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 트랑카벨 기병 사령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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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블랑독 이단 토벌 성전에 참여한 성전군 전체에는 추기경 아르누아 루케의 이름으로 특명이 내려졌다.
주둔지를 떠나 이틀 이상 걸리는 먼 거리로 이동할 때는 500명 미만의 병력으로는 움직이지 말라는 것이었다. 듣기로는 멀리 남쪽까지 진출한 부대들이 이단자들의 기습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다는 모양이다.
더켄데일 기사단 소속의 기사대장 헤로스 멀레어는 특명을 받고 콧웃음을 쳤다. 추기경이 내린 명령이니 따르지 않을 생각은 없었지만, 솔직히 성전군의 병력 운용은 너무 주먹구구가 심했다.
솔직히 손바닥만 한 엘랑키아 구석의 영지를 정벌하는데 너무 많은 병력이 모여있었다. 보급품과 진격로는 제한되는데 조직은 중구난방이고 통제도 되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적군을 보기도 전에 아군끼리 싸움이 날 판이었다.
그가 알기로 법황은 추기경을 이단 토벌 책임자로 파견할 때 유능한 용병 지휘관을 동행시킨 것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을 보면 전혀 통제되지 않는다. 그의 권한이 유명무실하거나, 혹은 완전히 무능한 인간이라는 것일지도 몰랐다.
결국 어떻게든 성전에 참여한 각 단체의 권위와 기여도 등등을 따져서 행군 우선순위가 정해지긴 했다. 거기 불복하는 자들은 멋대로 남쪽으로 행군하면서 주변을 약탈해 보급품을 채우기도 했지만, 대체로 질서가 지켜지기는 하고 있었다.
더켄데일 기사단은 알디온 출신의 3개 기사단이 연합하여 파견한 정예 병력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병력은 860명에 달했으며, 하나같이 잘 훈련된 무장 수도사들이었다.
멀리 북방 섬나라의 무명 기사단이라는 이유로, 성전 동료들에게 갖은 괄시를 당했다. 헤로스도, 그의 형제들도 분했다.
그들은 드라멜른이나 빌다우와 같은 유명 기사단처럼 광대한 기사단령이 없었기 때문에 병력 또한 많이 동원할 수 없었다. 알디온의 욕심쟁이 영주들은 종교 기사단 지원에 소극적이었기도 하고.
그 때문에 3개 기사단이 연합하여 정예들만 파견한 것이다. 헤로스는 그 지휘관이 자신이라는 것이 정말 자랑스러웠다.
순례자 어중이떠중이들이나, 숫자만 많을 뿐 복에 겨운 거대 기사단과 경쟁해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
오히려 이건 기회일 수도 있었다. 이단자들의 침투 병력으로 인해, 성전군의 활동이 둔화된 상황. 오히려 규모가 작고 기동성 있는 자신들과 같은 정예 병력이 활동하기 좋은 상황이다.
더켄데일은 방심하지 않는다. 오히려 습격해오는 적이 있다면 제대로 대응해 섬멸할 생각이다. 이를 통해, 마치 주머니 안의 송곳처럼 더켄데일의 이름을 교단과 대륙에 널리 알릴 수 있을 것이다.
···라고 생각하던 시절이 그에게도 있었다.
“남쪽 숲에도 적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숫자는 불명!”
“...후위로 보낸 연락병은 아직도 소식이 없습니다. 후위 부대는 길을 잃었거나··· 적에게 추격당해 전멸했을지도 모릅니다.”
“브로디안 경이 대응 명령을 내려달라고 전령을 보냈습니다!”
정체불명의 기마 척후대를 발견한 지 두 시간 째.
선두 부대가 적과 교전을 시작했으며, 부근 마을을 점거하겠다는 연락을 보낸지 한 시간 째.
블랑독에 흔한 작은 숲과 바위 산들 사이를 지나는 좁은 통로에 갇힌 지 20분 째.
이제 헤로스가 지휘하는 병력의 숫자는 700여 명으로 줄어 있었다. 나머지 160여 명은 어떻게 되었는지 생사도 알지 못한다.
병사들이 아우성치며 한데 뭉치며 방어선을 만들고 있었다. 지형이 너무 좋지 않다. 그나마 몇 명 남아있는 정찰병들을 시야가 좋은 언덕 위로 보냈다.
“브로디안 경이 다시 전령을 보내셨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방침을 알려달라 합니다!”
“기다리라고 해!”
“명령을 내리지 않으면 단독으로 돌파하겠다고 합니다!”
“정신 나간 자식, 이쪽으로 후퇴하라고 해! 이런 상황에서 기병 단독으로 뭘 하겠다는 거야!”
헤로스는 화를 버럭 내고 후회했다. 전령에게 화를 내 봤자 무슨 소용이 있는가.
“브로디안 경에게 전해라. 이 쪽으로 퇴각하라고 말이야. 기병의 돌격은 보병의 교전이 시작된 이후라고!”
“알겠습니다, 헤로스 경!”
이웃 기사단 출신인 브로디안 몰프는 연합 기사단의 총지휘권을 헤로스에게 넘기는 대신 기병대의 지휘권을 가지고 있었다. 전군의 삼 분의 일 정도가 기병이었기에 막강한 권한이기도 했다.
엄격한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강제로 무장 수도회에 입단했다는 브로디안은 붉은 머리카락만큼이나 화끈한 성격의 기사였다.
여러모로 주신을 위해 싸우겠다 서원하고 순명의 의무를 진 종교 기사단 소속에는 어울리지 않는 남자였다. 그도 그럴 것이 브로디안의 말버릇은 ‘언젠가 자신의 나라를 세울 것이다. 붉은 머리의 기사왕이라 불릴 것이다!’라는 것이었으니까.
그래도 이렇게까지 천치일 줄은 몰랐다.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적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면서 덮어놓고 돌격부터 하겠다니. 절대로 허락할 수 없었다.
다행히 단독 돌파는 단념한 모양이다. 잔뜩 화가 난 붉은 머리의 기사가 이끄는 기병대가 돌아오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 숫자가 좀 적어 보인다. 착각이라면 좋겠지만.
“헤로스 경, 지금 저 방향으로 돌파해야 합니다!”
얼굴을 보자마자 언덕을 등지고 제법 넓게 펼쳐진 평지 너머 관목림을 가리키면서 하는 소리다. 이미 교전을 좀 치렀는지 브로디언과 그 휘하 기사들 사이에서 화약냄새가 물씬 풍긴다.
“미안하지만 적군의 정체를 명확하게 알기 전에는 움직일 수 없소이다.”
“저 숲 너머에 적 기병이 가득합니다! 저희 정찰병들이 확인했습니다!”
“그러니 더더욱 매복에 주의해야 하는 것 아니오?”
“방금 제가 우회하려던 적 기병과 교전했습니다. 적군은 다수의 용기병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아마 우회하도록 놔두었다면, 이 언덕 위를 점령해 우리를 포위했겠지요.”
“흐음···.”
무모한 머저리라고 생각했었는데, 아무래도 헤로스가 상대를 과소평가한 모양이었다. 브로디안은 나름 주변과 전황을 살피고 있었다.
“잘하면 언덕 뒤의 적 기병을 기습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기습이 되지 않더라도 방어전을 하려면 숲속이 유리합니다.”
“그건 분명합니다만···.”
“아마 적도 갑자기 아군을 만나 충분한 정보가 없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먼저 공격하는 게 유리하지 않겠습니까?”
붉은머리 기사 브로디안의 제안은 확실히 합리적이었다. 성공한다는 전제가 있겠으나 말이다.
분명히 지금 위치한 바위 언덕 아래는 너무나 위태로웠다. 병력을 전개할 충분한 공간도 없을뿐더러, 브로디안의 말대로, 혹시라도 적이 먼저 언덕을 점거하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그렇게 합시다. 단, 언덕에 보낸 정찰병의 보고를 받고 움직이겠소. 브로디안 경의 기사대가 중앙을 맡아주시오. 보병들이 양 측면을 담당하리다.”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헤로스 경. 선봉은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
더켄데일 기사단 전체에 새로운 명령이 내려지고, 크게 세 개의 덩어리로 나뉘어 배치되기 시작한다. 중앙에 기병, 양 측면에 보병이다.
바위 언덕을 등지고, 관목림을 향한 배치다.
“언덕 위 정찰병의 보고! 숲 너머에 적의 깃발이 보인다고 합니다! 숫자는 불명! 좌측면에는 적이 보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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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이 정말 예상대로 움직이네요.”
첼레스티나가 망원경에서 눈을 떼고 말한다. 우리는 전장을 비스듬히 조망할 수 있는 작은 언덕 위에 엎드린 채로 전장을 살피고 있었다.
세 개의 무리로 나뉜 적군이 기세도 좋고 아군이 매복한 숲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물론 숲에 아군이 있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일부러 창과 깃발을 높게 들어 보여주었으니까.
그걸 돌파할 자신이 있기에 다가오는 것이겠다.
적은 상당한 수준의 정예군이다. 행군 중에 갑자기 전방과 후방에서 교전이 시작되었는데도 상당히 침착하게 행동했다.
언덕을 등지고 방어선을 형성했으며, 측면 공격 시도를 막아냈다. 그 후 일단 반격을 결심하자 순식간에 공격 대형으로 변경한다. 어지간한 베테랑 용병대 수준의 숙련도였다.
그렇게 방향을 결정하자 움직임도 신속했다. 지금은 언덕과 숲 사이의 풀밭을 건너 접근해오고 있었다.
하지만 이 움직임을 통해서 적의 한계 또한 알 수 있었다.
“적은 아직 우리 규모를 모르고 있는 것 같네요!”
“그렇겠지. 일부러 중대 규모의 기병들만 보여주고 전투를 피했으니까.”
적은 우리 규모를 모른다. 알았다면 저렇게 당당하게 공격에 나서지 못했을 거다.
“대열이 한쪽으로 몰리고 있네요···.”
“저기 지형이 영 엉망이더라. 발목이나 무릎 정도까지 올라오는 튀어나온 돌도 많고. 뜨거운 날씨에 웃자란 풀에 가려서 발디딤이 시원치 않아.”
이 주변은 전형적인 ‘블랑독 중부식 구릉지대’ 였다.
넓게 보면 평지에 가깝지만, 유난히 지표에 노출된 바위들이 많고 지표가 거칠다. 거기 옹기종기 모여 자라는 사람 키보다 조금 큰 정도의 관목림과 제법 물줄기가 빠른 개울이 더해진다.
그리고 이상하게 높낮이의 변화가 심하다. 경사가 졌다, 울퉁불퉁하다 와는 조금 다른 표현이다. 이건 직접 걸어 다녀봐야 알 수 있는데, 정말로 지표면의 높이가 제멋대로 바뀐다는 느낌이다.
대체 왜 이런 지형이 만들어지는지 모르겠지만, 마을이나 개간된 농지를 벗어나면 이런 개활지와 구릉지의 중간쯤 되는 지형이 잔뜩 있었다.
지금 적이 통과하고 있는 풀밭도 마찬가지였다. 풀 높이가 대충 일정하니 몰랐겠지만, 저 지역 자체가 상당히 비탈이 져 있고 바위가 많았다. 보병이나 기병이나 밀집대형을 유지하는 데 애를 먹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적에게 눈에 띌까 봐 걱정할 필요는 없다. 아마 전투를 앞두고 여기까지 살필 여유도 없겠지만.
“적이 다가온다··· 다가온··· 다?”
타타타탕! 타탕!
타타탕! 탕! 타타탕! 타탕!
적이 숲에 충분히 다가오자 숲속에서 일제사격이 쏟아져 나온다. 숲과 평지의 경계선이 자욱한 화약 연기로 지워진다. 일제사격인데도 총소리가 일정하지 않고 단속적으로 들리는 이유는 일제사격을 정식으로 훈련받은 트랑카벨의 용기병과 프리스마라 하마 기병들이 뒤섞여서 총을 쏴대고 있기 때문이다.
사격 대부분은 보병들에게 집중되었다. 밀집대형을 하고 조심스럽게 접근하던 보병들이 픽픽 쓰러져간다. 뒤늦게 반격을 하지만 선두 대열이 이미 거의 쓰러진 이후, 적의 얼굴은 보지도 못한 채 무작정 뻑뻑하게 피어오른 뿌연 화약 연기 너머를 통해 사격을 가할 뿐이다.
"가자! 주신의 이름으로!"
"알디온! 알디온을 위하여!"
"우와아아아아아!"
상대적으로 가벼운 피해를 입은 기병들은 숲으로 향하는 비탈을 뛰어 올랐다. 대충 사람 키 정도 되는 나무가 드문드문 서 있는 관목림을 기병으로 돌파한다. 그러나 막힌다. 생각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것이다.
기병으로 숲을 통과하는 것은 대체로 좋은 선택은 아니다. 지휘관 입장에서 피할 수 있으면 피해야 하고, 어쩔 수 없다면 속보 이상으로 서두르면 안 된다. 다만 나무의 밀집도, 즉 얼마나 빽빽하냐에 따라서 위험을 무릅써야 하는 경우도 분명히 있다.
나무 키가 작은 데다가 말이 충분히 돌아다닐 만큼 띄엄띄엄 자라 있으니 과감하게 뛰어들었을 것이다. 숲 건너편의 적을 기습하는 것을 기대 하면서.
하지만 딱 성인 남자 정도의 키로 자란 나무이다. 게다가 이파리와 가지가 가장 울창한 한여름이다. 거기에 온갖 중장갑을 걸치고 그 위에 장식이나 소속 신분을 나타내는 천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기병으로 뛰어 들었으니....
아까 말 타고 관목 숲을 가로 방향으로 달리다가 긁혔던 손등의 상처가 따끔거린다. 충분히 가치 이는 상처였다.
"쏴라!"
타타타타탕!
타타탕! 탕!
막 숲을 통과해 나오려던 적에게 총격이 쏟아진다. 말과 인간의 구슬픈 소리가 연달아 들리며, 나지막한 관목림이 죽은 자와 죽어가는 자로 가득 찬다.
용케도 숲을 빠져나온 적 기병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간신히 빠져나온 그들이 목도한 것은 1천 기가 훌쩍 넘는 기병들의 포위망이었다.
가끔은 병력의 숫자가 모든 전술과 기동의 우세를 폭력적으로 찍어 누르고 승패를 결정하기도 한다.
적 보병들은 아직 숲에 도착하지도 않았다. 숲에 들어가면 까다로워지는 보병은 숲 밖에서, 숲에 들어가면 약해지는 기병은 숲 안에서 끝장을 내기로 했다.
"전진!"
트랑카벨 총기병들을 선두로, 우리 기병들이 차근차근 포위망을 좁히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