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146화 (146/556)

22-3. 가장 신성한 전초전

###

블랑독 동부의 바닷가는 인구가 적은 지역이다. 작위를 가졌거나 세력이 큰 영주들의 거점은 내륙 지역에 몰려 있었기에, 정치적으로도 그다지 중요하게 여겨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어선들이 머무는 작은 어항들이 해안선을 따라 많이 늘어서 있었다. 블랑독의 주 산업인 농업이나 포도주 양조 따위에 비하면 훨씬 작은 규모지만 긴 해안선을 따라 늘어선 어촌들에서 행해지는 어업 역시 중요한 산업이었다. 양조장에서 나온 술 찌꺼기에 손질된 생선을 절인 블랑독식 절인 생선은 일부 미식가들 사이에는 최고급 요리 재료로 알려지기도 했다.

이 지역, 특히 로데브 강 이북의 해안 지역을 지배하는 소영주들은 다른 지역과 교류하지 않는 고집쟁이들로 유명했다. 그 때문에 넙치 영주니 고등어 영주니 하는 비하적인 별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어촌 마을 특유의 폐쇄적인 분위기도 한몫을 했고.

그 마을 중 하나에서 파괴와 방화로 인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간간히 주민들이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기도 하고, 다급한 외침이 들리기도 한다. 마을 전체가 불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마을 한가운데의 가장 좋은 석조 건물, 영주관이 불타고 있었다. 주민들이 나서 불을 끄려고 노력하지만, 더 번지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 이상의 행동은 할 수가 없었다.

이 혼란스러운 마을 외곽으로는 긴 행렬 하나가 마을을 떠나고 있었다. 수백 명쯤 되어 보이는 작은 군세가 마을을 떠난다. 몇몇 마을 주민들이 울거나 사정하며 가까이 붙으려 하지만, 후위를 맡은 병사들이 욕을 하고 고함을 지르며 쫓아버리고 있었다.

중앙에는 통일된 회색 옷을 입은 기병과 보병들이 몰려 있고, 행렬의 선두와 후위에는 용병으로 보이는, 제각각의 복장을 한 보병들이 느슨한 대열을 이루고 있다.

회색 옷을 입은 기병들 뒤편에는 이질적으로 생긴 조잡한 짐수레가 덜컹거리며 뒤따르고 있다. 짐수레에는 심하게 얻어맞아 얼굴이 멍투성이인 청년이 쇠사슬에 묶여있었다. 그 뒤로는 밧줄에 줄줄이 묶인 주민들 10여 명이 끌려가고 있었다.

어찌나 심하게 맞았는지 퉁퉁 부어서 원래 어떤 얼굴인지 알아보기도 힘들 정도이다. 상처에서 흘러내린 피가 고급스러워 보이는 셔츠를 적셔 불그스름한 얼룩이 퍼지고 있었다.

"...모, 모두 내 잘못이오. 내가 가서 소명을 할 터이니, 주민들은 풀어 주시오."

"내걔 소몡을 혤톄이니~!"

"푸하하하하하!"

얼굴을 심하게 맞아 발음이 불분명한 청년이 뭔가 이야기를 하자, 호위하던 용병들이 어설픈 발음을 따라 했고 주변에서 무례한 폭소가 튀어나왔다. 끌려가던 주민들 사이에서 분노가 번졌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단인지 어떤지는 이단재판소에서 가려질 것이오."

회색 옷을 입은 기사가 뒤를 돌아보더니 감정 없는 목소리로 단호하게 말했다.

"자네들은 너무 무례하게 굴지 말게!"

"네이, 네이!"

"푸크크크큭!"

"으흐흐흐."

다른 기사가 용병들에게 엄하게 경고했지만, 여전히 용병들은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듯 비웃음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이 멍투성이 청년이 다스리던 어촌 마을에 일어난 비극의 내용은 이러하다.

원래 폐쇄적으로 살던 이 마을은 트랑카벨 가문이든, 블랑독 연맹군이든, 성전이든 전부 남의 일이었다. 심지어 정순파에 대한 의견조차도 그랬다. 때문에 트랑카벨의 요청에 응하지 않았으며, 법황군이 찾아왔을 때도 큰 저항 없이 순응했다.

하지만 문제는 이 지역을 담당한 법황군의 파견대, 빌다우 기사단의 무자비한 공출이 시작되면서였다. 포고령을 내린 직후 기사단과 그들이 지휘하는 용병들은 약탈자로 돌변했다. 이에 저항하는 주민들과 무력 충돌이 벌어질 뻔했다.

...다행히 상황이 그렇게까지 폭주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몸싸움 과정에서 다치는 사람들이 나왔고, 앞장섰던 청년 영주는 심하게 얻어맞아 사슬에 묶이는 몸이 된 것이다. 심지어 그는 흥분한 주민들을 말리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대열은 마을 주변의 구불구불한 오르막길을 지나 마을 뒤편의 언덕 너머 숲에 접어들었다. 바닷바람을 맞아 단단해진 껍질을 가진 나무들이 듬성듬성 늘어선 해안가의 숲이었다.

"대체 원하는 것이 뭐요?"

멍투성이 청년이 자포자기한 듯한 목소리로 묻는다.

"뭐긴 뭐겠수! 우리가 신성한 전쟁을 위해서 마을 재산 좀 가져다 쓰겠다는데, 제때 내놨으면 이런 일도 없지 않았겠어? 그 뭐야, 신의 것은 신에게!"

"파하하하하!"

"신의 군대의 것은 신의 군대에게!"

또 용병들이 왁자지껄 떠든다. 회색 옷의 기사들이 다시 고함을 질러 조용히 시키자 잦아든다.

"모두 조용히 해! 귀하는 이단혐의로 기소되었소. 원한다면 법황청의 재판관 앞에서 자신의 의견을 밝힐 권리가 있소."

기사는 여전히 감정이 담기지 않은 목소리로 말한다. 사슬에 묶인 청년은 절망한 듯 고개를 푹 숙인다. 아무리 외부에 무관심한 촌구석의 어촌 마을이라고 할지라도, 법황청의 무자비한 이단재판소에 대해서는 들리는 이야기가 있었다.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어쩌면 재판관 앞에서도 말이다.

타앙....

"그러게 감히 신의 군대를 때리기 전에 생각을 했어야...."

"잠깐, 방금 총소리 아냐?"

"어떤 바보가 또 총 쐈어?"

오발 사고는 흔히 있는 일이다. 화승총은 한 번 장전을 했으면, 발사하기 전에는 발사 직전 상태를 해지할 수 없다. 점화를 해서 총열을 비워야 하는데, 이걸 아깝다고 그냥 들고 다니거나 까먹어서 오발사고를 내는 놈들이 꼭 있었다.

탕, 타앙!

멀리서였지만, 다시 또렷하게 두 발의 총성이 들려왔다. 주변이 언덕이 울퉁불퉁한 숲이라 방향이나 거리가 잘 가늠이 되지 않는다.

"총소리지? 두 발?"

"누가 쏜 거지? 설마 습격? 고기잡이 뱃놈들이?"

"일단 조심해."

일단 문제를 인식하자, 껄렁껄렁하고 가벼운 분위기이던 용병들이 갑자기 긴장하고 대열을 좁힌다. 자연스럽게 작은 대열을 이루고, 사각이 없도록 감시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주변에서는 아무런 이상도 보이지 않고 총소리도 더 들리지 않는다.

"자네, 선두로 가서 상황을 알아보게."

"알겠습니다."

"자네는 후위로 가서 알아보고."

"예, 다녀오겠습니다!"

뒤늦게 상황을 알아챈 회색 옷의 기사들도 주변을 경계한다. 명령을 받은 두 명의 기사가 대열 앞뒤로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이 대열의 앞뒤로 갈 필요도 없이, 새로운 이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탕!

"으윽!"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창병 하나가 가슴을 움켜쥐고 주저앉는다. 지탱을 잃은 장창이 그대로 쓰러져 땅바닥에 부딪히며 요란한 소음을 낸다. 쓰러진 병의 흉갑에 구멍이 뻥 뚫려있었다. 입가에서 핏줄기가 주르륵 흘러내린다.

"저쪽이다! 저기야!"

"어디? 시발 보인다!"

탕! 타탕! 탕탕! 탕!

흑색화약을 사용하는 총기는 사격 직후에 일어나는 뿌연 연기 때문에 사격 위치를 숨기기 힘들다. 숲속에서 일어난 하얀 연기를 발견한 용병들의 산발적인 사격이 이어진다.

"멍청이들아 쏘지 마!"

"흔적만 보이고 적은 진작 떠났는데 쏴서 뭐 해!"

"사격 중지! 멈춰 병신들아!"

고함이 오가더니 다시 쥐죽은 듯 조용해진다. 두려워진 병사들이 한데 모이기 시작한다. 엉성하나마 창벽이 만들어지고, 이를 보조하는 총병 대열이 만들어진다. 하지만 행군 중 급하게 만들어졌기에 위치도 좋지 않고 종심도 충분히 깊지 못하다.

"흐이야압!"

"커억!"

괴이한 고함과 함께 뭔가가 후다닥 하고 지나간다. 공포를 느낀 병사들이 무의식적으로 밀집했기에, 대열 중간중간은 구멍이 뻥 뚫려있었다. 이 사이로 기병 하나가 쏜살같이 지나갔던 것이다. 사격 중지 명령받은 병사들이 미처 대응하기도 전에, 기병은 언덕 뒤편으로 사라졌다.

"뭐야 시발! 우리 편 아니지?"

"빨간 옷 입은 기병 있었냐!"

갑작스러운 움직임은 큰 혼란을 불러왔다.

"뭐야, 너 괜찮아?"

"한 명 당했다! 한 명 당했다!"

"이게 뭐야 시발... 투창?"

이번에는 기병이 스치고 지나갔던 자리에 총병 하나가 피를 토하고 있었다. 그의 가슴에는 1미터 정도 되어 보이는 나무 장대가 자라난 듯 박혀있었다. 그 반대편, 등 뒤로는 쇠로 된 묵직한 창끝이 뚫고 나와 있었다.

"적이 투창을 쓴다!"

"투창? 손으로 던지는 창 말하는 거야? 화살이 아니라?"

"몰라 시발!"

탕!

"허윽!"

혼란스러운 가운데 또다시 누가 쐈는지 모를 총탄이 날아와 총병 하나를 더 쓰러뜨렸다. 이제 언덕 그림자 너머와 숲 사이로 뛰어다니는 기병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적이 보입니다!"

탕! 탕탕!

"쏘지 마! 적이 더 다가오면 쏘라고!"

그러거나 말거나, 두려움을 느낀 병사들이 숲을 향해 총을 쏘기 시작했다.

타타타탕! 타탕!

"으아아악!"

"끄으윽!"

"벼랑 위에 적! 언덕 위에 적입니다!"

"매복이다! 매복이다!"

언덕 위에 배를 깔고 누워서 쏘는 모양이다. 길에 인접한 가파른 벼랑 위에 하얀 연기가 빼곡하게 일어나고 납탄이 훅훅 날아온다. 또다시 죽거나 부상을 입은 몇 명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진다.

"언덕위의 적을 노려라! 쏴라!"

타타탕! 타타타탕!

타타타타탕!

"그만 쏴! 1열만 쏘라고!"

공포와 혼란이 나름 능숙한 베테랑들로 이루어진 용병들을 흔들어 놓았다. 백전노장이건, 이번이 첫 출전인 신병이건 별 차이 없었다. 공포에 질린 총병들이 표적이 어디인지도 모른채 허공에 마구 총탄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정보가 충분하지 못한 상태에서 귀로 명령만 들어버린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주변에서 방아쇠를 당기기 시작하자 목표가 어디인지도 모르고 마구 총질을 해 댄다. 매캐한 전쟁의 냄새가 코를 찌르고 뿌연 화약 연기가 시야를 가린다. 불필요한 자극은 늘어난다. 거기 발 맞춰 들어오는 정보가 더더욱 줄어 버린다. 당연히 혼란은 가속화한다.

"제기랄, 쏘지 말라고! 총 빈 놈들은 장전해라!"

"창병 밀집대형!"

그 때, 하얀 연기를 뚫고 두 명의 기병이 불쑥 튀어나온다.

"히이야아아압!"

"커헉!"

밀집 대형에서 벗어나 검을 지휘봉처럼 휘두르며 혼란에 빠진 부하들을 재편성하기 위해 고함을 지르던 장교 중 하나가 목을 움켜쥐고 주저앉는다. 알록달록한 옷을 입은 기병이 스쳐지나가며 정확히 날붙이로 목덜미를 베고 지나갔던 것이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겠다는 당황한 표정. 손바닥으로 상처를 막아 보지만, 단속적으로 뿜어져 나오는 핏줄기를 막을 수는 없었다.

"흐으윽, 이게 뭐야...."

근처에 있던 창병이 자기 허벅지에 뚫린 총구멍을 보고 절규했다. 무섭게 뿜어져나오는 피에 황토색 바지가 검붉은색으로 젖어 든다.

"너 이 새끼야! 아군을 쏘면 어떡해!"

"미친 새끼!"

스쳐 지나가는 기병에 놀란 총병이 반사적으로 쏜 총탄이었다. 아군의 대열 안쪽을 달려가는 적을 맞추려던 것이, 반대편의 아군에게 가서 명중한 모양이었다. 피해자 창병 주변의 동료들이 핏대를 올리며 고함을 지른다.

"전방으로 보낸 전령은 아직인가!"

"아, 아직 소식이 없습니다."

"어째서 별로 먼 거리도 아니지 않는가!"

지휘를 해야 할 빌다우 기사단의 기사들도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주변은 어둡지도 않고, 시야가 매우 좁지도 않다. 듬성듬성 난 나무들도 통행에 큰 방해가 될 정도는 아니다.

"이게 어찌 된 일이지, 제가 한 번 가보겠습니다."

"부탁하네."

하지만 마치 좁은 골짜기에 갇힌 것과 같은 압박감에 눌리고 있었다.

그리고 미처 새 전령이 출발하기도 전에, 그들도 주변에서 들리는 소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히이이이!"

"아라라라라라!"

마치 숲 자체가 울리는 듯한, 기분 나쁜 소리. 사람이 내는 것인가, 짐승이 내는 것인가. 아니면 어떤 종류의 악기가 내는 것인가. 기뻐서 내는 소리인가, 슬퍼서 내는 소리인가. 혹은 고통을 이기지 못해 지르는 비명인가.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용병들도 빌다우의 기사들도 들어보지 못한 기괴한 소리가 들려온다. 귀를 찢는 듯한 고음의 소리는 불규칙하게 진동하며 듣는 이의 신경을 긁어내는 기묘한 효과가 있었다.

탕! 타타타탕! 타탕!

"으아아악!"

"허억!"

갑자기 땅이 흔들리는 듯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반대편에서 요란한 총성이 울린다. 지금까지와는 질적으로 다른, 산발적이 아닌 분명한 목적을 가진 일제사격의 소리였다. 등 뒤에 총탄을 맞은 병사들이 비명과 함께 덧없이 쓰러진다.

"적이다! 후방에 적이야!"

"반대편이라고! 사격해!"

"빌어먹을, 반격해!"

상상 속에서 어마어마한 적을 만들어 신경과 체력, 그리고 총탄을 낭비하고 있던 빌다우 기사단과 그들이 고용한 용병들은 비로소 `진짜 적`과 마주했다.

그 적이란....

다름 아닌 기병도와 권총을 뽑아 들고 돌격해오는 트랑카벨의 기병대였다.

"함정이다! 눈 앞의 적에게...."

타타타타탕!

빌다우 기사단의 기사대장이 뭐라 외치기도 전에, 가까운 거리까지 육박한 기병들이 일제히 권총을 사격했다. 뿌연 화약 연기가 약탈자들의 대열을 감쌌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