개 정도.
어찌 됐건 또 치우기 위해 공세는 약간이나마 지연될 수밖에 없었다. 발바닥에 구멍이 뚫리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어어어, 저거!”
“요한 사제님! 그놈들이 또 옵니다! 그, 그··· 뭐냐 그거! 그거요!”
성문 쪽 위에서 밖을 내려다보던 수비병들이 호들갑을 떨며 방어 교회 소속 사제 요한 린데만 폰 아인푸르트를 부른다.
“페타드 말입니까?”
“네! 페타드요, 그거, 페타드!”
“뜨거운 맛을 보여줬는데도 또 오는군요!”
요한 사제는 혀를 차며 성가퀴 너머로 슬그머니 적을 바라본다. 성문 앞에 수비군이 세워 놓은 바리케이드와, 시체 사이를 지나 달려오는 몇 명의 병사들의 모습이 보인다.
“으아아앗!”
파팍, 팍! 어찌나 쏴대는지 고개를 내밀 수가 없었다. 적은 아예 작정하고, 100명 이상의 총병 중대를 하나 성문 앞에 박아놓고 있었다.
이들이 교대로 쏴대는 총탄이 쉴 새 없이 성벽을 두드리고 있었다. 어찌나 쏴대는지 화약 냄새와 함께 납탄에 갈려 나간 벽돌에서 나는 돌가루 냄새가 같이 날 지경이다.
“이거 큰일이군요!”
요한은 성벽의 양쪽 모서리에 놓은 두 개의 항아리를 바라보았다. 단단하게 밀봉된 항아리에는 아넥시에 잔뜩 있는 저급 포도주를 증류한 높은 도수의 증류주가 들어있다.
당연하지만 마시는 용도는 아니다. 순수한 알콜은 아니지만, 불을 붙이면 쉽게 붙을 정도로 높은 도수의 술이다. 생으로 저만큼 마시면 바로 코가 비뚤어지겠지.
용도는 화염병이었다. 화염 항아리라고 해야 할지. 뚜껑을 봉인한 천에 불을 붙여 성벽 너머로 던진다. 땅에 떨어진 항아리가 깨지면서 잠깐동안은 주변이 불바다가 되는 것이다.
다만 높은 도수의 알콜은 불이 붙어도 순식간에 타오르기 때문에, 주변에 특별한 인화물질이 없다면 불은 금방 사그라들고 만다. 그 때문에 아주 적절한 시기에 써야만 하는 것이다.
아까 그 무기, 페타드를 들고 왔을 때는 정확히 적병의 머리 위로 화염병을 던져 성공했다.
아마 성벽 앞 어딘가에 증류주를 뒤집어 쓴데다 자기네 폭발물의 폭발에 휘말린 불쌍한 성전군 병사들의 새카맣게 탄 시체가 있을 것이다.
페타드란 짜리몽땅한 원통이나 종 형태의 쇠로 된 관으로 된 폭발물이다. 안에 화약을 가득 채우고, 쇠로 된 뚜껑을 덮는다. 뚜껑은 화약을 밀봉하는 뚜껑이기도 하면서, 일종의 발사체이기도 하다.
"아으윽! 젠장 한 명은 잡았는데!"
모두 여섯 명의 성전군 공병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그중 두 명은 큼직한 솥처럼 생긴 쇳덩이를 들것처럼 나누어 들고 있었다.
나머지는 꽤 굵은 나무 토막을 어깨에 이거나 옆구리에 끼고 있었다. 굵은 밧줄을 어깨에 끼고 있는 병사도 보인다. 뒤에서 이어지는 아군 총병대의 집중사격을 믿고 조심조심 접근하고 있었다.
방금 한 명은 사격으로 쓰러뜨린 모양이나, 나머지는 바퀴벌레처럼 재빠르게 장애물을 요리조리 피하며 성문에 붙는 것을 막지 못했다.
"젠장! 성문에 붙은 적을 저격할 방법이 없네!"
방금 위험을 무릅쓰고 상체를 내밀었던 화승총 사수가 아쉽다는 듯 한탄했다. 아란 제국의 건설자들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몰라도, 특별한 돌출부나 강화 망루 등이 없다.
평범한 일자 성벽이다. 게다가 성벽길 아래로 뚫린 투석구 따위의 공격 수단도 없다. 결국 성문에 바짝 달라붙은 적을 공격하려면 성문 위 성가퀴 너머로 몸을 내밀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적도 작정하고 집중사격을 하는 이런 상황에서 그건 무리다. 용기의 문제가 아니라 그냥 병력 낭비이고 개죽음이다. 설령 그렇게 하려고 했다 해도 주변에서 말렸겠지만.
"항아리라도 던질까요, 사제님?"
"음, 아닙니다. 적들이 작정하고 집중사격 중이니 더 낭비하도록 두시죠."
"에이잇, 아쉽구만."
자칫하다가 희석하지 않은 증류주, 아니 주정이 잔뜩 담긴 항아리가 성벽 위에서 터지면 큰일이다.
"이래서 북방에서는 별 모양으로 성을 짓습니다."
"별 모양으로 건물을 짓는다고? 그게 똑바로 서긴 합디까!"
"아, 별 모양으로 세운다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별 모양이라는 거지요. 성벽 어느 부분을 공격당하든 두 군데 이상에서 공격당하게 됩니다."
"아이고 우리 성벽에도 그런 거 좀 지어 두시지!"
"그러게요, 시간만 있었으면!"
머리 위로 총탄이 오가고, 발 밑에서 적 공병들이 폭약을 설치하는데도 분위기는 그다지 급박하지 않다. 성문이 호락호락 뚫리지 않을 것을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항아리는 혹시 진짜로 뚫리면 그때 던지죠!"
"알았습니다!"
불안한 마음이 없지는 않지만, 사전 준비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