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 승리의 여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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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랑독 동부의 어느 해안 마을에는 법황이 파견한 성전군 기병대가 들어와 있었다.
흉흉한 분위기는 아니다. 마을은 성전군이 오기 전부터 저항을 포기했기에 전투 없이 무혈입성했고, 기병들 역시 특별히 마을에 위해를 가하지 않았다. 그저 서로 낯선 상황에 조금 긴장해서 거리를 두고 있을 뿐.
하지만 그중 한 집 주변에는 긴장한 기병들이 경비를 서고 있었다.
“어휴, 정말 말이 안 통하시네.”
명목상 법황이 임명한 성전군 총사령관, 라모리 스탠던 휘하의 기병 지휘관인 울터 콜린슨은 답답해서 한숨을 쉬고 있었다. 검소하지만 청결해 보이는 방 안에는 울터 본인과 구부정하고 머리가 하얗게 센,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는 노인만이 있었다.
“영감님, 우리는 법황 나으리에게 고용된 용병이라 상관하지 않지만요, 조금 있으면 이단심문관인가 하는 열성적인 분들이 온다는 말이에요.”
다시 한번, 차근차근 설명해본다.
“그 양반들은 뭐 하는 인간들인지 몰라도, 영감님에게 아주 심한 짓을 할 거예요. 그리고 저는 그런 걸 보고 싶지 않다, 이겁니다.”
“허허허, 대장님은 좋은 분이시구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밥맛 떨어져서 보기 싫다는 겁니다.”
울터는 지금, 마을에 남아있는 유일한 정순파 노인과 대화하고 있었다. 노인은 마을의 촌장이었으며, 다른 정순파 신도들을 모두 대피시켰으면서도 자신은 어째서인지 마을에 남았다.
“그럼 딱 한 번만, 딱 한 번만 거짓말하기로 합시다. 정순파 신앙을 버렸다. 진정한 신앙의 품에 안기기를 희망한다. 이렇게 이야기하시면 돼요. 그럼 법황청의 또라이··· 아니 이단심문관도 별 이야기 안 할 겁니다.”
“허허허, 제안은 고맙습니다. 하지만 이 노인네도 신념이 있습니다. 신앙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
“하아··· 그러면 저희가 못 봤다 치고, 남쪽으로 가시죠. 어차피 저희도 바빠서 숲속 까지 뒤지지는 못합니다.“
“거듭거듭 감사합니다만··· 저는 이 또한 주신께서 내린 시련이라 생각하여 받아들일 생각입니다.”
노인은 정말 미안하고 곤란하다는 표정이다. 하지만 그 눈빛은 단호하다. 울터는 정말 답답했다. 자신의 점령지에서 순교자가 나오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신이 시련도 주시겠지만, 아마도 저를 보내서 노인장 생명을 구하라고 했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오오, 그럴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신의 사도를 자칭하는 것은 법황청의 교리에서는 처벌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요?”
“으윽···.”
“하하하, 용병들은 무자비한 사람들이라 생각했는데, 대장님의 안에도 주신의 자비가 있군요. 참으로 기쁜 일입니다.”
“그게 아니라··· 순교자가 나오면 분위기가 안 좋아지니까 그런 겁니다.”
성전군의 총책임자인 법황의 대리인, 아르누아 루케 추기경의 점령 정책은 의외로 피와 파괴로 시작하지는 않았다.
저항하지 않은 지역에 대한 점령은 평화롭게 이루어졌다. 주민들에게 참된 신앙을 따르고 교단의 가르침을 받아들인다는 선서를 강요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러기만 하면 이단 의심자에 대한 무자비한 납치도, 가혹한 처벌도 없었다.
즉, 자신이 정순파라고 나서지만 않으면 점령군은 주민들을 딱히 괴롭히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군사적 점령이 끝난 직후 이어지는 ‘이단정화부’의 점령 정책이었다.
법황청 소속의 성직자들로 이루어진 정화부는 점령지에 성전에 이바지하기 위함이라는 목적으로 가혹한 세금을 물렸다. 한때 이단이었던 지역에 대한 징벌적인 세금으로 보였는데, 사실상 무자비한 약탈보다도 더 심할 정도였다.
울터 콜린슨은 성전군을 지휘하는 성직자들이 대체 무슨 생각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적지를 점령하면 속마음이야 어떻든, 상황을 안정시키기 위해서 당장은 자비로운 점령 정책을 포고하기 마련이 아닌가.
그런데 이단정화청의 성직자들은 ‘본래 주신의 것이었던 땅을 되돌리는 해방’이라고 말하면서 고리대금업자나 다름없는 짓거리를 하는 것이다.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이단심문관이라는 자들이 돌아다니면서 이단 혐의자들을 가혹하게 고문하고, 이단으로 판명이 나면 보기도 싫을 정도로 참혹한 방식으로 처형한다.
울터나 다른 동료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영적인 전쟁인지 뭔지 모르겠다만, 물리적인 전쟁이 끝난 이후에 하면 되지 않나? 이단정화청의 가혹한 정책으로 인해서 몇 번이나 소요 사태가 일어났다고 한다. 그가 보기에 저런 정신이 나간 짓만 하지 않았다면 얌전히 전쟁이 끝나기만 빌었을 평범한 주민들을 자극해서 벌어진 일이다.
이 고집불통 정순파 노인네도, 분명 이대로 두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뻔했다. 가혹한 이단심문을 당하고, 화형이든 뭐든 처참한 죽음을 맞이하겠지. 그리고 촌장인 그를 좋아하고 따랐던 주민들 사이에는 공포와 함께 분노도 자라날 것이다.
제발, 전투는 전쟁터에서 적과만 하고 싶었다.
“어이, 수갑 가져와!”
“예, 대장님.”
건물 밖에서 경비를 서던 부하들에게 소리치자, 곧 부하들이 튼튼하지만 거칠게 만들어진 수갑을 가져온다.
“이대로 고집을 부리시면 노인장을 포박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기꺼이.”
노인은 쇠고랑을 채우라는 듯, 양 손을 앞으로 내밀어 보인다. 울터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이자, 눈치를 보던 부하들이 쇠고랑을 채운다.
“혹시 수갑을 차니 후회되거나 그런 건 없어요? 지금이라면 아직 우리 애들이 실수로 놓치거나 할 수 있어요.”
“받아들여야 할 운명이지요.”
“에휴··· 데리고 가라. 알겠지만 때리거나 하면 안 돼.”
“알겠습니다, 대장님.”
두 명의 용병들이 수갑을 찬 정순파 촌장을 데리고 문을 나서자, 멀찍이서 구경하고 있던 주민들 사이에서 소란이 일어난다.
“아이고, 저걸 어쩐대!”
“법황이 보낸 사람들이 정순파는 무조건 죽인다고 하면서!”
“이걸 어째··· 이걸 어째···.”
울터는 화가 치밀어올랐다. 자신은 용병이고, 기본적으로 전쟁으로 밥을 먹고 사는 직업이다. 전쟁에 점령이나 관리 업무도 포함이 되긴 하지만··· 지금은 체력도 체력이지만 정신적으로 스트레스가 너무 컸다.
벌써 몇 군데에서는 소요 사태가 발생해 점령군과 주민들이 충돌했고 죽은 사람도 여럿 나왔다고 한다. 부디 자신이 맡은 지역에서는 그런 일이 없으면 좋겠다.
현재 법황의 성전군은 블랑독 지도 전체를 한 땀 한 땀 새로 칠하듯 작은 정착지도 점령해가며 진격하고 있었다. 죵교 기사단을 중심으로 한 주력부대는 느릿느릿 중앙으로 진격 중이라고 한다. 울터가 속한 용병들이 귀찮은 지역 점령 업무를 떠맡고 있었고.
이러다 남쪽에 도착하면 이미 엘랑키아 국왕이 보낸 군대가 전쟁을 끝내 놓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뭐··· 정말 그렇게 된다면 나쁜 것도 없다. 어차피 받을 용병료, 싸우지도 않고 전쟁을 끝낼 수 있다면 좋겠지.
억지로 긍정적인 생각을 해보는 울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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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넥시 중앙회관 건물은 단단한 돌로 지어진 독립된 요새 건물이다. 그 이유는 원래 아넥시를 통치하던 영주 집안이 살던 저택이었기 때문이다. 트랑카벨 가문의 중재로 아넥시 마을의 소유권을 포기한 이후로는 주민 대표들이 머물며 공적인 일을 처리하는 장소로 사용되고 있었다.
그 지하 창고에는 두 명의 남자가 갇혀있었다.
바로 방어 교회의 일원으로, 아넥시의 수비를 돕겠다며 멀리서 찾아온 요한 린데만 폰 아인푸르트 사제와 그 제자인 아르옌 그로반 수사였다.
“으으으으···.”
작은 체구의 수도사 아르옌은 무릎에 얼굴을 묻고 앓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비쩍 마른 손가락이 까슬까슬한 머리를 감싸 쥐었다.
“너무 힘들어하지 말게나, 아르옌 수사. 우리는 방어 교회의 일원이 아닌가? 우리는 현재의 타락한 교단을 개혁하고자 하는 신념을 가지고 있지 않나. 점진적 개혁을 위해, 법황청에 탄압당하는 종교 공동체의 자립을 돕고자 서원을 세운 몸이지. 그래서 가장 위험한 곳에 서는 자이기도 하고.”
몹시 괴로워 보이는 아르옌과 달리, 요한 사제는 무릎 위에 종이 뭉치를 얹어놓고 빠른 속도로 뭔가를 쓰고 있었다. 제자에게 제법 긴 연설을 하면서도, 펜은 잠시도 쉬지 않는다.
“하아아아!”
그 말을 들은 것인지, 아르옌은 한숨을 크게 내쉬더니 고개를 들었다. 역시 표정은 영 좋지 않다. 마치 혼이 나간 표정. 등을 차가운 돌벽에 기대어 자세를 고쳐 앉는다.
“우리는 목숨을 걸고서라도 블랑독의 도시들을 지키기로 맹세했지. 그리고 타락한 법황이 보낸 포악한 군세 사이를 지나 마침내 목적지인 아넥시에 도착하지 않았던가.”
“후우···.”
요한은 여전히 바쁘게 종이 위를 달리는 펜을 멈추지 않은 채, 말을 이어 나간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어느 정도의 성공이라고 할 수 있겠지. 게다가 방어 교회의 형제들이 준비해준 다양한 방어용 장비들도 무사히 옮길 수 있었네. 지금은 아넥시 방어를 준비하는 주민들에게 전달되었고 말이야. 이 역시 어느 정도의 성공이고.”
“....”
탁, 소리와 함께 마침내 뭔가를 바삐 기록하던 요한의 펜이 마침표를 찍는다. 잉크가 번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종이를 말린다. 열 장이 넘는 문서였다. 그것을 다시 순서대로 정렬하고 살펴보면서도 말은 이어진다.
“타락한 법황의 군세가 어느 정도인지는 상상이 잘 가지 않네. 하지만 아넥시는 내가 보았던 어떤 요새들보다도 준비가 잘 되어 있네. 단순히 물리적인 부분뿐 아니라 정신적인 부분에서 말이지. 인상적이지 않던가?”
“...그건 그렇습니다.”
“특히 내가 강한 인상을 받은 부분은 그들이 섬기는 ‘성녀’라는 존재일세. 그들이 주장하기로는 작년에 있었던 전초전에서 이 마을에 주신께서 보내주신 존재라고 하더군. 아마도 실존하는 존재는 아닐 걸세. 하지만 모든 아넥시 주민들이 굳건하게 성녀를 신앙하고 있더군! 그 강한 믿음이 영적으로 이 마을을 보호하고 있는 것이네!”
요한이 열정적으로 말한다. 뭐가 기분이 좋은지, 웃으면서 자신이 작성한 종이들을 뒤적거린다.
“무슨 내용을 작성하신 것입니까, 스승님?”
“우리가 가져온 무기들의 사용을 중심으로, 그동안 둘러본 아넥시 요새의 보강할 점에 대한 짧은 기록이라네. 하나하나는 짧은 내용인데도 분량이 제법 되는구만.”
“흐음, 그러시군요···.”
“이런 정리가 있다면, 설령 우리가 사명을 끝까지 다 하지 못하고 쓰러지더라도, 무기들이 헛되이 망실되는 경우는 없겠지.”
“온당하신 말씀입니다만···.”
제자인 아르옌 수사는 스승인 요한 사제의 말을 고분고분 받아들이기는 했으나 역시 불만이 있는 모양이다.
“하하, 자네 불만이 있는 모양이군. 우리가 아넥시 주민들에게 신뢰받지 못하고 이렇게 갇혀서 그런가?”
“...그렇습니다.”
“원래 방어 교회의 동지들은 돕고자 했던 상대에게 신뢰받지 못하고 오히려 죽임을 당하는 예가 많았다네.”
“그것은 저도 배워서 알고 있습니다.”
“그에 비하면 우리는 훨씬 나은 상황 아닌가? 비록 지하라고는 하지만 제법 쾌적하고 넓은 장소에, 괜찮은 식사도 꼬박꼬박 받고 있지 않은가?”
둘이 갇힌 지하 창고는 본래 포도주를 보관하던 장소라 그런지, 서늘하고 청결했으며, 나름대로 환기도 잘 되었다. 감옥으로서는 상당히 좋은 처우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스승님,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지, 말해보게나.”
“그··· 우리가 여기에 갇히게 된 계기 말입니다.”
“음, 뭔가?”
“스승님이 주점에서 날마다 도박판을 휩쓸어서 그런 것 아닙니까···.”
“으으으음··· 단순히 그것 때문만은···.”
“아니긴 뭐가 아닙니까! 연승에 수상함을 느낀 다른 사람들이 조작을 하는 게 아니냐고 주장했고, 사기꾼을 처벌하자는 분위기가 되어서 이렇게 된 게 아닙니까!”
요한은 처음으로 당황한 것 같다.
“허허헛, 오해일세, 아르옌 수사. 이 몸은 주신을 섬기는 자로서, 주신께 맹세코 단 한 번도 속임수를 쓴 적이 없다네.”
“그, 그게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주민분들의 신뢰를 얻어도 모자랄 판에 주머니나 털고 있으면 어쩌시려는 겁니까?”
“허허헛, 그, 그건···.”
“게다가 지금 속임수로 갇힌 게 아니라, 돈을 잃은 분들의 사적 제재로부터 거리를 두기 위해서 사흘간 유폐 당한 것이잖습니까! 신념을 가지고 투옥당한 신앙인처럼 말씀하시면 아무리 제자라도!”
거기까지 말한 아르옌은, 아무래도 과하게 흥분한 것 같다고 느꼈는지 다시 한숨을 쉬며 무릎을 끌어안는다. 시무룩한 표정으로 돌아가면서.
“아무튼··· 이제 이틀째니까요. 다소 세속의 도박을 즐기시는 것은 제가 상관할 바는 아닙니다만···.”
“으흠, 흠. 명심하겠네.”
그렇게 스승과 제자가 신통치 않은 대화를 나누고 있을 무렵, 밖에서 자물쇠를 여는 시끄러운 덜컥 소리가 들리더니, 지하 창고의 문이 열렸다.
“거기 별일은 없으시오?”
“하하하! 저와 제자 모두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거 잘 됐구먼. 원래는 내일까지 갇혀있기로 했지만, 이만 나와 보시오.”
“혹시 무슨 일이···.”
“적군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보셔야 할 것 같아서 말이오.”
“드디어!”
요한은 마치 용수철처럼 튕기듯 일어섰다. 아르옌 역시 비척거리기는 했으나 나란히 일어선다.
“그럼 나오시오. 이제 행동 좀 조심하시고! 사제님이 이게 뭐요 참.”
“하하하, 안 그래도 제자에게 뼈 아픈 충고를 들은 참이었습니다.”
도박 때문에 창고에 갇혔던 사제는 아는지 모르는지 껄껄거리며 대답한다. 아르옌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스승을 바라본다.
“자 가세, 아르옌 수사. 우리 사명을 다해야 하지 않겠는가?”
“알겠습니다. 스승님.”
두 사람은 축축한 나선형 계단을 통해, 곧 벌어질 새로운 아넥시 공방전을 준비하기 위해 밖으로 나선다.