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 가장 신성한 전초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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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 후욱!”
아넥시에서 가장 높은 망루에 기대서서, 용병 바트로는 입으로 화승에 바람을 불고 있었다. 꺼질 듯 희미해졌던 불꽃이 다시 살아나 반짝이며 화승을 태워 간다. 바트로와 동료들은 적의 주 접근로 중 하나일 것으로 생각되는 강화 보루의 돌벽에 나란히 기대어 앉아있었다.
이름하여 `바트로 저격대`의 일원들이다.
이 부끄러운 이름은 주민 대표단의 일원으로 사실상 아넥시 방어군 책임자인 루옹이 참모인 요한 사제의 제안을 받아들여 승인한 것이다. 바트로가 지휘하는 20명의 화승총 사수들을 이르는 말이다.
현재 요새화된 아넥시에는 200여 정의 크고 작은 총기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제대로 된 사수는 턱없이 부족했다. 아마 표준적인 훈련을 마친 정규 총병수준도 많지 않다. 전투를 겪으면서 전투 중 숙련을 기대해야 할, 간신히 재장전과 사격을 반복할 수는 있는 수준이다.
바트로 저격대라는 근사한 부대명이지만 현실은 조금 다르다. 그런 아넥시 내부에서 그나마 좀 나은 사수들을 모아놓았을 뿐이다.
아마 제대로 된 영지군이나 용병단 소속이라면, 그저 그런 평범한 총병 소대 하나였겠지.
아마 지금 아넥시에서 가장 훌륭한 화승총 사수는 요한 사제의 제자, 아르옌 수도사일 것이었다. 이전 전투에서 이름을 떨쳤던 모리츠라는 전설적인 저격수와 같은 인물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요한 사제가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라며 강력히 권했고, 루옹 역시 `가끔은 허세가 진짜가 되기도 한다`라며 동의하는 바람에 정말 부대 이름이 되어버렸다.
부대를 맡는 것은 처음은 아니다. 십 년 넘게 용병 생활을 하면서 승진할 기회, 장교가 될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항상 망쳤었다. 자기가 실수해서 망치기도 했고, 상황과 여건이 그를 배신해서 망치기도 했다. 과거에는 그런 세상을 원망하기도 했었지만....
멀리 성벽 위에, 적을 앞두고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도 쾌활한 요한 사제의 모습과, 그 옆에 커다란 도끼를 짚고 듬직하게 선 마을 대표 루옹의 모습이 보인다. 지금 그 둘은 누가 뭐래도 아넥시 방어군의 구심점이다.
하지만 그건 직책이나 신분으로 얻어진 게 아니다. 루옹은 그가 말하기로 평범한 포도주나 옮기던 마부 출신이고, 요한은 마을에 도착한 지 며칠 안 되는 사람이다. 하지만 이제 그 둘의 지휘에 거부감을 가지는 방어군은 아무도 없었다.
빛나 보인다. 바트로는 그렇게 생각했다. 보잘것없는 자신과 비교해서 말이다.
가난과 차별에 시달리다 무작정 고향 포르트와를 떠나 대륙을 떠돌기를 10년 이상. 그 동안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돈도, 사람도, 이렇다 할 경력조차도 말이다.
용병은 의외로 커리어 관리가 중요하다. 장기를 가지는 분야, 참전했던 유명한 전투, 함께했던 능력이 있는 용병단 등. 그 때문에 용병들은 자신의 옛 고용주나 지휘관들이 발급해준 확인증이나 임명장 등을 두루마리 통에 넣어 자랑스럽게 가지고 다닌다.
그런 게 전혀 없는 바트로와 같은 용병들은, 만년 말단 뜨내기 신세를 벗어나지 못한다.
운이 없었다. 기회가 없었다.
그런 변명이 통하는 업계는 아니었다. 자칫하면 오히려 쓸데없이 긴 복무 경험이 발목을 잡는다. 10년을 전쟁터를 전전했는데 인정받은 전공이 왜 없지? 왜 참여하는 전투마다 패배했지?
뭐라 대답할 말이 없다.
뜨내기 용병인 자신의 장점은 절박함 밖에 없었다. 싼 용병료. 임지나 복무 조건을 따지지 않는 싸구려 목숨이었다. 과거 아넥시 공격을 위해 자신을 고용했던 작은 용병대의 대장 하비에르도 그래서 자신을 고용한 것이다. 전투력 기대는 어렵지만, 싼값에 많이 고용할 수 있는 뜨내기들.
그런 하비에르조차, 바트로가 보기에는 빛나는 인생이었다. 자신과 비슷한 나이지만, 몇백 정도지만 자신만의 용병대를 이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하비에르조차, 결국은 돈에 팔려 블랑독의 무고한 이들을 공격하다가 더 큰 폭력에 묵사발이 나서 사망하고 말았다.
평생 이런 장면들을 보고 살았다. 마음대로 잘 풀리지 않는 인생과, 필사적으로 위로 올라가려다 덧없이 죽어가는 동료 용병들. 더더욱 비참해지고 피폐해지는 자신. 모든 것을 단념하고, 그저 이렇게 하루하루 살다가 어딘가 쓰러져 죽겠거니 했었다.
자신은 한 번도 무언가를 결정해본 적이 없었다. 한계까지 결정을 미루고, 좁아질 대로 좁아진 선택지 내에서 그나마 편한 쪽으로 도망치기만 했지. 그렇게 술에 술 탄 듯, 물에 물 탄 듯 어영부영 살았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생전 처음으로, 자신이 선택한 전장이다. 내가 고른 죽을 자리라는 말이다.
생전 처음 만나는 자신에게 우호적인 사람들을 도와 인정 받고 싶다는 생각도 물론 있었다.
용병 시절, 본의 아니게 괴롭혔던 주민들에게 속죄하고 싶다는 생각도 물론 있다.
하지만 그가 이번에는 도망치지 않은 이유는 아넥시 주민들이 항상 하는 이야기, 아넥시의 성녀와 트랑카벨의 콘도티에레에 대해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아넥시의 성녀에게 구원받았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가 공격군의 일부였던 아넥시 성문 앞에서였다. 트랑카벨 기병대의 카라콜 공격에 휘말려서 상처를 입었을 때 말이다. 허벅지에 뚫린 총상에서 피가 물처럼 흘러나오는 것을 보았을 때 여기가 자기 인생의 끝이겠거니 했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피가 부족해 기절했던 자신은 아넥시의 야전 병원에서 눈을 떴다. 주민들은 자신을 경멸하기는 했지만 적대하지는 않았다. 나중에 듣기로는 악당조차 살려낸 성녀의 자비로움을 자신들은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죽었거나, 죽지는 않았어도 다리를 잘라야 했을 부상이었다. 그것이 절름발이 정도로 끝난 것은 바트로가 봐도 기적이었다.
트랑카벨의 콘도티에레는 다름 아닌, 그가 속했던 고블린 닮은 사제의 군대를 철저하게 박살 냈던 인물이다.
전장에 꽤 오래 있었지만 그런 절망감은 처음이었다. 몇 배나 되는 그룬발트 중장기병들에게 포위당했을 때도, 손바닥만 한 가림막에 의지해 모르제나 총사들의 집중사격을 버틸 때도 그런 압도감은 느끼지 못했었다.
그런 괴물같은 상대였는데, 실제로 만나보니 너무도 평범하고 예의 바른 청년이었다. 자신의 사정을 듣더니, 오히려 자신을 위로하면서 마음의 짐을 하나 내려주기까지 했다. 어째서인지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성녀나 콘도티에레처럼 되고 싶다는 생각은 아니었다. 그들이 격이 다를 정도로 위대한 인물들이라는 것은 원숭이라도 알 수 있었다.
다만 그가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은, 아넥시 주민들 어느 누구도 그 두 사람에 대해 험담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상당히 친해지고, 그들의 일원으로 인정받은 이후에도 말이다.
성녀야 신성한 존재니 그렇다 치더라도, 본래 군 지휘관은 개자식 중의 개자식이 아니던가? 의도야 어떻든 병사 처지에서는 불합리함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고.
하지만 그런 게 없었다. 오히려 그런 이야기를 했다가는 한 대 얻어맞을 분위기였다.
바트로는 바로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높은 직위도, 큰돈도, 추앙받을 명예도 필요 없었다.
그저 자신을 받아준 아넥시 주민들에게 욕먹을 인간으로 남지 않고 싶었다. 그들에게 필요했을 존재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자신은 이 전장을 선택했고 아넥시를 떠나지 않았다.
목숨을 걸고 싸운다고 은화 한 푼 받지 못할지도 모른다.
압도적인 적의 세력에 밀려 불가피한 패배를 당할지도 모른다.
이단으로 붙잡혀 참혹한 죽임을 당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그를 인정해주고 이웃으로 받아준 아넥시의 주민들과 운명을 함께 할 수 있다는 것.
그들을 지키고 싶었다. 하지만 그들을 지키지 못한다면, 적어도 그들과 나란히 누우리라.
그것이 바트로의 선택이었다.
"온다, 준비해!"
"망할 자식들, 오기만 해 봐라!"
옆 성벽에서 호전적인 함성이 들려온다. `성녀가 지켰던 도시`를 지키는 방어군들의 사기는 굉장히 높다.
탕, 탕. 탕!
타타탕! 탕탕!
타타타타탕! 타타타탕! 탕탕!
띄엄띄엄 들리기 시작하던 총소리가 점점 잦아지더니, 귀가 아플 정도로 이어진다. 아직 성벽 위에서는 응사도 하지 않았는데 매캐한 화약 연기가 풍기기 시작한다.
"쏴라!"
우렁찬 명령과 함께 성벽 위에서도 대응 사격이 시작된다. 화승총, 쇠뇌, 활. 어설프나마 투석과 투창도 있다. 어설프나마 아넥시 방어군의 강한 의지가 담긴 사격이 성벽 아래로 쏟아진다.
바트로는 슬쩍 고개를 들어 성벽 아래를 내려다 본다. 예상대로, 적은 총병들의 엄호 사격을 바탕으로 사다리를 놓고 성벽을 오르려고 하고 있었다. 작년에 바트로와 용병들이 아넥시를 공격할 때와 근본적으로 같은 전술이다.
그게, `바트로 저격대`가 여기 매복하고 고개도 내밀지 않고 있었던 이유이다.
"이제 우리 차례다."
바트로는 자신의 부하이자 동료인 총병 20명의 얼굴을 바라본다. 모두 긴장해서인지, 그냥 날씨가 더워서인지 그늘에 있으면서도 얼굴에 땀이 번들거렸다. 그러면서도 어느 누구도 불씨를 꺼뜨리지 않았다. 총병의 기본 소양이었다.
"자, 사격 준비."
부스럭 소리와 함께 몸을 반쯤 일으킨다. 한쪽 무릎을 세우고 화승총도 개머리판으로 지탱하며 비스듬하게 세운다. 언제라도 튀어 나갈 수 있도록 무게 중심은 앞쪽으로 쏠리게 한다.
바트로는 계속 고개를 내밀어 적을 살핀다. 사다리를 가진 한 무리의 보병들이 성벽 아래 도착했다. 귓가에서 총알이 아넥시의 성벽에 부딪히는 소리와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생각보다 적의 수가 많고 화력이 거세다. 대응하는 방어군 측에서도 피해가 적지 않을 것 같아 걱정이 된다.
적 보병 대열이 사다리를 슬슬 들어 올리기 시작한다. 지렛대 원리를 통해 단번에 사다리를 벽에 붙이려는 것이다. 지금이다.
"발사!"
타타타탕! 타타탕!
그 이름도 부끄러운 바트로 저격대가 일제히 상체를 드러냈다. 모두가 성벽에 의지해 비스듬히 왼쪽을 조준한다. 이제 막 들어 올려진 사다리가 45도 정도 올라온 상태였다.
그 직후, 요란한 총성과 함께 뿌연 연기와 함께 화염에 치솟는다.
"으아아악!"
"뭐야 갑자기! 으윽!"
"아 젠장, 맞았어... 맞았다고!"
어쨌거나 아넥시 최정예 총병들의 일제사격이다. 사다리를 세우기 위해 다닥다닥 붙은 보병 대열에 집중된 데다, 측면에서 쏟아진 사격. 거리는 불과 10미터 내외.
순식간에 열 명 이상이 상처를 움켜쥐고 나뒹군다. 이 거리라면, 재수 없으면 관통당해 다음 사람이 상처를 입을 수도 있는 거리였다.
"어어어! 시발 꽉 잡으라고!"
"으아악, 뭐 하는 거야!"
그렇게 힘을 받쳐주던 한쪽이 완전히 무너지자, 지렛대의 힘을 받아 허공에 세워지려던 사다리가 기우뚱거리며 한쪽으로 쏠린다.
사다리는 생각보다 길고, 무겁고, 단단했다.
"으아아악!"
사다리가 미끄러져 바닥에 나뒹군다. 무겁고 길고 번거로운 사다리기에, 성벽과 수직으로 멀리서부터 운반해오는 것이다. 옮기고 세우는 데 한 두명이 필요한 일도 아니다.
그걸 성벽 바로 아래에서, 적의 사격을 받으면서, 병력이 순식간에 훅 하고 줄어든 보병들이 다시 한다? 어려운 일이다.
"됐어!"
여전히 고개를 내밀고 자신들의 성과를 확인하던 바트로가 성공을 전하자, 바트로 저격대 전원이 소리 없는 포효를 지른다. 물론 양손은 바쁘게 재장전을 계속하면서였다.
"장전 끝나면 옆으로 이동하자. 한 번 정도는 더 할 수 있어 보이더라고."
"그럽시다, 대장!"
"전쟁 생각보다 쉽네요."
첫 성공에 부대 분위기는 확 좋아졌다.
바트로 자신과 함께 보세낙 드 리몽 사제의 성전군에 속해 아넥시를 공격하다 포로로 잡혔던 용병.
델레망드에서 뱃사람으로 일하면서 총기를 배웠다는 노인.
총기 자체는 처음 배워보지만, 적응이 빨랐던 정순파 청년 등등.
제각각인 바트로 저격대 대원들이지만, 앞으로 잘 해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성전군이 아무리 많더라도 아넥시는 지켜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