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 가장 신성한 전초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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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계신 성스러운 주.”
“하늘에 계신 성스러운 주.”
“지상에 내려 가까이 살피시는 영.”
“지상에 내려 가까이 살피시는 영.”
“...그리고 신의 검을 뽑은 대리인.”
“그리고 신의 검을 뽑은 대리인.”
“하나 된 그 이름으로 우리는 비로소 완전해지나이다.”
“하나 된 그 이름으로 우리는 비로소 완전해지나이다.”
찬란한 황금빛으로 빛나는 교단의 상징을 하늘 높이 치켜든 아르누아 루케 추기경이 선창하자, 우렁찬 목소리가 뒤따른다.
주신교의 제1 기도문.
주신교도라면 누구나 알고 있으며 하늘을 우러러 평생 외워 온 기도문이다. 또한 주신 교리의 핵심을 담은 문장이기도 하다.
천상에 존재하는 신성이 지상을 지켜보다가 인간들을 보살피기 위해 영을 내려보냈다. 그림자 혼돈에 고통받는 인간들을 구하기 위해 대리인을 이 땅에 내어 무력한 인류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게 했다.
이 짧은 교리를 어떻게 이해하느냐가, 주신교의 천 년 역사를 불태운 핵심적인 논쟁이었다.
주가 가장 높은 존재이고 대리인이 가장 낮은 존재이나, 이는 격의 차이이지 세 존재의 본질은 동등하다 보는 일원계승론.
주가 가장 높은 존재임은 동일하나, 영은 주의 분신이고, 대리인은 주가 창조해 지상에 보낸 인간의 몸이라 보는 삼원분리론.
전자를 교리로 삼은 법황청의 주신 교단은, 후자를 교리로 삼은 정순파를 이단으로 판정해 주살령을 내린 것이다.
아무리 악덕한 마음을 가지고 악행을 저지를지라도, 그가 교단의 가르침에 정면으로 반발하지 않는다면 그는 교단의 법에 따라 처벌받지 않는다.
허나 아무리 정직한 마음을 가지고 선량한 행동을 하더라도, 그가 교단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교단의 법에 따라 처벌을 받는다.
그냥 처벌이 아니라, 도저히 인간이 인간에게 가한다고 상상하기도 힘들 참혹하고 잔인한 처벌을 강요받는 것이다.
이 아이러니에 대해서, 대부분의 신자들은 이해조차 할 수 없다.
애초에 일원계승론이니 삼원분리론이니, 평생 상아탑에서 신의 목소리가 남긴 신성한 책을 연구하는 신학자들이나 이해하고 논의할 문제이다.
대다수의 신도들은 그런 게 존재하는지도 모를 것이다. 죽는 그날 까지도. 딱히 그들에게 이를 알아야 한다고 요구하는 자들도 없다. 교단에서도 그렇게 깊은 교리까지 가르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이는 블랑독에서 정순파를 죽이기 위해, 신의 사역을 돕기 위해 소집된 성전군의 전사들에게도, 거기에 맞서 고향과 이웃을 지키기 위해 무장한 블랑독 연맹군의 전사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그 지독한 아이러니는 지금 이 자리에서도 또렷하게 드러나고 있다.
“주신에 맹세코, 우리는 모두 기억합니다!”
아르누아 루케 추기경이 힘이 담긴 목소리로 선언하듯 말한다.
아넥시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초원, 나지막한 언덕 처럼 세워진 제단 위에서는 아르누아 추기경이 성사를 집전하고 있다. 그 앞에는 20여 명의 성직자가 나란히 늘어서 있고.
하지만 제단은 어쩐지 초라해보인다. 어떻게든 노출된 나무 판자를 하얀 천으로 덮고 모서리를 꾸며보려 한 흔적은 보이지만. 물론 제의를 위한 물건들을 중간에 빼앗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앞에서 열성적으로 이를 듣는 성전군 병사들은 수천 명은 되어 보인다.
“이 땅, 블랑독에 간악한 이단자들 준동하기 시작했을 때, 홀로 신의 뜻을 행하기 위해 우리보다 한 발 앞서 도착했던 신실한 사제의 이야기를!”
추기경의 낮지만, 힘이 담기고 맑은 목소리는 선선한 바람을 타고 초원 구석구석까지 전달되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바로 보세낙 드 리몽! 스스로를 살피지 않고 이단의 땅에 홀로 뛰어든 그 용감함은 실로 모범적인 신앙심의 발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는 잠시 자신의 말을 듣고 있는 병사들의 면면을 둘러 본다. 이 자리에 선 이들은 성전군의 선봉이다. 전문적인 용병들은 후위에 배치하고, 종교 기사단과 무장 순례자들을 선봉에 배치했기에 이들의 신앙심은 남다르다.
진심으로 이 성전, 신의 사역을 통해 전공을 세우고 주신이 허락한 낙원에 당도할 수 있다 믿는 자들이다. 그만큼 집중해서 추기경의 말을 듣고 있었다.
“신실한 수도사의 이름을 기리기 위해, 법황성하의 재가를 받고 신앙교리국의 심사를 받아, 보세낙 드 리몽 수사를 성자로 추존합니다!”
흥분한 듯, 추기경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진다.
“신실한 수도사를 속이고 유인해 그 목숨마저 빼앗은 저주받은 도시 아넥시의 사악한 이단들을 몰아내고, 마침내 도시를 정화하는 날! 보세낙의 이름은 신성한 도시 아넥시의 수호성인이 되리라! 주신께서 이를 원하신다!”
“주신께서 원하신다!”
“주신께서 원하신다!”
“주신께서 원하신다!”
수천의 주먹이 허공을 가르고, 함성이 메아리친다. 치솟는 전의가 기세가 되어 제단을 뒤흔든다. 명백하게, 이 자리에 모인 성전군의 기세는 무형의 창이 되어 저주받은 이단들의 도시, 아넥시를 향한다.
“주신의 용사들아, 이단을 벌하라!”
“이단을 벌하라!”
“아넥시에 신의 정의를!”
“신의 정의를!”
성전군의 공격에 의한 제2차 아넥시 공방전의 시작을 알리는 외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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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각, 아넥시 성벽에서는 수비병들이 조용히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사실 매일매일 같은 일과를 보내면서, 외부의 공격을 기다릴 뿐인 아넥시 수비군에게 이런 종교 의식은 제법 볼만한 구경거리였다. 그것도 심지어 추기경이라는 고위 성직자가 주관하는 의식이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하루하루 생업에 종사하던 시골 사람들에게는 좀처럼 보기 힘든 화려하고도 공들인 의식이었다.
그들 사이에서 방어 교회의 사제 요한 린데만 폰 아인푸르트와 그 제자, 아르옌 그로반은 모자를 벗고 잠시 경의를 표하는 모습을 보이다 다시 모자를 쓴다.
주변 사람들이 보기에는 퍽 이상하게 보인 모양이다.
“사제님은 법황 양반 상대로 반기를 든 분 아니오?”
“제가 속한 방어 교회는 물론 교단과 적대하기는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주신의 신앙을 따르고 있으며 교단은 개혁의 대상이지 멸절의 대상은 아닙니다.”
“허어, 그거 참 복잡한 관계이구려.”
“트랑카벨 가문의 여러분도 엘랑키아 국왕이 보낸 군대에 맞서 싸웠지만 엘랑키아 국왕에게 반역하자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흠, 듣고 보니 그렇소이다. 임금님을 끌어 내리려는 생각은 절대 아니지. 세상 일은 왜 이리 복잡한지, 나 같은 농부 나부랭이에게는 이해하기가 힘들구려.”
“하하핫,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입니다. 한 가지 기준으로는 살아가기가 힘든 세상이지요.”
약 1천 명. 작년에 있었던 아넥시 전투를 생각하면 두 배에 가까운 수비병 숫자이다. 대부분이 전문적인 군인은 아니다.
허나 절반 정도가 작년의 전투를 경험했으며, 나머지 중에서도 일부나마 실전 경험이 있었다. ‘아넥시의 성자’ 보세낙 드 리몽이 이끌었던 용병대의 생존자들을 포함해서 말이다.
몇 번이나 떠날 기회가 있었던 와중에도 자진해서 도시에 남은 강한 의지를 가진 사람들이다. 몇 만이 될지 모르는 성전군에 맞서서, 승리의 확신조차 없는 상황에서.
무엇보다 잔류가 결정된 이후, 트랑카벨 가문에서 수 차례나 무기와 갑주를 포함한 물자 보급이 있었다. 자신들도 돈이 될 수 있는 것을 팔아 무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오랫동안 성벽을 고치고 기본적인 훈련을 받아왔다. 실전에서 얼마나 통할지는 모르나, 최소한 모든 주민, 수비병들은 자신의 위치를 가지고 있었다.
호락호락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전투가 슬슬 시작될 것 같군요.”
요한 사제가 담담하게 말하며 느슨하게 풀어 두었던 흉갑의 끈을 조인다. 허리춤에 찬 보조 무기인 손도끼의 감촉을 확인한다.
멀리서 긴 횡대 대열을 이룬 보병 부대 몇 개가 접근하고 있었다.
“적 숫자가 그렇게 많은 것 같지는 않은데요···.”
“첫 공격이니까. 우리 준비가 어느 정도인지 간을 보겠다, 이 생각이 아니겠나?”
“그렇군요.”
“그보다, 혹시 적진에 공성포는 보이지 않는가?”
“음···.”
망원경을 든 아르옌이 인상을 쓰며 적진 여기저기를 살피고 있었다. 남들보다 덩치가 작고 말랐기 때문인지, 몸통의 앞 뒤를 가리는 갑옷이 한 짝인 흉갑이 유난히 커 보인다.
“보이지 않습니다, 스승님. 당연히 공성포를 가져왔을 것이라 생각했는데요. 포병 대열은 보이지만 유난히 거대한 포는 보이지 않습니다.”
“혹시 시간에 맞추지 못했나? 당연히 가지고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말이지.”
“이만한 병력 차이라면 필요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음음, 그건 아닐세. 저들 입장에서야 여기 아넥시는 그냥 ‘지나가는 길’일지 모르지만, 이 다음은 트랑카벨 가문의 영토일세. 그 도시들을 공격하기 위해서라도 마련했지 않겠나.”
“듣고보니 말씀대로입니다, 스승님. 무슨 생각일까요?”
공성포가 없다는 것은 상당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아넥시를 둘러싼 성벽은 엘랑키아 왕국이 세워지기도 전, 고대 아란 제국 시절의 유물이다. 지금까지도 남아있을 정도로 견고하기는 하다. 그러나 쏟아지는 포탄을 견딜 수 있을 정도는 아니다.
“어찌 됐던 신께서 내려주신 절호의 기회일세. 우리는 그저 감사 기도를 올리고 이용이나 하면 되지 않겠나.”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파하하하!”
“그렇군, 다 같이 감사 기도라도 올려야겠어. 하하하!”
스승과 제자의 주고받는 농담을 지켜보던 주변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린다. 요한은 함께 웃으며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모두들 각오는 했다지만, 전투를 앞두자 눈에 띄게 굳은 모습이 보였던 것이다.
“루옹 대표님, 저희는 잠시 성문 쪽을 살피고 다시 보고드리겠습니다.”
“그러시게. 그런데 성문을 그렇게 막아버려도 되는가? 지난 전투 때에는, 트랑카벨의 콘도티에레 명에 따라서 우리가 나가서 싸웠었는데.”
“그때는 다시 치우고 나가지요!”
“크으··· 뭐 그럴 일이 있진 않을 것 같기도 하네.”
요한과 아르옌은 바쁘게 계단을 달려 내려간다. 오랜 세월에 닳고 닳아 잔돌로 가득해 울퉁불퉁한 비탈이나 다름없었던 성벽 계단도 새롭게 단장되어 이제 그럴싸한 형태를 보여주고 있었다.
아넥시 수비전은 명목상 여섯 명의 주민 대표들이 지휘한다. 하지만 그들 중 셋은 너무 고령이라 거동이 불편해 전장에 나오는 것도 어려웠다. 루옹을 포함한 나머지 셋도 경험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그나마 지난 전투에서도 민병대 지휘를 맡았던 루옹을 모두가 따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빠른 속도로 주민들의 신뢰를 얻은 요한은 루옹의 참모 역할이 되었다.
“성벽 준비는 어떻습니까?”
“준비 완료야! 한 놈도 못 들어올 걸?”
“수고하셨습니다!”
요한은 품에서 펜과 종이 한 장을 꺼내서 작은 표시를 했다. 방어 준비 체크리스트였다.
“아르옌 수사, 자네도 중앙청에서 방어 계획서 읽어봤지?”
“물론입니다, 스승님.”
“보고 감상이 어땠나?”
“저는 배움이 부족합니다만··· 대단하다고 느꼈습니다. 제 발로 아넥시 구석구석을 돌아보니 더 그렇게 느껴지더라고요.”
“잘 보았네. 그 ‘아군’의 콘도티에레라는 사람이나, 계획서를 직접 작성한 첼레스티나라는 부관 모두 보통 사람은 아닌 것 같더군!”
방어 교회에서 전문적으로 방어전 교육을 받은 요한은 더더욱 문서의 대단함을 느끼고 있었다. 실제로 거의 손 볼 것은 없었다. 아주 사소하게, 방어 교회풍의 업그레이드를 끼워 넣을 뿐.
하지만 방어 교회 역시 방어전의 베테랑이었다. 콘도티에레와 부관 첼레스티나가 얼마나 뛰어난지 몰라도, 변주해서 개선할 부분은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우리 방어 교회 역시, 100년 넘게 타락한 교단과 싸워 오면서 많은 것을 느끼고 기록해왔다네! 우리도 꼭 살아남아서, 아넥시에서의 전훈을 방어 교회에 전달해야 하지 않겠나.”
“맞습니다, 스승님.”
“자, 이번에는··· 서쪽 보루로 가세.”
“옙!”
스승과 제자는 발걸음을 빨리하여 목제 탑으로 보강된 서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