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 가장 신성한 전초전
끼이이이···.
두 명의 병사가 밀어 올리자, 자물쇠가 떨어져 나간 상자가 천천히 열린다. 견고하게 만들어진 만큼, 경첩이 뚜껑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비명을 지른다.
덜커덩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뚜껑이 열리자 모두의 눈이 상자 안으로 집중된다.
“...이게 뭘까요?”
“옷? 옷인가요? 예쁘기는 한데···.”
모두가 구경만 할 뿐, 손을 댈 엄두를 내지 못한다. 먼저 아쥬흐가 나서서 상자 안에 있는 것에 손을 댄다. 유난히 부드럽고 하얀 천으로 된 무언가였다. 그녀가 나에게 꺼낸 옷을 넘겨준다.
“이건··· 망토처럼 걸치는 겉옷인가요? 사제들이 쓰는 것 같네요.”
“테두리 금줄을 보아하니 그런 것 같습니다.”
폭이 넓고 어깨에 걸치는 튜닉 형태의 옷이다. 청결하고 결이 좋은 천으로 되었지만 화려한 장식은 없다. 다만 모서리의 금줄은 제법 공이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성전군 내부에 사제들이 많나요?”
“글쎄요··· 지금까지 얻은 정보로는 그렇지는 않습니다. 기사단의 무장 수도사와 같은 자들은 이런 옷을 입지는 않을 테고요.”
대체 무슨 용도인지 알 수 없었다. 상자 안에 가득한 것은 중요한 예식에서 수도사들이나 입을 법한 정갈한 옷이었다. 상자 안에 가득하니 한 20벌은 되어 보인다. 이게 전장 한 가운데 필요한 물건인가?
“...다음 상자를 열어보죠.”
“예, 아쥬흐 양.”
다시 뿌드득, 끼이이이, 덜컹.
“이건 무슨 냄새지?”
“이건 몰약 향기네요.”
새로 열린 상자 안에서는 향긋한 냄새와 함께 찬란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냥 빛을 반사할 뿐만 아니라, 엘리멘탈리들의 기프트를 통해 일종의 ‘마법 부여’ 상태가 된 물건이 뿜어내는 빛이다.
안쪽을 들여다본 나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이 찬란한 빛이라니.
“...이건 돈이 좀 되겠습니다.”
“푸흐흐, 항상 돈 앞에서는 초연하신 콘도티에레 에트도 그렇게 말씀하실 정도인가요?”
“아니··· 아, 이게 다 얼마야···.”
나와 아쥬흐가 농담하면서 이것저것 뒤적거리자, 근처에서 구경하던 병사들도 환성을 지른다.
“우와아아아! 저게 뭐지!”
“이 맛에 종교 믿는 건가?”
“설마 다 금인가? 그건 아니지?”
두번째 상자에는 많은 양의 종교 물품으로 보이는 뭔가가 들어 있었다.
“황금 관? 지팡이? 황금으로 된··· 알?”
“주신 교단의 권위를 상징하는 성직자의 관입니다. 이건 주교관은 아니고··· 누가 쓰는 관일까요? 신도들을 이끌고 주신의 의지를 지향하는 의미를 가진 신성한 지팡이네요. 아, 이 금으로 만든 알처럼 생긴 보주는 언젠가 찾아올 진정한 구원과 깨달음의 때를 상징한다고···.”
“...콘도티에레 에트의 주신교에 대한 박식함에는 항상 놀라게 되네요.”
“네에, 역시 콘도티에레는 모르시는 게 없네요!”
내가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지식을 좀 알고 있기는 하지. 참고로 내가 종교에 대해 빠삭하게 알고 있는 것은, 어릴 때 이단자 처벌을 보고 너무 놀랐기 때문이다. 잘 알고 있으면 이단 판정을 벗어날 수 있겠거니 하고 순진하게 생각해서···.
“...이 분량을 보아하니 어떤 고위 성직자님의 소지품을 몽땅 챙겨온 모양인데요.”
“호오.”
“전략의 본 목적을 ‘상대가 싫어하는 일을 한다’라고 한다면 이건 무척 전략적인 약탈입니다. 당사자는 이걸 되찾기 위해서 무슨 짓이든 할 테니까요···.”
“아하, 그래서 돈이 된다는 말씀이군요.”
그렇겠지. 결국 매스미디어가 없는 시대에 사람의 권위를 무지렁이 농부들도 한눈에 알아보기 쉽게 만드는 것은 다름 아닌 복장과 장비이다.
반짝반짝 빛나게 잘 닦은 갑옷에 형형색색 깃발이 달린 긴 창을 들고 발걸음도 당당한 군마에 탔다? 누가 봐도 귀족 기사다.
그에 비해서 거무튀튀하게 녹슬고 여기저기 떨어져 나간 싸구려 흉갑에 닳고 닳아서 이제는 광택도 없는 창날이 달린 어설픈 창을 들고 비쩍 마른 짐말에 탔다? 누가 봐도 떠돌이 용병이다.
그러므로 고위 성직자들이 남들과 다른 화려한 복장과 소지품으로 스스로를 차별화하는 것도 어찌보면 당연했다. 아무리 본인이 성스럽고, 똑똑할지라도 알맹이로 설득하는 것도 한계가 있지.
···그래서 이건 가치가 있다. 인질 이상으로. 똑같은 걸 하나 더 만들기도 곤란한 물건일 테니까. 그리고 관, 지팡이, 보주에 관심이 쏠렸지만, 바닥에 깔린 것들도 상당히 귀한 것들이다.
“여기 이건 제단에 올리는 붉은색 비단이고, 이 항아리들은 신성한 향유입니다. 이단으로 타락한 블랑독을 정화하겠다 굳게 마음먹은 모양이네요.”
“아하··· 정말 영적으로 싸우시려는 분들인가요?”
“그냥 와서 설교나 하고 그랬으면 좋았을 것을, 왜 전쟁은 해가지고.”
씁쓸한 현실이다.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설득하고 알려서 잘못되지 않은 믿음으로 되돌렸어야지. 다 죽이겠다고 군대를 보낼 것이 아니라.
···한편으로는 군인의 눈으로 봐도 말이다. 이거 만드는 데 소요된 공임은 둘째치더라도 덩어리로 들어간 황금이나 온갖 보석, 진주만 팔아도 보병 2~3개 연대는 편성할 수 있는 돈으로 보이는데.
뭐 적이 허튼짓을 해 주면 나야 좋지.
“자, 그럼 마지막 상자를 열어볼까요?”
아쥬흐의 지시에 따라 다시 병사들이 능숙하게 자물쇠를 뜯어낸다. 끼이이익, 덜컹.
“흐음, 마지막은 책이네요.”
“네에, 왠지 실망스럽네요!”
“아니에요, 첼레스티나. 가끔은 몇 줄의 글자가 황금보다 훨씬 더 가치가 있을 때도 있으니까요.”
“그래··· 이거 왠지 느낌이 좋은데?”
“네에? 그런가요 콘도티에레”
내가 보기에도 질 좋은 종이를 잘 묶고 가죽으로 표지를 한 책들은 묵직하고 중요해 보인다. 한쪽에는 끈으로 묶어 봉인된 두루마리도 잔뜩 보인다.
“아쥬흐 양, 봉인을 부숴보겠습니다.”
“콘도티에레 에트, 우리 군이 노획한 물건이니 당연히 사령관 판단대로 해야죠.”
“아··· 생각해보니 그렇네요. 그럼 열어보겠습니다.”
여섯 개의 두루마리 중 하나를 꺼내 봉인을 부수고 펼친다. 붉은색 밀랍으로 만들어진 봉인이 떨어져 나가자 두꺼운 종이로 된 두루마리가 펼쳐진다. 필경사들이 남긴 또렷하고도 멋스러운 글자. 여기저기 찍힌 직인. 서명자의 권위와 신임을 상징하는 무수한 꼬리표들.
전형적인 권력자가 작성한 문서의 형태이다. 나는 빠르게 펼쳐진 내용을 읽었다.
“이건 그거네요. 법황청과, 다른 종교 기사단 법인들이 각종 자원을 누군가··· 성전군의 사령관에게 위임한 문서입니다.”
첼레스티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옆에서 책을 살펴보던 아쥬흐의 입가에는 의미심장한 미소가 번져간다. 분명 트랑카벨 가문과 블랑독 상단의 재무를 책임진 그녀라면 이런 문서는 잔뜩 봤겠지. 현물 주식 역시 이런 형태의 문서이니까.
그러니 그 가치를 아는 것도 당연하다.
“법황, 그리고 법황령 및 그 주변의 20여 명의 군주, 16개 종교 기사단··· 정말 더럽게 많군요. 아무튼 이 작자들이 아르누아 루케라는 이름의 추기경에게 자원과 권한을 위임한다.”
“네에, 설마 이게 없으면 명령을 내리지 못하는 건가요?”
첼레스티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다.
“좋은 질문이네. 물론 그런 건 아니지. 가령 내가 계약서를 잃어버렸다면, 첼레스티나는 내 명령을 안 들을 거야?”
“네에··· 네? 그럴 리가요! 절대로 그런 일은 없어요!”
“그렇지? 이런 건 문서가 없다고 갑자기 권위나 의무가 없어지는 그런 건 아니야. 하지만 상황이 나빠지면 이야기가 달라져.”
“네에? 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콘도티에레를 모실 건데요? 상황이 나빠진다고 떠나지 않아요!”
“그래, 음··· 고마워, 첼레스티나.”
옆에서 우리 대화를 들으며 웃고 있던 아쥬흐가 설명을 이어간다.
“초반부터 문서를 잃어버렸다는 데서 이 문서의 원래 주인은 권위가 많이 떨어질 거예요. 그리고 전쟁이 길어지고 부담이 과중해지면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을 때 막기가 힘들어지죠.”
“네에··· 문서를 다시 만들면 안 되나요?”
“그래도 되겠지요. 하지만 법황청과 20여 명의 군주들, 16개 종교 기사단을 찾아다니며 일일이 사정 설명을 하고 새로이 서명받는 것도 큰일이 아닐까요?”
“아하, 그렇네요! 그 행동 자체가 권위를 떨어뜨리는 행동이겠구요.”
“역시 똑똑하네요, 첼레스티나.”
한마디로 이단을 토벌하겠다며 대군을 이끌고 오신 법황청 높으신 분의 권위가 저기 시궁창에 가서 처박혔다 이거다. 갑자기 지휘권에 손상이 가진 않겠지만.
우리네 보통 사람들에게는 큰 문제가 아니겠지. 하지만 가뜩이나 자기네 권위 존중 좀 하지 않았다고 이단으로 낙인을 찍고 군대를 보내 난리를 부리는 양반들이다. 아주 중대한 문제가 되겠지.
아, 이 얼마나 곤란하고 화가 날까. 웃음을 참기가 힘들었다. 남이 곤란해하는 모습을 보면서 좋아하면 안 되는데 이것 참···.
내가 실없이 웃고 있는 동안, 다른 책을 살피고 있던 아쥬흐는 표정이 안 좋아졌다. 설마 내 은밀한 즐거움이 들킨 것은 아니겠지?
“이건··· 기분 나쁜 책이네요.”
“무슨 책인가요?”
“...직접 보세요 콘도티에레 에트.”
그녀는 내게 책을 넘겨준다. 그러면서도 크게 표정의 변화는 없다. 하지만 눈가의 하얀 피부가 조금 붉게 변해있었다. 그녀가 상당히 흥분했다는 말이다. 대체 무슨 책이 아쥬흐를 이렇게 만들 수 있지?
묵직한 책에는 사람 이름과 지명이 가득 적혀있었다. 어디 어디 출신의··· 누구누구의 자식인··· 뭐뭐 경.
“...살생부입니까.”
“그렇네요.”
나는 다른 책을 꺼내 드는 아쥬흐의 손끝이 조금 떨리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 이렇게까지 된 상황에서, 공포는 아니겠지.
혐오감.
이만한 숫자의 사람을 일부러 분류해가며, 교단의 적, 죽어야 할 인간으로 판정했다. 터무니없는 행정력이 소요되었겠지.
게다가 더더욱 역겨운 것은, 사람을 죽이는 비용은, 처벌받는 대상자의 재산을 몰수해서 충당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법황청은 더욱 부유해지겠지.
평소의 아쥬흐는 유능한 행정가이자 상인이지만, 한 번도 사람보다 돈이 먼저라는 식으로 행동한 적은 없다. 그러니 그녀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이해가 간다.
“후우··· 여기 쓰인 사람들은 교단 입장에서는 처벌하고 재산을 몰수해야 할 대상이야.”
“네에? 제 이름도 있나요?”
“음 글쎄, 있을 수도? 그러고 보니, 이 책을 분석하면 법황청이 가진 정보망 구조를 역으로 설계해 볼 수 있겠구나. 첼레스티나가 해 줄래?”
“맡겨만 주세요! 내용을 읽어보고 분류 해 볼게요.”
항상 느끼지만, 첼레스티나는 순수하고 자기 행동을 포장할 줄 몰라서 가끔 어리석은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그녀는 빈틈없이 유능한 여자다. 전장에서만큼, 탁자 위에서도 유능하고 말이다. 역시 믿음직해.
“여기 얇은 책들은 성전군에 갈 군수품의 목록이네요. 이것도 의미가 있겠죠. 제가 분석해볼까요?”
“마, 맡겨도 되겠습니까, 아쥬흐 양?”
“지금은 뭔가 몰두하고 싶은 기분이에요. 오늘은 좀 늦게 자겠어요. 첼레스티나 같이 할래요?”
“네에! 영광이에요!”
두 사람은 아마도 오늘 이 상자의 책들을 끝장낼 기세이다. 이 내용이 분석된다면 적의 규모나 전략을 역산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이번 노획물에서 엄청난 금은보화가 나오지는 않았다. 직접적인 전술이나 전략을 기록한 문서도 없었다. 하지만 충분히 의미 있는 자료들이 나왔다.
이를 분석해서 도움이 되도록 해야지. 아쥬흐와 첼레스티나 두 사람에게만 맡길 수는 없다. 나도 좀 확인해 볼까.
아마 이 자체로 적에게 큰 타격은 아닐 것이다. 아까 첼레스티나가 말했지만, 수고롭긴 하겠지만 다시 만들면 되는 일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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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교단의 권위에 대한 심대한 도전이니라!”
법황이 임명한 블랑독 성전의 최고 책임자, 아르누아 루케 추기경은 불쾌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천막 안을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모스탈 전투 수도원장, 네부카디 델 카스트로소가 부복한 상태로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의 흉측한 상처투성이 얼굴에는 생긴지 얼마 안된 상처가 늘어나 있었다.
“이곳 아넥시가 어떤 장소인지 기억하느냐, 나의 제자 네부카디야.”
“물론입니다, 아르누아 추기경님. 감히 주신의 은총을 거부하겠다 천명한 간악한 이단들의 성지이자···.”
네부카디가 고개를 조금 들어 추기경과 눈을 맞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겁할 정도로 끔찍하게, 화상으로 일그러진 얼굴이지만 익숙하다는 듯, 추기경은 전혀 반응하지 않는다.
“...언제나 교단의 최일선에서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았던 보세낙 드 리몽 선배님이 이단들의 박해로 순교하신 장소입니다!”
“잘 알고 있구나.”
아르누아 추기경이 분노로 어깨를 떨더니 말을 이어간다.
“법황 성하의 명으로 이 신성한 전쟁을 해온 지 시간이 꽤 지났으나, 비로소 여기부터가 진짜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아넥시를 피와 불로 정화하고, 이를 로데브 강 이남에 도사리고 있는 이단의 우두머리에 옮겨붙어야 할 사명이 있거늘!”
잠시 말을 멈춘 그가 몸을 빙글 돌린다.
“엘랑키아 역사에 남을, 가장 성대한 성사를 치러 대륙 전체에 교단의 법이 엄정함을 알리고, 불쌍한 보세낙 드 리몽 수사를 성자로 추존할 생각이었는데···.”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마땅합니다, 추기경님.”
“그런데··· 이 불경한 이단의 무리에게 여기 필요한 교단의 물건들을 도둑맞다니, 참으로 수치스러운 일이구나.”
“추기경님···.”
말 뿐 아니라, 정말로 큰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연극과도 같은 대사를 한참 말하던 아르누아 추기경은 의자에 털썩 주저앉는다.
“...게다가 모스탈 수도회 소속인 랑시아 성녀의 성물 일습 또한 사라졌다지?”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추기경님···.”
“하아··· 뭐라고 사과해야 할지. 참으로 부끄럽구나.”
“스승님···.”
아르누아와 네부카디, 두 스승과 제자는 정말로 분하고 슬픈지 눈물을 뚝뚝 흘리기까지 한다.
“안타까운 일이다. 이런 일을 저질러 주신과 교단, 그리고 덧없이 스러진 보세낙 수사를 모욕한 이단에게 철퇴를 내리는 것 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속죄이겠다.”
“그렇습니다, 추기경님!”
“좋다, 네부카디여. 약식이 되겠다만, 내일 성사를 진행하겠다.”
아르누아 루케 추기경의 손가락이 천막 밖,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를 향한다.
아넥시.
평범한 포도주 유통 거점 마을이었던, 우연히 고대에 지어진 성벽이 있었을 뿐인 이 작은 성채 도시는 이제 아르누아 추기경에게 갈망의 도시가 되었다.
“공세를 준비하거라! 이번에는 절대로 실수가 있어서는 안된다!”
“맡겨주십시오, 추기경님. 목숨을 걸어서라도 완수해 보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