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 트랑카벨 기병 사령부
역시 우세를 점한 기병들의 전투는 경쾌하게 진행된다.
“대열을 맞춰! 너무 앞서지 마!”
“적을 다시 숲으로 밀어 넣는다. 서두를 필요 없어.”
적을 압박하는 2개 중대의 트랑카벨 총기병들은 인간과 말, 그리고 강철로 된 벽처럼 종심은 얕지만, 폭이 넓은 대형으로 접근한다.
이들은 제31 몽세나 정찰 연대 소속의 총기병들로, 연대장인 로베르 드 나뵈프가 지휘하고 있었다. 특별히 다른 지시를 하지 않아도, 휘하 하급 지휘관들이 능숙하게 대열을 유지한다.
사실 생각해보면 제31 정찰 연대는 트랑카벨 영지군 전체에서 가장 경험이 많은 부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대 창설은 조금 늦은 편이지만 그 범용성을 이유로 여기저기 많이도 불려 다녔다.
아무래도 편제상, 단 한 번의 결전을 위해 준비하는 부대는 전력을 아끼기 위해 섣부르게 전장에 나서지 못하는 경우가 많으니까. 제31 정찰 연대처럼 가볍고 범용성 있는 부대가 나서는 일이 많은 거지.
그만큼 그들의 기동은 손발이 척척 맞는다. 장교들의 고함 없이도 가지런한 기병 대열이 다가갈수록, 관목 숲을 막 통과해온 적의 기세는 점점 줄어든다.
그 측면에는 프리스마라의 경기병들이 각종 총기를 번쩍거리고 있었고. 아마 비슷한 병력의 견제라도 있지 않으면 통과하기 어려운 포위망이 되었다.
“콘도티에레, 적이 주춤거리면서도 도망치지 않네요? 역시 어딘가의 종교 기사님들이라 그런 걸까요?”
“그러게 말이야. 지금이라도 숲을 통과해 되돌아가는 것이 이득일 텐데, 자존심이 발목을 잡은 걸까.”
“항상 보면서 생각했는데요. 목숨보다 중요한 게 있는 적들을 상대하는 게 오히려 쉬운 것 같아요···.”
“어, 뭐? 첼레스티나 뭐라고?”
“앗, 제가 주제넘은 말을 했네요! 죄송해요오···.”
“아니 나무라려는 게 아니야. 오히려 핵심을 관통하는 말 같은데.”
역시 첼레스티나는 간혹 엄청나게 본격적인 화두를 던지곤 한다. 이번에도 그런 경우라고 할지.
확실히 종교니 명예니··· 신념이니 하는 본능을 뛰어넘는 거창한 정신론적인 무언가에 휘둘리는 적은 특징이 있다. 굳이 표현하자면 어그로 관리가 편하다고나 할까.
냉철한 전술가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행동을 한다. 그렇다 보니 그 ‘과정’ 자체에서 가치를 찾으려 하는 경향이 있다.
주신을 위해서 불리한 상황이지만 최후의 한 명까지 용감하게 투쟁했다··· 이런 것 말이다.
물론 눈물 나는 이야기다. 눈물 나는 이야기지만 희생은 그렇게 내면 안 된다. 물론 개개인이 자신의 신념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은 숭고한 일일 수 있겠지만. 지휘관은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이지.
열광적인 희생은 언제나 냉철한 계산에 기반해야 한다.
잔혹한 말이지만, 부하들을 이득 없이 죽게 놔두면 안 된다는 것이다. 내 병사들의 금쪽같은 목숨은 그게 더 많은 적의 목숨이든, 귀중한 정보든, 전술적 우위든, 민간인들의 목숨이든 뭔가를 얻었을 때만 내줄 수 있다.
그렇지 않고는 한 명도 못 내줘.
‘전술가에게는 너무 큰 희생도, 너무 적은 희생도 없습니다. 효율이 좋은 희생과 나쁜 희생만 있지요.’
스승님의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인정머리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이해한다. 아니, 그걸 이해하지 못하면 지휘관이 될 수 없다.
슬픈 일이다. 전장에서 목숨은 목표를 위해 지불할 수 있는 무언가가 되고 만다.
그런데 더 슬픈 것은, 소중한 병사들의 목숨을 지불했는데도 목표를 얻어내지 못하는 것이다.
“물러서지 마라! 더켄데일의 깃발을 세워라!”
···숲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던 적 기병들 사이에서 소란이 일어난다. 하얀 망토를 펄럭거리며 기사 하나가 깃발을 치켜들고 외치고 있었다.
“우리는 더켄데일의 성자 테오발트의 뜻을 따라, 우리의 신앙과 조국, 그리고 가족을 위협하는 적을 무찌르겠다 맹세하지 않았던가!”
“더켄데일! 더켄데일!”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기사의 외침은 멀리서도 잘 들린다. 펄럭이는 하얀 망토는 자신의 것인지 남의 것인지 모를 피로 젖어있었다.
“콘도티에레, 우리가 언제 저들의 신앙, 조국, 가족을 위협했나요! 적반하장이네! 정말!”
“하아··· 그러게 말이다.”
오늘따라 첼레스티나가 옳은 말만 하네. 딱 그 말대로다. 솔직히 조국은 그렇다 치고, 신앙과 가족을 위협하며 쳐들어온 것은 성전군 측이 아닌가?
아무튼 갸륵한 마음을 가진 더켄데일인가 하는 곳의 기사들은 후퇴 대신 공격을 택한 모양이다. 혀를 차고 싶기는 하지만, 아군으로서는 준비가 다 됐는데 들이받아 주면 그건 고마운 일이다.
“더켄데일 기사단! 나를 따르라! 무기를 들어라!”
“우와아아아아!”
“주신께서 원하신다! 돌격!”
“주신께서 원하신다아!”
고풍스러운 하얀 망토를 펄럭이며 적군이 돌격을 시작한다. 대열다운 대열을 갖추지도 못한, 한 무더기가 된 무모한 돌격이다.
몰리고 몰린 상황에서 시작되는 발작적으로 시작되는 돌격이다.
패주할래? 돌격할래?
절망적인 선택지에서 시작되는 전술적으로 아무 의미가 없는 그저 기세만 있는 돌격.
게다가 많은 문제가 있었다.
“사격 준비!”
총기병들이 두 자루의 권총을 뻗어 적을 향한다.
우선 양측의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50미터 정도밖에 안 되는데. 그러니 대열을 정돈할 틈도 없이 우르르 달려들었겠지.
다음으로 아군은 너무 준비가 잘 되어 있다. 정면의 총기병 2개 중대에, 측면에는 사거리가 긴 화승총을 가진 프리스마라 경기병들이 제법 있다. 적은 아마도 100기가 안 되어 보이는데···.
“우와아아아아!”
“이단자를···.”
타타탕! 타탕! 탕탕! 타타탕!
타다당, 탕, 타탕! 탕탕!
아마도 ‘이단자를 섬멸하라’ 정도의 말을 하려고 했던 모양이지만, 그 외침은 총소리에 완전히 가려졌다.
먼저 측면의 소총들이, 다음으로는 정면의 권총들이 불을 뿜었다.
화약이라는 참혹한 무기 앞에서, 인간의 의지와 육체는 너무도 쉽게 스러지고 만다.
첫 일제 사격이 끝나자 맹렬히 돌진하던 적 기병대, 아니 ‘기사의 무리’는 순식간에 무너져 버렸다. 제대로 대열이 갖춰지지 않아 선두의 인간과 말들이 쓰러지자 바로 돌격로가 막히면서 기세가 줄어 버렸다.
보병이라면 의지만 충만하다면 아군의 시체를 뛰어넘으며 돌격이 이어질 수 있지만, 기병은 그게 쉽지 않다. 그래서 굳건한 대열과 충분한 간격이 필요한 것이다.
당황한 적도 산발적으로 총기로 반격하지만, 흥분으로 날뛰는 말 위에서의 사격이 효과가 있을 리 만무했다.
그저 전장의 뿌연 연기만을 더할 뿐.
탕! 타탕!
권총을 바꿔 든 총기병들의 사격이 거의 멈추었다. 나나 다른 사람이 사격 중지 명령을 내린 것은 아니었다.
그냥 이제 쏠 대상이 별로 남지 않았던 것이다.
“으아아아!”
“이단자들이 사악한 마술을 쓴다아!”
“크흐흑, 도망쳐!”
살아남은 적 기사들이 우르르 도망치기 시작한다. 대열은 애초부터 무너져 있었으니까, 그들을 통제할 수도 없다. 뭐 통제할 수 있어 보이는 지휘관도 이미 죽은 것 같지만.
더켄데일의 깃발을 들고 설치던 기사는 죽었나? 인제 보니 깃발을 챙겨서 도망치는 것 같긴 하지만.
“적이 도망치네요, 콘도티에레!”
“그래, 예상보다 더 무모했던 적이야.”
일부러 적을 관측하기 좋은 언덕에 자리를 잡았는데, 이래서야 몫 좋은 일등석을 차지한 구경꾼이나 다름없네. 사전에 계획을 전달하고 배치한 전방 부대들이 다들 잘 싸우고 있다.
게다가 적도 대충 예상한 범위 내에서 움직이고 있으니 아군 장병들이 잘 싸우는 모습만 지켜보고 있어도 되니까.
“전진!”
수많은 동료들을 시체로 남겨놓고, 적이 다시 관목숲 안으로 후퇴했다. 이제는 추격해야지.
잠시 제자리에서 재장전을 마친 총기병들이 다시 전진을 시작한다. 추격이지만 특별히 빠르게 달리지는 않는다. 그저 총총걸음으로 대열을 맞추면서 느긋하게 나아갈 뿐.
어차피 적이 사라진 숲을 통과해야 하니까, 빠르게 달려도 의미가 없다고 해야 할지.
“앗, 콘도티에레, 전령이 왔네요! 정찰병들이 소식을 전해온 모양이에요!”
“그래? 무슨 내용일까···.”
“네에, 바로 다녀올게요!”
첼레스티나가 언덕 비탈을 내려가 달려오는 전령을 맞이하러 간다.
현재 이 지역 주변에는 과도하다 싶어질 정도로 사방으로 정찰병들이 배치되어 있다. 거미줄처럼 배치된 외곽 정찰은 제31 연대 소속의 추격기병들이 수고해주고 있었다.
물론 이렇게 하면 전투에 쓸 수 있는 전력이 줄어든다. 게다가 오히려 적에게 아군의 존재가 노출될 수 있다는 단점은 있다.
하지만 우리 존재를 알리는 거야 지금으로서는 큰 손해는 아니다. 무엇보다 여기는 사방 어디에 적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적지니까.
단점을 감수하고 최대한 많은 정찰을 뿌려 최소한 뒤통수 간지러울 일은 만들지 않으려 한 것이다.
정찰병과 대화를 나눈 첼레스티나가 헐레벌떡 뛰어 올라온다.
“동쪽에서 적으로 생각되는 기병과 보병의 무리가 나타났다고 해요! 아마 적이겠죠, 콘도티에레?”
“음, 갑자기 어디서 우호적인 군대가 나타나진 않았겠지. 병력과 거리는?”
“보병과 기병이 섞여 있는데, 선두의 보병은 약 600, 기병은 300 정도지만, 후속 병력이 더 있다고 해요. 지금 속도라면 1시간 20분 정도면 도착할 것 같다네요.”
“지금 상대하는 적보다 조금 더 큰 규모인가.”
지금까지 정보를 취합한 바로는, 성전군은 특별히 통일된 편성 구조를 가지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아마 성전군에 합류하기 전 편성되었던 단위 그대로 이동하거나 전투하는 모양이니까.
그래서 오히려 규모를 예측하기가 힘들었다. 가령 제대로 편제된 군대라면, 깃발의 개수나 견인되는 포의 수만 확인해도 대략적인 규모 예측이 가능한데 말이다.
“더 접근해서 총소리를 듣게 된다면 행군속도가 더 빨라지지 않을까요?”
“그렇겠지? 흐음···.”
나는 5초 쯤 고민하면서 전쟁터를 흘깃 바라보았다. 이제 총기병들이 적이 통과해왔던 관목 숲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럼 1시간이라 칠까. 그리고 30분 동안 나머지 적을 때려잡고, 남은 30분 동안 어떻게 할지 고민해보자.”
“네에, 그게 좋겠네요! 역시 대단해요 콘도티에레!”
으음, 말은 호기롭게 했지만··· 괜찮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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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정이야! 함정이야!”
“이단들이 사악한 마술을 쓴다!”
갑자기 관목림 안쪽에서 더켄데일 기사단 소속의 기병들이 튀어나온다. 몰골이 말이 아니다. 하얀 망토가 피로 물들어 있는 기사들도 많았고, 나뭇가지에 걸려 주욱 찢어지거나 너덜너덜해진 경우도 많았다.
무엇보다 무사히 전투를 마친 명예롭고도 용감한 얼굴이 아니다. 그저 공포에 질려서 조금이라도 빨리 공포의 원천으로부터 멀어지고 싶어하는 얼굴들이다.
“무슨 일인가! 더켄데일의 성자께 맹세코! 부끄러운 줄 알게!”
성전에 파견된 더켄데일 기사단을 총지휘하는 헤로스 멀레어가 고함을 질렀다. 그는 방금 숲속의 적으로부터 쏟아진 일제사격을 받고 큰 피해를 당한 보병 대열을 정돈하느라 정신을 놓을 지경이었다.
그런데 무사히 숲속으로 돌격해 들어간 기병들이 저런 꼴로 되돌아오다니···.
“대, 대장님···.”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됐나? 왜 자네들만?”
“다 죽거나··· 흩어졌습니다! 적이 많습니다! 1천, 아니 더 많아요!”
“진정하게! 주신께서 우리를 보고 계시다네!”
“빌어먹을, 숲 너머 피바다에 누워 있는 녀석들에게도 그렇게 말해 보시구려!”
“적이 마법을 쓴다구요, 마법을!”
공포에 질린 기병들은 횡설수설을 반복할 뿐이다. 이래서야 제대로 된 정보를 얻을 수도 없고 보병들에게도 악영향만 미친다.
이렇게 어리석은 이들이 아니었는데 대체 숲 너머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모두 침착하고, 보병 대열의 후방에 대기하라!”
“...크으으으!”
헤로스는 어떻게 해야 할지 잠시 고민한다. 지금 간신히 돌격 대형을 새로 만든 보병 대열을 숲속으로 돌격시키는 것이 옳은 일인가?
그 사이에 숲속에서는 살아남은 아군 기병들이 꾸역꾸역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기병 돌격을 이끌었던 붉은 머리의 기사, 브로디안 휘하의 기병 숫자는 200명이 훨씬 넘었었는데. 돌아오는 숫자는 50도 되지 않는다.
“대장님, 저기 브로디안 경이 보입니다!”
“다치신··· 모양입니다.”
몇 명씩 무리를 지어 숲에서 나오는 기병들 사이로 타는 듯한 붉은 머리가 보였다. 장점인지 단점인지, 투구가 벗겨진 브로디안의 붉은 머리는 멀리서도 잘 보인다.
···하지만 상태가 아주 좋지 않아 보인다. 총에 맞은 것인지 겉옷이 피에 젖어있고 망토가 심하게 더럽다. 설마 낙마를 했던 것인가?
“어, 어떻게 된 거요?”
“크흑! 헤로스 경···.”
평소와 달리, 브로디안의 목소리는 모깃소리처럼 작게 들린다.
“함정입니다. 이단자의 군대는 우리 생각보다 훨씬 많습니다. 잘 훈련된 기병의 숫자만··· 1천 기 이상입니다.”
“더켄데일의 깃발에 맹세코, 우리는 더한 상황에서도 싸워오지 않았습니까?”
“이 적들은, 크흑! 뭔가 다릅니다. 조금이라도 유리한 지형으로 이동해야···.”
힘없는 브로디안의 목소리의 끄트머리는 지워졌다. 주변 병사들이 아우성치듯 고함을 질러댔기 때문이다.
“적이 나타났습니다! 숲을 통과해서!”
“적이다! 적이다아!”
숲을 통과해 나타난 것은, 형편없는 몰골의 더켄데일 기사단 생존자들과는 달랐다. 완벽하게 말의 키까지 맞춘 것 같은, 반짝반짝 빛나는 금속 갑주로 온 몸을 덮은 중기병.
그 첫 대열이 일제히 숲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방금 전투를 치렀다기에는 너무도 위풍당당하고 침착한 모습이었다.
“어, 어째서 기사의 무구를 갖춘 적이? 적군은 이민족 복장을 한 경기병이라고 보고가···.”
“저희가 속았습니다! 완전히···. 적은 블랑독의 귀족 기사대로 보입니다.”
“...주신께서 우리를 보살피시기를.”
헤로스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전투를 결심했던 전제부터가 어긋나 있었다고? 그럼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하지?
“후방! 뒤를 보십시오. 대장님!”
“멍청이들아, 대열을 벗어나지 마!”
아우성치는 소리는 이어진다. 마지막으로 들려온 목소리는 어딘가 다 포기한 듯한 말투의 부관 보고였다.
“뒤에도··· 적입니다.”
그들이 방금 떠나온, 초원을 가로지르기 전 지나던 행군로에는 어느새 알록달록한 복장을 한 기병들이 한 줄로 늘어서 있었다.
전투를 준비하는 자세조차 아니다. 아무리 거리가 멀다지만, 마치 ‘너희들 어떻게 하는지 구경이나 하겠다’라는 듯한 태도가 여기까지 느껴진다.
발끈하려던 헤로스의 귀를 낯선 소리가 때린다.
“아라라라라라라라!”
“아라라라라라!”
카라라라라라라!
사람 목에서 나는 소리인지, 어떤 장치가 내는 소리인지.
생전 처음 들어보는 소리가 초원에 고립된 더켄데일 기사단의 사방을 채워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