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 트랑카벨 기병 사령부
“이게 대체 무슨 소리지?”
“침착하라! 이단자들의 사악한 술법에 불과하다!”
“아까 기병들이 적들은 이단 마술을 쓴다고 했어!”
“가서 막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대장!”
더켄데일 기사대장 헤로스 멀레어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의 자랑스러운 부하들이 패닉에 빠지고 있었다. 강철처럼 예리하고 화강암처럼 단단하던 동료들이 말이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전장에 함께 나갔었다. 지원군이 오지 않으면 이길 수 없는 절체절명의 상황도 겪었다. 터무니없는 포화에 순식간에 형제의 삼 분의 일이 죽어 나가는 상황도 겪었다.
항상 이기기만 한 것은 아니지만, 교단의 적을 상대로 사납게 싸웠고 그 결과로 지금까지 교단을 지켜왔다. 어떤 상황에서도 용기와 신앙심을 잃지 않고 헤로스를 따랐던 용사들이 아닌가.
그랬던 더켄데일의 기사들이 갑자기 이성을 잃고 공포로 날뛰고 있었다.
“아라라라라! 아라라라라라라!”
“아라라라라라라라!”
하지만 헤로스 자신도 공포심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 지옥의 문 너머에서나 들릴 법한 소리는 대체 무슨 소리일까?
블랑독의 이단자들이 정말로 지옥에서 악마들을 불러 낸 것일까?
트랑카벨의 탕녀라 불리는 이단의 대제사장이 악마와 몸을 섞어 사람을 홀리는 힘을 얻었다는 소문은 있었다. 그렇지만 굳건한 신앙심으로 무장한 무장 수도사들인 자신들은 그 영향을 받지 않으리라고 믿었다.
아니, 어쩌면 신앙심이 깊은 만큼, 또 다른 신비에 대한 면역이 약한지도 모른다. 그 신비를 내가 믿는 신앙의 대상이 막아줄 수 없다면 말이다.
“헤로스 경!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적의 사격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동료 형제들의 아우성이 헤로스를 현실로 돌아오게 했다. 조금이나마 정신을 차렸다. 일단은 여기서 벗어나야 했다.
“모두 침착해라! 적이 뭔가 속임수를 쓰고 있지만, 그것만으로 우리를 이길 수는 없다! 직면한 위협에만 대응해!”
사실 그 자신의 머릿속도 엉망진창이었지만, 뭐라도 말하고 대응하지 않으면 부대가 무너진다.
“우선 이 자리를 벗어난다! 퇴각한다!”
“어, 어디로 가야 하겠습니까?”
“후방, 왔던 곳으로 돌아간다! 전방 대열에 전해라!”
“후방에도 적 기병들이 있지 않습니까?”
“시야가 가려진 숲에 무작정 들어가는 것보다는 낫다. 더켄데일이 언제부터 느슨한 기병 포위망을 두려워하게 되었지?”
“그··· 맞습니다, 헤로스 경!”
역설적이게도 결단력 있게 행동하자,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 생긴다. 주변 부하들 역시 정신을 좀 차린 모양이다.
지금까지 당한 피해는 어쩔 수 없다. 중요한 것은 남은 병력이라도 추려서 전장을 벗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보다 우세한 아군 부대와 협력하여 반격해야 한다.
“전군 반전하라! 퇴각한···.”
쿵, 퍼억!
괴상한 소음이 격렬한 공기의 흐름과 함께 느껴졌다. 바람의 칼날에 찢겨나간 풀잎이 사방으로 흩날린다. 자신과 형제들의 망토, 더켄데일의 상징이자 자랑인 하얀 모직 망토가 부웅 떠오른다.
스윽, 하고 시야가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시간차로 뜨거운 고통이 옆구리에서 느껴졌다. 뜨겁게 달궈진 단검으로 옆구리를 마구 쑤시는 것 같은 통증.
“흐읍··· 흐어억!”
손을 가져대 대자, 흉갑의 매끈한 표면이 느껴져야 할 곳에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우격다짐으로 뜯어낸 것 같은, 날카로운 갑주의 절단면이 장갑 너머로 느껴진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어? 어어! 헤로스 경! 헤로스 경!”
“으아아! 적의 마법이다!”
옆구리가 갑옷째로 한 움큼 뜯겨 나간 헤로스 멀레어가 휘청이다 무릎을 꿇었다. 허리부터 아래가 갑자기 말을 듣지 않았다. 뜯겨 나간 허리 부분의 단면에서 소름이 끼치는 내용물이 울컥울컥 솟아 흘러 허벅지를 적셨다.
경험한적이 없는 낯선 통증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커헉!”
입에서 걸쭉한 피가 솟아오른다. 배에 상처가 나서 입으로 찐득거리는 피가 올라오기 시작하면 이미 늦은 것이라고 했던가. 허벅지 높이까지 웃자란 들풀 냄새가 훅 하고 올라온다.
“으아아아! 주신이시여!”
“살려줘!”
“아아아! 으, 으아아아아!”
그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절대로 보고 싶지 않았던 것. 바로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치는 더켄데일 기사단의 모습이었다.
“머, 멈춰···.”
안타깝게도 헤로스의 마지막 말은 형제들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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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렬이 늦은 게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나···.”
주변 언덕 지형이 좋지 않다. 둥그스름하게 부풀어 오른 형태의 완만한 언덕이 아니라서 그렇다. 높지는 않더라도 바위투성이에 울퉁불퉁, 상면도 비탈도 고르지 못했다.
그래서 기마 견인포를 배치하던 포수들이 고생한 모양이다. 뒤늦게 괜찮은 위치를 찾았으나 공간이 좁아 2문밖에 배치하지 못해 포격을 개시해도 되냐는 연락이 와서 그러라고 했는데···.
그렇게 힘들게 준비해서 겨우 첫 포격을 시작했다. 그런데 그 두 발의 포탄이 잭팟을 터뜨렸다.
지금까지 어떻게든 질서를 유지하고 있었던 적이 우르르 무너져 도망쳤던 것이다. 나도 전쟁을 계속하고 있지만 잘 버티던 부대가 어떤 계기로 인해 갑자기 무너지는 순간은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
정말 표면 장력으로 버티던 물잔이 와르르 넘쳐버리는 순간과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적이 도망가네요! 추격 명령을 내릴까요?”
“음··· 아냐 계획대로 하자. 저래도 포위망을 빠져나가면 어쩔 수 없지. 우리는 그··· 이제 한 사, 오십 분 거리 정도 남은 적이 또 있잖아?”
“네에! 맞아요, 그 생각을 못 했네요, 역시 콘도티에레!”
“첼레스티나는 우선 그쪽에 대해서 알아봐 줘. 적이 갑자기 속도를 높이거나 하지는 않았는지.”
“네에, 콘도티에레!”
어쩌면 오늘 두 탕을 뛰어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 병사들 고생하겠네.
전투에서 승리했다는 기쁨과 자신감도 좋지만, 피로는 어느 순간 갑자기 엄습해온다. 결정적인 승리의 순간에 뿜어져 나온 아드레날린의 영향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어느 순간 갑자기 팔이 무거워지고 가슴이 답답해진다는 것은 경험으로 알고 있다. 그러니 전투를 두 번 연속으로 하게 된다면 조금이라도 쉬게 해 줘야 한다.
그래도··· 종교 기사단을 이렇게 어정쩡하게 풀어 주는 건 아쉽기도 하네. 종교 기사단의 광신자들은 평범한 정치적 이득을 노리는 영지군이나 황금을 원하는 용병과 다르다.
분명 어떤 형태로든 블랑독에 해가 될 것이다. 그래서 최대한 잡아 죽이거나 포로로 잡아 둬야 한다.
뻐어엉!
두 번째 포격이 시작되었다. 거의 동시에 발사된 두 발의 포탄이 흩어지기 시작한 적의 보병 대열을 때렸다.
어디에 맞은 건지, 적 한 명이 허공으로 2미터 쯤 치솟았다가 빙글빙글 돌며 떨어진다. 피로 젖은 하얀 망토가 허공에서 펄럭펄럭 돌아가는 모습이 말로 표현 못하게 그로테스크하다.
그게 적의 패주를 가속시켰다. 적은 포탄이 날아오는 쪽에서 멀어지는 방향, 아군이 매복해 있던 숲에서 멀어지는 방향으로 어지러이 도주한다.
하지만 그 방향에는 프리스마라 경기병들이 느슨한 산개 대형으로 포위하고 있었다. 그나마 그 방향이 안전할 것으로 생각한 것인지.
“하라라랏!”
“허억!”
프리스마라 경기병 한 명이 도망치는 적 기사의 곁을 스쳐 지나간다. 그의 손에 들린 무기의 뾰족하고 곡괭이처럼 살짝 휜 강철 가시에서 적병의 투구로 길게 피와 뇌수로 된 실이 이어진다.
보통 우리는 가시 망치라고 부른다. 철저하게 갑옷, 그것도 투구를 뚫기 위해 만들어진 이 무기이다. 더 높고 위치에서 더 빠르게 움직이는 경기병이 중보병을 상대하기 좋은 무기이다.
용도는 제한되지만, 검이나 도끼에 비해서 저렴하고 관리도 편하기에 경기병들이 많이 쓴다. 이번에도 착실하게 도망치는 적 보병들의 투구를 무수히 따버리고 있었다.
숲 쪽에서는 말에서 내린 용기병과, 소총으로 무장한 프리스마라 기병들이 몰려 나와서 아직 도망치지 않은 적에게 화력을 유감없이 뿜어내고 있었다.
프리스마라 기병들에게 고마운 점은, 말에서 내리는 것을 썩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명령에 따라 주었다는 것이다. 전문적인 하마 전투 요원인 용기병들을 보조하는 경보병으로 그 힘을 충분히 보여준다.
타타타탕!
“흐어어억!”
“반격해, 반격! 어딜 가는 거야!”
“다 도망치고 있는데 어쩌라고!”
“끄아악!”
결국 한 차례 더 근거리 일제사격이 이어지자 남아있던 적군도 도망치기 시작했다. 무기를 버린 전면적인 도망이다.
“아라라라라라!”
“모가지 따러 간다!”
용기병들은 여전히 느슨하나마 대열을 유지한 상태로 추격에 나섰지만, ‘도보 상태’인 프리스마라 기병들이 신이라도 난 듯, 무기를 뽑아 들고 ‘수확’에 나선다.
“히이이익!”
“저 새끼들이 낸 소리야?”
“악마의 사도다! 아악!”
“사, 살려줘··· 흐어윽!”
도망치는 적의 등에 망설임 없이 무기를 꽂고, 애걸복걸하는 적의 머리를 여러 차례 내리쳐 조용하게 만든다.
살육을 즐기는 것은 아니다. 재미로 적을 괴롭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래야 하니까 기계적으로 적의 목을 긋고 뼈를 부순다. 전장에 닳고 닳은 용병들 특유의 효율이다.
쏟아지는 총탄을 몸으로 받아내면서, 강대한 적의 돌격에도 악착같이 버티고 늠름하게 대열을 유지하는 우리 병사들이다. 하지만 패배 후 무력화된 적을 끝장내는 데엔 우리 병사들은 아직 초보자다.
우리 자식은 좋은 것만 하게 하고, 더러운 일은 남의 자식 시킨다는 마음은 아니지만··· 나나 트랑카벨 병사들이나 아직은 철저하지 못한 점이겠다.
그렇게 아군은 풀밭을 이리저리 도망쳐 다니는 적군을 남김없이 잡아 죽인다. 운이 좋아서든 실력이 좋아서든 일부는 포위망을 뚫고 도망친 것 같지만.
애초에 철저하게 물 샐 틈 없는 완벽한 포위망은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이 정도면 큰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콘도티에레! 새로 나타난 적에 대한 보고예요!”
끝나가는 전장을 바라보고 있자니 첼레스티나가 언덕 비탈을 헐레벌떡 뛰어온다. 과연 2차전은 어떻게 해야 할까.
“고생했어. 적의 동향은?”
“네에, 적은 무언가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확신한 것 같기는 해요. 하지만 조심스럽게 대열을 정돈하고 행군 속도는 오히려 느려졌네요!”
“허어, 적장이 과감한 사람이 아니라 다행이네.”
“기병 일부를 정찰로 보내 이쪽을 살피려고 하는 것 같네요! 대응해야 할까요?”
“제31 연대의 로베르 경에게 전령을 보내줘. 적의 정찰병들이 접근 중, 대응하고 필요하다면 지원을 요청할 것!”
“네에, 로베르 드 나뵈프 경에게 전령, 적의 정찰대 접근 중, 대응하고 필요하면 지원을 요청할 것!”
첼레스티나가 다시 언덕 비탈을 따라 뛰어간다. 어휴, 오늘은 하필 지휘부로 선택한 위치가 여기라서 첼레스티나가 고생이 많다. 종일 언덕을 오르락 내리락.
다음 전투 지휘를 위해서 전장 반대편으로 움직이는 게 좋을까.
아니지, 한번 더 싸우는 게 결정된 것은 아니니 천천히 생각하도록 하자. 싸울지 여부가 결정이 되고, 전장까지 결정된 이후에 옮겨도 늦지 않다.
외곽에서 경비를 하고 있는 건 제31 연대 소속의 추격기병들이니까, 적의 수가 많지 않다면 로베르 경이 적절하게 대응하겠지.
추가적인 병력이 필요하다면 프리스마라 예비대를 일부 파견하면 될 테고.
다시 전장을 내려다보니, 이제 관목 너머 풀밭에서 벌어진 전투는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포위된 상태에서도 항복을 거부한 적 무리에 용기병들이 총탄을 퍼붓고 있다.
아무리 기회를 주고, 살아날 구멍을 보여줘도 저들에게 트랑카벨 병사들은 같은 하늘에 살 수 없는 이단의 무리인 것일까.
우리 병사들의 마무리가 유독 잔혹하게 보이는 것은, 일선의 병사들 역시 적 기사들이 보여주는, ‘이단자들에 대한 혐오감’에 역으로 혐오감을 느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샹다메리에서 엘랑키아 국왕이 보낸 군대와 싸울 때와는 분명히 다른 분위기이다.
이런 살륙 전은 될 수 있는 대로 피하고 싶었지만···.
적 살리겠다고 우리 병사들을 위험에 처하게 할 수 없다. 어설프게 살려줘도 고향에 돌아가는 대신, 블랑독 주민들을 괴롭히려 들겠지.
그럼 전장에서 최대한 삭제해 버리는 수밖에.
다음 적은 이런 머저리들은 아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